정세초점2


 
정권교체와 세력교체
 
 
이 해 영 / 연구위원·한신대 교수
 
 
 

정권이 교체되었다. 건국이후 처음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예상대 로 정리해고 삭풍이 몰아치고 있다. 지난 대선때 200만표면 정리해 고를 막고, 300만표면 재벌해체라는 노동자후보측의 '공약(?)'이 다 시금 상기되기도 한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1,000만 노동자들은 자 신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후보를 외면하였고, 또 워낙 '짝사랑'에 익숙한 탓일까 노동자후보측도 여기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 고 있다. 아마도 정리해고 국면이 너무 가파른 탓일 게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노동자들은 노동자후보를 선택하지 않는 것일까? 민주노 총과 국민승리21간의 내밀한 관계를 감안한다면, 왜 노동자후보는 55만으로 추정되는 민주노총 가입노조원조차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 한 것일까? 누군가의 말처럼 좀 더 당해 봐야 우리 노동자들도 '정 신'을 차릴 것인가? 아니면 애당초 가능하지도 않은 조건에서 몇몇 선진분자들이 지나치게 앞서가서 생긴 결과인가? 과연 한국에 노동 자후보가 성공할 수 없는 것은 미국에 사회주의가 없는 것처럼 '자 연'스러운 일일까? 아마 이런 류의 대답 없을 질문들의 리스트는 한 참을 써내려 가도 끝나지 않을 듯싶다.

한국 정치사에 있어 이번의 정권교체는 그 자체로 만만찮은 의의 를 갖고 있다.

먼저 지역주의문제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역주의라는 프리즘을 통해 볼 때, 남한의 좌도와 우도, 즉 지역연합간의 대결에 서 좌도연합이 박빙으로 승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해방 이후 지금까지 지배엘리트 구조에서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구가해 온 PK와 TK그룹은 향후 약세 내지 보합세가 예상된다. 이 집단이 당장 몰락의 길을 걷지 않으리라 판단하는 이유는 이미 사회의 요 소요소, 마디마디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분의 완고함과 설사 이 들이 정권을 상실했다 하더라도 대구·경북, 부산·경남이라는 여 전히 강고한 지역 근거지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정권 교체로 인해 지배엘리트의 순환은 어느 정도 촉진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고, 이는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의 정치미학적 효과를 거두리 라 생각된다. 달리 표현해 TV화면에서 못 보던 얼굴, 볼 수 없었던 얼굴들이 더욱 빈번히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 들은 이로부터 '바뀐 세상'을 확인하게 될 것이며, 지배구조 그 자체 는, 그러나 새로운 수혈을 통해 더욱 공고화될 것이다.

둘째 지배블럭의 재편을 들 수 있다. 이번 대선에서 확인된 한가 지는 이제 한국사회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 곧 절차적 민주주의 자 체는 되돌리기 어려운 제도로 안착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비용이 적게 드는, '싼' 선거를 자축하는 동안, 경제논리는 더욱 강화되었다. 만물이 오직 비용의 관점에서 계산되는 동안, 본 질적으로 비용의 관점에서 계산될 수 없는 '민의'와 주권은 점차 희 박해 질 것이다.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은 그러므로 지배블럭 재 편의 제1의 법칙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지역성은 지배블럭 재편의 제2법칙으로 감안되어야 한다. 이번 대선을 통해 한국의 정치구조는 명실상부 소(小)방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중앙정치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잡기 위해 서는 역시 지역기반이 제일이다. 확고한 지역기반이 없이는 저 보 수정치판에서 살아남을 길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향후 한국정치판 은 불안정한 지역간 균형체제에 의해 특징지워질 전망이다. 특히 정권의 허약한 의회기반과 소방주에 의해 분할점령되어 있는 지역 구도라는 조건에서 앞으로 불거져 나올 내각제문제는 한국정치의 불안한 앞날을 전망케 하는 이유이다.

셋째 97년 대선은 이러한 정치적 의미 이외에 이렇다할 사회경제 적 의의를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것은 이미 이번 대선이 이념이 나 노선에 기초한 정책대결이 아니라 지역방주들간의 합종연횡에 기초한 격렬한 권력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볼 때 이미 80년대 후반 이후 군부를 대체해 한국사회 지배 연합의 중추로 등장한 독점재벌의 경제권력 자체는 거의 영향을 받 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대선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 어 떤 정치세력도 재벌의 입김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고, 또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다. 물론 독점재벌의 입장에서 볼 때 첫째 그 속도에 있어 IMF에 의해 강제되고, 둘째 그 형태에 있어 - 정권인수기 차 기정부에 의한 - 국가주도적인 탓에, 부분적으로 내키지 않는 측면 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소위 '개혁'이라는 것이, 멀 리는 80년대 이후 선진자본주의 일반에서 관철되어 온 탈규제, 유 연화전략으로 일컬어지는 신보수, 신자유주의 공세의 연장에 있으 며, 가까이는 90년대 이후 한국의 독점재벌이 강력하게 요구해 온 규제완화, 민영화 그리고 신경영전략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이는 대선당시 각 정당의 경제정책, 노동정책이 자구만 다를 뿐 그 어떤 질적 차이도 없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 다시 말해 비 록 그것이 아무리 요란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차기정부가 추진하는 이른바 '재벌개혁'은 신자유주의 공세의 한국적 관철방식이라는 것 이다. 그런 이상 그것은 독점재벌 일반의 이해에 배치되는 것이 당 연히 아니다. 물론 이 과정에 순치되지 못하는 중하위급 재벌의 침 몰이 수반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넷째, IMF관리체제 문제이다. 물론 IMF문제는 그 자체로 대선 종반에 터져나온 돌발변수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미 그것은 단 순한 외생변수로서가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의 구조변경을 강제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산업자본으로부터 자립화된 국제 투기자본, 이른바 카지노 자본주의의 공세 앞에, 한때 수출한다고 호들갑까지 떨어 댔던 한국형 성장모델은 완전 나체로, 즉 '투명'해 짐으로써 역사적 종언을 고했고 이로써 '세계화'되었다. 그 결과 미 국이 지배주주로 있는 '신자유주의 인터내셔날'의 집행자 IMF의 총 재와 대주주 미국이 지명하는 인물을 - 구한말, 50, 60년대 한때 그랬던 것처럼 - '고문'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경제총독의 눈으로 볼 때, 이른바 '경제대통령'은 잘해야 현지 대리인에 지나지 않을 게다. 이런 조건에서 어떤 자기완결적인 국민경제를 상정하고 짜여진 노사정 3자구도는 진지한 재고를 강요받게 된다. 즉 교체된 정권의 정치적, 정책적 운신폭은 IMF에, 국내자본은 국제금융자본 에 구조적으로 제약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노동정치의 관점에서 정권교체가 어떤 의미를 갖 는 지를 짚어 보자.

먼저 1.2%의 득표력이 문제가 된다. 노동자후보가 설사 당선을 목표로 한 것이 분명 아니라 하더라도 이 득표가 실망스러운 것임 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국민승리21의 경우 한국사회 어 떤 정파 못지 않은 전국적이며 또 상대적으로 강력한 조직인프라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열악한 자금형편, 제도권 언론의 견제 그리고 불공정한 선거법적 환경 등의 요인만으로 1.2%는 필요충분하게 설 명되지도 않는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 어떤 무엇보다도 자신 의 조직적 잠재력을 실질적인 정치력으로 전환시켜 내지 못한 데, 즉 노동자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열의를 제대로 묶어 내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 이러한 아래와 위간의 소통장애는 다시금 지도부내의 좌 와 우간의 부실한 합의구조로 인해 강화되었고, 결국 노동자후보의 뚜렷한 사회적 정체성을 대중적으로 확인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하 는 원인이 되었다. 선거 초반전 당시 지도부와 '정치연대'간의 합의 등 의미 있는 시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일어나라 코리아' 해프닝이 보여주듯 일관되고 체계적인 계획보다 는 즉흥적인 정세적 요구에 따라 사업이 전개되었음은 부인하기 어 려울 것이다.

둘째, 득표전략면에 있어서도 두 개의 서로 다른 개념, 즉 한편 으로 국민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계급주의 노선사이에서 명확한 진 로 설정이 되지 못했다. 노동자후보의 실제 득표수를 지역적으로 분석해 볼 때 평균이상의 득표율을 보인 곳은 거의 예외 없이 울산 북(13.8%), 동(9.5%), 창원 갑(2.77%), 을(3.79%), 거제 (3.94%)에서 경북 구미 갑(2.45%), 경주 을(3.27%), 포항 남 (1.7%), 충남 아산(2.04%), 청주흥덕(1.78%), 부평 을(1.82%), 원주 갑(1.69%), 경기 군포(1.38%) 등 대규모 사업장이 밀집되어 있거나 그 배후지 또는 제조업에 연관된 지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보잘것 없이 보이지만 향후의 정치세력화와 관련 해서 그나마 들 수 있는 희망의 작은 근거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는 향후 노동자후보의 사회적, 곧 계급·계층적 정체성이 무엇이며, 선거전략상 타겟이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다. 아 울러 계급지향적 정당이 정치세력화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초동단계에서는 계급동원전략이 구사되어야 한다. 특히 중간층 을 비롯한 광범위한 국민대중의 지지획득은 자신의 확실한 계급· 계층적 중심이 서있지 않은 조건에서는 공허한 수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노동운동내 지역주의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임에 분명하 다. 그리고 이것이 노동자의 정치적 진출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라 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정권교체는 어떤 의미에서 DJ문제의 종결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DJ정권의 기본성격이 노동자정권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기정 부가 이전의 억압적 배제주의 정책을 무조건적으로 따를 것이라고 보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신자유주의적 기조하 친자본적 노사협조주의(social partnership) 혹은 달리 표현해 사 회협약의 형태를 통해 어쨌든 노측을 끌어 들여 노·사·정을 하나 의 구조로 가져가는 낮은 수준의 코포라티즘을 선호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판단은 IMF관리체제하 일방적 노조배 제가 가져올 한국경제의 파국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노조를 달래서 데리고 가는 방식을 선호할 국제금융자본의 이해관계도 감안한 것 이다. 특히 차기정부의 정책적 선택폭이 사실상 IMF에 의해 제약 되어 있는 상황에서 상당수 노동자들이 DJ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 대는 환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어찌되든 DJ주문에서 깨 어난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정리해고를 둘러싼 현재의 '노사정위원회'는 이번 정권교체가 노 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해 갖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더욱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우선 캉드쉬 IMF총재가 민주노총 관계자 를 만나서 한 다음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리해고제 도입이 국제통화기금의 조건이 아니다. 한국정부가 결정한 것이다. 정부로 서는 국제사회에 무엇인가 투명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어 정리해고 의 법제화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국제통화기금은 정리해고제 도 입이 국가신인도를 높이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노·사·정 3자기구에서 지속적인 합의를 도출해 내는 것이다. 정리해고 법제화보다 3자협의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한 겨레신문> 98.1.14) 필자는 캉드쉬의 이 말을 믿을 이유도 또 그렇 다고 못 믿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은 캉드쉬가 한국 노동자를 특별히 걱정해 줄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 문이며, 못 믿을 이유도 없다는 것은 국제금융자본의 이해만 챙기 면 되는 입장에서 그가 굳이 거짓말을 해가면서까지 한국정부를 편 들 이유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의 말이 사실이라 면 왜 차기정부는 IMF가 정리해고 법제화를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앞장서서 강행마저도 생각하는 것일까? 반대중적 '대중경제' 의 앞날이 걱정되는 대목이다.

또 한가지, 알려진 것처럼 차기정부는 재벌개혁을 위한 5개항을 합의했다고 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재벌총수의 사유재산마 저도 경제회생을 위해 내놓겠다고 합의한 대목이다. 만일 사실이라 면 감동적인 결의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은 국민회의 한 관계자의 다음 지적이다. "어느 기업이든 지배주주 재산 중 국가 가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다 담보로 잡혀 있다"(<한겨레신문> 98.1.14) 그렇다고 할 때 차기정부는 재벌쪽도 - 이미 '담보'로 잡 혀 있는! - 재산을 내놓는 어려운 '고통분담'을 감내했으니, 노동자 들도 정리해고와 같은 '고통분담'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결국 차기정부는 노동자의 일자리(생존권)와 재 벌총수의 이미 담보잡힌 재산, 어차피 할 소위 '개혁'을 맞바꾸는 것 을 사회협약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협약이지 않은가.

차기정부가 노동자정부가 아닌 다음에야, 어쩌면 이 모든 것은 1.2%의 당연한 결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권교체가 한 번은 거 쳐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세력교체의 경과점으로 자리매김되어 야 한다. 여기서 세력교체란 단순히 인물 그리고 세대의 교체가 아 니라, 사회적 역관계 전체를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발본하는 것을 의미하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이런 의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발전단계로 파악된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