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1} 2월 총파업관련 자료: (출처) 민주노총 CUG '조합원의 소리'
민주노총의 위기, 의사소통의 문제가 아니다
1998. 2. 25. / 민주금융노련 부위원장 태기석
2월 27일자 [노동과 세계]는 '민주노총 위기인가?'를 다루면서 '현장과 지도부의 의사소통 부재가 민주노총의 위기의 핵심'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 참가 → 지도부의 잠정합의안 도출 → 2월 9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부결, 지도부 불신임, 비대위구성 → 재교섭요구 및 국민회의의 재교섭거부 → 비대위의 총파업철회 등의 과정을 통해 촉발된 민주노총의 위기상황이 '중앙 지도부가 현장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장 역시 지도부의 고민을 잘 모르기 때문에' 에 발생한 문제란 말인가? 그렇다면 만약 중앙지도부가 현장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의사소통에 최선을 다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내가 보기에 노동운동에 있어서의 이 '만병통치약'이 현상황에 대한 원인진단과 해답으로는 부적절한 것 같다. 현재 민주노총의 위기는 본질상 의사소통의 부재, 따라서 '의식상의 문제'로 발생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의사소통에 의해, 즉 의식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물적토대의 구조적 변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이며, 따라서 그 해결방안 또한 기존의 처방과 다른 것이라는 상황인식이다.
그동안 중앙지도부와 투본대표자들, 그리고 중앙위원들은 현장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그동안 숱한 회의를 통해 현장의 동력을 끊임없이 점검, 고민해 왔다. 고용의 위기, 정리해고라는 노동자 생존에 대한 불안이 고조되는 전대미문의 위기상황에서 예상과는 달리 현장동력이 안 살아나자 왜 안 살아나는가에 대한 고민이 민주노총 간부들의 뇌리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그동안 현장은 죽어도 정리해고제를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는데 지도부가 현장의 흐름을 모르고 노사정협상에 응했던 게 아니었다. 현장도 현재의 수세적 국면에서 노사정위원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고, 만약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훨씬 더 개악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가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고, 그나마 참석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고 얻을 것은 최대로 얻어내는 것이 최선의 전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장도 알고 있었다. 관료주의는 없었다. 본질적으로 중앙과 현장의 갈등은 없었다. 다만 협상의 속성상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전술적 차원에서라도 현장은 물론 중앙, 산별간부들까지도 끝까지 정리해고수용 반대입장을 천명해야 했다. 밀어붙이기 전술상 누구도 공식석상에서 정리해고제 수용 불가피론을 주장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중앙지도부는 협상해야 했고 현장은 원천적으로 정리해고제를 반대해야 했다. 이것을 두고 현장과 충분히 공유하지 못한 게 잘못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태를 정확히 보는 시각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적 없다고 지도부를 매도해서는 안된다. 지도부 또한 끊임없이 현장을 점검하고 고민했다.
'현시기 노자간의 역관계상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석하는 것이 과학적 선택이었고 정리해고에 대해 일정부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민주노총이 정리해고제를 수용해 놓고서는 현장에서 올라오는 정리해고반대투쟁을 받아안을 수 없다. 수용을 한다면 무슨 명분으로 정리해고반대투쟁을 조직하느냐'는 말도 맞다. 둘 다 맞다. 기존 지도부가 협상을 한 것도 맞고, 협상결과를 거부한 것도 맞다?! 그동안 이 지점에서 많은 고민을 해왔다. 그 결과 정리된 결론은, "역사적으로 고용의 조건이라는 물적토대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시기에는, 특히 노자간의 불리한 역관계로 인해 정리해고제에 몰려있는 시기에는 불가피하게 노동운동에 있어, 마치 임당수를 건너기 위해서는 심청이라는 '제물'이 필요하듯이, 아무래도 노동조합 지도부의 제물이,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 같다"는 것이다. 즉 이땅의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노사정위원회에서 교섭하는 사람들이 필요했고, 그 사람들을 제물로 삼아, 정리해고에 반대하고 투쟁을 선언하는 지도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은 지금 고통스런 단계를 경과하고 있다.
[노동과 세계]가 현재의 민주노총위기의 극복대안으로 '불신을 극복하고, 새집행부 구성으로 전열을 정비하자'고 주장한 것은 맞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노총의 현 위기를 초래한 근원으로서 '고용구조의 변화 특히 정리해고가 강요되고 있는 남한자본주의의 물적토대의 변화'라는 맥을 정확히 짚어내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만약 현상황에 대한 이상의 진단이 맞다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 기존지도부의 제물이 필요했고 또 정리해고제 반대를 주장하는 새로운 지도부가 필요했다면 우리는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매도해서는 안되며 서로의 존재의의를 인정해야 한다. 양자 모두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기 위해 필요했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노동자를 팔아먹지 않았다. 이상의 인식이 전제된다면 치유는 쉬워진다. 문제의 근원이 '우리들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물적토대의 변화'라는 '외부'에 있다면, 우리의 '창끝'은 이제 우리 내부가 아니라 우리 외부를 향해야 한다. 더이상 우리 자신을 괴롭히며 동지들을 힘들게 하지 말자. 오늘의 상황을 초래한 근원인 우리의 외부의 적 정권과 자본에 대해 전열을 정비하고 투쟁의 결의를 곧추 세우자. 우리 내부의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지난 2월 9일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자의 대의를 져버렸다'며 부당하게 매도당했던 과거 민주노총 지도부의 명예회복이 선행되어야 한다. 누구도 노동자의 대의를 져버린 사람이 없는 이상, 당시 찬성발언 했다가 매도당했던 대의원들에 대한 명예회복도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사실 비대위의 총파업 철회에 대해 일부에서 느끼는 배신감은 2월 9일 억울하게 매도당한 것에 대한 분함에 비례한 것이었다. 즉 분함이 큰 사람일수록 배신감은 컸다. 2월 26일 정기대의원대회(3월 3일로 연기 : 편집자 주)는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차분한 논의와 대책마련을 통해 우리 내부의 불신을 말끔히 치유함으로써, 민주노총이 외부의 적인 정권과 자본의 정리해고 총공세에 대응하여 노동자생존권을 지켜낼 수 있는 강고한 투쟁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