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푸른 새순이 돋듯이
편집기획실
우리나라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에는 두 가지 큰 대회가 있다. 그 하나는 89년에 와서야 세계 노동절 100주년 기념행사를 노동자의 손으로 치루면서 자기 자리를 찾게 된 노동절 대회이고, 다른 하나는 88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이다. 이 두 대회는 참 공교롭게도 상·하반기로 나뉘어져 있어 한 번은 포문을 여는 자리로, 나머지 한 번은 열었던 포문을 닫고 그동안 흩어져서 열심히 싸웠던 서로를 격려하고, 새로운 힘을 축적하는 자리로 활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노동절은 권역별로, 노동자대회는 중앙집중으로 치뤄져왔다. 그 한 표현으로 노동절 때는 가벼운 차림의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노동자대회 때는 침낭에, 배낭에 한 살림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을 예사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렇게 매끄럽게 포문을 열었다 닫었다 했던 적이 거의 없다. 매년 노동절은 이미 3월을 전후로 전개되기 시작한 임단투 동력을 중간 점검하거나, 투쟁의 집중점을 만드는 자리였고, 11월의 노동자대회는 노동법과 관련된 또다른 투쟁을 본격화하는 자리였다. 결국 1년 내내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만큼 이 두 대회는 한국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투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반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98년 노동절 역시 투쟁의 날이었지만, 올해는 국내외적으로 '남다른 노동절' 이었다.
40분 집회, 6시간 가두 시위
집회 이전부터 이미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진영은 대체로 '400만 실업자를 눈앞에 두고 있는 현재, 노동자가 처한 상황은 투쟁이 불가피하다, 2기 민주노총 지도부는 확실히 싸울 것이다, 고용보장 정리해고 철폐 등의 싸움을 산별연맹, 또는 단사별로 해서는 더 이상 전선을 치기 어렵다, 따라서 전국적 전선의 설치가 시급하다.'는 상황인식이 있었다. 바로 이러한 판단들이 이날 집회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우선 매년 지역별로 해 오던 노동절 행사를 중앙집회로 잡은 것은 흩어져 있는 고용불안에 대한 불만을 모아내고, 전국적인 투쟁분위기를 형성하여 공세적인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만명이 예상되는 집회의 장소를 종묘로 선택한 이유 또한 마찬가지이다. 공식행사에서 발언 비중을 낮추고 가두 행진에 초점을 맞춘 것도 그러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제부터 투쟁을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선포를 의미한다.
그 선포의 내용은 '고용안정쟁취·민중 생존권 사수'라는 대회명칭에서부터 민주노총 이갑용 위원장의 발언과 결의문에 이르기까지 잘 나타나고 있다. 이갑용 위원장은 "노동자의 투쟁만이 현재의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고용안정을 쟁취할 수 있다" "지도부를 믿고 힘차게 투쟁해 나가자"고 힘주어 말했다. 결의문을 통해서는 * 정리해고, 근로자파견제 즉각 철폐 *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용유지 * 부당노동행위 척결 * 공공부문의 일방적 구조조정 중지 및 고용안정협정 체결 * 20조의 실업기금 마련과 실업자 생활보장 * 재벌해체, 재벌 총수의 재산환수 * IMF와의 재협상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이 요구는 현재 민주노총 5대 요구로 재정비되어 정부측에 제안된 상태이다.
그런데 집회가 신속하게 끝난 것은 좋았지만, 고용안정·민중 생존권 사수를 내건 집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농민, 빈민, 철거민 등 민중연대 발언이 없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35,000여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가한 이날 집회는 각 연맹들이 사전집회를 통해 5, 6월 총력투쟁을 결의하는 등 고조된 분위기로 진행되다, 집회 막바지에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행진이 불가능해 지자, 늦은 밤까지 을지로, 청계천, 종로 등에서 산발적인 가두시위로 전개되었다. 가두시위는 저녁 8시가 다 되어서야 명동성당에서 2차례의 집회로 마무리되었다. 명동성당 마무리 집회에서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신속한 대응이 눈에 띠었다. 집회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최루탄을 쏘아댄 정부와 경찰에 강력 항의하고, 경찰을 고소·고발하겠다는 기자회견은 적절한 대응이었다.
물론 이번 노동절 대회가 차분한 보도행진으로 마무리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깝게는 3월에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멀게는 총파업 철회사태 이후 노동대중의 분노가 체감되면서 과거와는 다른 집회가 될 것이라고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누구나 짐작한 결과에 비하면 전체 짜임새는 좀 엉성했다. 치고 나가지도 못하고, 턱없이 밀리지도 않는 바람에 교착상태가 3시간여 유지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간이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다.
학생운동, 침체를 벗어나 새로운 투쟁으로 전진
이번 대회에 7,000여명이 참석한 학생들 역시 고용안정쟁취, 민중생존권 사수를 주요 슬로건으로 들고 나왔는데 이는 노학연대의 의미도 있지만, 예비 노동자에서 예비 실업자로 전락하게 될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생존권 투쟁의 의미도 있다. 휴학이 급증하고, 군대 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억지로 졸업을 연기하거나, 대학원에 지원자가 몰리고 있는 상황은 모두 실업대란, 고용불안이 원인이기 때문이다. 통계상으로도 신규 실업자는 97년 237,000명을 헤아리고 있다. 한 유인물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해고된 아버지와 취직 못한 딸 아들'이 함께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이런 사실 앞에 "운동권 일부 학생들은 또 걸핏하면 폭력시위로 사회 혼란을 야기시켜 외국인들의 투자의욕을 꺾어 놓았다. 그래놓고도 이제 와서 또다시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조직적인 폭력시위가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은 이 사회를 망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조선일보, 5월 2일)며 정부의 단호한 처사를 요구하는 언론의 태도나, "집회는 합법 - 시위는 불법" "정당한 요구는 환영, 불법요구는 단호히 대처" 하겠다는 정부의 발언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이것은 노학연대의 고리를 차단함과 동시에 민주노총을 2기 노사정위원회로 견인하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더 깊게는 학생뿐만 아니라 제 민주세력과 민주노총의 연대를 차단하고, 노동자·민중의 격렬한 분노를 의도적인 폭력행위로 몰아 사회로부터 고립시킨 뒤, 이번 노동절 투쟁이 곧 이어질 총파업 투쟁의 전초전으로 기능할 수 없도록 예봉을 꺾어 보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그 의도는 실패로 기울고 있다. 적어도 이번 노동절 투쟁은 다음의 몇 가지 의미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투쟁의 새로운 출발점
금속연맹은 이번 노동절 투쟁은 '정리해고에 대한 강력한 저지선을 구축하는 의미가 있으며, 준비기 단계의 투쟁을 종합정리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접어드는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이번 노동절 투쟁은 몇 가지 새로운 의미가 있다.
첫째,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투쟁의 구심으로서 대중적으로 각인되는 자리였다. '투쟁하는 지도부, 혁신하는 지도부'를 내세웠던 2기 지도부는 규약에 보장된 3년의 임기를 거부하고 1년 임기의 투쟁과 혁신의 지도부로 자신의 역할을 규정해 왔다. 이번 노동절 투쟁은 이러한 지도부의 의지가 대중적으로 공표되는 자리였다.
둘째, 민주노총의 위상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였다. 노동자·민중 생존권의 최후의 보루,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추진력으로서의 민주노총의 위상은 이제 '말'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였고, 이번 투쟁은 이를 확인하게 하는 자리였다. 이 날 집회에는, 88체육관에서 점잖게 노동절 행사를 하고 있던 한국노총 행사를 박차고 한국노총 소속 모나미 노조원들이 참여해 많은 박수를 받았다. "싸울 수 있는 조직을 찾아왔다"는 모나미 노동자들의 말은 민주노총이 현시기 자본과의 투쟁에서 왜 최후의 보루일 수밖에 없는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셋째, 경제위기와 자본의 국가경쟁력 강화 논리에 맞서 지난 2월의 좌절과 무기력을 극복하고 새롭게 투쟁전선을 구축하는 출발점이었다. 이번 노동절 투쟁은 5, 6월로 예정된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다. 이것은 지난 노사정위원회와 국회를 통과한 노동악법에 대한, 그리고 투쟁을 자제해야만 경제위기가 극복된다는 자본의 요구와 협박에 대한 대중적 거부이기도 하였다.
넷째, 이 날을 기점으로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권과의 대치선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50년만의 정권 교체, '국민의 정부' 역시 신자유주의의 첨병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노동에 호의적이라는 김대중의 거품 이미지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서로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는지 분명해 진 것이다.
다섯째, 우리의 노동절 투쟁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세계 노동자의 저항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날 전세계 노동자들은 날로 강화되는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실업문제의 해결, 노동시간의 단축, 노동법 개악 반대 등을 내걸고 투쟁하였다. 세계 곳곳에서도 비슷한 슬로건으로 투쟁이 전개되었었는데, 전후 최악의 경기침체와 3.9%에 달하는 실업률에 시달리고 있는 일본에서는 전국 1천1백여 곳에서 200만명의 근로자들이 참가하는 항의집회가 열렸으며, 일본 최대의 노조인 '연합'은 7년만에 처음으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대만에서도 노동절 사상 최대인 2만여명의 노동자들이 타이베이에서 가두행진을 벌이며 '고용보호 확대'와 '동등한 교육기회 보장'을 요구했다.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도 수천명의 근로자들이 실업사태에 항의하고 '주당 35시간 근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총파업 5일째에 노동절을 맞이한 덴마크에서는 10만여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항의집회를 가졌다. 이제 '만국의 프로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맑스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으로 들리고 있는 것이다.
1889년 제2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제창된 세계 노동자의 날 '노동절'이 올해로 109년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100여년전 8시간 노동제를 외쳤던 미국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 시공(時空)을 뛰어넘어 현재화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가 그대로 되살아 나는 일은 없듯이, 지금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현실은 초국적 자본의 신자유주의 지배가 전면적으로 관철되느냐, 노동자·민중의 투쟁으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여 고용보장과 위기탈출을 동시에 보장받느냐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이 두 길 중에 한 길은 노동자가 선택해야 할 길이고, 또한 노동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97년 수도권 노동절은 88체육관에서 전야제를 하고 여의도에서 행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풍선이 머리에 남는 기억이다. 98년 노동절은 민주노총이 내부 통일성을 강화하고, 지도력을 복원한 날로, 그래서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한국 노동자의 투쟁이 푸르른 5월에 새순이 돋듯이 돋아난 날로 기억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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