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1998년 1월 23일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가
주최한 심포지움 '김대중정권의 진로와 노동운동의 진로'에서 발표한
"김대중정권과 노동자운동의 진로'를 토대로 작성하고, 1998년 2월 28일에
열린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제2차 정기총회토론회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가필한
것이다.
IMF관리체제, 김대중정권, 그리고 노동운동
들어가면서
1. IMF처방과 제반 위기론에 대한 검토
2. 김대중정권의 성격과 진로
3. 노동 운동의 진로
미주
오늘날 한국경제는 자신의 발전과정에서 가장 심대한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다. 한국을 국가부도사태 직전까지 내몬 외환-금융위기는 IMF의 긴급 구제금융 덕분에 일단 진정되긴 했지만 언제 다시 터질지 모를 상태로 잠복되어 있다. 게다가 긴축재정과 고금리정책의 실시와 같은, 외환-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취해지고 있는 제반 조치들은 역으로 실물경제의 위기를 재촉해 수많은 기업들을 파산상태로 내몰고 있다.
그런데 적대적 모순들을 지닌 사회의 발전은 특정 형태로의 모순들의 배치(arrangement), 모순들의 불균등한 발전과 전이(replacement), 모순들의 특정 부분으로의 응축(condension)이나 전반적인 응축, 모순들의 부분적인 폭발(explosion)이나 전반적인 폭발, (모순들의 크고 작은 폭발을 통한 특정 모순들의 '해소'와 새로운 모순들의 '발생'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모순들의 재배치(rearrangement)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모순들의 특정형태로의 배치를 통해 사회적 관계들의 특정한 '구조'(structure)가 형성되고, 모순들의 폭발이 가져오는 모순들의 재배치를 통해 사회적 관계의 '재구조화'(restructuring)가 이루어진다.
다른 한편, 제반 모순들이 대폭발 직전까지 고도로 응축된 상태에서는, 물리학의 '혼돈(chaos)이론'이 나비 한 마리의 가벼운 몸짓 한번이 대폭풍우를 몰고올 수 있다는 이른바 '나비효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어떤 사소한 사건의 발생이 예상치 못한 커다란 사태를 불러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모택동이 '하나의 작은 불씨가 온 광야를 불태운다'라고 말했을 때, 그의 언급 역시 사실상 '나비효과'와 같은 사태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렇지만, 나비의 몸짓 한번과 작은 불씨 하나는 어떤 조건 하에서나 항상 폭풍우를 몰아오고, 온 광야를 불태우는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효과를 가져오게 만드는 제반 모순들(이나 요인들)의 고도의 응축이 사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나비 몸짓 한번과 작은 불씨 하나는, 비록 그것들이 특정의 조건 하에서는 폭풍우를 몰고오고 광야를 불태우는 직접적인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태가 생겨나도록 제반 모순들을 응축시킨 심층적인 원인은 아니다. 다시 말해, '폭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 '폭발'을 가능토록 만든 '응축'의 원인이 그 폭발의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원인인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위기의 폭발에 부딪쳐 그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위기의 보다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원인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경제위기는 경제위기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직면한 경제적 관계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사회적 관계 전반의 위기를 수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위기는 경제위기인 동시에 사회적 관계 전반의 '유기적 위기'(organic crisis)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점에서 경제위기는 경제적 관계의 '재구조화'( restructuring)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 전반의 재구조화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구조화의 방향은 어느 하나만으로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재구조화의 방향 등을 둘러싼 사회 세력들 간의 대립을 매개로 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외환-금융위기가 폭발함과 더불어 한국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IMF 관리체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5대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함으로써 김대중세력이 한국사회의 지배층을 대변하는 집권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IMF의 처방은 앞으로 진척될 한국사회의 재구조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는 그들 요구의 국가정책으로의 전화를 통해 관철되어야 하기 때문에 김대중정권의 정책방향에 의해 IMF의 요구가 한국사회에서 관철되는 구체적인 방식이 결정될 것이다. 그렇지만, IMF의 처방과 김대중정권의 노선에 대한 피지배대중의 대응방향 역시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발제문의 목표는 한국경제가 사회적 관계 전반의 심대한 '유기적 위기'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공황국면에 빠져 듬으로써 IMF 관리체제 하에 놓여 있고, 다른 한편으로 파산난 김영삼정권을 대신하여 김대중정권이 들어서게 된 조건 속에서 한국 노동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매우 일반적인 수준에서 개진하는데에 있다. 이를 위해 여기서는 IMF 처방과 경제위기에 대한 제반 견해들 및 김대중정권의 성격 등을 먼저 살펴보는 선 상에서 문제에 접근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어떠한 위기해결책을 강구해 갈 것인가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위기의 원인을 무엇으로 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때문에 위기의 원인을 옳게 파악하는 것은 위기의 올바른 해결책을 강구하는 전제조건이 된다. 나아가 성립된 사회적 힘관계의 불리함으로 말미암아 위기의 올바른 해결책을 추구해 나가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위기의 근본 원인을 호도하거나 위기의 부차적인 원인을 위기의 주된 원인인 양 말해서는 안된다. 이를 전제로 하여 여기서는 먼저 IMF처방의 기본성격과 문제점 및 그간 제시된 제반 위기론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1.1. IMF처방의 성격과 문제점
IMF의 처방은 (1) 한국경제의 위기가 세계경제의 위기로 비화되는 것을 막고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구제금융의 제공 등을 통해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지원한다는 측면과 더불어 (2)한국에 대한 지원을 동시에 미국자본이 중심인 초국적자본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계기로 적극 활용한다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IMF의 구제금융이 없었더라면 한국경제가 당장 국가부도사태에 빠져들게 되었을 것이라는 점 등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미국이 100억불에 달하는 구제금융을 조기집행하기에 앞서 자신들의 요구를 완벽하게 관철시키기 위한 압력을 집중적으로 가한 점 등은 그 지원이 단지 한국경제가 위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돕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IMF처방은 '단기처방'과 '중-장기적 처방'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때 단기처방이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비용을 구제금융 수혜국, 즉 국제수지 적자국이 전적으로 부담해야 한다는 원칙 하에서 해당 국가에게 긴축재정의 실시를 요구하는 것이고, 중-장기적 처방은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창달을 가로막는 해당국가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결함의 시정을 요구하는 구조조정프로그램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IMF는 '금융 및 기업부분의 근본적인 결함' 등을 한국이 위기에 빠지게 된 근본 원인으로 보면서 부실금융기관의 도태-정리, 기업지배구조의 개선과 경영투명성의 확보, 금융-자본-상품시장의 전면적인 개방과 자유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을 위기극복을 위한 중-장기적인 구조조정프로그램으로 제시하고 있다.[주1] 이러한 IMF의 처방은 철저히 신자유주의적인 위기해결책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처방은 '재벌개혁' 등을 요구하고 있는데에서 드러나다시피 한국경제의 천민적인 구조를 개선하는 데에 일정하게 기여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초국적 자본의 진출에 방해가 되는 제반 장애물의 완전한 제거를 요구하고 있고, 외자유치와 내국자본의 수출증대 및 국제경쟁력 강화를 통한 위기해결만을 선택가능한 유일한 위기해결책으로서 강요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IMF처방의 성격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될 수 있다.
첫째, IMF의 처방에 담겨 있는 초국적독점자본의 요구는 내국독점자본의 요구와 배치되는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내국독점자본의 요구와 일치하는 측면을 더 많이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옳게 인식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그간의 개방화 등을 통해 외국자본이 한국으로 많이 진출하기 했지만 그 진출은 아직 매우 미약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 한국이 금융, 기술 등의 면에서 대외적으로 종속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기자신의 축적기반을 상당한 수준에서 지니고 있는 내국독점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사회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김영삼정권 하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탈규제화, 자유화, 유연화 정책 등은 내국독점자본의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이기도 했으며, 내국독점자본 역시 이른바 '세계화 전략'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자본축적전략으로서 이미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나아가 비록 김영삼정권 하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그러한 세계화 전략이 위기의 도래로 인해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되었지만,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도 한국의 내국독점자본은 그러한 '세계화전략'을 앞으로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내국시장의 개방화를 반대하는 등 초국적자본의 이익을 완전히 무시한 채 내국독점자본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내국독점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도 초국적자본의 이익을 아울러 고려해야 하는데, 이 점은 초국적자본 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재벌개혁 등은 개별재벌 총수들의 직접적인 이익과는 배치되지만, 독점자본의 경쟁력 강화 등에 기여하는 등 내국 총독점자본의 '장기적' 이익과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 물론 한국이 IMF 관리체제 하에 놓이게 됨으로써 내국독점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초국적자본의 요구가 보다 강력하게 관철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 조성되었다. 이로 인해 한국경제의 대외적 종속성은 앞으로 크게 진척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국독점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초국적자본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그 요구가 내국독점자본의 전면적인 굴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이상, 한국이 국가부도사태에 빠지고 부실기업은 물론 이른바 '우량기업'까지 모조리 파산하는 최악의 상태로 내몰리는 것에 비한다면 내국독점자본의 이익에 휠씬 합치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IMF가 요구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인 위기타개책의 가장 핵심적인 측면은 대외종속성의 심화 등을 가져오고 있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내외 모든 자본들의 운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철저히 시장경제와 자본의 경쟁논리에 종속시키고, 위기부담을 노동자-민중에게 전면적으로 전가시키는 데에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둘째, 외환-금융위기의 해결책으로 IMF가 요구하고 있는 긴축재정정책과 고금리정책, 기업구조 조정정책 및 노동력 사용의 유연화정책 등은 경쟁력을 상실한 자본의 대대적인 폐기, 대량해고와 임금인하, 노동시간의 연장과 노동강도의 강화 등 사실상 (과잉축적의 위기가 불러일으킨) 경제공황이 수행하는 역할을 국가정책으로서 목적의식적으로 추구하도록 요구하는 것과 같다. 이 점에서 IMF 처방은 위기예방책이라기 보다는 공황을 겪게함으로써 공황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위기타개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이른바 'IMF한파'란 이러한 사태 진행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자신에 내재하는 고유한 모순으로 말미암아 공황국면에서 이루어지는 과잉축적된 자본의 대대적인 폐기, 대량실업의 창출, 임금인하와 노동시간의 연장 등을 통해 자신의 성장을 위한 새로운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다시말해 위기의 자본주의적 해결책이란 역설적으로 경제공황의 출현 그 자체이다. 이와 관련하여 IMF처방이란 가장 자본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위기해결책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철저한 시장경제적 개혁' 등을 요구하는 IMF의 신자유주의적인 위기해결책은 그러한 해결책의 적극적인 강구를 통해 오늘날 미국이 (세계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선진국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장기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전세계적 수준에서 시장경제적 개혁이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이로써 자본운동에 대한 규제가 철폐되면 될수록 자본주의체제의 '구조적 불안정성'은 더욱 높아져 위기 출현에 더 한층 노출되지 않을 수 없고, 일단 위기가 출현하면 그 위기는 더 한층 파국적인 형태로 진행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은 자본운동의 탈규제화와 자유화 및 지구화-세계화가 이른바 '카지노 자본주의'를 성립시켜 국제금융체제의 불안정성이 극도로 높아진 것이 현 시기에 동아시아 전체가 경제위기에 급속히 빠져들게 된 중요한 조건의 하나가 되고 있는 사실에 의해, 그리고 근대초기의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체제가 1930년대 이르러 결국 유례없는 대공황을 맞이하게 된 사실에 의해서도 입증된다.[주2] 실제로 자본운동에 대한 국가적 규제는, 비록 위기 출현을 지연시키고 위기 표출의 형태를 덜 파국적인 형태로 변경시킬 따름이지 위기 출현 자체를 막을 수는 없지만,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만들어내는 위기의 예방책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다른 한편, 미국자본주의는 오늘날에 이르러 (늦든 빠르든 파국적인 공황으로 빠져들지 모르는) 호황의 정점에 도달해 있는 것으로 보이며, 한국에 이어 일본까지 공황에 빠져들게 되면 미국자본주의 역시 공황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미국자본주의가 공황에 처하게 되면 이는 세계공황의 도래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신자유주의적인 위기태개책이란 '위기예방책' 그 자체라기 보다는, 종국적으로는 체제를 위기에 더 한층 노출시켜 공황의 출현을 용이하게 만들고, 도래한 위기가 한층 더 격렬한 형태로 표출되도록 만드는 '파국적 위기 촉진책'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앞으로 세계공황이 도래한다면 그 공황이란 극소수층을 제외한 인류 전체에게 엄청난 고통을 강요하는 실로 미증유의 것이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오늘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위기란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세째, 신자유주의적 위기해결책은, 설령 그것을 통해 위기극복이 일시적으로 이루어지다고 할지라도, - 제3세계에서는 이들 국가의 대외적 종속성을 심화시키는 측면은 별개로 친다고 할지라도 - 한편으로는 체제를 위기에 더욱 노출시키고 위기를 파국적인 위기로 출현하도록 만드는 기제로 작용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대중을 개별화-원자화시켜 이들을 자본축적 논리에 더욱 종속시키는 동시에 위기부담을 노동자-민중에게 철저히 전가시킴으로 인해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심화시키고 다수대중의 빈궁화와 빈민화를 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다. 후자의 측면은 성공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있는 모범사례로서 칭송받고 있는 멕시코의 현실에 의해 가장 잘 드러나고 있으며[주3],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이 철저히 이루어진 가운데 1990년대에 들어와 장기호황을 누리고 있는 미국사회가 그러한 호황의 혜택이 다수 대중에게는 돌아가지 않는 이른바 '5분의 1, 5분의 4 사회'로 급속히 전락하고 있는 사실[주4] 등에 의해서도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네째, 위기의 원인을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결함에서 찾는 IMF의 견해는 천민자본주의적 요소들을 대거 지닌 동남아시아국가들만이 아니라 재벌이 이미 해체되고 자본합리화가 고도로 이루어진 일본이 왜 오늘날 심각한 금융위기를 경험하고 있으며, 유럽의 국가들 역시 오늘날 (비록 심각한 공황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속적인 불황을 경험하고 있는가를 함께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이후 심각한 구조적 불황에 처하게 된 이후 세계자본주의체제는 그간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 - 경쟁력없는 자본들의 폐기, 기술혁신, 대량해고와 임금인하, 노동력사용의 유연화 등 -등을 대대적으로 행해 왔다. 그렇지만, 독점자본 지배 하에서는 경쟁력을 상실한 자본부분의 폐기가 많은 경우 공장시설의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미가동 등으로 대체되기 때문에 시장여건이 조금만 개선되면 곧장 과잉생산이 유발되고, 과잉생산은 이윤율을 하락시켜 자본의 과잉축적을 한층 더 촉진시킨다. 이로 인해 독점자본지배 체제 하에서는 과잉축적된 자본의 대대적인 폐기가 매우 어렵다. 또한 자본운동의 세계화-지구화과정과 더불어 자본들 간의 국내외 경쟁은 격화되지 않을 수 없는데, 경쟁의 격화는 자본의 과잉축적을 크게 촉진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로 인해 오늘날에는 자본이 전세계적 수준에서 엄청나게 과잉축적된 조건 속에서 세계자본주의체제가 운동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공황 출현의 조건이 이미 성숙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아가 제투기자본의 증대 등은 종국적으로는 생산부분에서의 자본의 과잉축적의 증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화-지구화과정은 국제투기자본 운동을 규제할 정치적 수단들을 약화시키는데, 이로 인해 세계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은 오늘날 크게 증대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공황 출현의 조건이 되는 자본의 이러한 세계적 수준에서의 전반적인 과잉축적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국가들이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가장 먼저 심각한 공황국면에 빠져 든 것은 이들 국가들이 (자본-금융시장의 개방 등으로 인해 국제금융체제의 불안정성에 한층 노출된 가운데) 적합한 이윤을 창출하지 못하는 과잉축적된 자본부분을 유럽과 미국 보다 상대적으로 더많이 지니고 있는 데에 기인한다. 그 이유는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가 1970년대 중반이후 구조적 불황에 빠져들면서 1980년대에 그 나름대로 기술혁신과 구조조정 등을 지속적으로 단행해온 데에 비해 (자본주의 발전의 불균등에 매개되어 1980년대에 수출의 확대 등에 유리한 국제환경을 맞이한) 동아시아국가들은 세계경제가 전반적으로 불황을 겪고 있는 1980년대에 기술혁신 보다는 자본투자의 확대에 기초하여 자본세계시장으로의 수출을 크게 신장시키고 고도성장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구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1980년대에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을 때에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가 고도성장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으로 오늘날에는 동아시아가 가장 먼저 심각한 경제위기에 빠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동아시아국가들이 1980년대에 세계시장으로의 수출을 크게 신장시키고 고도성장 정책을 추구한 것은 그들 국가들이 천민자본주의적 구조나 국가주도형 발전모델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러한 정책을 추구하기에 매우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맞이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는 옳게 인식해야 한다. 이 점은 자본투자의 확대에 기초한 고도성장 정책의 추구에 유리한 국제환경을 맞이했더라면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1980년대에 동아시아국가들이 취한 정책과 유사한 정책을 기본적으로 추구했을 것이라는 점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다섯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세계자본주의체제 자체는 오늘날 자본이 엄청나게 과잉축적된 조건 속에서 운동하고 있으며, 현 시기에 동아시아가 가장 먼저 공황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은 불안정한 세계금융체제에 극히 노출된 조건 속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과잉축적이 그간 이 지역에서 이루어 진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경제위기의 근본원인은 이들 정치-경제체제가 지닌 근본적인 구조적인 결함에 기인하는, 이들 국가들에게만 해당하는 고유한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이윤생산체제 내지 시장경제체제 자체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자본의 과잉축적 위기'이다.[주5] 다시 말해, 한국을 비롯한 현 시기 동아시아의 경제위기의 기본적인 측면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치-경제체제에 고유한 특수적인 위기가 아니라,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어떤 구성부분도 결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세계적 수준의 (그러나 현 시기에는 동아시아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표시되고 있는) 자본의 과잉축적 위기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국가들의 정치-경제체제가 지닌 구조적 문제점은 '위기의 근본원인'이라기 보다는 '위기의 부차적인 원인' 내지 '위기의 심화-격화요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IMF처방이란 위기의 부차적인 원인 내지 심화-격화요인을 위기의 근본요인으로 보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으며 - 물론 위기의 근본원인이 자본주의체제의 작동방식 그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IMF가 위기의 근본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지만 -, 세계자본주의체제를 더 한층 위기에 노출시키고, 최종적으로는 보다 파국적인 형태의 세계공황 도래를 촉진시키는 처방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한국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외환-금융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자를 적극 유치하고 한국자본의 국제경쟁력을 높혀 나간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일정하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공황에서 일정하게 벗어나 있는 한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
1.2. 제반 위기론에 대한 검토
그간 많은 제도권 인사들은 한국경제가 빠져든 외환-금융위기와 관련하여 외환수급 상의 일시적인 교란이나 정책당국자들의 무능 등과 같은 직접적이고 표면적인 원인만을 언급하거나,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원인으로서 한국인들의 과소비풍조 등을 거론해 왔다. 그런데 과소비풍조란 절대 다수 국민의 소비행태와는 무관하다. 또한 소수부유층의 과소비행태는 그간 한국경제가 눈부시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의 소수에로의 집중이 고도로 진척된 결과로서 나타난 것으로 위기의 원인이라고 보다는 위기를 불러일으킨 경제과정의 결과물이었다.
그러한 견해와는 달리, 한국경제가 빠져든 외환-금융위기를 보다 구조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 견해로서는 1)재벌에 의한 경제지배와 같은 한국경제의 구조적 결함이나 국가주도형 발전모델이 지닌 '약탈적 구조'와 같은 발전동원체제의 내적 모순을 지적하는견해, (2) 한국경제의 대외적 종속성이 만들어낸 근본적인 위기로 보는 견해, (3)자본주의적 이윤생산과 시장경제체제가 만들어내는 자본의 과잉축적위기로 보는 견해 등이 제시되어 왔다.그런데 우리는 IMF처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과정에서 현 시기 위기의 근본적인 성격을 자본의 과잉축적위기 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와는 달리 (1)의 견해를 지지하는 견해 중 특히 재벌체제의 문제점 등을 강조하는 견해는 장상환교수 (경상대)[주6], 김상조 교수(한성대)[주7]에 의해 대표적으로 개진되고 있는 반면, 정경유착, 관치금융 등을 만들어내 국가주의적 성장모델의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는 견해는 조희연교수 (성공회대)[주8]에 의해 대표적으로 개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양 입장은 위기의 원인을 설명함에 있어 경제적 측면을 중시하는가, 아니면 정치적 측면을 중시하는가의 차이이지 근본적으로 동일한 입장에 속하는 견해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견해는 민주노총 지도부를 비롯한 운동권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위기해결책으로서 소유분산과 전문경영인에 의한 기업경영 등을 통한 재벌해체 등을 요구하고 있고 노동력 사용의 유연화 및 한국경제의 완전개방 등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지만,) 위기의 원인을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국가들의 정치-경제체제가 지닌 '특수한' 구조적 결함에서 찾고 있고, 재벌개혁 등을 통해 한국자본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위기해결책이라고 보는 점에서는 IMF의 견해는 물론 나중에 언급할 김대중정권의 견해와 (위기의 원인과 해결책을 파악하는 관점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이들의 견해는 위기의 원인을 파악함에 있어 IMF와 시각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서 행한, IMF의 위기진단에 대한 비판은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른 한편, (1)의 견해를 보다 일반화시키면, 현 시기 동아시아의 경제위기는 국가가 경제발전을 주도하는 이른바 '일본식 자본주의'가 지닌 구조적 문제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 서면 일본식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적인' 이른바 '영미식 자본주의'로 개편하는 것이 위기해결책이 되는데, 이 경우에는 '더 많은 시장경제적 개혁'이 위기해결책으로서 제시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은 국가개입의 필요성을 많든 적든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크게 보면 신자유주의적인 위기해결책을 지지하게 된다. 그로 인해 재벌체제나 국가주도형 발전모델 등을 위기 출현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보는 진보학계의 인사들은, 설령 노골적인 신자유주의적인 위기해결책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큰 틀에서는 시장경제적 개혁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점에서 이들은 최소한 '신자유주의적 위기해결책의 수동적인 지지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 일련의 논자들은 현 시기의 위기를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 전반의 대외종속적 경제구조가 빚어낸 위기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제출하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김성구교수(한신대)[주9]와 임현진교수(서울대)[주10] 등에 의해 대변된다. 김성구교수에 의하면, 현 시기의 외환-국제수지 위기는 본질적으로 '신식민지 종속적-독점적 축적의 위기'로서 '표면적인 위기'가 아니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인 한국이 겪을 수밖에 없는, 대외종속적인 경제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근본적인 위기'이며, 그 결과는 '외국자본에 의한 한국경제의 직접적 지배'이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는 IMF관리체제 하에 놓이게 됨으로써 한국경제의 종속성이 더한층 심화될 수밖에 없는 측면을 파악하는 데에는 도움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앞에서 말한 (1)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현 시기에 왜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국가도 심각한 금융위기에 빠져있는가를 당장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현시기 위기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부차시하고 있고, 신자유주의적 처방이 기본적으로 초국적독점자본은 물론 내국독점자본의 이익에 상응하는 처방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있으며, 초국적자본이 내국독점자본의 한국지배를 해체시킬 것이라고 보는 것과 같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견해와는 달리, 우리는 현 시기 위기의 근본적인 성격은 자본의 과잉축적 위기이지만, 경제의 대외종속성으로 말미암아 그 위기가 일차적으로 외환위기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고 있으며, 경제구조의 대외적 종속성은 (재벌지배나 정경유착구조, 관치금융 등과 마찬가지로) 한국위기를 한층 첨에화하고 악화시킨 요인으로 보아야 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김성구교수는 신식민지 내지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파악함에 있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측면보다 '종속성'의 측면을 더욱 중시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 서 있었다면 그는 한국사회를 '신식민지 (내지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라기 부르기 보다는 '국가독점자본주의적 신식민지 (내지 종속)사회' 정도로 이미 규정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위기로 말미암아 한국경제가 외국자본에 의해 직접적인 지배받게 될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될 수 없지만, 김성구교수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론'은 종속심화 테제를 필연적인 법칙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종속성의 문제가 약화되거나 심화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종속심화의 경향으로 인해 초국적자본에 의한 직접적인 지배가 이미 예정된 것으로 보는 것과 같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와는 달리, 한국이 위기가 가져올 종속성의 심화로 인해 얼마만큼 초국적자본의 직접적인 지배 하에 놓이게 될 것인지는 미리 예단할 것이 아니라, 추후의 발전과정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입각하여 답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이 초국적자본의 직접적인 지배 하에 놓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단정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현 위기가 현재 한국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내국독점자본의 전면적인 파산 등을 가져온다면 그 결과는 외국자본에 의한 한국경제의 직접적인 지배가 될 것이며, 그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한국사회는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로부터 '초국적자본 지배 하의 식식민지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는 외국자본의 지배가 금융-산업의 전 분야에 확대되고, 합작과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초국적자본과 내국자본과의 융합 등이 크게 진척될지라도 내국독점자본 지배체제가 곧바로 초국적자본의 직접적인 지배체제로 바뀔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속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가 15대 대선에서 당선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다. 김대중에 대한 지지도가 그간 유권자의 35%선에 머물었기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도 그가 그 선에서 득표했더라면 그의 대통령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에 당선되려면 그는 이번 대선에서 적어도 40% 이상의 득표율을 올려야만 했고, 40%선의 득표율을 올린다고 할지라도 경쟁자의 득표율이 김대중의 그것 보다 높지 않아야만 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그와같은 조건이 충족되었고, 이로써 그는 15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자민련과의 연합 내지 DJT 연대의 구축에 성공함으로써 김대중은 마(魔)의 35%선을 넘어 40%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연합의 구축에 힘입어 영남민과 보수적 유권자층의 반DJ 정서가 누그려졌으며, 이들이 김대중 당선을 막기 위해 유력한 다른 경쟁자에게 몰표를 몰아주는 사태가 방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민련과의 연합은 그의 당선을 가능케 한 필요조건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자민련과의 연합을 전제로 한다면 이회창후보의 두 아들 병역기피 의혹사건이 터져나온 것이 그의 당선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이인제의 탈당과 그의 선전(善戰), 미국의 간접적 지원과 김영삼의 암묵적인 지원, 외환-금융위기의 도래와 IMF관리체제의 성립 등이 크게 작용했다. 그외 박찬종이 이인제를 지지한 것과 국민승리21의 권영길후보가 겨우 30만표 밖에 득표하지 못한 것 등도 그의 당선에 기여한 요인들에 속한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기 위한 그 자신의 집요한 노력과 여러 우연적 요인들의 개입 덕분에 대망의 대통령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은 한국에 불어닥친 외환-금융위기로 말미암아 한국이 IMF관리체제 하에 놓여 있는 조건 속에서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가 당선되었을 때 김영삼대통령은 이미 무력해질 대로 무력해진 존재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당선되자마자 그는 곧장 대통령직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에서 김대중정권은 공식적으로 출범하지 않았을 때부터 실질적으로는 이미 출범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김대중정권은 미국자본이 중심을 이루는 초국적독점자본의 국제통화관리기구인 IMF의 직접적인 지시-통제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김대중정권은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에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부여할 것이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김대중의 그간의 정치노선의 변화과정 및 공식출범하기 이전에 이미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김대중정권의 성격 등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2.1. 김대중의 그간의 정치노선
군부정권 하에서 김대중은 무엇보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납치, 투옥, 사형선고 등으로 말미암아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으며, 지배층으로부터 대표적인 반체제인사나 좌경 용공인사로 몰리는 가운데 항상 위험시되거나 불온시당해 왔다. 그러나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긴 했지만 군부정권과 '비타협적으로' 투쟁한 인사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군부정권과의 투쟁 속에서 재야세력과 연대할 때에도 급진 재야세력 내지 재야세력의 전투적 부분과는 항상 거리를 취했으며, 군부정권을 민중투쟁을 통해 타도하려 하기 보다는 그들과 일정하게 타협하는 가운데 선거를 통해 퇴진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온건 저항노선은 결과적으로 군부정권의 연장에 기여했으며 군부정권에 저항하는 민중운동의 발전에 족쇄를 채우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그가 5.18 민중항쟁의 배후조정자로서 군법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것은 그에게는 정말 억울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한번도 그러한 민중항쟁의 지도자로서 활동한 적도, 또 그러한 지도자가 되려고 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김영삼과 더불어 13대 대선에 출마함으로써 그는 노태우정권의 출범을 결정적으로 도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군부정권의 조기 퇴장을 방해했다. 나아가 그의 13대 대선 출마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야당세력을 분열시키고 군부정권이 만들어낸 지역대립구도를 결정적으로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긴 했지만, 그의 역할은 한국 민주화운동이 올곧게 성장하는 데에 기여하기 보다는 그 과정을 지극히 더디고 우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에 기여한 것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는 가운데 그는 많은 중소서민층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호남차별구도가 고착됨으로써 그에 대한 타 지역주민들의 지지는 계속 엷어진 반면 군부정권 하에서 지역적 차별의 주된 표적이 된 전라도민들로부터는 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이 점에서 그에게는 중소서민층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와 전라도민의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겹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개의 이미지는 전라도민의 압도적 다수가 중소시민층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 한계를 돌파하지 못했지만) 중소서민층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그가 중소서민층과 그 압도적 다수가 서민층인 전라도민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된 데는 그가 박해받은 지역인 전라도 출신의 정치인이라는 점, 나아가 군부정권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야당인사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입장에서 중소서민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강-정책을 제시해 온 점등이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그가 제창한 적이 있는 '대중경제론'은 '민중주의적인 진보성'을 상당히 담고 있었다.
그가 야당인사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야당정치인에 속했다는 사실은 지배층과 그들의 영향 하에 있는 보수적 유권자층이 그를 항상 위험분자 내지 용공분자로서 배척하도록 만든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보수적 유권자층 등이 그들 따돌리는 한, 김대중이 대통령에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후 대권 장악을 위해 지배층과 보수적 유권자층 및 미국의 지배층에게 자신이 결코 위험분자나 용공분자가 아니라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 애써 왔다. 14대 대선에서 그가 이른바 '뉴DJ플랜'을 내세우면서 '나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라고 선전하기 시작한 것은 - 이것이 14대 대선이 '민주 대 반민주' 대립구도가 아니라 순수히 지역대립구도에 의해 규정되도록 만든 데에 크게 기여한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 그 당시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적어도 보수적 유권자층의 상당부분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음이 없이는 결코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4대 대선에서의 패배는 이후 그의 '보수화'를 더욱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점에서 14대 대선 패배 이후의 그의 정치활동 궤적은 한마디로 갈수록 더욱 보수화되고 진보성을 탈각시켜 나간 것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이러한 보수화를 통해, 그리고 자민련에게 대폭적인 양보를 행하는 것을 통해 자민련과의 연합 내지 DJT연대를 성사시키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그는 이번 선거를 통해 대망의 대권을 획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그의 행적에 비추어 보아 우리는 김대중이 애초에는 제도정치인으로서는 보기 더물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민중주의적 진보성을 지닌 자유부르주아 정치인이었지만, 이후에는 점차 보수화되어 ('부르주아적 진보성'은 소지하고 있다할지라도) '민중주의적 진보성'은 잃어버린 자유부르주아 정치인으로 변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의 가장 전형적인 옹호세력인 자유부르주아세력은 군부독재체제와 같은 '공개적으로 억압적인 부르주아국가체체' 하에서는 합법적 정치공간을 박탈당하고 지배블럭으로부터 배제당함으로써 피지배민중과 (일정한 거리를 지닌 가운데에서도) 많든 적든 연대하거나 제휴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가 진척되어 나가면 이들 세력은 대체로 자본주의사회의 재생산을 책침지는 헤게모니적인 지배분파로 등장하게 되며, 또 그런만큼 그들이 야당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지배블럭의 일원으로 편입하게 된다.
다른 한편, 자유부르주아세력은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기본적으로 옹호하긴 하지만 자유시장경제체제에 근본적인 결함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그 결함을 제거하기 위한,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광범한 사회적 규제를 옹호하는 '혁신자유주의분파' ('좌파적 자유주의분파)와, 자유시장경제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표시하면서 그러한 사회적 규제의 제거 내지 최소화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분파'( 내지 '우파적 자유주의분파')로 구분된다.
그런데 자본운동에 대해 혁신자유주의적, 사민주의적 규제가 가해진 체제 하에서는 자유화, 탈규제화 등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는 그러한 혁신자유주의적, 사민주의적 규제의 폐기를 옹호한다는 측면에서 전적으로 보수반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주11]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군부독재 하에서 자본운동에 대한 관료권위주의적 규제가 가해지고 정경유착체제 하에서 재벌지배체제와 같은 천민적인 자본주의적 경제질서가 정착해 있는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경제구조의 선진화-합리화'에 기여하는 일정한 진보적 측면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은 정치구조의 민주개혁 등에 반대하는 파시즘적-수구적 노선과 결부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러한 민주개혁과 결합시키려는 개혁적 노선과도 결부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신자유주의는 크게 보아 '파시즘적 내지 수구적 신자유주의'와 '개혁적 신자유주의'로 구분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궁극적으로는 자본운동의 자유 보장을 중점에 놓는 이념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에서 어디에서나 반노동자적-반민중적이며, 또한 그러한 한에서 어디까지나 보수반동적임을 우리는 옳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김대중은 그간 자신이 '자유시장경제론자'임을 공언해 왔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자유시장경제론자'로 보는 한에서 그의 노선은 자본운동의 세계화-지구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국경제가 심각한 위기국면에 빠져있고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는 조건 속에서 '신자유주의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편, 그는 자유시장경제체제의 확립을 위해 그간의 관료권위주의적 규제의 철폐, 정경유착구조의 청산, 재벌체제의 개혁 등에 나설 것이며 아울러 군부독재체제의 비민주적 유산들을 제거하기 위한 민주개혁 등을 일정하게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그는 한국적 상황에서 파시즘적 또는 수구적 신자유주의분파가 아니라, 개혁적 신자유주의분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이 공황국면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가 수구보수세력과 연합하고 있는 데다가 한국사회의 중추를 수구보수세력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행하는 민주개혁 역시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2.2. 김대중정권의 성격
김대중의 당선에 의해 한국은 실로 50년 만에 실질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당선은 지배층이나 보수적 유권자층의 지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소외된 층의 지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당선은 한국 현대사의 전개에 커다란 획기를 긋은 일임에 틀림없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의 당선은 - 비록 다른 부르주아 정치가들에 비해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진보성'을 상대적으로 더많이 지니고 있긴 있지만 그를 위험분자 내지 불순분자로 낙인찍히도록 만든 '민중주의적 진보성'을 그가 버린지는 이미 오래되지만 - 우리 사회의 지배층과 기득권층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지배층과 기득권층은 그의 당선에 저항하기 보다는, 그에게 적응하고 재빨리 그를 지지하면서 그를 길들이는 쪽으로 입장을 돌변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국정 책임자로서의 김대중'을 '군부독재체제 하에서 야당지도자로서의 김대중'은 물론 '야당에게 합법적 정치공간이 열린 조건 하에서 야당지도자로서의 김대중'과 명백히 구분해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군부독재 하에서 김대중은 지배불럭으부터 배제되고 가장 많은 박해를 받은, 독재에 반대하는 범민주연합운동의 대표자로서 피지배대중의 운동과 일정하게 제휴하거나 연대했었다. 그러나 합법적 정치활동의 공간이 열린 이후의 김대중은 비록 야당지도자였지만, 큰 틀에서는 지배불럭을 구성하는 여러 분파들 중 한 분파의 대표자였으며, 통치불럭의 대표자는 아니었지만 지자제의 실시와 더불어 통치불럭의 하위부분에 참여한 야당분파의 대표자였다. 그러나 이제 대통령이 된 김대중은 중소서민층 등의 지지를 받고 당선되긴 했지만 더 이상 범민주연합의 대표자나 중소서민층의 대표자가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통치불럭의 최고지도자로서 위기에 처한 한국자본주의와 지배질서의 안정적 재생산을 총괄하게 된 (그 속에서 독점자본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내국총자본의 대변자이자 지배불럭의 대표자가 되었으며, 그러한 입장에서 계급갈등을 위시한 제사회세력 들 간의 갈등을 조정해야 하는 사회적 갈등의 최고 조정자가 되었다. 아울러 그는 IMF 관리체제 하에 놓이게 된 정권의 집행책임자이다. 이로 인해 그는 내국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도 초국적자본의 이익도 아울러 충실하게 대변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무엇보다 초국적자본과 내국독점자본 간의 이해의 공통분모를 함께 대변하는 초국적자본과 내국총자본의 대변자이자 그들 간의 갈등을 조절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김대중의 당선을 통해 무엇보다 국가체제로의 전라도민의 통합은 결정적으로 촉진되고 있다. 그리고 김대중정권은 앞으로 지역갈등의 해소에 많든 적든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대중정권이 지역차별 해소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 그것이 영남민들에게 영남출신 인사들의 기득권을 지나치게 해치는 것으로 인식되어 지역갈등이 추후에 새로운 형태로 크게 증폭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지역차별 해소정책은 앞으로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 추친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하겠다.
그런데 김대중이 자유시장경제체를 강력하고 옹호하고 있고, 한국이 IMF 체제 하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김대중정권은 앞으로 무엇보다도 위기의 신자유주의적인 해결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정권'으로 기능할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은 한국적 상황에서 '수구적 신자유주의분파'가 아니라 '개혁적 신자유주의분파'에 속하는 인물이며 피지배대중의 많은 부분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이 점에서 김대중정권은 초국적자본과 내국(독점)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요구를 관철시키는 가운데에서도 그것을 양보적 통합책과 우리 사회의 민주개혁 등과 일정하게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대중정권은 앞으로 (결국 '수구적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전락한 김영삼정권과는 달리) 일종의 '개혁적 신자유주의정권'으로 기능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김대중은 대중에 대해 '포퓨리즘적 설득력'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 볼 때 김대중은 피지배대중을 체제에 통합시켜 나감에 있어 제도정치권의 그 어떤 인사보다도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한국경제가 위기에 처해 있는 현 상황은 위기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도 일단은 피지배대중의 협력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다. 이 점에서 한국의 지배층은, 비록 자신들이 처음부터 원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할 최적의 인사를 자신들의 대변자로서 맞이하게 된 셈이다. 이와는 달리, 김대중정권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민중진영은 대응하기가 가장 어려운 상대와 부딪치게 되었으며, 자신의 운동을 국가와 자본에 대해 자립성을 지닌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감에 있어 아전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김대중의 포퓨리즘적 설득 등으로 말미암아 국가와 자본에 대해 자립성을 추구하는 노동자-민중운동이 여론과 일반 국민대중으로부터 고립될 가능성 역시 높아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 김대중정권이 자민련과의 연합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수구보수세력이 국가와 사회의 핵심영역에 광범하게 포진해 있다는 점에서 김대중정권이 취할 수 있는 양보적 통합책과 민주개혁의 범위는 매우 제한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국경제가 심대한 위기에 처해 있고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을 매우 강도높게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그러한 개혁과 통합책이 지극히 형식적인 것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위기타개책이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위기타개책의 성격을 지닌 것인 한, (신자유주의의 본질이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성격을 지닌 것인 만큼) 그러한 위기타개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도입되는 민주개혁이란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후퇴 내지 실질적인 반동 속에서 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의 외형상의 진보' 내지 '민주주의의 실질적 후퇴로 인한 민주개혁의 허구화'의 성격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김대중정권의 위기타개책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노동자-민중으로부터 커다란 저항에 부딪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노동자-민중의 저항이 증대해지면, 김대중의 정권의 무력화가 이루어지고, 정국운영의 주도권이 위기의 파시즘적 해결을 요구하는 수구보수세력에게로 넘어 갈 가능성 역시 배제될 수 없다. 나아가 한국이 현 시기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지의 여부는, 물론 김대중정권의 위기타개책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겠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세계경제의 발전양상 및 초국적자본의 태도에 의해 기본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그로 인해 한국을 위시하여 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는 경제공황이 세계공황으로 발전한다면 - 실제로 현시기 한국의 경제공황이 세계공황의 진정한 출발점이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데 - , 김대중정권의 노력이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정대화교수(상지대)는 김대중정권의 출현을 '절차적 민주주의의 착근'을 가져왔고 민주정부는 곧 개혁정부로서 기능할 것이라는 점을 들어 '수식어없는 민주정부'와 '개혁정부'의 출현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주12] '개혁/진보세력'은 - 그가 말하는 '개혁/진보세력'이 김대중정권에게 부여해준 '민주/개혁세력'과 어떻게 구분되는 지가 매우 애매하지만 - " 김대중정부의 민주화와 개혁을 전제로 그 정부를 지지하되 지속적인 민주화와 개혁을 위한 견제의 역할을 동시적으로 수행해야 한다"[주13]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과거의 '비판적 지지론'의 재생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그의 견해는 민주주의의 문제를 절차적 민주주의의 문제로 왜소화시키고 있고, 김대중정권이 '민주정부'나 '개혁정부'이기에 앞서 자본의 요구를 철저히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정부로 기능할 것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개편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민주개혁이란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후퇴를 강제함으로써 민주개혁의 허구화를 수반하게 되며, 민주주의의 실질적 후퇴는 결국 지배세력과 노동자-민중 간의 모순을 격화시킬 수밖에 없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2.3. 현 시기 김대중(정권)의 위기극복 노력의 성격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김대중이 행한 첫 발언은 정권교체의 의의 및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조화를 추구하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그는 당선되기 이전에 금융실명제의 사실상의 폐기와 김현철의 출소 등을 지지한데 이어 동서화합과 국민적 대화합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전-노사면에 찬성했다.
당선된 후 그에게 떨어진 가장 시급한 과제는 한국경제가 빠져든 경제위기의 탈출책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는 대선기간 중 'IMF와의 재협상론'을 제기한 적이 있지만 그것이 그를 궁지로 내몰자 IMF와의 협약을 충실히 준수하겠다는 입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돌변시켰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입장을 변화시킨 데에는 단지 당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IMF의 요구사항이 비록 과도한 개방요구와 긴축재정의 요구 등과 같은 매우 가혹한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자유시장경제론자'로서 IMF의 처방이 위기타개책으로서 기본적으로는 적절하다고 그 자신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IMF의 요구를 단지 외부의 주문으로서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국경제의 재생을 위한 '한국민 자신의 플랜'으로 삼겠다는 점을 IMF측에 약속했다.
그러나 그에게 붙어있는 ''민주투사' 내지 '중소서민층의 대변자'라는 이미지와 선거 기간 중에 정리해고제의 조기도입에 반대하고 IMF와의 재협상론을 들고 나온 적이 있는 점 등은 서로 동일하거나 다른 이유에서 국내외의 자본가층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외국의 지배층과 보수언론 등은 김 당선자가 만약 우유부단하게 행동할 경우 외국의 지지를 받지못해 한국경제가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재빨리 경고하는 동시에, 친노동자적 정책이 아니라 노동자에게 고통감수를 요구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또한 김대중이 당선되자마자 초국적독점자본의 첨병인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은 한국의 신용등급을 완벽한 정크본드로 떨구어 버림으로써 그가 초국적자본의 요구를 수용해 IMF의 요구사항을 아무런 유보없이 시행하도록 마지막 압박을 가했다. 신용등급이 이와같이 하향조정되자 곧바로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과 금리가 폭등하는 등 금융시장이 마비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국내외의 부르주아 언론들은 국가부도 위기의 임박 등을 거론하면서 입을 맞춘 듯이 그의 결단을 재촉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김대중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그는 22일 데이비드 립튼 미 재무차관 등 미 정부 대표단과 가진 IMF 관련 회의에서 정리해고제를 수용하고 IMF의 요구사항을 유보없이 신속하게 처리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솔로스와 같은 대표적인 국제 금융투기업자와 만나 한국에 투자할 것을 권유하고 조언을 청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노동단체대표자들과 만나 '사회적 합의'에 참여할 것과 외자유치와 기업의 경쟁력 강화 등을 위해 정리해고제 등을 수용할 것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며, "금융기관이나 한계기업의 인수-합병시 '고용승계 의무'의 폐지를 취임 전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는 예상을 초월한 위기의 심각성, 외자유치의 필요성 및 정리해고제의 도입을 통한 기업경쟁력의 강화와 이를 통한 더 많은 일자리의 창출 등을 내세우면서 정리해고제의 조기도입 반대라는 그의 선거공약을 당선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철회해 버렸다. 이와 더불어 그는 노동자들에게 임금동결 내지 임금인하 및 정리해고제의 도입을 감수할 것과 그런 조건 속에서도 경제위기의 극복 등을 위해 생산성의 향상 등에 적극 나서 줄 것을 요구했다.
다른 한편, 김대중은 경제위기에 처하게 만든 지배층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포푸리즘적 설득 및 일정한 양보적 통합책의 강구를 통해 무마하려는 시도 역시 재빨리 착수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노동자들의 고통감수와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재벌개혁과 민주개혁을 약속하면서 '노사정위원회'의 설치를 추진했으며, 이 기구 속에서 노-사-정 간의 합의와 대타협을 이끌어내기 위해 힘을 놻았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는 지난 2월 6일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의 실시를 노조 정치활동의 허용과 같은 노동자측의 다른 요구사항과 맞바꾸는 형태로 노사정 간의 이른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데에 마침내 성공했는데, 이는 그가 거둔 최근에 거둔 가장 가시적이고 중요한 성과에 속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대중정권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체제' 내지 '신자유주의적인 계급타협체제'의 구축을 위기극복과 체제유지의 가장 중요한 중요한 기반으로 삼겠다는 점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의 문제를 주로 절차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이번의 노사정 간의 '사회적 합의'를 설득과 타협에 기초해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중대한 진전을 가져온 일로서 높게 평가한다. 그런데 제2차대전 이후 유럽에서 이루어진 계급타협체제는 고용과 상대적 고임금의 보장 및 사회복지체제의 수립 등을 대가로 노동자들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다는 것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경제위기의 시기에는 임금을 동결하거나 인하할지라도 고용보장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린다는 것이 노동자들로부터 합의를 받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제시되었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경제위기의 도래로 인한 불가피성을 들어 노동자들에게 생존권에 대한 '근본적인' 침해를 자발적으로 감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임금동결과 임금삭감은 노동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자신의 노동력 재생산비의 일부를 자본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계급타협을 위한 그의 플랜에는 임금동결분과 임금삭감분을 (노동자로의 소유권의 이전과 같은) 다른 방식으로라도 최소한 보전하려는 아무런 방책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게다가 노동자들이 감원을 방지하기 위해 감봉을 감수한다면, 이는 '노동공유를 통한 노동자들 간의 고통분담'이지 결코 사용자가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실시가 법적으로는 연기된 가운데에서도 정리해고제는 사실상 산업의 전부분에서 공공연히 자행되어 왔으며,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취업층의 근 절반에 가까울 정도로 한국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이미 크게 진척되고 있었다. 게다가 기업도산과 경영합리화를 위한 인원감축은 물론 기업의 인수-합병 등이 앞으로 크게 진척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리해고제까지 합법화됨으로써 노동자들은 자신의 고용을 지킬 마지막 수단을 잃게 되었으며, 고용불안정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종속성 및 임금하락과 노동강화 등이 결정적으로 촉진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점에서 대량실업이 발생하고 (물가의 급격한 상승으로 말미암아 실질임금의 급격한 하락을 가져오는) 임금동결과 임금인하가 이루어지는 조건 속에서 정리해고제까지 실시되게 된 것은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이 불러일으킨 경제위기의 부담을 노동자들에게 전면적으로 전가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김대중은 노동자들에게 고통감수를 요구하면서 노사대화합을 위한 방안으로서 무엇보다 재벌개혁을 크게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상호지급 보증 금지, 결합재무제표의 작성, 기업투명성의 제고, 그룹 간의 '빅 딜'을 통한 기업구조조정의 강구 등 그가 제시하고 있는 재벌개혁의 내용이란 IMF의 요구수준을 크게 넘어서는 것이 아니며, 한국 기업구조의 '선진화-합리화'에 기여하고 총독점자본의 장기적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지, 총노동에 대한 총자본의 어떤 실질적 양보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 중 IMF의 요구를 넘어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재산을 기업에 출자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사재 출자란 기업가들이 자기재산을 자기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지 노동자들에게 임금동결분이나 임급삭감분을 보전해 주는 것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아가 노동기본권의 확대 보장과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보장 등 그가 공약하고 있는 일정한 민주개혁이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것들이지, 위기가 안겨주는 고통을 분담한다는 차원에서도입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게다가 김대중정권 하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의 신장을 결정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등이 폐기될 전망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생존권에 대한 훼손은 그 대가로 다른
어떤 것들의 양보를 받아아낸다고 할지라도 할지라도 불가피하게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후퇴를 가져오게 된다는 점, 노동자대중의 생존권에 대한 근본적인
침해를 전제로 하여 성립되는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체제'이란 비록 노조지도부가
그 구축에 찬성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노동자대중에 의해 수용될 수 없는 체제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나아가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의 구축에
노조지도부가 찬성한 것은 노조지도부를 '신자유주의적 지배연합'의 일원으로
편입시켜 노조지도부의 정치적 타락을 재촉하고 노조지도부로부터의 노동자대중의
이탈 등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적 코포라티즘체제'란
계급타협의 기반을 훼손시키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허구적인 계급타협체제의
성격을 지니는데, 앞으로 김대중정권의 위기타개책이 실패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그러한 허구적인 계급타협체제의 구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그의 시도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에 기인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경제위기의 도래와 IMF관리체제의 성립 및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등은 한국 노동자운동에게 엄청난 새로운 도전을 안겨주고 있다. 경제위기의 도래는 노동자운동에게 한편으로는 위기부담을 노동자대중에게 전가시켜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자본의 공세에 맞서 노동자-민중생존권을 보장해 나가야 한다는 과제를 절박한 것으로 만드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적 관점이 아니라 국민적 관점에 서서 자본과 협력하여 우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유혹을 안겨준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IMF관리체제의 성립은 한국의 노동자대중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세계 각국의 노동자계급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과 동일 선상에 놓여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나아가 포퓨리즘적 설득과 더불어 일정한 민중통합책의 강구와 신자유주의적인 코포라티즘체제의 구축 등에 기초해 위기의 신자유주의적 해결을 추구하고 있는 김대중정권의 출범은 한국노동자운동의 지형을 변모시키는 중요한 새로운 조건임에 틀림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역대정권 중 가장 친노동자적인 김대중정권이 출범했기 때문에 정권과 협조하여 위기탈출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주장이 매우 설득력을 지니고 유포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김대중정권의 출범은 노동자운동을 체제내적 운동으로의 전화를 촉진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하였다시피, 김대중정권의 위기타개책은 본질적으로 민중생존권을 파탄으로 내모는 반노동자적-반민중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김대중정권 하에서도 한국의 노동자운동이 체제내화된 자본종속적인 운동으로 전락함이 없이 국가와 자본에 대해 명백히 자립성을 지닌 대안적 운동으로 성장-발전해 갈 수 있는 지의 여부는 노동자계급의 미래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이다. 나아가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신자유주의 공세에 저항하는 전세계 노동자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어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한국의 노동자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이 폭발한 공황기에 노동자운동이 직면하게 되는 과제라는 점, 한국이 빠져든 공황은 동아시아 전체가 빠져든 공황의 일환이라는 점, 현 시기의 공황는 세계공황을 유발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 공황의 초기국면에는 자본과의 협력을 통해 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일정한 설득력을 지닐지 모르지만 공황이 지속되는 조건 속에서는 생존권 쟁취를 위한 노동자대중의 운동이 밑으로부터 폭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공황은 대중을 한편으로는 더욱 자본논리에 종속시키고 절망에 빠뜨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자각하고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나설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을 제공해 준다는 점, 신자유주의적 위기타개책은 경제과정을 위기에 더 한층 노출시키는 동시에 한번 닥친 위기가 파국적인 양상을 띄고 전개토록 만든다는 점, 신자유주의적 위기타개책은 공황을 벗어날지라도 노동자대중의 생존권을 끊임없이 압박하는 기제로서 작용하게 된다는 점 등을 유의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노동운동진영이 외자유치 등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위기해결책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패배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노동자대중에게 돌아오는 것은 절망과 고통밖에 없다는 점, 비록 어려울지라도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맞서는 투쟁을 과감하게 전개하고 이를 통해 사회변혁을 길을 찾아 나가는 것이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물론 전세계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이익과 합치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운동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맞서는 가운데 노동자-민중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투쟁을 과감하게 전개하고 그 투쟁을 사회구조의 민주변혁을 위한 투쟁으로 확고하게 결합시켜 나가야 할 과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위기의 근본원인을 한국의 정치-경제체제가 지닌 고유한 문제점으로 보면서 재벌개혁 (내지 재벌해체)를 통한 한국자본주의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기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견해란 사실상 신자유주의적인 위기해결책의 대안이 될 수 없고, 운동노선의 개량주의화와 김대중개혁노선의 제2중대로의 편입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위기의 근본원인을 한국경제의 대외적 종속성에서 구하는 견해란 계급모순을 민족모순으로 대체시키는 효과를 지닌 견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정리해고제를 어떤 조건 하에서도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정리해고제의 합법화를 시도하면 총파업투쟁도 불사하겠다고 공언해온 민주노총의 지도부가 몇가지 양보를 받아내는 댓가로 정리해고제를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지도부를 대신하여 들어선 비상대책위원회가 곧바로 총파업투쟁의 철회를 결정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은 현시기에 이르러 가장 심대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한국노동자계급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데에 요구되는 한국 노동운동의 (주-객관적인) '당면' 투쟁과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노동자대중의 생존권의 확보는 어떤 시기, 어떤 조건 속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노동자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투쟁과제이며, 공황기를 맞이하면 이 과제는 더욱 절실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는 달리 생존권문제를 다른 개혁조치들과 맞바꾸어 노사대화합 등에 나서면, 이는 운동의 체제내화와 정치적 타락을 가져오는 동시에 노동자대중과 노조운동과의 괴리 등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생존권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보다 임금과 고용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생활임금의 확보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확보'를 원칙으로 삼아야 하며, 생활임금이 지급될 수 없는 조건 속에서는 최소한 미지급된 부분만큼이라도 소유권을 이전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반대하고 고용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해야 할 것이다.
(2) 시장경제논리의 제한과 경제과정 전반에 대한 사회적 규제 내지 민주적-민중적 규제의 확대를 위해 투쟁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운동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저항하는 정치'(politics against politics)의 성격을 지닌다. 경제과정 전반에 대한 사회적 규제 내지 민주적-민중적 규제의 확대는 경제과정이 초국적자본과 내국자본의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최대한 저지하고 노동자대중을 사회과정을 규제하는 진정한 주체로 상승시켜 나가기 위해서도 필요불가결하다.
(3) 은행대출금의 출자분으로의 전환과 노동조합소유분의 확대 등을 통해 대기업을 공기업 내지 노동조합소유기업으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한국의 재벌체제를 해체시킬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종업원지주제의 도입과 국민주의 보급을 통해 재벌기업을 국민기업화해야 한다는 주장[주14]은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합치하는 올바른 재벌해체 방향이 아니다.
(4) 국-공유기업의 민영화-사유화에 반대하고, 이들 기업이 노동자총회 내지 노동자평의회의 민주적 규제를 받아 운영되도록 요구해야 한다.
(5) 노동3권의 유보없는 보장과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모든 악법의 철폐를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6) 남북한 평화군축체제의 구축과 국방비의 대폭적인 삭감을 요구해야 한다.
(7)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가 신자유주의적인 코포라티즘체제의 구축을 지지하고 있고,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고 있는 조건 속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지도부를 올바르게 세우는 일은 민주노조운동의 장래와 관련하여 관건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민주노총의 혁신은 오늘날 매우 절박한 과제가 되고 있다.
(8) 공동투쟁의 조직화에 기초하여 기업별노조체제를 신속히 산별노조체제로 전환시켜야 한다.
(9) 노동자들의 현장투쟁력 및 대기업노동자와 중소기업노동자,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및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층 간의 차이를 넘어서는 노동자대중 전체의 계급적 단결에 기초한 노동자대중의 전국적 결집과 투쟁력을 높여 나가야 한다.
(10) 의회로의 진출이 아니라, 노동자대중투쟁의 성장-발전에 복무하는 노동자정치조직의 건설이 추진되어야 한다.
(11)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확보하고 자본의 반동적 공세에 맞서는 민중연대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상설적 공투체를 건설해야 한다.
(12) 노동자국제주의의 입장에서 국제연대를 강화하고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저항하는 투쟁의 전형을 창출해 나가야 한다.
위에서 제시된 과제들 중 현시기에 문제해결의 핵심고리를 이루는 것은 (7)의 과제이다.[주15] 왜냐하면 당면투쟁과제들에 적극 대처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저항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 지도력이 재창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조운동은 그간 주로 국가의 탄압정책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왔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참다운 대안적 운동으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국가의 탄압정책에 맞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계급적 원칙에 입각하여 국가의 포섭정책에 대해서도 명백히 대항해 나갈 수 있는 이념적, 정치적, 이론적 능력을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민주노총 상충부는 그러한 능력의 부재로 인해 신자유주의적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김대중정권의 포섭정책에 쉽게 굴복하거나 그 굴복을 시정할 투쟁의 조직화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노동자대중에 의해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그러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민주노조운동이 그간 소중하게 가꾸어온 '민주성의 원칙'마저 내팽겨치고 있다. 이로 인해 민주노조운동은 현시기에 이르러 출범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이 위기를 옳게 해결하기 위한 비상한 노력을 함께 기우려 나가자. (98년 2월 22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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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와 관련하여서는 이른바 '자기조정적 시장'(self-regulating market)이 만들어 낸 파국인 결과를 역사적으로 추적한 Karl Polany,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 8th printing(Boston: Beacon Pres, 1967). 폴라니 지음, 박현수 옮김,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적-경제적 기원](민음사, 1991) 참조.
(3) 이에 대해서는 데이비트 윌슨, "마퀼라도라 문제?", [현장에서 미래를]제28호(97년 12월호); 원영수, "멕시코의 체제위기와 노동운동의 대응", [현장에서 미래를] 제29호(98년 1,2월호);"Mexico: Regime in Crisis(1), (2)," The Internationalist No. 1(January-February 1997), No.2(April-May 1997) 등 참조
(4) 이에 대해서는 에드워드 올프, "파이는 어떻게 잘리는가?", [현장에서 미래를] 97년 5월호 참조
(5) 이러한 관점에 서 있는 글로서는 채만수, "현 시기 외환-금융위기의 배경과 의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이 97년 12월 14일에 공동주최한 정세토론회, '한국경제의 현황과 노동운동의 대응방향 - IMF구제금융, 한국경제, 노동운동 - ' [자료집] 참조. 짧은 글로서는 김세균, "공황기의 노동운동 - '절망의 몸부립'을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 ", [현장에서 미래를] 97년 12월호 권두언 참조.
(6) 이에 대해서는 장상환, "외환위기의 원인과 IMF 구제금융의 영향",영남노동운동연구소, [연대와 실천], 제42호(1997년 12월호) 14쪽 참조.
(7) 김상조, " IMF구제금융과 한국경제의 미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 공동주최 정세토론회(1997년 12월 14일)자료집, [한국경제의 현황과 노동운동의 대응방향 - IMF구제금융, 한국경제, 노동운동], 36쪽 참조
(8) 조희연, "동아시아 성장론의 검토 - 발전국가론을 중심으로 -", [경제와 사회] 제36호(1997년 겨울호) 참조.
(9) 김성구, "IMF 통제 하의 한국자본주의: 위기와 전망,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IMF시대와 노동자의 삶], 도서출판 노기연, 1998 참조.
(10) 임현진, " 종속이론은 죽었는가? - 한국의 발전위기에 대한 해석 -", [경제와 사회] 제36호(1997년 겨울호)
(11) 김성구교수는, 신자유주의는 자유경쟁의 조건으로서 자본집중에 반대하고 노동자의 권리 보장 및 사회복지체제의 수립 등에 찬성하는 '독일형 신자유주의'와 그렇지 않는 '영미형 신자유주의'로 구분될 수 있으며, 그가 최근에 쓴 [대중참여경제론]에 비추어 판단할 때 김대중이 말하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독일형 신자유주의'에 가깝다고 평가하고 있다.(98년 1월 23일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가 주최한 심포지움 '김대중정권의 성격과 노동운도의 진로]에 제출한 토론문 참조) 그런데 '사회적 시장경제론'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독일형 신자유주의'는 '사회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혁신자유주의에 가까운 것이 되고, 그 반대로 '시장경제' 측면을 강조하면 '영미형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것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1980년대의 '독일형 신자유주의'란 (레이건이즘이나 대처리즘 보다는 그 반동성이 상대적으로 완화된) '부드러운 형태의 영미형 신자유주의'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중참여경제론]에 나타나는 김대중의 노선은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는 독일형 신자유주의'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국이 처한 조건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그가 수구보수세력과 연합해 있는 사실 등을 고려한다면, 약간의 변용은 나타날 지 모르지만, '영미형 신자유주의'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개념 사용의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신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영미형 신자유주의'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할 것이다.
(12) 정대화, "김대중정부의 정치적 과제와 전망", 98년 2월 7일에 열린 학술단체협의회 98년 정책토론회 '김대중정권의 과제와 전망' [자료집] 12쪽 참조.
(14) 이러한 입장을 제시하고 있는 글로서는 김상조, 앞의 자료집, 42쪽 이하 참조.
(15) 이와 관련하여서는 채만수, "새로운 지도력으로 위기를 돌파하자", [현장에서 미래를], 98년 1,2월호(제29호); "방황하는 노동", [현장에서 미래를] 98년 3월호(제30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