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언


<공산당선언> 150주년 : '잊기 위하여'!


이해영(연구위원)


인간은 단순히 말만을 할 수 있는 동물은 아니다. 그들은 쓰고 읽을 수 있는 존재이다. 문자가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먹고 사는 일이 아무리 엄혹하다 하더라도 다른 동물과 구분되고 나아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도 가능해 진다. 문자는 물론 밥이 아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아니 좀 더 인간답게 잘 살기 위해서는 밥만으로 충분치 않다. 이런 의미에서 문자는 존재 필수품이다.

이 고마운 문자로 쓰여진 지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인간답게 잘 살기'에 보탬이 되는 것들이 있다. 단연 여러 경전(經典)이 첫손에 꼽힌다. 그러나 성인의 경서에서 오늘날의 노동자가 어떻게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지를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좀 더 노동자의 처지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또 세상 어디에 문제가 있으며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지를 좀 쉽게 알려 주는 문자들이 필요하다. 더불어 '노동자 세상'에 대한 소중한 꿈도 담겨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게다. 말하자면 노동자용 모험소설이라고 할 까?

청년기의 열정과 도전의식으로 가득찬 맑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이 세상에 나온 것은 지금부터 150년 전이다. 사실 이런 류의 구조 개혁을 촉구하는 선언서는 역사적으로도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당시 그 어떤 요즘 식의 공산당이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좀 '쫀쫀하게' 평하자면 급진적인 국제 지식인 써클 내지 정파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선언>은 새 세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이긴 하지만 한 때 세상을 바꾸어 보기도 하였다. 어쩌면 근대 이후 역사에서 이 짧은 팜플렛만큼 세상을 뿌리채 흔든 글도 드물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선언>의 중심사상에 그 이유가 있다.

첫째, <선언>은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역사발전의 기초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후 오늘날까지도 - 부당하게도 - 무슨 결정론이니 하는 욕을 먹고 있지만, 이 명제는 세상살이에 먹고 사는 문제의 엄중함과 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말만의 또는 머리속의 좋은 세상이 허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구조' 개혁의 사상이 확립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유관계의 재편을 포함한 사회의 발본적인 혁신 또는 구조 - 요즘말로 '시스템' - 의 개혁 과 교체 없이 노동자 생활의 근본적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둘째, <선언>은 지금까지의 역사란 것이 그 어떤 달콤한 상부상조의 목가적 꿈의 세계가 아니라, 먹고 먹히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것도 먹는 계급과 먹히는 계급사이의 갈등과 투쟁의 세계였음을 보여준다. 이 서늘한 현실주의는 '노동자의 세상'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고 <선언>은 주장하는 것이다.

셋째, <선언>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 지를 제시한다. 요즘의 우리 말로 하면 한마디로 '정치세력화'이다. 그것도 단순히 군중이나 몇 몇 집단이 아니라, 전체 계급으로 조직된 정당의 불가피성을 주창한다. 그리고 모든 억압받는 계급과 사회 전체가 해방되지 않은 채, 노동자 자신만의 해방이 가능하지 않음을 <선언>은 강조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이 계급이기주의나 혹은 계급 로비주의와 무관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선언>이 오늘날 다시 읽히는 이유는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기념행사적인 데에 있지 않다. <선언>은 최근의 자본의 '세계화' 또는 이른바 '지구화'의 불가피성과 그 효과를 법칙적인 것으로 본다. 그 동안 체제경쟁으로 가리워 졌던 상황이 그 장막이 걷히면서 - 비교될 수 없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 150년전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선언>의 대안은 바로 국제적인 노동자 연대투쟁, 곧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이었다. 지구적인 자본운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국적인 노동운동의 현실에 비추어 다시금 주목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선언>과 '우리'사이에는 단지 15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뿐만 아니라, 좌절한 현존사회주의의 실험과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노동자 정당의 경험이라는 역사적 거리가 가로 놓여 있다. 하지만 그 거리는 이승과 저승처럼 결코 넘지 못할 그 무엇은 아닐게다.

<선언>이 발표된지 150년, 이제 잊혀 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잊기 위하여', 먼저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