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이런 깃발을 든 미친 군중을 만나고 싶다
이 무 열
책만드는 노동자
올봄, 우리네 강산은 완전히 미쳐버렸다. 우리의 심신을 그토록 스산하게 들쑤셔놓던 겨울 바람이 물러가기가 무섭게 철이른 진달래와 개나리가 산하를 수놓더니만, 하루 이틀씩 사이를 두고서 봄꽃이란 봄꽃은 모조리 꽃망울을 터뜨려버렸다. 앞산을 보아도 꽃이요 뒷산을 보아도 꽃이요 뜨락을 보아도 꽃이요, 발밑에 밟히는 게 있어 내려다보니 풀꽃 하나가 애처로운 얼굴을 하고서 올려다본다. 금수강산이라는 말을 실감한 적이 일찍이 없었던 바는 아니지만, 올봄처럼 넋을 빼놓는 잔치판은 난생 처음이다. 세상이 도니 산하도 제정신을 차리기가 버거운 모양이다.
어쨌거나, 덕분에 나는 보름은 좋이 황홀한 꽃 속에 묻혀 지내는 행운을 만끽했다. 분에 넘치는 포만감을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누지 못한 게 조금은 미안스럽기도 하지만.
팍팍한 이 세상에 웬 난데없는 꽃타령으로 누구 속을 뒤집어놓느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 조금 변명을 하고 넘어가야겠다. 내가 이곳 산자락에 거처를 정한 것은 무슨 전원 생활을 찾아온 것도 아니고 인간을 피해 도망온 것도 아니며, 다만 교통 좋은 도회지에 변변한 작업 공간을 구할 여력이 없어 값싼 곳을 찾다가 우연히 이곳까지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일 뿐이라는 거다.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동네 앞에도, 산너머 골짜기마다에도 허름한 창고 안에 수억씩 가는 기계를 들여놓고 조그마한 기계 부속 한 가지만 하루에도 수십만 개씩 찍어내는 공장이 즐비하다. 값비싼 임대료와 까다로운 규제를 피해 몰래 숨어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도회지에는 자본주의의 꽃인 금융업과 호화 매장과 향락업소와 영업 사무실, 그리고 거기에 붙어서 먹고사는 업종들만 남고, 번듯한 공단에는 그래도 족보에는 오를 수 있는 규모라야 들어가니까 말이다.
하기야 올봄에 나한테 예고 없이 꽃세례를 퍼부은 미친 봄도 인간의 무분별한 경제 활동의 부산물인 엘니뇨의 영향이라니, 이제 어딜 가도 이놈의 자본주의 문명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는 없게 돼버렸다.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면 정면으로 맞서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듯싶다.
조금은 장황하게 서두를 꺼낸 것은 이 미친 세상, 미친 봄, 미친 산하에 걸맞은 미친 넋두리, 미친 이야기꽃을 하나 피워볼까 해서다.
이제 많은 것이 분명해졌고, 분명해지고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인간을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의 사회적 합의였던 '복지국가'로의 이행 약속은 휴지조각처럼 버려지고, 오로지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만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인류 모두에게 더 나은 삶을 약속할 거라는 입에 발린 거짓말마저도 이제 시들해지고 있다.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인간은 원래 불평등한 존재이고 인간 사회는 본시부터 적자 생존의 사회였다는 말이다.
그 말은 이제 노골적인 협박과 공갈로 변모하고 있다. 다수가 살기 위해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살려면 무릎 꿇고 들어와 삶을 구걸하라, 그러지 않으면 넌 죽는다. 세상에는 인간이 넘쳐난다, 너 아니래도 널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 인류의 절반, 아니 80%가 사라진다 해도 자본은 끄떡없다.
자본의 이런 공격에 대한 대응은 아직까지는 무력한 듯이 보인다. 자본주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규칙을 인정해야 하고, 그러면서 삶을 구하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주인공인 자본을 살리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희생을 치르면서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고, 타협은 또다른 타협과 양보를 부른다. 10%를 잘라내면서 이룬 타협은 다시 10%를 더 잘라내라는 요구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30여 년간 사실상 완전고용 체제하에서 고도성장을 계속해온 한국 사회가 사상 처음으로 맞고 있는 지금의 사태, 그리고 저들(권력과 자본)의 거짓되고 방약무도한 태도는 90년대 초·중반 우리가 저들이 떨어뜨려주는 떡고물에 넋이 나가 신기루를 보고 있었던 데도 일단의 원인이 있다. 저들은 우리가 체제 속에 단단히 갇혀 있어 정면 대응을 하지 못할 거라고 보고 마음놓고 우리를 우롱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 위기의 원인을 무차별적으로 모두의 탓으로 돌리고, 고통분담이라는 명목하에 고통을 전가하고,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공멸로 치달을 수도 있는 방안을 해결책이랍시고 들이대고는 살려면 무조건 따르라고 강요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회' 운운하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이들을 현혹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파문을 낳은 이번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의 단면을 살짝 들여다보자. 고위 공직자의 평균 재산이 십수억이라니, 아무리 곱게 보려 해도 이들이 '성실하게 일한' 결과로 그런 재산을 모았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물의를 일으킨 '복부인' 복지부 장관 자리에는 차라리 사재를 털어 실직자들한테 위로금 조로 단돈 10만원씩이라도 나눠줄 수 있는 수천억대 재산가를 영입하는 건 어떨까. 본디 냉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데도 이렇듯 울화가 치미는 건 저들이 들먹이는 언사가 너무도 가소롭기 때문이다. 뭐,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부가 되겠다고?
소름이 돋는 것은 저들이 '눈물 젖은 빵'이니 '존재와 의식'이니 하는 말을 결코 모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초국적자본과 국제금융자본의 하수인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저들의 현실 인식에는 저들의 계급의식이 속속들이 반영돼 있다. 저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택한 위기 타개책과 그 허구성, 그에 함축된 저의를 잠깐만 돌아보자.
다 알다시피, 저들이 모델로 선택한 영·미의 앵글로색슨 신자유주의는 체제의 수용 능력을 벗어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떨구어버리면서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신성시하다시피 하는 가장 야만적인 자본주의 체제다. 그런데 그런 체제가 그런대로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버젓한 사회에서 떨려난 사람들 중 많은 부분을 아직까지는 체제 속에 붙잡아둘 수 있는 복지체계가 그런대로 건재하기 때문이다. 루스벨트 집권시에 짜여진 미국의 비교적 탄탄한 복지제도, 그리고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슬로건하에 2차대전 후 20여 년에 걸쳐 구축된 영국의 훌륭한 복지체계를 저들이 모를 리 없다. 그리하여 물러설 곳이 그래도 조금은 있는 그 나라 서민들과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는 우리네 서민의 차이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인데, 저들은 그 점은 애써 외면하고 경쟁력 강화만을 내세우며 그저 따르라고 강요만 하고 있다. 포복절도할 '복지병' 운운 소리까지 나왔는데, '병'은커녕 '복지'의 'ꑁ'자라도 누려보고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울화가 조금은 덜하겠다.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은 경제의 매우 드문 성공례로 거론되는 멕시코와, 영국의 경우를 보면 저들의 저의가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멕시코의 경제 회복은 부자들에게나 회복일 뿐 민중의 삶은 전보다 훨씬 더 팍팍해져 빈부 격차가 3∼4년 전에 비해 3배나 더 벌어졌다는 것, 공식 통계 아닌 사실상의 실업률은 여전히 30% 내외에 달한다는 것, 그에 따라 한시도 세상이 조용한 날이 없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영국의 경우에도 저들이 숭앙해 마지않는 대처의 집권 이후 노동대중의 삶이 더욱 힘겨워지면서 빈부 격차가 2배 이상 더 벌어졌고, 미국에 이어 '집 없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저들의 말마따나 사태가 잘 수습될 경우 우리가 누리게 될 미래다.
저들이 이런 사실들을 모를 리 없다. 저들은 알면서도 오로지 자본의 논리에 따라, 경쟁력 최우선의 함정에 빠져, 국제금융자본의 하수인이 되어, 갖은 감언이설을 들먹이며 우리 노동대중의 목숨을 건 도박을 선택한 것이다. 우연히 이 확률 낮은 선택이 횡재를 가져와 다수 노동대중의 삶을 건질 수 있다면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겠지만, 그 확률은 매우 희박하다. 가증스러운 것은 이 도박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도 가진 자들은 손해를 입지 않거나 더 큰 부를 손에 넣을 확률이 높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저들의 계급적 속성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 더군다나 이렇듯 전쟁을 선포해놓고서 혹시 격화될지 모르는 실업자와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비하여 혹독한 시위 진압 훈련까지 하고 있다니, 저들의 만반의 준비 태세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눈은 국내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이 세계화하고 있는 지금, 한 나라의 문제는 일국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행동은 비록 국지적일지라도 시야는 세계적이어야만 한다.
뭐니뭐니해도 오늘의 최대의 관건은 우리에게도 예외 없이 2중의 압박을 가해오고 있는 이 야만적인 자본주의, 이윤 창출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제거해가며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파괴의 방향으로 몰고가는 신자유주의를 무엇으로 어떻게 제어하느냐는 일일 것이다. 그나마 사회에서 떨려나는 사람들의 누추한 가림막이던 복지국가의 꿈과 다소간의 완충 역할을 하던 국가간 장벽마저도 경쟁력을 앞세운 거대자본의 이윤 추구욕에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있고, 생산활동을 떠난 비대한 투기성 금융자본의 말발굽에 다수 인류의 생사가 오락가락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부작용이 커지면서 서유럽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에 속속 좌파(?) 정부가 들어서고 있지만, 이들은 그 거친 말발굽 앞에 놓인 분장 팩에 불과한 듯하다. 분장 팩이 말발굽에 채여 터지면서 대처의 신자유주의가 블레어의 신자유주의로 탈바꿈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만 지난 경험을 반추해보자. 그나마 덜 야만적이던 자본주의, '복지국가'를 태동시킨 케인스주의 이론이 어떻게 한 세대 이상의 기간 동안 자본주의의 지도 이념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를. 그 첫번째 동인은 물론 내적인 것으로서, 이윤 실현의 길이 막혀 파국에 직면한 자본이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도움으로 기사회생하면서 국가와 긴밀한 연관을 맺게 된 거였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은 동인이 하나 더 있었다. '복지국가'의 태동과 케인스주의의 확산에는 지금까지 10년 가까이 몰매를 맞고 있는 사라진 '현실사회주의'의 견제력이 크게 작용했다. 루스벨트의 뉴딜정책과 복지정책을 이야기할 때, 당시 대공황에 허덕이던 서방 사회에서 소련에 건설중인 사회주의가 '새로운 문명'으로 각광받고 있었다는 점, 또 그 영향으로 미국 역사상 그리고 당시 세계에서 좌파 세력의 힘이 가장 컸던 곳이 미국이었다는 점을 간과한다면 그것은 허구다. 마찬가지로 1950∼1960년대의 서유럽에 '복지국가'가 태동한 것을 이야기할 때, 당시 자본주의 세계의 대립 축으로까지 떠오르고 있던 소련과 사회주의 세계,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상당 기간 집권까지 한 탄탄한 좌파 세력의 존재를 빼놓는다면 그 역시 허구다. 다른 평가는 일단 접어두고라도, '현실사회주의'를 포함한 강력한 좌파 세력의 존재가 자본주의의 태생적인 야만성을 제어하는 데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는 점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1970년대 중엽 이후의 신자유주의의 출현은 내적으로는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국가자본주의(복지국가)의 파탄의 결과인 동시에, 외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억제할 견제력이 소멸한 결과이다. '현실사회주의'는 내적인 모순과 외적인 압력에 시달리다 붕괴해버렸고, 서방 세계의 좌파는 '복지국가'의 덫에 걸려 체제 안에 갇혀버렸다.
이제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어진 자본주의, 그 주역 배우인 초국적자본과 국제금융자본은 온 세계를 자신의 발 아래 무릎 꿇리며 온 인류에게 자신의 규칙을 따르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저들은 조금도 주저 없이 자신들의 세계에 이 많은 사람들이 다 필요한 건 아니라고 협박하고 있다. 선거에서 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권력은 감언이설로 그 엄연한 현실을 감추려 들고, 일부 순박한 선량들은 현실에 참여하면서 그 야수의 발톱을 조금이나마 무디게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자본이 제시한 규칙을 바꾸지 못하는 한 그들의 존재는 더 효과적인 지배방법을 창출하는 데 일익을 담당할 뿐이다.
자본주의가 이제 인간을 버려가며 사회와 자연을 갉아먹고 나아가 자신과 인류의 토대까지도 무너뜨려가는 것이 분명해진 지금, 그에 맞서 그 고삐를 틀어쥐고 공멸의 궤도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길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것은 하루빨리 이윤을 위한 생산에서 인간을 위한 생산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불필요한 경제과정은 가차없이 잘라 내버리는 것이다. 경제의 주조종간을 자본의 논리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틀어쥐는 것이다.
지난날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과정을 찬찬히 반추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 실패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지레 겁먹고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다가는 더 큰 화를 자초할 수도 있다. 이제 사태가 분명해진 지금, 그간의 좌절과 번민을 걷어내고 분명한 목소리로 외쳐야 할 때다. 자본의 운동이 다수 인류에게 더이상 떡고물조차도 떨어뜨려주지 않고 그 파편과 잔해가 인간의 삶을 갈수록 옥죄어오고 있는 지금, 이제 분명한 목소리로 게임의 규칙을 바꾸자고 외쳐야 할 때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어쩌면 유효기간이 훨씬 지나 이미 썩은내가 진동을 하고 있는데도, 눈앞의 신기루에 현혹되어 썩은내인지 향내인지조차도 분간 못하고 있던 우리에게 내리고 있는 형벌인지도 모른다.
현란한 자태로 나를 황홀경 속에 빠뜨렸던 앞산과 뒷산과 뜨락의 꽃사태도 이제 계절을 앞서온 초여름의 신록에 묻혀버렸다. 신록은 언제 보아도 새로운 출발의 동력을 준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찾아와 올봄의 미친 산을 제어한 이 신록이 군홧발 위의 진초록 제복인지, 아니면 푸르른 민초들의 한바탕 잔치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이 무엇인들 어떠랴.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만 되지 않고 모든 것이 희망대로만 풀리지 않는 게 세상 일일진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복과 민초가 뒤섞여 있으면 또 어떤가. 어쨌거나 세상에는 마지막까지 남아 정리할 사람은 많아도 제때에 제곳에서 제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적은 듯한데, 글로나마 넋두리를 실컷 쏟아놓으니 조금은 후련하다. 내친 김에 꿈까지 꾸어보자.
올여름, 난 종로 거리에서 이런 깃발과 피켓과 플랭카드를 든 미친 군중들을 만나고 싶다.
"우리는 구차한 복지보다는 떳떳한 일자리를 원한다."
"부정축재와 불로소득은 전면 몰수하라."
"3억 이상의 재산 소유자는 모든 공직에서 손을 떼라."
"우리 회사는 우리 손으로, 우리 나라도 우리 손으로."
"노예의 삶 강요하는 자본주의는 무덤으로 보내자."
"우리는 이윤보다는 사람을 우선하는 체제를 원한다."
"세계의 노동대중이여, 우리의 뒤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