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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특별수당 지급과 최저생계비 인상을 요구조건으로 97년 12월 13일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 실업자 투쟁은 실업문제가 서서히 그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글은 프랑스 실업자 투쟁을 통해 확인되고 있는 '실업' 문제에 대해 보다 확장된 인식을 제공하고 있다.
"실업은 더이상 일자리의 부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점점 감소하는 노동량에 적합하게 노동의 사회적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따라서 일자리의 창출에 의해 (프랑스) 실업을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 이번 실업자 투쟁은 '일자리 보장' 차원이 아니라 상품사회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
만약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사회가 된다면 실업도 직업인 사회가 될 것이다."
- 본문 中에서 |
직업으로서의 실업
이 환 식
해외 연구위원(파리8대학 교수)
실업자의 반란
프랑스의 실업자들이 거리로 나섰다. 언론은 '실업자의 반란'이라고 이름짓고 있다. 이들의 요구는 연말 특별수당 1,500프랑(37만원) 지급과 최저생계비(Les minima sociaux)의 1,500프랑 인상이다. 공산당과 녹색당이 민첩(?)하게 '반란군' 주장에 가세했다. 두 정당 모두 좌파연립정부의 주주들이다. 물론 대주주는 수상 죠스팽(L. Josoin)이 이끄는 사회당이다. 좌파정부는 특별수당 지급을 선뜻 약속했다. 반면 최저생계비의 인상은 거부했다. 일부 인상요인을 인정한 것이 전부다. 이것은 93년이래 보조금에 반영되지 않은 물가상승분만 인정한 것이다.
정부가 최저생계비 인상을 거부한 이유는 예산부족이다. 유럽연합은 99년 1월 단일통화 유로(EURO)를 시행한다. 회원국들은 재정적자 규모를 국민총생산의 3% 이내로 축소해야 한다. 이것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강제하는 소위 '3% 족쇄'이다. 프랑스는 가까스로 이 기준을 지키고 있는데 실업자 단체가 대폭적인 보조금 인상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예상되는 예산부담은 대략 0.4∼0.9%이다. 보조금 인상은 곧 '유로'의 포기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따라서 유일한 대안은 납세자의 추가부담에 의존하는 방법뿐이다. 하지만 죠스팽 수상은 반대한다. 700억 프랑의 추가부담을 납세자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보조금 인상을 거부하는 또 다른 속사정도 있다. 고용노동자들의 최저임금(SMIC)과 실업노동자의 보조금 사이에 형평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고용노동자의 최저임금 실수령액은 월 5,120프랑이다. 반면 실업노동자의 보조금(RMI, ASS 등)은 대략 월 2,500∼3,500프랑 수준이다. 1,500프랑을 일률적으로 인상하면 최고 5,000프랑이 된다. 고용노동자의 최저임금과 유사한 수준이 되는 것이다. 생산활동을 기피하고 보조금으로 생활하게 된다는 이른바 '비활동 함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보조금 사회'는 결코 사회당이 원하는 사회는 아니다. 700만의 빈곤층에도 불구하고 '노동에 기초한 상품사회'는 여전히 집권 사회당이 선호하는 모델이다.
물론 '비활동 함정'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저 소득만 비교하여 일하지 않는 보조금 수혜자보다 '일하면서 더 가난한 고용노동자'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품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과정을 통해 사회와 관계를 맺는다. 이것은 노동이 담보하는 경제적 가치 이외의 주요한 사회기능이다. '비활동 함정' 논리는 노동이 지닌 이러한 사회적 가치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요구조건의 관철 여부에 관계없이 실업자 운동은 이미 성공한 '반란'이다. 거리로 이들이 진출함으로써 실업세계를 지배하던 부정적 이데올로기가 파괴되었다. 사실 프랑스에서 실업문제가 지닌 정치적, 사회적 비중은 가히 폭발적이다. 지난 10여년간 정권이 5차례나 좌우파로 바뀌었다. 700만에 이르는 실업자 등 사회 빈곤층의 응징성 투표로 집권세력이 연속 교체된 것이다. 실로 정치권이나 언론이 실업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파괴력이다. 하지만 사회에서 요란하게 논의되는 실업은 언제나 추상적 현실이다.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려진 실업자 개인의 좌절과 고통은 정치나 언론의 관심사가 아니다. 개체로서 실업에 이르면 사회적 담론도 달라진다. 비판의 대상은 상품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아니다. 개인의 결함이다. 실업이 즉각 무능, 게으름 등 수치스런 개인 현상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침묵과 노동시장으로 복귀하기 위한 기다림만이 이들에게 강요된다.
실업자 운동은 이러한 이중적 실업담론에 대한 저항이다. 실업을 상품사회의 모순적 실체로 객관화하는 것이다. 실업으로 박탈되었던 정치적 권리도 회복했다. 실업자 단체들(AC, APEIS, MNCI)은 대표성을 확보했다. 실업자 집단의 사회세력화가 실현된 것이다. 이것이 그동안 실업자를 대표하던 노조들, 특히 FO(노동자의 힘), CFDT(민주노총) 등이 방법론을 문제삼아 실업자 운동을 비판하는 주요한 이유이다.
상품사회의 균열
프랑스 실업자 운동은 상품사회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였다. 상품사회는 인간생활을 임노동 중심으로 조직한다. 따라서 노동은 각자의 생존을 보장하는 수단이나 시지프스의 노역과 구분된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가 모두에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상품사회의 기본정책은 완전고용을 밑도는 경제활동이기 때문이다.
케인즈(J.M. Keynes)는 '적정수준의 실업'을 완전고용에 미달하고 최저고용을 상회하는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실업의 공포가 항상 노동시장을 지배한다. 노동자 사이의 치열한 경쟁은 필연적이다. 결국 노동자는 불리한 노동조건을 일방적으로 강요받는다. 이것이 바로 적정수준의 실업에 내포된 자본의 지배논리이다. 그러나 고용이 최저수준에 이르면 임노동자의 생활이 붕괴된다. 엄밀히 말하면 노동에 기초한 상품사회가 무너지는 것이다. 프랑스의 실업인구는 공식적으로 300만을 넘는다. 경제활동인구의 13% 규모이다. 실업기간은 평균 16개월이다. 1년 이상 실업상태가 지속되는 구조적인 장기실업자도 150만에 육박한다. 이들 가운데 다수는 재취업의 가능성에 대해 거의 회의적이다. 즉 평생실업으로 들어선 것이다.
이러한 실업구조를 경제기능의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경기변동에 따른 일시적 현상도 아니다. 국가의 개입이나 조절에 의해 해소될 수 있는 위기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적 보수혁명은 국가의 경제적 개입수단을 상당부분 제약하고 있다. 설사 국가가 효율적으로 개입한다 하더라도 경제성장이 받드시 고용확대를 수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실업정책은 여전히 고전적 고용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기업만이 고용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지속적으로 기업에게 세제혜택을 부여한다. 하지만 시장경제하에서 기업의 과제는 생산요소의 효율적 관리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기업들이 구가하는 호황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다.
변화를 내걸고 집권한 좌파정부는 고용정책을 수정했다. 노동시간 단축과 국가에 의한 고용확대가 주된 내용이다. 주당 노동시간을 39시간에서 35시간으로 단축하는 것이다. 산술적으로 기업이 동일한 생산능력을 유지하려면 생산성을 10% 증가하거나 신규 노동력에 의존해야 한다. 후자가 좌파정부의 희망사항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자본의 저항이 완강하다. 이것이 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고용증대를 의심스럽게 하는 요인이다.
또한 국가의 선택적 고용정책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프랑스 실업위기의 단면이다. 노동시장에 처음 진입하는 세대를 위해 일자리를 국가가 제공한다는 이 정책은 공공부문이 이들에게 5년간의 고용을 보장함으로써 향후 고용기회를 넓혀 준다는 취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이니셔티브는 일시적으로 실업증가를 억제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업해소라는 전선에서는 빗나간 느낌이다.
오늘날 산업영역의 고용감소는 돌이킬 수 없는 현상이다. 즉 고용창출에 의한 실업해소는 환상이라는 뜻이다. 실제 생산영역의 노동력 소모는 가파르게 감소하고 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부를 과거보다 훨씬 적은 양의 노동력으로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기술에 의한 생산성 향상에 따른 결과이다. 따라서 노동이 더이상 부의 척도가 아닌 것이다. 또한 '정상적 고용'을 의미하는 전일제 노동의 필요성도 점점 감소한다. 즉 생산과정이 시간노동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관계는 팽창적으로 산업사회를 형성했던 시절의 유산에 불과한 완전고용, 전일제 노동으로 기능하고 있다. 사회가 생산과정의 급속한 변화를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실업문제는 일자리가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점점 감소되는 노동량에 적합하게 노동의 사회적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필연적으로 사회의 이원화를 초래한다. 점점 소수만이 비교적 높은 임금을 받는 정상적인 고용형태로 생산에 참여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노동자는 불안정 고용이나 실업에 직면한다. 실업은 이원화된 사회에서 사회생산의 특성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동자의 사회적 존재양식인 것이다. 문제는 고용과 소득을 결합한 노동중심의 사회관계가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가에 있다. 소득이, 제공된 노동에 대한 경제적 보상으로 됨에 따라 실업은 노동자를 점차 사회체제 생산에서 배제하게 된다. 프랑스 실업자 운동은 궁극적 고용과 소득의 분리, 즉 임노동과 무관한 '기본소득'의 보장을 통한 실업해소를 지향하고 있다.
노동의 권리에서 소득의 권리로
'기본소득 보장'을 처음 주장한 프리드만(M. Friedman)의 의도는 실업완화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만은 실업노동자에게 지급되는 각종 사회보조금의 대폭 축소를 주장했다. 그리고 생계비에 미달하는 저임금의 일자리를 수용한 노동자에게만 국가가 기본소득을 지급하도록 했다. 말하자면 저임금에 따른 부족한 생계비를 지원하는 조건부 기본소득 보장이다. 프리드만의 최저소득 보장은 폭발적 실업인구에도 불구하고 일부 업종은 구인난을 겪는 역설적 상황을 전제한다. 즉 계절 노동, 시간제 노동 등 생계비 이하의 저임금을 제시하는 불안정 노동을 실업노동자가 수용하도록 강제하는 수단인 것이다.
기본소득 보장의 프랑스판 버전은 프리드만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 기본소득은 국가가 저소득층 국민에게 보장하는 조건 없는 생존소득의 권리인 것이다. 그 개념적 근거는 현재 실시되고 있는 최저구직소득(RMI : Revenu Minimum d' insertion)이다. RMI는 실업보험 권리가 소멸된 실업노동자에게 국가가 지급하는 생존보조금이다. 기본소득 보장은 실업노동자에게 한정된 이러한 국가보조금을 전국민에게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노동과 분리된 사회적 부의 배분이다. 이러한 기본소득 보장은 향후 실업이 피할 수 없는 사회현상이라는 사실의 암시이기도 하다.
기본소득은 대략 최저임금의 60∼100%가 적정규모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독일 녹색당은 사회적 부의 불평등한 분배구조를 기본소득을 통해 완화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최저임금이 아닌 중간임금의 50% 이상을 주장한다.
사실 전 국민에게 조건 없이 평등하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사회적 부의 공정한 배분이라는 기본 정신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현행의 모든 실업보상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소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부 실업노동자의 경우 '기본소득'이 이전의 실업보험금이나 사회보조금보다 오히려 더 적은 소득이 될 수 있다. 반면에 고용노동자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지급되는 '기본소득' 이외에 고용에 따른 임금소득이 추가된다. 말하자면 사회적 부가 빈곤층으로부터 부유층으로 역류되는 것이다. 따라서 소득규모에 따른 강력한 누진세제로 개혁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아이러니 하게도 복지국가가 급속히 쇠퇴하는 시기에 복지국가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 보장으로 사회가 훨씬 더 평등해진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용에는 적잖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어떻게 재원을 확보할 것인가? 어떻게 노동기피 현상을 방지할 것인가? 이것이 가장 빈번히 제기되는 질문이다. 재원의 문제는 세제개혁의 문제일 것이다. 반면 노동기피는 윤리문제일 수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기본소득에 따른 노동자들의 노동기피는 오히려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게으름 피울 권리가 있는 반면에 생존에 턱없이 미달하는 저임금으로 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일자리 선택의 폭이 훨씬 확대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노동은 더이상 사회체제 생산의 중심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임노동이 아무런 특권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거기에서는 다양한 사회생산 활동들이 노동에 버금가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결국 기본소득은 이원사회에서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완벽한 실업보상과 저임금으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요컨대 기본소득의 존재가 상품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정치적 난제, 즉 노동권의 문제를 해소한 것이다.
그럼에도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기본소득 보장으로 진정 실업이 해소될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그 생각으로부터 완전고용의 기적을 실현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사회에서 실업은 직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