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과 내부개혁으로 거듭나는 민주노총
혼란과 우려 속에 '혁신'을 들고 나와 당선된 2기 민주노총 이갑용 위원장을 4월 19일, 느즈막한 시간인 저녁 6시에 위원장실에서 만나 보았다. 채만수 편집위원장이 함께 한 대담은 1시간 30여분 동안 진행되었는데 긴 대담은 아니었지만 2기 지도부의 입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논의가 많았었다.
힘들었지만 얻은 것도 많았던 선거
- 오늘이 마침 4·19 38주년이고, 전국공공연맹이 출범한 뜻 깊은 날입니다. 이렇게 의미 있는 날에 좋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번 선거는 민주노총의 상황이 여러 모로 어려운 속에서 치뤄졌습니다. 때문에 특히 후보로 나서기까지 마음 고생이 많았을 텐데, 나서야겠다고 결심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 우선 저는 저번에 무산된 선거의 부위원장으로 출마했었습니다. 사실 그때 출마할 당시 울산지역의 위원장들이 모여서 위원장 후보로 출마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울산쪽 위원장들은 동의가 됐었는데, 단병호 위원장과 마지막 얘기하는 과정에서 부위원장으로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거가 무산되었죠. 그후 서울의 몇몇 동지들이 울산지역에서 위원장이 나와야된다는 이야기를 해서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지만 마음의 결정은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다 울산지역에서 동의를 못얻고 서울에 올라와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마음 고생이라기보다는 누구나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는 이 시기에 내가 과연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당선되는 것도 어려울 것이고...... 이 두 가지가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울산지역에서는 사실 "뻘밭에 발 빠지는 것 싫다." "울산지역에서는 그래도 건강하게 운동해 왔었는데 서울에 올라가면 발 빠지는 것과 똑같지 않냐." "지금으로서는 개혁도 불가능한 것 아니냐"면서 "뭐하러 올라가냐"고 다들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결정해서 출마를 결심하기까지에는 나름대로 힘들긴 했지만 가치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선거과정에서 노동운동판의 잘못된 풍토를 많이 보았지만 당선이라는 사실 이외에 얻은 것도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 말씀을 들어보니 울산지역의 일부에서 위원장으로 출마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상당히 작용한 것처럼 들리는데요, 정갑득 후보도 울신지역 출신이잖아요?
□ 그렇긴 하지만 정갑득 후보는 울산지역에서 동의가 되지 않은 독자출마였다고 봅니다. 정갑득 후보가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울산지역에서 위원장 후보가 나와야 된다는 것도 정갑득 후보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사실 있었지요.
98년 민주노총의 상, IMF에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는 세력
- 의례적일 수 있겠지만 중요한 문제이니 여쭤보겠습니다. 총노동운동에서 민주노총이 점하는 위상과 역할, 임무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상황에 따라서 민주노총이 해야할 역할은 틀리다고 봅니다. 올해 같은 경우는 그 역할이 보다 명확한데, 제가 당선되고 난 이후 민주노총의 활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가, 9일 만에 기자회견을 했었습니다. 그때도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만 살기 위한 민주노총이 되어서는 우리도 살아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런 길을 가서도 안됩니다 실업자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IMF에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민주노총이 남지 않으면, 싸움을 이기지도, 전개할 수도 없다"는 판단입니다. 모두 다 넘어져도 민주노총만은 투쟁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세력으로 남아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올해 민주노총의 상이고요, 평상시의 상은 이러한 상이 정립된다면 이후에 어느 구조든 들어가서 나름의 역할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민주노총의 상은, 단사에서 문제가 올라와서 형성되는 식이었는데 그런 위상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최소한 연맹에서 해결할 것은 해결하고, 사회, 정치, 경제 투쟁을 할 수 있는 민주노총이어야 됩니다. 물론 단위 사업장의 투쟁은 도와주고, 협조해야 하지만 명백한 의미에서 얘기하자면, 정치, 사회, 경제 투쟁을 해야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 지금 말씀하신 것 중에 지금의 상황과 관련하여, 최근에 한 외국기자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한국에 IMF관리체제가 들어갔을 때 일반적으로 외국에서 볼 때, 한국의 노동자들이 한판 벌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용하더라, 이게 왠 일이냐."고요. 지금 말씀하신 투쟁의 내용이 앞으로라도 그러한 것들에 대항해서 맞서겠다는 의미인가요?
□ 맞습니다. 투쟁이 없을 수밖에 없었던 게 한국의 언론이 재벌체제 속에서 재편된 언론이고, 학자들도 40년을 자본주의 체제의 정치, 경제 구조속에서 길들여져서 그런지, IMF에 대해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서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 '저게 오면 산다'고만 했지, 저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아무도 얘기 안했습니다. IMF가 무엇인지, 진실되게 내용이 전달됐었다면 누구라도 거부하고 투쟁했겠지요. 그런데 이게 들어오고 나서야 제대로 인식하게 되고, 느끼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상황이 매우 절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거과정 초기에서는 준비 안된 위원장이었기 때문에 선거공약으로 뽑아 내지도 못했었지만 IMF에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은 명확했기 때문에 공약에는 넣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저쪽은 처음에는 없다가 나중에 삽입한 것으로 압니다. 상호 시각의 차이는 있습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IMF 문제가 큰 타이틀로 앞으로 민주노총의 싸움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고민해 들어갔습니다. 지금 대통령이나 정·재계나 IMF 때문에 꼼짝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저항을 해줘야 IMF에 대해 뭐라고 얘기를 할텐테, 이렇게 물 흐르듯이 흘러서야 말이 안됩니다. 초국적 자본이 이윤 빼가기 위해서 왔는데, 거침없이 가져가도록 도와주고 있는 꼴이죠. 최소한 우리가 싸워서 재협상을 하는데 보탬이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이왕 돈을 빌려오는 거라면 정말 경제를 살리기 위한 목적을 최대한 살려야지 이윤만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고용안정이 곧 경제를 살리는 길
- 그것과 관련하여 지금 김대중 정권이 155개 공기업을 대대적으로 민영화한다고 나오면서 소위 신자유주의 정책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앞으로 민주노총이 어떻게 대응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 오늘 전국공공연맹의 건설도 이런 상황에 기초한 출범인데, 공기업을 팔아서 나라를 살리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발상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노동조합측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해야합니다. 매각을 해서 해외 자금이 들어와도 아마 주식을 살텐데 주식이야 팔고 가버리면 그만이죠. 이윤을 위해 주식만 샀다가 팔고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 형태의 매각이 과연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는 길인지..... 김대중 정권의 경제살리기도 근본적이기보다 근시안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경제를 살리겠다면, 경제를 살리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숨어 있는 자금을 뽑아 내는 방법도 있고, 최근 북한은 3년째 군비증강을 안하고 있다는데 이런 상태라면 양쪽이 평화적으로 군비축소를 해서 재원을 마련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이 돈이면 충분히 만들 수 있습니다. 또 저희는 조세개편도 얘기하고 있습니다. 현재 금리가 20% 정도의 고금리이기 때문에 금리생활자나 사채업자도 은행으로 돈을 다넣고 있다고 합니다. 10억을 넣으면 1년에 2억이 생기는데 이것을 최소한 반 정도는 세금을 때려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고소득자의 직접세 부담도 늘려야 하고요. 정주영이 92년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 3조원의 자산을 털어서 국가경제를 살리겠다고 했었는데, 한 사람이 그 정도였다면 60대 재벌 정도면 지금 모으려고 하는 재원을 충분히 모을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재벌들은 국가의 특혜하에 돈을 모았기 때문에 그 돈은 개인의 돈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돈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든지, 법적인 조치가 있어야 됩니다. 그 돈이면 고용창출도 될 것입니다. 고용안정과 고용창출이 된다면 경제는 살아나는 것 아닙니까? 이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만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시각이라면 저항만 생길 뿐이지 경제를 살리지 못할 겁니다.
- 후보 토론회에서 (고영주 사무총장의 발언중에) "IMF(경제위기)가 발생하게 된 요인 중에는 한국사회의 재벌문제가 자리잡고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벌의 정경유착, 과다한 차입경영, 중복투자와 문어발식 경영이 문제를 낳았기 때문에 근본적인 처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듣기에 따라 '만약 한국에 재벌문제가 없었다면', 혹은 '그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있었다면 경제위기는 예방할 수 있었고, 예방할 수 있다고 들리는데,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물론 재벌문제가 다는 아니겠죠. 그러나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바로 정치구조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정경유착이라는 것이 자본이 돈을 갖다 준다고 덥석 받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돈은 모두 음성적 선거비용으로 소비되는 구조죠. 재벌문제만 풀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한보사태 하나로 경제 전체가 1년 내내 흔들리게끔 만들어져 왔던 구조가 있는 겁니다.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어지려면 정치적 투명성이 먼저 정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요구할 정치적 내용은 정치적 투명성과 돈 안드는 선거,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방법을 제출하라는 것입니다.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허리띠는 물론 목까지 다 졸랐는데, 너희는 도대체 뭘 졸랐냐?' (재벌들한테)조르지 못하겠다면 정당하게 갈 수 있도록 키라도 제대로 잡으라는 거죠. 재벌을 해체하고 재벌 재산을 환수하여 그 재원으로 실업자문제 등 고용문제를 해결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노사정위원회의 참여 조건입니다.
노사정위원회 참여해야 할 근거, 없음!
- 노개위와의 관계에 대해서, 혹은 민주노총의 노개위, 신노사관계 구상 관련 전술에 대해서 과거에는 어떻게 생각했고, 지금의 판단은 무엇인지요?
□ 노개위 당시는 제가 세밀하게 판단할 정도로 가까이 있지 않았습니다. 현장에 묻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말씀드리자면, 10년 동안 민주노조운동은 자주성, 민주성, 현장성을 담보한 상태에서 투쟁으로 민주노총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출범하고 난 뒤 현장성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관료화 됐다는 것은 돈의 관료화가 아닙니다. 현장성을 지켜내지 못하면서 현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위에서 몇몇 상층부의 논의구조에 의해 민주노총이 자꾸 흘러가는 과정, 저는 이것이 신노사협조주의라고 판단하는데, 이 부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현장의 목소리가 담보되지 않으면 투쟁은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것이 지난 노사정위원회의 혼란 과정이었습니다. 아무도 싸울 준비는 안하고, 협상에만 매달려 있으면 결국 협상 위주의 민주노총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철저히 이것을 막아야 했는데, 그런 것들을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위상이 흔들리는 상황으로까지 갔던 겁니다. 저는 그래서 현장으로 돌아가서 현장의 목소리가 담긴 투쟁으로 민주노총의 상을 다시 정립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선거참여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때를 어떻게 보느냐 보다는 앞으로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주성과, 민주성을 살리고 현장성이 가미된 투쟁을 할 것입니다. 옛날은 잘 모릅니다.
- 잘 모르시는 게 아니라 잘 아시는데요.
{노동과 세계}의 긴급진단(98. 2.27.)에 보면 "노개위와 노사정위원회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노개위가 단순히 노동법 개정을 위해 만들어진 기구였다면, 노사정위원회는 우리가 그동안 줄곤 요구해왔던 사회개혁의 내용을 다루는 장이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노사정위원회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IMF 체제하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IMF구제금융을 들여오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노사간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에서 법을 제정하는 문제였습니다. 일방적으로 법을 제정하면 한쪽에서 반발이 나올 것 같으니까 이것을 무마시키기 위해 노사가 같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던 것이죠. 민주노총이 들어갈 때 노조간부들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요. 이 IMF체제에서 경제 살리자는데 뒷발을 빼서 국민들로부터 욕을 먹을 수는 없고, 어떻게든 대응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들어갔는데, 막상 회의 끝나고 보니 한쪽에만 일방적으로 칼자루를 쥐어줘서 미친듯이 춤을 추고 있는 꼴이 되어버린 겁니다. 사실 민주노총은 이제 당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미조직 노동자들만 먼저 날라 갔습니다. 그러니 민주노총도 책임이 크죠. 그런데 엄밀하게 말해서 민주노총은 노사정 합의 안했습니다. 대표들이 잠정합의라고 얘기했었고, 내일 대의원대회가 있으니 거기서 논의한 후 조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지 않았습니까? 그후 민주노총은 다시 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재협상은 안된다면서 한국노총만 참여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던 겁니다. 이 부분은 명확히 해야 합니다. 민주노총이 찬성해서 결과가 그렇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책임을 면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차기 노사정위원회에는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를 다시 협상하지 않는다면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죠.
- 노사정위원회의 불참을 선언한 후에도 민주노총의 최근 문건들을 보면, '노사정위원회의 합의정신'을 기준으로 자본과 정부측의 움직임을 재단하고 있는데(예를 들어 {노동과 세계] 98. 3.27일자 '근로자파견법 시행령' 관련 기사 등)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3월 27일이면 당선되기 전이네요. 지금에야 조금 정비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 아직 집행부 전체가 저의 의지를 확실하게 반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금 지역을 순회하고 있는데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내용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단지 아직 정비가 덜 돼서 혼선이 있는 부분도 있는데 그것은 지도부의 입장은 아닙니다.
다수가 참여하는 폭넓은 의결기구로 전환할 필요
-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노사정 잠정합의안 파동'을 계기로 볼 때 그동안 민주노총의 의사결정 기구나 과정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고, 어떤 '교정책'을 갖고 계신지?
□ "왜 책임을 지도부만 져야 하느냐?"는 말이 있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일리가 있었습니다. 대충의 노사정 합의안이 나왔을 때 그 책임이 명확히 정리되었다면 싸우는 방식이 달라졌겠지요. 노사정에 참여했던 사람이 비상대책위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의사소통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현장에서는 근로자파견제와 정리해고제에 대해 분명히 반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도부는 들어가서 제동장치를 많이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만들겠다는 제동장치가 완벽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토론도 못해보았습니다. 현장은 오로지 법제도화에 반대하는 입장만 명확하게 갖고 있었고, 지도부는 최소한 이러저러한 장치가 설정되었다는 설명도 없었습니다. 사실 제동장치도 빈약했죠. 게다가 "우리는 이것에 동의하지만 업종, 연맹, 단사별로 꼭 협상해야 한다"는 대목 하나라도 넣어놨으면 싸울 수 있는 근거가 있는데, 그런 장치도 없었습니다. 상층부에서는 논의할 내용이 없었고, 밑에서는 못받아들이는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회의구조와 관련해서는, 민주노총의 회의체계가 어떻게 흘러왔냐면, 상집, 중집이 있는데 중집은 한번도 한 적이 없고, 투본이 생겼더군요. 지역대표 몇 사람과 업종대표, 임원들이 없던 체계를 만들어서 결정을 했던 거죠. 중앙위원에서 제의는 하지만 중앙위원은 빠진 상태에서 항상 일 처리는 투본이 다 했습니다. 구조 자체를 확대개편 하든지 보다 넓은 틀을 만들었다면 보다 활발한 토론도 가능하고, 전달 과정도 쉬웠을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공약에도 밝혔듯이 구조를 폭넓게 하고, 회의체계는 순서를 밟아 가는 과정을 정착시키려고 합니다. 상집을 유지하면서, 중집을 살려내고, 중앙위원은 3배수, 대의원은 5배수로 확대해서, 단사 위원장이면서도 대의원 대회에서 직접 얘기도 못 듣고 전달받아 일을 진행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합니다. 현장이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투쟁전선을 배치하고, 한편으로는 내부개혁을 병행해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 이상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민주노총과 전교조 등은 그동안 끊임없이 '합법화' 문제에 매달려 왔습니다. 정말로 민주노총이 합법단체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 참 우스운 얘깁니다. 국민들에게 이만큼 알려졌으면 이것이 합법화지, 대통령도 인정하면서 청와대 오찬 하자고 하는 판에 합법화 됐다, 안됐다는 논의는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번에 설립신고서를 제출했는데 아마 보완명령이 내릴 것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전교조를 빼지 않았습니다. 물론 전교조를 빼고 우회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의 생리가 이렇게 흘러가면 민주적이지도 못할 뿐더러, 조직을 이완시킵니다. 전교조가 들어와서 내년 9월에 합법화된다면 그때 민주노총도 하면 됩니다. 지원금 좀 준다고 그렇게 우회적으로 간다면 민주노총의 상은 정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상급단체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 상태도 아닌데 더이상 뭘 법, 법 합니까? 설립신고서를 반려한다면 저쪽이 문제가 있는 것이지, 우리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 저도 한 말씀드리고 싶군요. 합법화의 문제를 저들이 유도하는 방식으로 협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합법'이란 헌법에 위배되지 않으면 합법인 것이라고 봅니다. 민주노총이 법외단체이지 불법단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관점으로 대응해 왔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까지 너무 합법화에 매달린 경향이 있었습니다.
98년, 한판의 투쟁은 불가피하다
- 민주노총 내부에도 정리해고를 어쩔 수 없이 기정 사실화하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그런 태도가 발생한다고 판단하십니까?
□ 중앙위원회에서도 사실 그런 말이 나왔었습니다. "정리해고, 더이상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죠. 그런데 정리해고 되고 나서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어떻습니까? "거지가 다되어서 깡통 차야할 판인데, 아 이걸 어떻게 가만 있느냐."고 하면, "그런데 이미 법제화 된 것 어쩝니까" 이러더라고요. "우리만 문제라면 우리가 좀 쫄라맬 수도 있겠는데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다. 86년에 대통령 직선제로 전국민이 다 들고 일어나서 법을 바꾸지 않았냐, 잘못된 법, 잘못된 사회를 제대로 바꾸겠다는데 왜 우리가 안 나서야 되냐, 우리가 먼저 나서면 다른 사람이 다 도와줄 것이다. 자신을 갖고 가야 한다." 이렇게 설득을 했는데 많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지역별로 순회할 때도 그런 문제제기가 나오지만 결국은 "아, 위원장이 올해 앞장선다는데 다 따라가야지요." 이렇게 말합니다. 조합원들이 고민은 하겠지만 싸우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현장에서는 거의 폭발 직전이에요. 누군가 나서서 끌어달라고 하는데 거기에 제가 나섰습니다. 현장부터 투쟁의 의지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받아 안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민주노총 조합원들만 갖고서는 이 싸움을 못합니다. 지역 다니면서 사회개혁 갖고 싸우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만 싸워서는 사회개혁도 안될 뿐더러 우리 자리도 못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주 나쁜 놈들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만 정리해고 안되면 되는 거냐. 실업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대책이 있어야 우리도 살아 남는다. 임금 몇 푼 받는 것으로는 사회에서 살아 남지 못한다. 멕시코를 봐라." 이렇게 얘기하면서 다니는데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내용도 틀리지 않는 것 같고...... 제가 준비 안된 위원장이라 이정도 밖에 못합니다.
민주노총이 앞장서는 실업자 운동
- 준비 많이 되셨는데요......
기왕 실업자 문제가 나왔으니 좀 더 논의를 해보았으면 합니다. '위원장 후보토론회'에서 고용안정을 위한 정책방안으로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정리해고, 근로자파견법 철폐투쟁"을 들고, "정리해고 투쟁사업장을 묶어 전선을 형성하고,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 "실업급여 확대, 부도사업장에 대한 긴급융자, 직업훈련, 물가안정을 위한 투쟁" 등을 제시했었습니다. 또 "실업자대책위를 만들어 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해 실업자동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 곳에서 가지 각색의 실업자 모임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실업자동맹'은 어떤 강령을 갖는 단체여야 한다고 보십니까?
□ 이 자리는 솔직히 말해야 하는 자리이니 있는 그대로 말하겠습니다. 실업자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공약에 넣었지만 구체적인 대책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22일 대통령을 만나기 전까지 적어도 실업자 문제에 대한 대책을 들고 들어가서 제안을 해야 하는데...... 가장 고민입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민주노총의 형편만으로는 준비기간이 너무 짧아 각 연구소마다 자료를 부탁드렸습니다.
그리고 실업자동맹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실업자들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길거리의 사회문제만 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직을 우선 만들어 교육도 시키고 희망도 심어주면서 실업자 대책을 공유하고 함께 노력해 간다면 실업자들도 희망을 갖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만 싸워서는 어짜피 안되는 싸움이니 큰 힘을 모아 요구를 관철시켜야 됩니다. 그 분들 나름의 단체를 만들어야 될 필요가 있다면 전폭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책' 입니다. 정부도 대책이 없습니다. 재원을 뽑아 내야 하는데, 몇 십조라도 어디서 터져 나와야 이것으로 재원을 만드는데......
그런데 이 부분은 명확합니다. 실업자 대책을 꾸릴 때 정부의 대책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안을 내고, 감시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실업자 대책을 위한답시고 정부기구 하나 더 만들어 건물짓고, 그거 관리하느라 사람 쓰느라 돈 다 쓰지 실제로 고용하는 데 쓸 돈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게다가 정부는 IMF구제금융은 경제를 살리는데 써야지 실업자를 구제하는데 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실업자를 구제하면 경제가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현재 민주노총 차원에서는 지역별로 실업자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중앙차원에서는 건설일용노조협의회와 건설노련 쪽을 묶고, 대표로 이00 부원장님이 그 일을 맡고 계십니다. 인력을 보강해서 집중적으로 정책을 마련해야 할 단계입니다.
- '직능별·지역별 부위원장제를 도입하겠다'는 선거공약과 관련, (고 사무총장 후보가)직능별 부위원장은 "민주노총의 교육·정책사업이 취약하고 조직도 마찬가지여서, 핵심적으로 이 세 가지를 나누었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총 1기의 예산구조 가운데 이 부분에 책정된 예산 비중은 어느 정도이며, 이 부분을 확충하여 교육·정책·조직의 기능을 강화할 생각은 없으신지요?
□ 예산지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 민주노총은 파산선고 해야 할 정도입니다. 선거 때문에 빚만 잔뜩 짊어진 상태입니다.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강화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직선제의 경우 어려운 점이 분명히 있지만 여러 가지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선거를 치르면서도 공영제로 할 예정입니다. 조직에 애착이 가야 돈도 모이는 것 아닙니까? 또 한편으로 재정위원회를 활성화할 예정입니다. 56만을 대상으로 하는 재정사업이라면 충분히 민주노총 사업 정도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극복 가능한 IMF 한파죠.
- 국민승리 21과 민주노총의 관계는 공식적으로 어떤 상태입니까.
□ 정리를 아직 못했습니다. 대의원 대회에서 정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는데, 어떻게 될 지는 두고 봐야죠.
- 상반기 투쟁에 걸림돌로 작용할 요소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당선되자마자 정치일정을 확인해서 체크해 보았는데, 지자체선거와 월드컵이 걱정됩니다. 월드컵에 이겨서 16강에 들어가 보십시오. 분명히 파업해도 나오지 않을 것이고, 국민들도 관심이 없을 겁니다. 돈이 조금 있는 실업자의 경우 36개, 60개 채널 신청해 놓고 하루종일 TV만 볼 거예요. 이렇게 되면 실업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전선을 다 짤라버릴 수도 없고...... 걱정입니다. 물론 경제위기 이데올로기도 문제이죠.
짧은 임기에 '혁신'이 가능하겠는가
- 마지막으로 민주노총의 규약과 상관없이 1년만 위원장으로 민주노총을 책임지겠다고 선언하였는데, 이 경우 두 가지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그렇다면 민주노총의 혁신적 개편을 위해서 어떤 안을 갖고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래도 잠정적 집행부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 다난한 상황속에서 확고한 지도력의 확립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에 대한 복안은 있으십니까?
□ 지금 1년 짜리 위원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얘기하는 사람들은 자기 욕심 때문에 하는 말이고, 싸우겠다는데 안나서면 그런 사람은 영원히 민주노조에 발 못 붙입니다. 저는, 꼭 직선제로 다들 신망 받는 위원장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야 얼떨결에 위원장 당선되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이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저도 한 10년쯤 더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한 뒤 민주노총 위원장 꼭 한번 하려고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해야할 역할은 민주노총을 바로잡는 것이지, 다시 위원장 되겠다는 생각에서 사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 뜻은 명확합니다. 아직 젊어서 힘이 있어 이 힘을 발휘해 주는 것이 민주노총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평생에 내가 해야 할 일 한가지는 분명히 했구나 하는 생각으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원래 1년 뒤에 신임투표였는데, 그거 별로 의미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잘못했으면 '민주노총 위원장 자격 없습니다' 하고 당연히 내려가야지요. 신임을 물을 정도로 일을 못했으면 당연히 내려가는 거지 어디 부끄럽게 신임투표를 합니까. 고영주 동지하고도 논의해서 결정했던 공약입니다. 꼭 그렇게 할겁니다.
이갑용·고영주 체제는 선거과정에서 '투쟁하는 민주노총' '아래로부터 혁신하는 민주노총'의 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었고, 그것이 선거결과로 일정 부분 현실화되었다고 봅니다. 지금은 현장에서부터 투쟁하자는 의지가 강력해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전체의 분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골리앗 때 '외로운 늑대'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이름 하나 있어야겠다고 말하더군요. 아마 상황을 반영하는 말이겠죠.
- 연구소처럼 민주노총의 외곽에 있는 단체들에 대해서도 평소의 평가와 요청이 있으시다면?
□ 사실 민주노총의 현재 인원과 능력으로 이 상황을 극복하기는 힘듭니다. 주변의 여러분들에게 공식적으로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회단체에 목매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단체에 공개적으로 요청해서 필요하다면 상시적인 체계를 만들고 토론회도 상시적으로 유지해낼 생각입니다. 저희가 모자라는 부분은 꼭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 오랫동안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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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정/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