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인 사회운동적 조합주의를 위하여(3)

Kim Moody


이 글은 90년대 후반 미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부활을 대표하는 노동운동 활동가 포럼의 이름이자 그 기관지인 {Labor Notes}의 편집주간인 Kim Moody의 근저, Workers in a Lean World: Unions in the International Economy, Verso, London, 1997의 초록으로서, 격월간학술지 New Left Review, 1997년 9·10월호(통권 225호)에 게재된 것을 번역한 것인데 지난 4월호에 이어 마지막 부분이다.


번역을 마치며

이 글의 저자인 Kim Moody는 이 글을 통해서,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적 지구화가 노골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과정에서 전세계 노동계급과 그들의 조직들이 처한 조건을 개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글은 우선 우리 노동운동이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전체적인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국제노동운동의 현실과 전망을 진단하고 있다. 그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국제노동에서 '길을 잃은 거인' ICFTU(국제자유노련)와 ITSs(국제 산별노련의 사무국)를 장악하고 있는 이른바 '사회적 동반자관계', '사회적 협약'과 경제주의(business unionism)의 옹호자들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보수적 조류와, 아래로부터의 현장투쟁과 노동계급의 여타 부문과의 전투적 연대, 국제주의적 전망과 실천에 기초한 새로운 노동운동(사회운동적 조합주의)의 조류 간의 국제적, 일국적, 지역적 투쟁이 향후 국제노동운동의 기본구도를 형성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런 전망은 국제노동 내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기본인식을 제공함과 동시에 국제적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또한 극소수에 의해 전유되는 정보, 또는 먼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리는 내용에 대한 접근 자료와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국제노동운동의 발전경로와 전망에 대해 한국 노동계급이 자신의 관점과 입장을 정리하고 쟁점화시키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개념화되고 있는 새로운 '사회운동적 조합주의'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내부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객관화·일반화시키는 준거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특히 1998년 초반을 혼란과 위기의 시기로 만든 민주노총 내부의 갈등이 한국만의 독특한 상황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보편적인 하나의 흐름이라는 사실도 이 글을 통해 확인된다. 그와 함께 이 글에서는 우리 운동이 추구해야 할 '노동조합운동의 민주적·자주적·계급적 발전'이라는 기본노선의 정당성이 역사적으로, 국제적으로 풍부하게 입증되고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글은 특히 현장에서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맞서 싸우는 동지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장에서 이 글을 소재로 학습, 평가, 토론해보길 기대한다. 물론 이 글 자체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진단이자 제안이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경험이나 준거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운동의 과정 속에서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망 자체의 세부적인 정당성에 대한 논증보다는 그것의 발전적 정교화와 구체화가 더욱 중요한 문제이며, 그러한 전망의 완성과 쟁취 여부는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 "대안적 '모델'이 아직은 분명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적인 대안은 반란에 나섰던 전세계 노동계급들에게 분명하다. 옛 슬로건처럼, 그들이 단결하는 날은 그 대안이 분명해지는 날이다."

국제적인 사회운동적 조합주의를 위하여(3)

Kim Moody

미국 {Labor Notes} 편집주간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여 : 현시기의 노동정치

"노동조합은 결코 정부가 되지 못하는 야당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네덜란드 사회학자 젤레 비서(Jelle Visser)는 쓰고 있다(주1)(그러나) 오늘날 더욱더 많은 나라의 노동운동은 놀라운 열정으로 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노동운동은 자신의 힘이 생산상의 지위뿐만 아니라 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획득한 사회적 안전망에도 상당한 정도 의존한다는 인식으로 이 과제에 대응하기 이르렀다. 자본과 그들의 신자유주의적 동맹자들은 아주 똑같은 이해 - 복지국가가 노동자와 조합들의 어려운 시대를 견딜 능력을 뒷받침한다 - 로부터 국가후원의 안전망을 해체하려 애쓰고 있다.

'결코 정부가 되지 못하는 야당'으로서 노동조합들은 밖으로부터 싸워야 한다. 사실, 오늘날의 세계에서 노동자와 조합들은 기업의 경쟁력 의제와 그것이 의미하는 밑바닥까지의 경주를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더욱더 국외자로 내몰린다. 제시되고 있는 대안은 동반자관계(partnership)라는 마비상태이다. 많은 조합지도자들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싶어 하지만, 자본의 현대적 의제와 노동조합이 쟁취하고자 하는 바로 그 목적은 너무나도 불일치 한다. 정부의 긴축계획과 예산삭감에 반대하여 거리로 나서면서 노동조합들은 노동계급 속에서 전혀 다른 동맹자를 발견했다. 최고 지도자들은 계속 이 대안들 사이에서 동요하고 때로는 투쟁을 훼손시키기도 하지만, 이 투쟁의 방향은 분명한 것 같다.

정치의 영역에서 투쟁은 당분간 주로 방어적 방향이다. 복지조치, 연금, 의료보장, 실업수당과 기존의 공공 서비스의 방어는 지난 몇년간 대부분의 대중파업과 총파업의 동력이었다. 특수집단의 사회적 성과물, 예를 들어 소수보호조항(affirmative action)이나 이민자 권리를 방어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때때로 단체교섭의 영역에서 조합들은 프랑스의 트럭운전사들이나 독일의 노동시간단축 투쟁에서처럼 일정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대개 일국적·국제적으로 노동진영이 자신의 힘을 건설하고 확대하기까지는 대부분의 투쟁이 방어적일 것이라는 점은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정치적 좌파와 조직노동의 지지자들 사이에는 방어투쟁을 다소 나쁜 것 또는 부적절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역사상 거의 모든 노동의 격변과 진보는 방어적 투쟁들에 기원을 두고 있다 ― 고용주와 정부가 이전에 획득한 것을 다시 빼앗으려 하거나 단순히 상황을 악화시키려고 시도할 때이다. 이 과정에서 방어투쟁은 노동진영이 조직을 충원, 건설 또는 재건할 시간과 상황을 제공한다. 그러나 '동반자관계'라는 유혹의 목소리는 방어투쟁이 ⒜ 지금의 전지구적 경제에서는 절망적이라거나 ⒝ 보수적이고 퇴행적이라고 충고한다. 그들은 그 대신, 물론 조합들이 직업, 소득 또는 보다 광범한 사회조항에서 물질적 개선을 위한 희망 없는 투쟁을 포기한다는 전제아래, 경제를 개선할 보다 광범한 사회적 동반자관계의 다양한 형태를 제시한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동반자관계 또는 사회적 계약은 투쟁에 대한 대안으로, 즉 새로운 번영을 향한 손쉬운 길로 제시된다.

이런 관점은 미국의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이나 일종의 투자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를 옹호하는 영국의 윌 허튼(Will Hutton)같은 저술가들에 의해 표현되는 자유주의적·민중주의적 견해이다. 이런 자본주의하에서 '시민사회'의 다양한 조직들은 주요기업과 은행 그리고 주요경제결정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타 금융기관들에 대해 평형추로서 작용하거나 그 내부에서 일정한 제도적 역할을 하려고 시도한다.(주2) 그들은 자본과, '시민사회' 또는 보다 친절하고 상냥한 자본주의를 창출할 비정부기구 및 자원봉사자들의 '제3부문' 사이의 '사회적 계약'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다른 사람들은 투자방향에 영향을 줄 수단으로서 연금기금의 사용을 호소하기도 한다.(주3)

이 모든 계획들은 오늘날의 TNCs가 이윤이라는 근시안적 관점에 기초해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수동적 기관이라는 암묵적 견해를 공유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전지구적 행위자들이 '투자자'(stakeholder) - 노동조합이나 다양한 지역사회조직 - 또는 연금기금을 통해 활동하는 실질적 주주들의 대표성을 증대함으로써 일국적 차원에서 통제될 수 있다는 가정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연금기금이 민주적 통제하에 있게 된다면 연금기금이 가질 잠재적 힘을 보여주는 거대한 수치가 제시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연금기금은 모든 주식의 25%를 통제한다. 다만 언급되지 않은 것은 주식의 나머지 75%가 상위 10%가구(전체주식의 25%)와 자신의 지분에 비해 과도한 영향을 행사하거나 소유하고 있는 금융기관(50%)의 손에 안전하게 있다는 사실이다.(주4)

주식과 지분의 활용

연금·기금 자본주의에 대한 통상적인 주장은 이것이 사회의 투자우선순위에 민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영국과 더불어 연금기금이 중요성을 가진 소수의 몇 나라들 중 하나인 미국에서 주식은 수십년간 투자자금원이 아니었다. 자본지출은 거의 전적으로 기업내부에서 생성된 이윤에서 나온다. 1950년초부터, 내부자금이 자본지출의 95%를 이루었고, 1990년 이래로는 100%이다. 1980년초 이래, 발행된 주식보다는 '퇴장한' 주식이 더 많다. 그 이유는 주식이 시장지분을 위한 전쟁, 즉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인수·합병 - 인수와 합병에 1.5조 달러 그리고 환매(buyback)*에 5천억 달러 - 에서 자본의 최신식 경쟁무기 중의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주5) 이것은 연금기금이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 환매(buyback) : 적대적 인수·합병으로부터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적대적 인수자가 보유한 주식을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다시 사는 행위

이런 투자자·주주에 관한 다양한 제안들은 항상 실질적인 권력관계를 희석시키는 분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자본주의적 기업들은 서로 그리고 사회전체와 조화될 수 있는 이해관계를 가진 투자자와 중립적 목적을 가진 하나의 보다 참여가능한 기관이 된다. 영국의 한 연구자그룹이 윌 허튼의 해석에 대해 언급하며 "비전은 모든 투자자의 보편적 이익에 관한 정치적 환상에 의존하며, 그들의 경제적 분석은 투자자들 사이의 재분배를 둘러싼 갈등이라는 구조적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주6)고 말했다. 가장 분명한 갈등은 노동자들과 실제 소유자들 간의 갈등이지만, 예를 들어 기업고객과 소비자가구들 사이에서 가격결정을 둘러싼 갈등과 같이 다른 갈등도 있다.

다른 관점에서는 단지 자본가계급이 주식, 채권, 상호부금과 기타 재산권을 통해 소유권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소유가 '사회적인 것'으로 된다. 그러나 1910년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이 지적했듯이, 주식소유는 실제로 자본을 집중시키는 한 방식이다. 그것은 최대 자본가들이 수많은 소액주주들의 자본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업을 확장할 수 있게 하였다. 주식소유는 그들의 통제력이나 권력을 감소시킨 것이 아니라 증대시켰다.(주7) 오늘날의 인수와 합병은 이런 현실의 현대적 형태일 뿐이다. 사실 최근에 주식의 최대 구매자는 그런 활동(인수·합병)에 참여하는 기업들이었다. 1980년대초 이래, 총 1.4조 달러의 주식이 인수·합병에 삼켜진 반면, 또다른 5,000억 달러가 기업이 주식을 환매하는 데 들어갔다 ― 이 모든 것은 통제의 중심에 있는 자들의 권력을 증대시켰다.(주8)

주식소유를 일정한 형태의 사회민주주의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보다 훨씬 더 주목할만한 것은 리프킨의 '제3부문'의 기초가 되는 자본주의국가(state)에 대한 평가이다. 이 '제3부문'을 구성하는 비정부기구(NGOs)와 자원봉사조직들이 재정적으로 곤란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는 정부가 자금을 제공하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이것이 현실적인 것으로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정부가 "상업적 경제의 이익에 덜 연계되어 있고 사회적 경제의 이익에 더 조절되어"(주9)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도대체 오늘날 어느 정부에 대해 말하는지 상상하기 힘들다.

투쟁에 대한 이 모든 대안들의 문제점은 TNCs가 이끄는 오늘날의 기업들이 분명히 전세계적 제국을 확장하고 수십년전의 전설적인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하여 계급전쟁을 수행하는 약탈자들이라는 점이다. 정부들은 이들의 인도를 뒤따르고 있으며 더욱더 '상업적 경제'의 영향하에 들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정형적 '시민사회' 이상의 무언가가 평형추로서 필요하며, 그것은 조직된 노동계급과 그들의 동맹자들이다. 마지막으로, 물론 이들의 제안에는 진정한 직업창출을 보장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투자와 내부수익성의 기본메카니즘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남겨두기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문제와, 노동계급이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킬 구체적 문제인 계급내 평등의 문제에 대한 강조는 광범한 세력을 모으고 노동계급의 힘을 증대시키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자본측 기구들에서 대표성을 강화하기 위한 모든 다양한 계획들은 동반자관계의 관점으로 끝나며, 이 관점에서 노동조합이나 다른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실질적인 자본주의적 경쟁이라는 전쟁으로 끌려 들어가며, 직업을 창출하기보다는 파괴할 가능성이 높다. 노동진영은 그런 경쟁을 통해 전진할 수 없다. 그들의 역사적 역할은 이런 파괴적 힘을 제한하고 궁극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요구는 노동조합과 그들의 노동계급 동맹자들이 "노동을 경쟁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노동진영의 주요한 공세적 이슈인 노동시간단축투쟁은 19세기와 19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정치투쟁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공적으로 적립되는 연금인 미국의 사회보장기금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은 전체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이 투쟁의 일부이다. 그러나 법제화를 통해 구현된 주당 35시간 이하 - 임금삭감 없고 아무 조건도 없는 - 의 일국적 기준은 즉각적으로 고용증대, 노동계급의 지위강화에 기여할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좌파와 노동계급의 낡은 정당들이 그런 투쟁을 수행할 의지가 없거나 능력이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또다시 결코 정부가 되지 못하는 '야당들'에게로 떨어진다.

국제정책의 영역에서, 무역협정들의 재협상은 장기적 프로그램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시기 정치의 관점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세계적으로 '상향평준화'를 가져오기 위해 더 많을 역할을 할 수 있는 하나의 목표가 있다 ― 제3세계 외채의 탕감. 제3세계로서는 북의 은행들에 대한 부채가 결코 끝이 없는 담보물 같은 것이었다. 1994년 현재 세계은행에 따르면, 이 부채는 제3세계 외채위기가 표면에 등장한 시기인 1980년의 9,060억 달러에 비해 2.5조 달러에 이른다.(주10) 이는 250% 이상의 증가로서, 제3세계의 거의 모든 신규부채가 원래의 부채를 상환하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 제3세계는 몇 배 이상을 상환한 셈이다.

이런 외채의 탕감 또는 점진적인 축소는 남의 정부들이 북의 은행들이나 채권 보유자들에게 해마다 이자로 지불하는 수십억 달러를 해방시킬 것이다. 노동조합과 다른 조직들이 이 조치가 풀어줄 새로운 자원의 적절한 재분배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곳에서는, 제3세계의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안전망을 제공하는 사회적 프로그램이 회복되거나 심지어 확대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명백히, 이런 잠재적 부의 건설적 재분배는 북과 남에서 모두 강력한 노동운동을 필요로 할 것이다. 투쟁의 변수가 전3세계 전역에서 변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이 서로 반목하도록 애썼던 세계의 이 두 부분의 운동을 한데 묶는데 크게 기여할 공동의 목적이다.

전세계적 사회운동적 조합주의 경향을 향하여

지구화와 유연생산의 압력, 새로운 투쟁의 변혁의 힘, 그리고 최근 노동계급에게 나타난 새로운 세력은 모든 노동계급과 그들의 조직을 보다 공격적이고 대결적인 방향으로 추동하고 있다. 아주 많은 최상층지도자들이 여전히 기업경쟁력·동반자관계 의제의 틀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이 과정은 빈번하게 조합 내부투쟁과 함께 시작하거나 그것을 포함한다. 논쟁과 도전은 조합들 내에서 보다 흔히 있는 일이며, 북의 활동가들에게 '역할 모델'을 제공하는 경제적 남의 일부 지역에는 새로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이나 도전의 결과에 대해 불가피한 것은 없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북의 많은 지역에서 최근세대의 최상층 지도자들은 1980년대의 산물이며, 이런 저런 형태의 자본과의 동반자관계에 깊이 물들어있다. 사실, 한편에서 냉전의 종식과 보다 많은 연맹과 조합들의 ICFTU와 ITSs(국제노동조합서기국)로의 결집,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이들 단체에서 미국, 독일, 일본, 영국 지도자들의 영향력의 증가는 동반자관계의 옹호자들이 과거보다 더 폭넓은 청중을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 그들은 등뒤로 사회민주당 정치가들의 유혹의 합창과, 수많은 TNCs의 협박과 회유의 말을 동시에 듣고 있다.

세계노동진영의 방향에 대한 논쟁의 상황은 보다 유리할 수도 있겠지만, 투쟁이 필요하다. 사회운동 조합주의의 개념과 실천을 추진할 국제적 경향이 필요하다. 그러한 경향의 원료는 이미 다음과 같은 조합들에서 가까이 있다: 남한, 남아프리카, 브라질의 노동조합들과 아시아의 기타 새로운 조합들; 변화하는 라틴아메리카 조합들 내의 주요 경향들; 캐나다 자동차노조(CAW), 미국의 전기노조(UE), 프랑스의 SUD(연대 단결 민주주의); 노동조합 내부의 반대파 또는 개혁그룹; {레이버 노트}(Labor Notes)와 같은 출판물을 중심으로 결집된 활동가들의 전국적 네트워크; APWSL(아시아·태평양 노동자연대), CJM(마퀼라도라 정의연합), US-GLEP, 마퀼라도라 노동자지원위원회와 같은 국제적 연대 네트워크; TIE(초국적 정보교환)과 같은 산업별 네트워크.

명백히, 이것은 다양한 경향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의된 좌파적 정치경향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경향의 사람들과 좌파적 배경을 갖지 않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노동조합과 반대파 네트워크와 같이 아주 상이한 조직들을 포괄한다. 그것은 전세계적이며, 남북의 분리선을 뛰어넘으며, 3극지역권 전체에 미치고 있다.

이 경향이 공유하는 것은 단일한 조직이나 중앙지도부가 아니라 오늘날의 지구화하는 세계 속에서 노동조합운동의 역할에 대한 견해이다. 사회운동적 조합주의의 이런 관점에 중심적인 것은 조합민주주의, 지도부 책임제,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 조합의 충원과 모집에 대한 헌신, 조합원수의 확장을 뛰어넘어 노동계급의 다른 부문과 조직들에 다가가려는 비전과 실천이다. 이 관점은 노동조합이 국제·국내자본과 그들의 신자유주의적 정치적 동맹자들에 대한 투쟁에서 적극적·지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이해한다.

사회운동적 조합주의는 이런 사고와 비전에 근거한 지향이다. 그것은 일국적 노동관계체제를 재구성하거나 모든 노동조합들을 동일한 구조로 만들려는 시도가 아니다. 산업전략적 접근이 중요하지만, 사회운동 조합주의는 CAW의 경우처럼, 오늘날에 전형적인 통합된 일반조합들의 행동을 지도할 수 있다. 그것은 캘리포니아 간호사협회와 같이 단일한 직종별조합 또는 프랑스의 전신우편체제의 SUD와 같이 정부기관에 기초를 둔 노동조합의 실천과 관점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카탈로니아의 CCOO와 같이 전국적 노동연맹의 한 지역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실천이 평조합원 실천이며 소규모 지도자그룹의 진보정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회운동 조합주의는 국제적 차원에서 쟁취해야 할 전망이다. 여러 나라의 활동가들에 의한 공동의 전망에 대한 인정은 국제주의적 실천을 용이하게 함과 동시에 기존의 노동계급조직의 모든 수준에서 이런 지향을 위한 투쟁을 강화할 것이다. 그것은 이런 맥락에서 최대의 실질적 힘과 잠재력을 가진 조직, 즉 노동조합들 주위로 계급 내부의 여러 부문들을 한데 결집시킴으로서 노동계급의 힘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전망이다. 그것은 노동계급의 파편화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전망이다. 그것은 좌파의 낡은 대중정당의 '개혁'에 대한 것이 아니지만, 어떤 정도의 로비나 전통적인 '내부침투'보다 그들을 중도적 입장에서 밀어낼 가능성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아래로부터 자기해방을 위한 수단이자 예행연습(rehearsal)이다.

결론

자본주의적 지구화과정을 통한 세계경제의 재편은 거의 20년간 북의 노동계급 대다수를 마비시켰다. 많은 산업국에서, 노동조합들은 노동력에 대한 비율면에서 쇠퇴했으며, 그와 더불어 노동과정의 변화는 계급과 그 조직들을 영구히 파편화하는 것같았다. 동일한 과정은 남의 일부지역에서 새로운 노동운동을 낳았고, 또 다른 제3세계지역에서 보다 오래된 노동조합들을 부활시키고 있다. 국제적 노동진영은 발을 맞추지 않고 행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가 본것처럼, 1990년대 중반 남북 양쪽의 많은 지역에서 반란과 전투성이 남북 양쪽의 많은 지역을 휩쓸었다.[노동조합 활력의 상당한 부활이 이루어졌다―생략] 자본주의적 지구화와 연결된 압력은 더욱 많은 노동대중이 행동에 돌입하게 했다. 게다가, 규제되지 않는 경제통합의 형태와 그 결과는 더욱 명백해졌다. 세계시장의 비인격적 힘은 시장통제에 대한 최후의 장벽을 제거할 책임을 맡은 신자유주의 정치가들의 얼굴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어제의 보이지 않는 손은 아주 잘 보이게 되었고, 그 과정은 사실 정치화되었다. 국가는 사라졌다기보다는 방향을 바꾸었다. 국가는 대중적 불만의 좋은 표적이 되었고 많은 조합들은 마침내 한때 그들이 지지했던―또는 심지어 여전히 지지하는―정당들의 퇴각으로 남겨진 빈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 놀라울 것도 없이, 공공부문 조합들이 이 반란을 이끌었다.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국제 노동진영은 다시 한번 발을 맞추어 행진하고 있었다.

표면 바로 아래에서, 현장의 반란도 다시 시작되었으며, 새로운 노동방식이 오랜동안 정착한 곳에서 특히 그러했다. 스티븐 로치(Stephen Roach)가 말했던 노동력에 대한 압력이 그가 경고했던 '노동자 반발'(worker backlash)을 유발하기 시작했다. 이 반란의 대부분은 현장 게릴라전이었고, 노동조건이 어느 정도까지 유연하고 비열할(lean and mean)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투를 벌였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전체 노동자의 전투적 행동으로 폭발하기도 했다. 점점더, 그것은 새로운 그룹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조합에 가입하는 형태를 취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부문에 걸쳐 그렇게 했다: 공공과 민간, 산업과 서비스. 일부 선진산업국의 노동조합들이 심각하게 쇠퇴했지만, 운명의 반전에 대한 희망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전지구적으로, 자주적 노동조합주의는 이제 역사상 어느 때보다 보다 많은 노동하는 인간을 포괄하게 되었다.

국제적 경계를 뛰어넘은 노동진영에 의한 현장투쟁과 보다 거대한 정치투쟁의 결합은 노동조합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 다른 노동계급 조직과 지역사회들의 힘과 역량을 강화할 더 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가장 기본적일 뿐만 아니라 가장 커다란 규모의 투쟁은 여전히 일국적 수준에서 일어나지만, 국경을 뛰어넘을 기회와 필요성은 전보다 더 커졌다. 전지구화하는 자본주의의 윤곽은 이제 그 약점만큼이나 분명해졌다.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국제적 캠페인에 대한 공명은 이것의 두드러진 예이다.―생략] 영국 항만노동자들의 소규모집단이 지구를 가로질러 전세계적 행동을 고취한다면, 명확한 목적과 민주적 조직을 갖춘 조합들과 국제적 노동단체들이 그들의 조합원들이 행동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상상해보라.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새로운 지도부가 분노한, 행동하는 평조합원들로부터 생겨나야 할 것이다―그들 위에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그 이름이 무엇이든, 사회운동적 조합주의는 그런 새로운 지도부가 자본주의에 의해 사람들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을 뛰어넘어 결집하고 도달할 수 있는 민주적 비전이자 실천이 될 수 있다. 만약 지구화의 결과에 대한 투쟁이 지속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게 된다면, 그들과 함께 투쟁할 지도자들은 주위를 둘러보고, 한 흑인 노동교육가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그토록 찾았던 그 지도자들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주11)


<미주>

1) Visser, in Regini, 17쪽.

2) Rifkin, 236~295쪽; Will Hutton, The State We're In, London, Jonathan Cape, 1995.

3) Robert Pollin, "Financial Structure and Egalitarian Economic Policy", New Left Review 214, 11-12월호 1995년, 26~61쪽; Richard Minns, "The Social Ownership and Capital", New Left Review 219, 9-10월호 1996년, 42~61쪽.

4) Mishel and Bernstein, 242쪽; 미국 상무부, 1995년, 532쪽.

5) Left Business Observer 76호, 1997년 2월 18일.

6) Julie Froud, Colin Haslam, Sukdev Johal, Jean Shaoul & Karel Williams, "Stakeholder Economy? From Utility Privatization

to New Labor," Capital & Class 60호, 1990년 겨울호, 89~91쪽.

7) Anthony Brewer, Marxist Theories of Imperialism: A Critical Survey, London, Routledge, 1990, 89~91쪽.

8) Left Business Observer 76호, 1997년 2월 18일.

9) Rifkin, 236~274쪽.

10) 세계은행, 1995, 220~221쪽

11) Elyse Bryant, 폐회연설, 1993년 Labor Notes 대회,디트로이트, 1993년 4월.

한/노/정/연


번역 : 원영수 / 정세분석실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