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
신 광 영
한림대 사회학과
지난 12월 우리는 헌정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하여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는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였다.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된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정권의 변화가 곧 권위주의 체제의 해체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야당 후보의 승리가 현대 한국 역사의 분수령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정권 교체가 특정 지역 지지에 근거한 정당들의 연합으로 가능하였기 때문에 정권 교체 이후의 정책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과연 야당 후보로서 당선된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은 역대 권위주의 정권들과 어떤 차별성을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관심사이었다. 특히 노동계의 경우 김대중 정권의 노동정책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노동정책과 어떤 점에서 차이를 보일 것인가에 대해서 궁금해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정권도 노동정책과 관련하여 이전의 권위주의 정권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유일하게 야당 후보로서 정권교체를 이루었고 또한 노동계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재계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서 촉각을 곤두세웠고, 노동계는 향후 노동정책의 방향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는 태도로 일관했었다. 특히 IMF 외환위기가 재벌들의 과잉투자와 부채과다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책 기조와 노사관계 개혁에 관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새로운 노동정책 ?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노동계는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들과 질적으로 다른 정부의 노동정책을 기대했다. 한편으로 민주 정권에 걸맞게 국제적인 수준에서의 노동인권을 보장하고 지금까지 소외된 노동자 대중의 이해를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지난 3개월에 걸쳐서 나타난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은 뚜렷한 특징을 보여주지 않은 채 정책 이념상 신자유주의와 절차적으로는 조합주의 사이에서 방황을 하고 있다. 이는 단적으로 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도 혼미를 거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명히 과거 정권에 비해서 노동운동에 대한 태도는 훨씬 호의적으로 변했다. 과거 파업을 해결하기 위하여 손쉽게 동원되었던 공권력도 자제되고 있다. 노동부의 정책 기조도 어느 정도 바뀐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는 노동정책을 경제정책의 하위정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정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노사정위원회와 같은 합의기구를 발족시켜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정치적으로 세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이 표류하는 이유는 IMF에서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노동계가 요구하는 민주적 개혁 사이에서 정책의 기조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IMF는 재벌개혁 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시장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외국자본이 투자할 수 있는 투자환경을 개선하는데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각종 행정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국가규제 철폐가 제시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두 가지 경제정책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기존 기업체들의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구조조정 촉진 책이다. 이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하여 부채비율을 200%로 낮추도록 하고 은행의 경우도 BIS 8%를 넘지 않도록 하여, 한국 기업들이 보여준 과도한 차입경영을 막기 위한 '부실경영 방지책'이다. 다른 하나는 계열기업의 상호지급보증과 결합 재무제표 작성 요구 등을 통해 '기업 경영의 건실화'를 꾀하는 경영 합리화 정책으로 구성된다. 이는 선단식 경영을 통하여 비효율적이면서도 경제를 지배하는 전근대적인 재벌체제를 재편하기 위해 도입한 정책이다. 이러한 개혁이 성공한다면 한국의 기업들은 보다 효율적으로 경영될 것이고, 효율성이 아닌 시장독점을 통한 기업발전은 크게 어려워질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재벌의 구조조정으로 알려진 재벌개혁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IMF가 요구하는 또 다른 개혁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정리해고제 도입이다. 이는 한국의 재계가 요구하는 내용이기도 하였으며, 정리해고제 뿐만 아니라 근로자파견제 등을 포함하여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야기하는 핵심적인 사항들이다. 재벌의 요구와 IMF가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는 기업의 필요에 따라서 인력을 자유롭게 활용한다는데 주목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용불안의 정도는 크게 높아질 수밖에 없다.
우여곡절 끝에 1998년 2월 제1기 노사정위원회 합의 사항안에 정리해고제가 포함되었다. 이는 1997년 3월 김영삼 정부하에서 이루어진 개정 노동법보다 경영상의 해고 요건을 강화시켜 해고를 더 어렵게 만들었지만, 실제 벌어지고 있는 해고는 이러한 법과는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대량 해고를 통한 경영합리화가 모든 부문에서 지배적인 경영 합리화 전략으로 등장하고 있다. 대량 해고를 통한 기업의 경영 합리화는 기업의 기술혁신을 통한 기업 생산성 향상 대신에 임금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과잉 노동력'을 줄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실업자가 급증하여 지난 5개월 사이 실업자가 100만명 이상 증가하는 실업대란을 맞고 있다. 경기가 침체되자 과잉 노동력의 해고가 이루어지면서 경기침체의 고통은 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재벌기업의 경영 합리화와 대규모 노동자들의 생존권 박탈이었다. 재벌 기업들은 합리화를 통하여 보다 건실하고 생산성 있는 조직으로 탈바꿈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은 생존 자체가 어려운 고통의 나날을 겪고 있다. 가족의 해체와 노숙자의 급증 등으로 사회적 위기로 전화되고 있는 실업대란은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이 신자유주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이다. 물론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기업의 도산과 이에 따른 실업자의 증가가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실업자의 수와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다 적극적인 국가 개입이 이루어졌다면, 실업문제는 현재와 같이 심각한 상태로 진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가 당연시 받아들이는 정리해고제가 불법적인 차원에서 적용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없이는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제도적인 혁신 ?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당선과 함께 1998년 1월 14일 제1기 노사정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노동, 자본, 국가가 국내 경제 운영의 기본틀을 합의를 통하여 만들어 낸다는 유럽형 조합주의적 노사정위원회와는 달리 제1기 노사정위원회는 IMF가 요구하는 개혁을 노동계, 재계, 정부가 합의를 통하여 이루기 위해 조직되었다. IMF 외환위기 하에서 급작스럽게 조직된 노사정위원회는 IMF로부터 금융지원을 받기 위하여 여러 가지 핵심적인 노사문제를 서둘러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한 주요 내용들이 민주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에 의해 거부되면서 노사정위원회의 대표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노사정위원회가 유럽식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노동계 대표의 대표성이 문제가 된다. 대표성이 없을 경우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한 사항들이 노동자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성 문제는 세 가지 차원에서 제기된다. 먼저 노동조합 조직률과 관련된 문제로서 노조 조직률이 낮은 경우 노동조합은 노동자 대중을 대표할 수 없기 때문에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한 사항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제한된 노동조합원에 한정된다. 유럽의 경우 조합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노조조직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문제는 상급 노조조직의 통합 문제이다. 노조 조직률이 높더라도 노조가 분산되어 있으면, 상급 노조조직의 통제력이 약화된다. 더구나 상급 노조 단체들 간의 경쟁이 발생하는 경우 노동계의 이해가 체계적으로 노사정위원회에서 반영되기 힘들다.
한국의 경우 노조는 기업별 노조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노사정위원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노총과 민주노총이 다양한 조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반영하기 힘들다.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노동계 대표가 체계적으로 조직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문별, 지역별, 산업별로 통합된 노동조합연맹에 의해서 부문별, 지역별, 산업별 노동조합원들의 이해를 수렴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가 중앙조직에 의해서 대변되면서 노사정위원회 내부에서 협상을 통하여 반영되어야 한다. 이러한 조직구조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노동계 대표들은 자칫 자신들의 의견만을 반영하게 될 수도 있다.
세 번째 노동계는 정치적 대표 기구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힘보다는 노조 자체의 힘에 의존하여 요구를 관철시킬 수밖에 없다. 유럽의 조합주의가 좌파 정당이 강하여 정치적 수단을 노동계가 갖고 있기 때문에 노조가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노동계를 대표하는 정당이 없는 상태에서 노동계의 영향력은 대단히 제한적이며 또한 주변적인 위치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자본과 국가의 연합이 지배적이었고, 노동은 철저하게 배제되었기 때문에 노동의 대 사회적 영향력은 매우 제한된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없기 때문에 노사정위원회에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결국 노동조합 자체의 조직력과 파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사정위원회 제도는 외형적으로 유럽의 조합주의적 타협 제도와 유사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전혀 다른 제도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는 주체들 사이의 불신이 매우 높기 때문에 노사정위원회 자체가 타협을 통하여 시대적 요구에 맞는 타협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아직도 기업은 노조를 민주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만든 합법적인 조직이라는 점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노조 자체를 부정하려는 강한 '반노조주의'를 보이고 있다. 서구의 자본가들과는 달리 한국의 자본가들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노조관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도 오랫동안 억압적으로 노동통제를 해온 관행을 벗어나야 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민주적 노사관계를 새로운 관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노사관계를 담당하는 조직과 공무원들은 권위주의 시대의 관행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또한 노동계도 협상을 통한 타협을 어용으로 보는 관행이 있기 때문에 노사정위원회에서 노동계 대표들의 활동은 크게 제약되어 있다.
노사정위원회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국적인 수준에서 노동조합 체제의 재편과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가 요구된다. 노동조합 체제의 재편을 통하여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한 노동계 대표가 조직노동자들을 제대로 대표한다는 대표성과 노동자들의 이해에 따라 활동한다는 호응성을 확보할 수 있다. 대표성과 호응성이 문제가 되는 경우 노사정위원회는 실질적인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노동계급이 독자적으로 정치적인 힘을 갖지 못하는 경우 노사정위원회 자체에서 노동계는 쉽게 고립될 수 있다.
진정한 개혁을 위하여
노동정책은 거시적인 경제정책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노동정책만으로 정책의 성격을 파악할 수 없다.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의 성격 규정도 노사간의 갈등을 둘러싼 정책만으로 파악될 수 없다. 노동운동과 노동자계급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의 틀이 신정부의 노동정책을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신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노동정책의 속성이 IMF 외환위기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IMF 외환위기가 없다면 어떤 노동정책이 실시되었을까 하는 질문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본질적인 성격은 선택을 강요받는 시점의 정책 선택에서 드러난다는 점을 인정하면, 우리는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이 신자유주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도 매우 다양한 외양을 지니고 있다. 김영삼식 신자유주의와 김대중식 신자유주의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영삼식 신자유주의는 정치적으로는 새로운 권위주의를 보여주며 경제적으로는 무한경쟁을 내세워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인데 반하여, 김대중식 신자유주의는 어느 정도 국가가 노동과 자본간의 관계에 중립적으로 개입하려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세련된 신자유주의라고 볼 수 있다.
바로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에서 나타나는 딜레마는 '세련됨'에 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다 민주적으로 노동자들의 활동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려는데 있다. 필연적으로 신자유주의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약화시키게 되는 반면에,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촉진시키게 된다. 특히 권위주의 시대 억압되었던 노조활동이 합법화되고 활성화되는 경우 신자유주의는 사회적인 차원에서 거부될 수 있다. 한국의 상황은 바로 김대중 정부가 정권교체를 통한 야당 대통령 후보의 권력 장악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민주적 정치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바로 동일한 정부가 경제활성화를 위하여 기업 구조조정을 추구하고 있다. 정리해고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기업의 경영합리화는 노동자들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삶을 위협하게 된다. 서구와 같이 사회적 안전망이 발달되어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해고는 곧바로 생존의 위협이 된다.
정치적 민주화에 걸맞는 노동정책은 과거 권위주의하에서 발전되었던 경제체제의 체질개선과 새로운 민주적 질서를 노사관계에서도 실현시키려는 의지를 담아야 할 것이다. 권위주의의 산물인 반노조주의를 타파하기 위하여 보다 심도 있는 노사관계 개혁이 요구된다. 이는 법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수준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법 따로 현실 따로'인 현실에서 보다 적극적인 행정통제가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를 토대로 한 노동정책은 노동자들의 권익약화와 불만을 낳고 궁극적으로는 정권의 위기를 낳는 요인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다.
현재 신자유주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이 노동계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신자유주의 틀을 벗어나야 한다. 노사관계의 민주적 개혁을 추구하는 노동정책이 도입되고 실시되는 경우 비로소 김대중 정부의 노동정책이 노동자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현재와 같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고 있는 세 마리의 토끼(IMF 요구, 재벌 요구, 노동계 요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선택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이 아니라 무엇이 정책의 중심을 이루어야 하는가 하는 선차성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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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정/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