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국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뜻
김 상 태 / 문화비평가
나라가 부도가 나서 모두 거지가 될 거라고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경제를 잘 모르므로 그 내막 또한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두렵고 부끄럽고 슬펐다. 사람들은 또 잘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그것은 이른바 인간성이라 부를만한 것들인데 치사하고 속보이고 지저분한 것들이었다. 결국 한국과 한국 사람은 안되는 나라고 안되는 나라 사람들이라는 말 같았다. 나는 자꾸 나라를 생각하게 되었다. 청소년 시절에 학교 윤리교육을 열심히 받았던 강박관념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간에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한다는 말을 되새겨 본다. 그리고 아무튼 간에 나는 점점 슬퍼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유럽여행을 다녀왔던 어떤 사람이 해 준 얘기가 있었다. 영국에 가면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한쪽으로만 탄다고 한다. 통상 한 계단에 두 사람이 타는 것이 에스컬레이터인데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모르지만 한 계단에 한 사람씩만 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반은 맨 아래계단에서 윗 계단까지 시원스럽게 비어 있다. 그리고 혹간 바쁜 사람이 있으면 그 빈곳으로 뛰어올라 간다. 그렇게 배려된 공중질서라는 것인데 아무런 강제도 감시도 간섭도 없지만 그들은 어딜 가나 그렇게 한다고 한다. 그 사람 말인즉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일종의 자문이었다. 어찌 보면 너무나 자주 듣던 얘기인지라 이제는 진부한 예화에 불과한 것도 같다. 사람마다 여기에 대한 각양각색의 대답들이 또한 있다. 아무렇거나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나도 무언가를 떠벌리거나 중얼거리며 한마디를 한다. 하지만 진이 빠지고 부질없다고 느낄 때도 많다. 이런 중언부언은 도대체 거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요컨대 '그러니까 고모양 고꼴이지'라고 내뱉으면 속이라도 좀 편해지나?
솔직히 말해서 이런 푸념을 늘어놓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을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만은 예외인 듯 '조선 놈은 안된다'고 지껄인다. 이런 사람의 진정한 정체는 본질적으로 계급적인 것인 바 그가 알든 모르든 자신은 피착취자가 아니라 착취자이거나 착취자가 되고 말겠다는 신념을 가진 자이다. 어떤 조건에서 사람들이 왜 그래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의사가 그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물적 구체성이 사실을 제대로 알려주곤 하는데 이런 자들은 자신의 이해득실에 부딪치면 제 엉덩이라도 흔들 것처럼 다급하게 행동한다. 사실 그야말로 공중질서와 사람에 대한 배려에 관해서 아는 바 없는 자이다. 나는 이런 자들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고 감히 말하는데 실은 가소롭기가 그지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자신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적이 없는 바보들이기 때문이다. 요지인즉 나는 국민성이란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사람 또는 일군의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이 어떤가는 그 사람이나 사람들이 어떤 관계의 그물망속에 사는가가 일차적으로 규정한다. 조직깡패의 행동과 샐러리맨의 행동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인 바 그 차이를 그들의 조건이 아니라 그들의 본성으로 이해한다는 건 얼마나 엉터리인가? 진정으로 악질 반동적인 생물학자들의 유전자설 따위가 그에 육박할는지는 모르겠다. 우리의 소박하고 진실한 체험은 이런 헛소리에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규정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일이다. 계급이란 말은 이론서의 문장을 치장하는 수식구가 아니다. 수십권씩 아류를 양산하는 처세술들의 진정한 대답이야말로 사실은 계급 속에 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일상의 현실이다.
여기 반쯤찬 물이 부글부글 끓는 냄비가 있다고 하자. 아래서 뜨거운 불이 타고 있으므로 이 냄비 안의 일정수의 물분자는 반드시 기체상태로 존재한다. 그 분자들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부딪히고 방황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그 분자들은 아주 불안하다. 재수가 좋으면 그 기체분자는 액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 편안히 안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액체상태의 어떤 분자가 그 대신 기체로 튀어 나가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어떤 분자의 재수가 어떤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어쨌든 일정수의 분자는 기체 상태로 내둘려야 한다. 우습게도 나는 이 사실을 30년 살고서 겨우 알았다.
예컨대 나는 수많은 친구들이 그렇게도 다양한 그러나 거의 예외 없는 가족문제에 시달리는걸 대학 때 알았다. 대단히 외향적이고 정열적인 경상도 사나이였던 한 친구가 그 이상으로 방어적이고 수동적이고 인간에 대한 공포심에 젖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그가 어렸을 때부터 두집 살림을 했다는 걸 알았을 때, 사회에서 한 인간의 내면으로 이어지는 방정식의 해(解)를 나는 상당히 명징하게 끌어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배우자 부모 형제 자매 가까운 지인들이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게 좀처럼 되지 않는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그렇겠지만 그 안되는 정도는 결국 한국 사회라는 조건에서 일차적으로 규정된다. 해방이후 한국 현대사란 그야말로 들끓는 냄비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우리자신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평안을 절대로 달성시킬 수 없는 냄비 속의 물분자들이었으며 우리는 제아무리 용빼는 재주를 가져도 인간적으로 행복할 수도 평화로울 수도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우리를 괴물로 만들기도 하고 위대하게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보다 일찍이 보다 폭넓게 이와 같은 말을 했던 사람도 있었다. 나는 '프롤레타리아란 곧 인륜의 파탄성이다'는 식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얼마나 당연한가 고색창연하고 우아한 파티에서 로미오와 쥬리엣들이 일급침실로 짝짓기 공간을 찾아 들어갈 때, 하녀와 마구간 마부는 들판에서 뒹굴고 그 아래엔 청백의 백합꽃들이 비참하게 으깨진다. 이 백합꽃의 화두를 우리는 한 두 번쯤 얘기해본 적이 있지 않던가?
프롤레타리아란 그 즉자성에서 더럽고 냄새나고 무례하고 파렴치하고 게다가 이기적이다. 그밖에 갖다 붙여야 할 이름표는 얼마든지 있으며 신성한 신부 멜더스는 이 잡놈(?)들을 계도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굶겨 죽여야 한다고 {인구론}에서 말했던 것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그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 인격마저 재생산시킨다는 사실이다. 걸레 같은 민중의 아들이 그렇게 증오하던 제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 가는 드라마가 어디 한두 개던가? 경제학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재생산이란 문화적으로 인격적으로 이 인륜의 파탄성을 재생산하는 끔찍스런 위협이다. 그러니 자기는 죽어도 착취자가 되겠다며 '조선 놈은 안된다'고 말하는 작자들을 십분 이해할 만도 하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그래서 우리는 영국과 달리 에스컬레이터뿐만 아니라 엘리베이터, 버스 정류장, 지하철 그 어디에서도 그렇게 아수라이다. 좋다. 그러니 어쩔 텐가?
때로 우리는 대자적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옛날에 한완상 교수가 대자적 민중이란 말을 써서 그때로 보자면 여하간 좋은 이미지로 남아있는 편이다. 나는 그래서 대자적 프롤레타리아란 말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 비범한 현대자본주의 하의 피지배계층 일반을 대중이라 불러보기도 하고 대자적 민중이란 말의 조합도 생각해 보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피지배자 일반의 생존전략은 그러므로 명백한 것이다. 이 더러운 땅덩어리에서 탈출한 도척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더불어서 대자화 되는가가 그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모든 철학자가 동의했다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 곧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질문이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되는가?
홉스라는 철학자는 동정심에 대해서 남의 불행이 제 불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오는 것이라고 그 의미를 폄하했다. 그런데 난 그렇지가 않다. 그 말이 심리학적으로 혹은 생리학적으로 사실이면 어떻다는 건가? 나는 나를 사랑하며 그 본성이 요구하는 바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괴로워 못살겠다. 아마 짐승이라도 그 점만은 똑같을 게다. 하지만 그 짐승보다 두뇌용량이 훨씬 큰 나는 내가 끓는 냄비 속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나 같은 남들을, 남 같은 나를 알고 있다. 끓는 한국사회에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다른 나들과 어떻게든 뭔가를 해보아야 한다. 그게 안되면 나의 평화도 가망이 없는 것이다. 조금만 더 나아가 보라. 이 지구라는 냄비는 끓고 있지 않은가? 국경이 문제가 아니다. 우연히 정해준 어떤 시공 속에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문제이다. 우간다에 태어났으면 나는 우간다 애국자이다. 그 시공에 함께 사는 사람들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어디에 태어났어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한다. 돈이 많아도 싫고 권력이 많아도 싫다. 나는 같은 냄비 속에 사는 여기 이 사람들과 무언가를 해야겠다. 사람이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사랑하고 놀다가 죽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그게 안되니까 우겨서 쥐어짜려는 헛된 몸부림이다. 하여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사랑하고 놀 수 없는 세상이라면 그게 되도록 무언가를 해 보는 것 말고 도대체 무엇 하러 사는가?
진정으로 세계주의가 아니면 애국심도 또한 없는 것이다. 이것을 헷갈리기 때문에 히틀러의 역사도 있었다. 지지고 볶아도 좋다. 줄 안서는 나들, 속물, 걸물들, 좋은 사람들, 나쁜 사람들 나는 그 모두를 사랑한다. 되건 말건 되도록 할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해서 그 처절한 우국지사들의 시와 사자후를 제대로 이해한다.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한다.
나는 피지배계급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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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정/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