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미래를] 98년 3월호
생존권을 위한 최후의 보루는?
김진균
자문위원·서울대 교수
노사정합의사항을 인정할 수 없다며 파업을 결행하기로 결의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결정을 지난 2월 12일 비상대책위원회가 하루 종일 늦게까지 토론하고서 철회하고 난 지금, 게다가 국회에서 재빨리 정리해고와 파견근무제를 도입한 노동법 개정을 해 놓은 지금의 상황이지만 2월 10일∼11일에 광주에서 개최된 민교협 겨울수련회에서 경제사정을 잘 아는 교수 한분의 발언을 우리는 진심으로 허심탄회하게 성찰해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 교수가 발언한 것은 이러하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지난 9일 이른바 노사정합의안의 추인을 부결한 데 대한 정부 및 대통령 당선자측의 강경대응방침은 우리들의 깊은 우려를 낳고 있다.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 체결한 조약이나 합의가 국민의 생존권을 포기·양도한 것일 때에도 국민들이 그 조약이나 합의를 인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민주노총 대표가 교섭대표권을 위임받았다고 해서 그 대표권을 위임해준 조합원들의 생존권까지 함부로 협상안에서 포기, 양도할 수는 없다. 노사정협의회라는 것은 원래부터 근로조건이나 임금수준 등을 협상할 수 있어도 근로자들의 정리해고를 협상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권한도 이유도 없는 조직이다. 세상에 어느 누가 남의 생존권을 대신하여 자기들끼리 협상할 수 있단 말인가? 남의 재산이나 인권, 남의 순결과 정조까지도 때로는 대신 흥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그것조차 위법인데 하물며 남의 생존권을 멋대로 협상테이블에서 논의한다는 것은 후안무치가 극에 다다른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말세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정리해고법제화는 IMF가 요구한 사항이 아니라 당선자측이 외국자본의 국내기업 사냥을 유인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고, 외국자본이 유입되지 않으면 국내 경제가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은 언론이 아니라 당선자측이 외국자본의 국내기업 사냥을 유인하기 매체를 통해 당선자측이 이미 귀에 못이 박히게 선전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노동운동 조직이야말로 우리 경제를 외국자본의 전횡으로부터 보호하게 될 마지막 보루이며 우리 민족 생존권의 최후의 피난처이다. 이것마저 포기한다면 우리에게 국민경제란 더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우리 정부는 더이상 우리를 대표하는 정부라 할 수 없다. 정리해고는 고통분담 차원의 협상대상이 될 수 없다. 그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이고, 민족의 생존권, 우리 근로자 개개인의 생존권에 관한 문제이다. 인권도 포기하고 민족의 재보마저 포기했던 박정희 정권도 근로자의 생존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만약 정부가 강경대응으로 민주노총의 재협상요구를 유린한다면 국민들의 광범한 지탄을 받을 뿐만 아니라 차기정부의 출범 자체가 파국속에서 실종될 수도 있는 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 발생할 혼란을 누가 책임질 수 있는지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지금 우리 모두는 국가위기 상황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고통분담이라는 미명하에 소수의 약자에게 고통을 전담시켜 타인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불법무도한 행위는 삼가해 주기 바란다."(98년 2월 11일)
민주노총이 파업결의를 철회했다. 전국의 노동현장에선 바야흐로 명예퇴직이나 해고를 사용자 멋대로 진행하고 있다. 노사정합의에 의해 신설되리라 믿어졌던 실업자의 초기업노동조합 가입조항이 국회에서 노동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도 취업자중에서 비정규노동자가 45%를 넘어서고 있는데 2백만명의 실업자가 올해에 생겨나리라고 예측되고 있다. 그러한 민중이 기댈 곳은 어느 주체에 있는가? 국가가 경제를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한다 해도 재벌들이 해외에서 돈장사를 하려다 오히려 국제적 투기꾼들에게 걸려들어 국내 자본의 씨를 말리는 꼴을 예방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이번에 드러났다. 국내에서 재벌로 군림하던 자본들이 단지 경제위기만을 발생케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총체적 위기를 초래해 버리고 말았다.
이 총체적 위기를 민주노동운동계를 놓고 생각해 보자. 위에 인용한 교수의 발언이 진실로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한다면 민주노동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의 심정이 또한 진실된 것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이런 것이다. - 민주노동운동진영이 '80년대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 만큼은 아니더라도 파업과 같은 결연한 의지로 싸워나갔을 때, 과거의 운동경험에 비추어 보면, 제도언론이 주도하는 여론으로부터 국가의 위기도 외면한 체 자기들만의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로 매도될 뿐만 아니라 공권력에서 으름장을 놓듯이 수배·구속되는 사태가 벌어 질 것이고, 운동주도자들은 2∼3년 징역을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조직도 많이 손상을 입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자대중의 신뢰와 민족·자주의 최후의 보루로 양심을 지킬 수 있다면 조직의 복원은 빠르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위의 주장의 진의를 진실로 이해한다면, 노사정합의에 의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입법화됨으로써 김대중대통령과 그의 정권은 당선 시초부터 그 주체적 보루이기를 이미 포기한 상태에서 국제통화위기의 해소방안을 찾았다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10여년, 길게 보면 근20여년 반민주독재세력에 맞서 민주화와 노동해방의 주역으로 자라온 민주노총도 노동자·민중·국민의 생존권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의 자부심이 크게 손상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민주노동운동세력의 조직정비도 필요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조직의 핵심가치를 다시 확인하여 설정하고, 그 가치의 실현을 위한 지적·도덕적 토대를 구축하는 방향에서 노동자들의 신뢰를 펂득해야 한다. 해고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기댈 수 있는 양심적 구심으로 되기 위해 뼈를 깎는 아픔으로 거듭 태어나야 할 것으로 본다.
노사정합의제는 그것이 아무리 정직하고 투명하게 운영된다 하더라도 '사회적 합의' 메카니즘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고, 자칫 조심성을 살리지 못하면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고 관철하기보다는 그 메카니즘에 참여한 사람들의 직접적 이해관계를 위한 배분메카니즘으로 타락할 위험성이 항상 내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 노사정의 메카니즘에 기대면 기댈수록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조직이 진보성을 상실하고 국가독점자본의 온갖 독점적 이익확보에 봉사해 주고만 역사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한국의 노동자가 대결해야 하는 자본은 '재벌'이라는 형태로 나타나 있는 국내의 독점세력과, 세계적 자본흐름의 격량속에서 서로 어울리고 서로 싸우기도 하면서 무소불위의 힘을 작동하고 있는 초국적자본이다. 한국 민족이 냉전체제에서 민족의 분단으로 양체제 싸움의 최전선에서 대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한국의 노동자들은 세계적 차원에서 싸우는 자본들끼리의 융합된 전선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 대치전선은 전자통신시대의 전쟁양식이 하나의 전쟁양태로 지적되는 것처럼, 옛날과 같이 전방과 후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삼십육개 방향에서 정보지식무기로 무장한 총체적인 전선을 구성하고 있다. 언제나 초국적자본은 정보무기로 공격하는 월등한 힘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한가지 사실을 명심해 보자. 자본주의가 세계화되었다고 하는 그만큼의 체제통합은 세계의 어떤 지역 또는 어떤 사회의 경제도 독자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한국의 경제위기 내지 총체적 위기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주도국에서조차 그만큼 위험의 잠재력을 연결시켜 놓고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이 세계적 차원의 최전선에 서 있다면, 그 세계적 연관성을 인식하여 위기극복을 위한 지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즉 노동운동은 절대로 위축될 수 없고, 세계 노동자 및 동·서양을 막론하고 급증하고 있는 세계적 실업자들과 연대하여 하나의 전선으로 묶어 가는 전략·전술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민주노동진영과 연대하는 지적 정보연구집단은 이러한 정세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위하여 유효한 정보를 신속하게 보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이 노동자에게만 불리한 상황이라도 지레 비관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노사정합의제의 첫단추 끼기에서 인식과 경험의 부족으로 실수한 것은 올바른 인식과 판단을 되살려 개혁해서 진보성을 확보해 가야 한다. 지난 십여년간 처절하게 싸워온 노동자들의 확신에 찬 기운을 다시 조직적으로 살려내어 민중에 배반되지 않는 방향으로 역사의 진로를 뚫어보자.
|
한/노/정/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