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노동자 정치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고 민 택 / 편집위원
 
 
 

"만약 자본주의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면 사람들이 과연 피 부를 검게하려고 노력했을까?" 최근 누군가로부터 이런 농담(?)어 린 질문을 받았다. 바로 얼마 전의 일인데도 어떤 자리에서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그 질문만은 생생 히 남아 있다. 그때 나는 얼떨결에 입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받았지만 속으로는 '설마 그럴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쩌지 못 했다. 순간 평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인종차별'이 내 안에 있지 않았나 싶어 게운치 않은 뒷맛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는 역설적으 로(바로 '인종차별'적으로) 차라리 그랬더라면 어쩌면 자본주의가 벌써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까지도 해 보았다.

세계는 자본주의가 불러일으킨 1,2차 세계전쟁을 비롯한 온갖 살 육전쟁과 자본의 노동착취 과정에서 자본이 저질러온 숱한 악행에 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자본주의 사회 자체의 고유한 모순의 발현으 로서가 아니라 인간세상에서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인간본성 혹은 사회현상의 불가피한 발현으로 비치게 하는 여러 요인들로 둘러싸 여 있었다. 특히 제국주의와 식민지와의 관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사이의 대립으로 여겨졌던 상황, 여러 형태의 민족대립과 인 종차별, 선진국 노동자와 후진국 노동자의 조건의 차이, 일국 내에 서의 노동자 계층분화, 성 차별 등은 세계적 차원에서 혹은 일국적 수준에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은폐시키고 지연시키는 결정적인 작용을 해왔다. 이것들은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가 그 이전 어 떤 사회보다도 피지배계급에게 이른바 '기회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과 '생활수단의 향상'을 가져옴으로 써, 노동자를 비롯한 피지배계급이 수동적으로나마 자본관계를 인 정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노동자의 투쟁이,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실패로 끝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세계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은폐시키고 지연시켰 던 요인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거나 약화되고 있다. 물론 어떤 요 인들은 여전히 지속되거나 더욱 강화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국가 경쟁력을 앞세운 국가주의, 애국주의가 위력을 발휘하거나 노동자 내부의 경쟁을 부추길 가능성이 그것들이다. 노동자의 대중투쟁과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만 객관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은 분명 성숙되고 있다.

그 같은 조건은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완전히 지배력을 장악 함으로써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동시에 자본주의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자본의 전지구화와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환경을 살펴보자. 첫째 세계 거의 모 든 나라에서 발생하는 대립과 갈등의 주된 원인이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자 본과 노동의 대립이 가장 중요한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후진 자본주의에서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90년대 들어와 선진자본주 의 나라들의 노동자투쟁이 되살아남으로써 선진국 노동자와 후진국 노동자의 조건이 압도적인 차이에서 점차 좁혀지고 있다. 비록 각 국의 자본축적의 역사와 대중투쟁의 경험의 차이에 의한 구체적 상 황과 처지는 같지 않지만 대중투쟁의 성격이 점점 동질화해가는 경 향은 더욱 뚜렷해 질 것이다. 둘째 자본이 전지구적으로 자신의 장 악력을 넓혔다는 공간적, 지리적 의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생산 과 판매의 단위가 점점 '세계 자체'로 되고 있다는 측면이다. 이에 따라 자본 사이의 통합이 더욱 전면화하고 있다. 이는 세계가 하나 로 평화롭게 통합되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국의 고통과 재앙이 순식간에 세계의 그것으로 퍼져나갈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과학기술혁명은 인간노동을 급격히 기계노동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생산직 노동자의 절대수와 비율이 동시에 줄어들 고 있다. 비록 상대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노동강도를 염두에 둔다 해도 노동강도 강화에 따른 일자리 줄이기는 생산력 발전에 따른 일자리 축소에 비하면 부차적인 효과에 불과하다. 이는 이제 인류 가 다 같이 적은 노동 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생산 력이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실제로 이렇게 되는 것만이 인류의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가르켜주는 것이다.

사실 소련 및 동유럽 체제가 무너지면서 세계는 한때 이제 노동 자계급의 정치는 상당 기간 역사의 뒷편으로 물러나야할 운명에 처 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 뒤 진행되고 있는 역사적 현실은 오히려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대중투쟁이 역사상 가장 광범위 하게 지구 도처에서 터져나오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의 신자유주 의적 공세가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 이다.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계급 자신의 정치를 세우는 수준으로 까지 올라온 것은 아니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새롭게 등장하 고 있다. 자본의 보수화가 전면화되고 있는 조건 속에서도 세계적 으로 개량주의 세력의 정치적 진출이 오히려 활기를 띠고 있다. 그 러나 이들 세력이 자본의 요구와 노동자의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기회는 이로부터 충분히 주어질 수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IMF 구제금융과 김대중 정권의 등장이라는 격 변을 또 다시 맞이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쩌다 한국경제가 이 지경이 되었냐고 한탄하며, 이렇게 된 원인 규명과 책임 소재를 둘 러싸고 논란이 한창이다. 재벌개혁과 정리해고 문제가 전사회적, 전 계급적 관심사로 떠올라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상황을, 앞서 얘기 한 세계 자본주의의 현실과 관련하여 바라보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당장 노동자계급에게 닥쳐올 고통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 타까운 일이며 분노를 금하기 어려운 상황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한 번만 더 생각하면 굳이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 다고 해도 지금과 유사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세계 모 든 나라가 동시에 갖고 있다. 한국경제의 위기는 태국과 인도네시 아에서 시작한 위기와 맞물려 있으며 동시에 이 위기는 일본을 경 유하여 미국으로 번져나갈 가능성조차 안고 있다. 이토록 세계경제 는 이미 그 통합의 정도가 그 지역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곧바로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만큼 진전돼 있다. 노동자계급은 이러 한 환경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거기에 따른 대응을 준비해야 한다. 지금 세계 전지역의 노동자는 자본주의 선·후진국을 막론하 고 심각한 생존권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따라서 각국의 노동자 는 자신의 지배계급을 향한 비타협적인 투쟁 외에 달리 선택할 방 법이 없다. 일국내에서의 노사협조주의나 노사정 협약은 오히려 세 계적 차원에서 노동자 간의 경쟁을 더욱 강화할 것이고 결국 그 결 과는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와 노동자계급 자신의 발등을 찍 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아직 미약하긴 하지만 96년말에서 97년초에 걸친 총파업투쟁의 경험과 지난 대선에서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를 지지한 30만이 넘는 세력을 확인했다. 이들은 단순히 표찍는 행위를 넘어 행동을 통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숫자 가 아니다. 김대중에게 투표한 노동자 중에도 상당 수는 조만간 김 대중 정권과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노동자계 급의 선진부분은 바로 여기에 기초하여 자신의 정치적 진출을 준비 해야 한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