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社會評論] 112호에 실린 글을 번역한 것으로 아시아 통화위기의 배경과 전개과정을 통해 제국주의의 현재적 모습을 밝히고 있는 글이다. 한국의 경제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번역하게 되었다.





아시아 통화위기의 진실

- 폭로된 현대제국주의의 약탈자로서의 정체 -

야마시타 이사오(山下勇男)

전후 노동운동사 연구가




미국을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1960년대이래 이른바 개발원조를 통해서 발전도상국에 다국적기업의 생산거점을 구축하여 이들 국가들을 세계시장에 편입시켜 왔다. 80년대로부터 90년대에 걸쳐 일어난 역사적 격동,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해체에 의해서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더욱 확대되어 바야흐로 전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는 이 생산양식에 고유한 모순 - 즉, 과잉자본의 발생에 수반하는 곤란들을 배제할 수 없었다. 가치를 실현할 수 없는 과잉자본이 투기의 기회를 찾아서 세계를 뛰어다니고 있다. 여기에 자본주의가 빠져 있는 경제위기의 본질이 있다.

97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타이의 바트(Baht)가 국제적 투기꾼들의 투매(投賣)로 크게 폭락하였다. 이를 계기로 통화위기의 물결은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들에, 이어서 아시아 신흥공업국들(NIES)에 미쳤다. 10월말에는 홍콩의 주가가 급락하고, 순식간에 세계의 증권시장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타이, 인도네시아, 한국이 거액의 대외채무를 껴안고 제국주의 금융지배의 국제기관인 IMF(국제통화기금)에 항복하였다. 이 지역의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은 과잉자본의 처리를 한 몸에 떠안고, 고난에 찬 새로운 투쟁을 개시하고 있다.

바트가 폭락하고 나서 10개월, 홍콩의 주가가 폭락하고 나서 반 년.

이 글의 목적은 이 기간의 추이를 되돌아보면서, 발생한 사태의 배경과 본질, 현국면의 특징, 금후의 전망을 지켜보는 데에 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구조변화

70년대 이후 관측된 금융위기 현상들을 더듬어 보면, 이번의 아시아 통화위기는 결코 특수·예외적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원래 하나의 흐름에서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0년대 이래의 주요한 현상을 열거하자면,

(1) 70년대 초두,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석유제한 전략의 발동으로 중동의 산유국에 쌓인 이른바 오일달러가 미국으로 환류되고, 그것들이 주로 중남미의 발전도상국에 대부되어 멕시코 등에서 채무위기를 불러 일으켰다. 중남미 발전도상국의 80년대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불렸다.

(2) 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서 미국, 이어서 일본에서 버블(거품)경제가 붕괴되고, 금융기관이 껴안은 불량채권이 표면화하였다. 일본자본주의가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음은 주지하는 대로이다.

(3) 92년부터 93년에 걸쳐서 유럽에서 파운드(poundsterling)나 리라(Lira) 등이 폭락하여 어쩔 수 없이 ERM(환율기구)으로부터 탈퇴하였다. ERM은 EC(유럽공동체) 가맹국간의 환 시세를 상하 3.5%의 변동폭에서 조정하는 제도였는데, '파운드·리라 투매 - 마르크 매점' 투기를 맞아 변동폭을 15%로 확대하고서도 지탱하지 못하고, 93년에 실질적으로 붕괴되었다.

(4) 94년부터 95년에 걸쳐서 멕시코에서 다시 통화위기가 발생하였다. 95년 1월의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의 발효를 앞두고,(주1) 멕시코 정부는 크리스마스 직전에 갑자기 페소(peso)의 대(對) 달러 환율을 절하, 고정환율제로부터 변동환율제로 이행하였다. 그것이 미국의 이자율 인상과 겹치면서 그것을 기화로 달러가 일제히 인상되고, 멕시코 정부는 채무불이행의 갈림길로 내몰렸다.

80년대 중반이래,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일어난 특징적인 변화 --- 즉, '실물경제와 금융경제의 괴리'에 경제학자의 관심이 쏠리게 되었다. '재화·서비스 무역보다도 자본이동이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된'(宮崎義一, {複合不況} 中公新書, 1992)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존재방식은 IMF체제의 붕괴, 주요국의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을 중대한 여건으로 하여 생겼다. 본격적인 조사가 처음으로 이루어졌던 86년에는 환(換) 거래는 재화 및 서비스 무역거래의 17배였다. 이것 자체가 놀라운 숫자였는데, 그 규모는 그후에도 한층 확대되어 95년에는 36배까지 팽창했다.

금리나 외국환(外國換)의 선물거래는 72년에 시카고에서 시작되었다. 화폐는 바야흐로 상품 자체로 되었다. 컴퓨터와 통신네트워크의 발달로 세계의 금융시장은 순식간에 연결되고, 환 시세의 작은 변동을 둘러싸고 거래가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고도의 수학적 지식과 컴퓨터 기술을 구사한, 데리버티브(금융파생상품)라고 부르는 투기적 거래수단들이 개발되었다. 이렇게 해서 금융거래는 더욱더 투기적 성격을 강화하게 되었다.

제2차 대전 후의 국제통화체제

제2차 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기본적 틀을 정한 IMF체제에 1971년 커다란 전기(轉機)가 찾아왔다. 당시 미국 대통령 닉슨이 그 해 8월에 성명을 통해 일련의 달러 방위책(防衛策)을 발표하고, 외국의 공적기관이 보유한 달러와 미국이 보유한 금과의 교환정지를 발표하였다(닉슨 쇼크). 이에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IMF체제가 붕괴되었다. 같은 해 12월 스미소니언 협정에 따라서 주요 국가 통화의 대(對)달러 환율의 절하가 실시되었지만, 달러 위기에 제동이 걸리지 않고, 73년에 주요 국가들은 차례로 변동환율제로 이행하였다.

IMF는 제2차 대전 후의 미국의 압도적 경제력을 배경으로 46년에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세계은행)과 함께 설립되었다. 미국의 금준비에 기초를 두고, 본래 미국 국내에서밖에는 통용되지 않는 달러에 국제결제수단으로서의 강제력을 부여했다. 각국의 통화는 달러를 매개로 하여 금과 결부되고, 공적기관이 보유하는 달러에 한해서 미국이 보유하는 금과 교환할 수 있었다. 결국 미국의 국제수지가 흑자 혹은 균형을 유지하고, 외국의 공적기관의 청구에 따라서 금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이 이 제도가 성립하는 전제조건이었다.

IMF체제는 발족후 수년이 되자 재빨리 모순을 노정한다. 제2차 대전 전에는 쏘련 한 나라였던 사회주의 국가가 전후 동유럽으로 확대되고, 세계체제로서 성립하였다. 49년 중국혁명의 승리가 상징하는 것처럼,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성립에 의해 원호를 받는 형태로, 식민지 국가들이 차례로 민족독립을 달성하였다. 세계의 역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고, 미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재건·부활 사업을, 전쟁으로 피폐된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 지배층의 자력(自力)에 맡길 여유가 없었다. 이리하여 마샬플랜(Marshall Plan)이나 돗지라인(Dodge-line)이 미국의 재정지출에 의해서, 이른바 달러살포정책으로서 추진되었다. 그것은 IMF체제가 애초 상정하고 있지 않은 사태의 전개였다.(주2)

유럽 주요 통화의 교환성이 회복된 57년에(주3) 최초의 달러위기가 발생하였다. 미국의 재정적자의 확대, 부흥된 서유럽 국가들의 수출경쟁력의 회복 등을 통해서 미국의 국제수지가 적자로 전락하고, 미국이 방류하는 달러가 이제 미국으로 환류되지 않고 서유럽에 머물게 되었다(유로달러). 금풀(gold pool)의 결성(1961), IMF 출자금의 거듭된 증자, 금의 이중가격제로의 이행(1968), IMF의 특별인출권(SDR)의 창출(1969) 등등, 60년대 10년간에 전개된 달러 방위책 전반을 개관하는 일은 지면관계로 생략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압도적 규모를 자랑했던 미국의 공적준비금이 유출되기 시작하고, 60년대 중반이래 베트남 인민의 민족해방투쟁에 개입하여 상처가 커짐에 따라서 금유출 속도는 한층 빨라져서 71년에 드디어 달러-금 교환정지로 내몰렸다. IMF는 그것 자체가 내포하는 고유의 모순에 의해서만 붕괴된 것은 아니다. 두 체제간의 대립을 주요한 모순으로 하는 세계적 계급투쟁의 귀결로서 붕괴된 것이다.

불안정 요인은 '과잉달러'의 숙폐(宿弊)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 요인으로서의 과잉자본의 존재, 그 국경을 넘는 이동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금본위제의 붕괴 이후 계속해서 자본주의 경제가 부단히 시달림을 당해온 숙폐이다. 금의 뒷받침이 없는 관리통화제도를 채용하는 것은 시장에 유통하는 상품총액을 상회하는 통화의 과잉상태를 허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잉 통화의 존재는 일국 규모로 관리 가능한 규모에서라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재정정책에 일정한 자유를 준다. 자본주의 체제의 존속을 위협하게 된 계급투쟁의 발전이 각국의 독점부르주아지로 하여금 관리통화제도를 채용하게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60년대의 달러 위기의 진행, 71년의 IMF체제의 붕괴를 거쳐 73년에 주요 국가들의 통화가 차례로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결과, 국제적인 자본이동은 관리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본래는 재화의 거래에 수반하여 발생하는 환 거래를 투기의 수단으로 변화시켜 버렸다.

주요 국가 통화가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것을 계기로 하는 국제통화위기, 그리고 그 위기를 준비한, 달러를 기축으로 하는 제2차 대전 후의 국제통화체제의 붕괴야말로 세계 각지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통화위기의 진상이다. 97년부터 98년에 걸쳐 아시아를 습격한 일련의 통화위기도 그 근본적 원인을 파고 들어가 보면, '과잉 달러'의 존재에 도착한다. 통화 폭락의 진원지는 타이도, 홍콩도, 일본도 아니고, 미국이다.

세계무역을 확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통화가치는 안정되어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73년에 주요 국가의 통화가 변동환율제로 이행한 이후에 환 시세의 안정을 회복시키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85년의 G5[선진 5개국 회의] 플라자 합의는 주요 국가의 금리면에서의 정책협조에 의해서 환율을 일정 수준으로 유도·안정시키려는 시도였다. 이 과정은 87년 10월에 이르러 미국과 독일의 보조가 흩어지고 블랙 먼데이(black Monday)가 발생하자 파탄되었다. 92년에는 주요 국가의 국제금융업무에 종사해오다 은퇴한 전문가들이 IMF의 발상지인 미국의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여 브레튼우즈 개혁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IMF 설립을 위한 준비회의가 열린 지 50년째인 94년에 열리는 국제통화회의에 대비하여, G7[선진 7개국 회의]의 상설기관화나 목표환율권(目標換率圈)의 설정 등 다수의 선택지로 이루어진 국제통화제도 개혁안을 마련했으나, "현역 (통화) 마피아들의, 거의 냉담하다고 할 정도의 평가"밖에 받지 못하고 파탄되었다(藤井良廣, {通貨崩壞 --- 大亂期の円·ドル·マルク} 日本經濟新聞社, 1995).

그런데, 국제금융시스템의 불안정·혼란이야말로 헷지펀드(hedge fund) 등의 투기꾼에게 폭리를 탐한 활약의 무대를 제공한다. 이 사실을 증명한 것이 다름 아닌 97∼98년의 아시아 통화위기였다.

타이 바트 폭락를 일으킨 사람들

아시아 통화위기의 책임이 개발도상국 측에 있는 듯이 주장하는 논의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간에 횡행하고 있다. 투기꾼들에게 이용할 틈을 주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日本經濟新聞}의 기자는 "펀더멘탈스(성장율·물가상승율·경상수지 등 경제의 기초적 조건 --- 인용자 주)를 일탈한 허구의 환율이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藤井, 앞의 책)하다고 떠들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바트, 루피아(rupiah), 원(圓) 등의 통화가치가 단기간에 반감해버릴 정도로, 아시아 각국 경제의 기초적 조건이 그 정도로 악화되어 있던 것일까?

확실히 그러한 요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역수지 적자는 증가 경향에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언설(言說)이 짐짓 간과하고 있는 것은, 제국주의를 뒷방패로 다른 나라의 약점을 이용, 인민의 고혈(膏血)을 짜내 치부를 하고 있는 금융기관들의 책임이다. 바트 폭락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 헷지펀드의 투기적인 달러 매점, 바트 투매였음은 완전히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 수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96년 8월, 97년 2월, 5월에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씨는 바트 투매, 달러 매점을 해 왔다. 그 규모는 5월 13, 14 양일간에 40억 달러로, 97년 전반기(前半期에)에 60억 달러였다고 한다. 조지 소로스 씨가 약간의 보증금을 은행에 가지고 가서 바트화를 대량으로 차입했다가 그것을 잇달아 팔아버린다. (중략) 그리고 6월말에 그가 재차 공격을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상반기에 60억 달러나 외화를 잃고, 선물(先物)을 포함하여 외화가 거의 고갈된 타이 중앙은행에는 바트를 더 이상 방어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중략) 어떻든 경제대국의 금융집단이 신흥의 작은 나라 경제를 농락하는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다."(向壽一, [中國·元の切り下げがバブル崩壞の引き金を引いた], {エコノミスト} 97. 10. 7).

"7월 2일에 바트는 달러와의 펙(peg)제[고정환율제]로부터 변동환율제로 이행하고 헷지펀드 측은 승리를 거두었다. {타임}지 97년 11월 3일자에 의하면, '늑대는 30억 달러 이상을 수중에 넣었다.'"(今井琊, [ソロスの次の標的は歐洲通貨統合], {週刊東洋經濟}, 97. 12. 20).

헷지펀드는 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서 미국에서 급성장한 데리버티브(금융파생상품) 거래의 일종이다. 헷지란 '울타리'란 뜻으로 리스크 헷지(risk hedge)라고 불리는 것처럼, 본래는 상품의 선물거래에 따르는 리스크(위험)의 회피수단으로서 발달했는데, 국제통화위기 등과 결부되어 바야흐로 세계금융시장의 최대 교란요인이 되었다. 헷지펀드의 참가자격은 파트너라고 불리는, 500만 달러(약 6억엔) 이상을 가진 자산가이다. 사람 수의 상한은 펀드 메니저(조지 소로스는 이 펀드 메니저이다)를 포함한 100명. 그 중 다수는 바하마나 버뮤다 같은 세금천국(조세회피지역)에 설립된다.

제국주의 국가를 뒷방패로 하여

헷지펀드의 규모는 정확한 통계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파트너가 5,000명 이상, 운용자산은 3,000억 달러 혹은 4,000억 달러라고 한다. 88년의 운용자산은 520억 달러로 추정되었기 때문에 최근 9년 사이에 6∼8배 팽창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가운데 최대의 것은 조지 소로스가 운용하는 퀀텀펀드로서 그룹 전체의 운용자산은 200억 달러이다.

그런데 헷지펀드의 문제는 그 규모가 아니다. 세계의 금융시장을 뛰어다니고 있는 자금량에서 본다면 4,000억 달러는 결코 큰 금액이 아니다. 헷지펀드의 '실력'은 가지고 있는 자금량의 몇십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금융적 술수에 있다. 앞의 인용에서도 나오지만, 소액의 보증금(한번 투기할 때마다 1,000만 달러?)을 쌓고 은행에서 현지통화를 빌려 외국환시장에서 달러와 교환한다. 그 경우 외환시장의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효과는 최대로 된다. 헷지펀드는 금융거래에 수반하는 리스크를 회피하는 분산형 투자라는 상식에 반해서 거액의 자금을 한 점에 집중한다. 일단 폭락이 시작되면 이 추세가 강화되도록 현지통화를 보유하고 있는 금융기관이 일제히 달러 매점에 나선다. 현지통화가 충분히 저락한 적당한 때를 가늠하여 다시 사서 차입금을 은행에 갚고 보증금을 지불하며, 수중에 남은 달러 자금을 챙긴다. 조지 소로스는 이 '달러 매점 바트 투매'로 폭리를 취했지만, 그 후의 주가 폭락에서는 20억 달러의 손실을 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초 이래의 수익율은 18%라는 고율을 기록하였다({エコノミスト} 98. 12. 16.).

헷지펀드의 공격목표는 결코 개발도상국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92년부터 93년에 걸쳐서 영국의 파운드나 이탈리아의 리라 등 유럽의 무역수지 적자국의 통화가 대(對) 마르크 절하를 내다보고 투매되어 어쩔 수 없이 유럽환율기구(ERM)를 탈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승자가 된 조지 소로스는 일주일에 15억 달러를 벌고, "잉글랜드은행을 때려눕힌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헷지펀드는 언뜻 보면 무국적의 투기꾼 집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국 정부라고 하는 어엿한 뒷방패가 있다. 말레이지아의 마하티르 수상이 아시아 통화폭락의 방아쇠를 당긴 조지 소로스를 비난했을 때, 미국의 루빈 재무장관은 방만한 경제가 파탄한 책임을 슬그머니 전가하려 한다고, 간접적인 표현이지만 소로스를 변호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아시아 통화위기가 폭발하기 전 해에 클린턴 정권은, 파트너 수의 제한 철폐, 설립절차의 간소화, 기관투자가의 진입 제한 완화 등으로 이루어진, 헷지펀드 진흥촉진법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1996년 증권시장개혁법'을 시행하였다(今井琊, {圖解 新版デリバティブ} 中經出版, 1997).

개발도상국 경제를 파멸의 갈림길로

이마이(今井琊)는 자진해 헷지펀드를 선전하는 사람이지 결코 개발도상국의 편이 아니다. 그러한 그가 아주 적절하게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시아의 신흥세력, 특히 태국이 미국의 '정보기술협정' 체결 요구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었음을 아는가? 96년 11월에 필리핀에서 열렸던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에서 ASEAN국가들과 미국 사이에 정보기술 관련 제품의 관세 상호철폐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 태국의 수뇌부는 이때 'APEC은 개발도상국에 시장개방을 강제하기 위한 장이 아니다. 지금처럼 가면 새로운 식민지주의의 추진기관에 불과할 것이다'라며, '이 회의를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먹어버리는 연못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말레이지아나 인도네시아 등은 이에 가세하여 '금융 서비스 분야에서의 시장개방을 강요하는 미국의 전략은 개발도상국을 불리한 입장으로 몰아넣을 뿐이다. 자유화란 금융 시스템을 조작한다든지 활용한다든지 할 수 있는 대국의 입장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 이번의 아시아 통화위기가 이러한, 미국 측에서 보면 태도가 건방진 아시아의 민족주의에 대한, 환 시세를 이용한 공격이었음은 명백하다"(今井琊, [ヘッジファンドの最新の爲替戰略] {エコノミスト} 97. 11. 10.).

소로스 등 국제투기꾼들은 다른 나라의 약점을 이용하여 거액의 자금을 동원하여 인민의 피땀을 짜낸다. 그리고 제국주의는 이들의 강력한 한패이자 뒷방패로 되어 있다. 이들이 조작하는 자금의 규모로 말한다면, 이들은 단기간에 한 나라의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을 수 있다. 97-98년의 아시아 통화위기는 이 사실을 새삼 증명하였다.

"(금융의 혼란에 의해서) 20년간의 성장은 두 주일만에 상쇄되어 버렸다. 산업이 폐쇄를 강요당하고, 실업이 증대하고, 산업기반의 정비는 정지되고, 정부는 굴복하여 IMF(국제통화기금)에 도움을 구하고 있다. /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호경기 때보다 지금이 낫다는 식의 이야기는 도저히 할 수 없다. 고통은 전보다 훨씬 크다"(뱅쿠버 APEC 포럼에서의 마하티르 수상의 강연. {しんぶん赤旗} 97. 11. 26.).

마하티르는 투기적 환 거래를 감시하고, 무언가 규제장치를 도입하도록 IMF에 요구하였다. IMF는 마하티르의 요구에 응해서, 환 투기가 금융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할 것을 마지못해 약속하였다. 그런데 IMF는 1946년에 설립된 이래, 최대 출자국인 미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다. 클린턴 정권이 헷지펀드의 후원자임을 상기한다면, 답은 저절로 명백할 것이다.

일찍이 떳떳하지 못하게 세상을 사는 '도박꾼 집단'으로 간주되던 조지 소로스에 대한 월가(Wall street)의 평가는 바야흐로 180도 바뀌어서, "선견지명을 가지고 고도의 정치정보와 금융 첨단 기술을 구사하여 시장을 선도하는 집단"(今井, 앞의 책)등이라고 칭송받는 존재가 되었다. 사진으로 보는 소로스의 표정에는, 꺼림칙한 낌새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작년 9월 홍콩에서 열린 IMF·IBRD 총회에 초청되어 강연하였다. 그는 금년 2월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도 초청되어 패널리스트로서 발언하고,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직후인 김대중과 회담하는 등, 세계적 명사의 지위에 출세하였다.

통화위기의 숨은 주역 '엔'

달러를 기축으로 하는, 제2차 대전 후의 국제통화체제의 성립, 그 붕괴로의 과정과 붕괴 후의 과정을 장기적으로 조감(鳥瞰)할 때,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사태는 역시 달러 위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달러는 그 60%를 미국 국외에서 보유하고 있다. 85년의 플라자 합의 이후 세계의 공적준비에서 점하는 달러의 비율이 낮아지고, 마르크와 엔, 특히 마르크의 비율이 상승했는데,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다시 달러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달러는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이전에 잃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달러를 대신할 통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지배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달러는 패권통화로서의 지위를 역으로 강화하고 있다고까지 볼 수 있다.

아시아의 통화위기를 통해서, 각국의 통화가 보다 강하게 달러에 링크되어 왔음이 새삼 부각되었다. 자본주의세계경제는 80년대에, 그때까지의 미국 일극(一極)에서 미·일·독이라는 3극 구조로 변화되었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특히 무역·자본거래의 결제수단에 관한 한, 그 일각을 점해 마땅한 '엔'은 끝내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다. 일본의 수출에서 점하는 엔 표시의 비율은 36%, 수입은 23%에 머물고 있다.

태국에서 통화위기가 처음 표면화했을 때 미국 정부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를 취했다. 태국 '지원'책은 일본이 중심이 되어 IMF 빼고 계획되었는데, 최종적으로는 IMF가 관여하는 형태로 실행되었다. 미국은 한 푼도 내지 않았다. 달러에 대해서 실력 이상의 높은 환율을 설정하여 외자유입의 조건을 확보하려고 한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통화정책은 본래 미국이 강제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시아 각국이 무역수지의 적자를 보충하기 위한 필요에서 어쩔 수 없이 도입한 단기자금을 공급한 것은 주로 일본의 은행과 서유럽의 은행이었다. 96년 말 주요 국가의 대 아시아 융자잔고는 3671억 달러로, 그 가운데 일본이 단연 수위로 1186억 달러(32.3%), 서유럽의 은행과 합해서 3분의 2를 점한다. 미국은 대 아시아 투자에서는 명백히 뒤쳐져 있었다.

95년 4월에 개최된 선진7개국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G7)에서 "(엔 고(高) 달러 저(低)로부터) 엔 저 달러 고로의 질서 있는 반전"이 합의된 후 엔저와 초저금리를 배경으로 아시아에의 단기 달러 자금의 유입이 급증하였다. 엔 캐리트레이드(엔 해외 지참 거래)라든가 외전(外轉; 엔의 외화로의 전환에 의한 운용)이라고 불리는 수법이 그것으로, 초저금리로 조달한 엔을 달러로 전환하여 대부하는데, 미국 루트와 아시아 루트가 있다. 5% 이상인 미일의 금리차에서도 명백한 것처럼, 그리고 미국을 훨씬 능가하는 고금리의 아시아와 비교하면 한층 명백한 것처럼, 일본과 서유럽 국가들의 금융기관은 초저금리로 조달한 엔 자금을 운용하여 거만(巨万)의 부를 획득했다. 이리하여 '엔'은 아시아 통화위기의 '숨겨진 주역'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국정부가 IMF에 수족을 결박당하는 것을 기피하여 미일 양국의 원조를 교섭했을 때에도 당초 클린턴 정권은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클린턴 정권이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는 것은 태국 '지원'책이 확정된 후이고, 아시아의 통화위기가 자국에 파급된 위험성을 인식하게 된 이후이다.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붕괴하기 이전의 세계정세 하였다면, 아마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패권통화 '달러'를 둘러싼 공방

일본정부는 자국의 금융기관이 거액의 불량채권을 안고 있는 데다가 아시아에 빌려준 자금이 회수불능이라도 된다면 세계금융공황의 방아쇠로 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전면적인 '지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부상된 것이 '아시아통화기금(AMF)' 구상이다. 그것은 금융 '지원'을 받는 경우에도 경제정책의 선택 자유도를 최대한 확보하고자 하는 ASEAN 국가들의 의도와, '엔'의 국제통화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일본의 일부 지배층의 의도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ASEAN 국가들의 통화 바스켓 방식은 80%의 비율로 달러와 링크되어 있기 때문에 엔-달러 환율 변동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 94년 중국 인민위안(人民元)의 34% 절하, 그리고 95년 봄 이래의 엔저의 진행은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경쟁력을 삭감하여 무역수지의 적자 확대를 초래했다. 만약 각국의 통화가 '엔'과의 관계를 강화한다면, 엔-달러 환율 변동의 영향을 완화할 수 있다. 바로 '엔 경제권'을 확립할 호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 구상에 대해서 미국정부는 갑자기 반격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AMF 구상은 미국이 빠진 아시아 경제질서의 확립으로 통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의 지배층도 미국의 의향에 반해서까지 단결하여 '엔 경제권'의 확립에 매진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리하여 AMF 구상은 싱겁게 좌절되고 덧없는 구상으로 끝났다.

가까운 장래에 달러의 패권을 위협하는 통화가 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경제의 20%를 점하는 '유로'의 탄생일 것이다. 99년 1월 1일의 발족을 목표로 일전에 제1진에 참가할 대상국의 심사를 끝내 11개국에 의한 발족이 결정되었다. 유럽의 독점 부르주아지는 이 통화통합을 통해서 오랜 현안이었던 달러 지배로부터의 탈각을 노리고 있다. 클린턴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그것을 환영하고 있지만 본심으로는 실패하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이후 각국의 금리차는 어떻게 수렴되어 갈 것인가? 만일 금리차가 메워지지 않는다면, 재차 헷지펀드 등의 표적으로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때, 클린턴 정권이 표명하고 있는 방침과는 다른, 미국 금융독점의 본심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다.

달러의 패권은 결코 안정적이지도 강고 하지도 않다. 그것은 언제나 엷은 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대단히 불안정한 기초 위에 성립되어 있다. 경상수지의 적자 형태로 미국에서 해외로 방류되는 달러가 미국의 재무성증권(국채)을 구입하는 형태로 미국으로 환류하는 구조가 가령 어딘가에서 단절된다면, - 예컨대 자국통화를 방어하기 위해서 미 국채의 보유국이 이를 대량으로 매각하는 경우, 미국 경제는 갑자기 꼼짝 못하게 된다. 그것이 세계경제에 미치는 파괴적 작용은 헤아릴 수 없다.

미 국채가 대량으로 매각된 경우, 금리가 급등하고, 계속해서 사상 유례없는 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미국의 주식시장은 일거에 붕괴된다. 97년 6월에 열린 덴버 정상회담에서의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의 발언을 상기해 보자. 하시모토는 기자회견 석상에서, 미일 자동차 부품 교섭에서 이른바 수치목표 설정을 둘러싸고 미키 캔터 미 통상대표와 충돌했던 95년 당시를 회고하면서, 미 국채를 매각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발언하여 물의를 빚었던 일을. 아시아의 통화위기는 충분히 그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클린턴 정권이 사태의 중대함을 알아채고, 금년 1월 IMF의 캠도쉬 전무이사를 수행하도록 서머스 재무부차관을 아시아 9개국에 급파하고, IMF의 융자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공갈을 치고 돌아다녔던 것은 위기의 파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세계공황에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

아시아에서 폭발한 과잉생산 공황이 본격적으로 세계공황으로 발전하는가 아닌가는 호황을 지속하고 있는 미국 경제에 언제, 어떤 형태로 파급되는가에 달려 있다.

뉴욕시장의 평균 주가는 작년 10월 말 홍콩의 주가 폭락 직후 일시에 7,000달러 가까이 급락했는데, 그후 다시 8,000달러 대를 회복하고, 2월말에는 8,500달러를 돌파하여 9,000달러 대를 엿보고 있다. 미국 경제는 도매, 소비자 물가가 모두 안정되고, 기업의 정보화 투자에 지탱되어 3%대의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98년은 아시아 시장의 수축의 여파로 2%대로 감속될 것이라는 관측이 한결같지만, 일본과 비교하면 안정도가 뛰어나다. 연속 80개월 이상의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 정보화 투자에 의한 생산성의 향상은 '뉴 에코노미'(신경제)론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까지 보인다.

그러면, 미국 경제가 파탄된다면 어떤 경우인가?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그려보자.

태국의 통화위기에서 발단하고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된 과잉생산 공황은 아시아와 관계가 깊은 미국의 하이테크 산업을 습격하여 이 분야의 기업은 일제히 업적 악화에 휘말려 있다. 인텔이나 IBM, 컴팩, 모토롤라,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인 명성의 다국적기업이 아시아 지역에서의 수요의 감퇴를 반영하여 감익결산(減益決算) 혹은 업적 전망의 하향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원래 홍콩의 주가폭락이 뉴욕시장에 파급되었을 때, 맨 앞서 판매된 것은 정보통신 관련 주였다. 태국의 통화위기나 홍콩의 주가폭락은 그에 선행하는 정보통신·가전·자동차 등의 분야의 과잉생산공황의 발현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을 그대로 받은 것은 다름 아닌 ASEAN과 아시아 NIES 국가들 자신이고, 부품생산과 조립공장을 아시아에 두고 있는 일본과 미국이었다. 최근 NEC, 후지츠, 히타치, 후지덴키 등 일본의 주요 반도체 제조업체는 감익결산의 전망과 신규 설비투자의 중지를 차례로 발표했는데, 미국 경제의 장래는 호황을 견인해온 하이테크 업계의 금후의 동향 여하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미국의 무역적자의 확대가 초래할, 달러고로부터 달러저로의 국면의 재전환이다. 80개월 연속되고 있는 경기의 상승국면은 무역적자의 확대과정이기도 하였다(91년 100억 달러에서 96년 1,650억 달러). 아시아 통화의 폭락에 의해서 ASEAN과 NIES 국가들의 수출경쟁력이 회복되고, 그 창끝은 미국으로 향했다. 영향은 벌써 미국의 무역적자의 확대로 되어 나타났다. 3월 19일에 상무성이 발표한 1월의 무역통계에 의하면, 무역적자가 전 달에 비해서 10.5% 증가하고, 92년에 현행방식으로 통계를 공표하기 시작한 이래 최대로 되었다. 대일(對日) 적자는 감소했지만, 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신흥공업국·지역으로부터의 수입이 급증하였다. 금후 미국으로부터의 시장 개방, 수출 자숙, 수입 확대 요구가 강화될 것임에 틀림없다. 조만간에 달러고는 임계(臨界)에 달할 것이다.

과잉생산공황의 부담은 아시아에

제국주의는 아시아에서 폭발한 과잉생산공황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고 있을까? 그것은 지금 3개의 방면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 첫째는, IMF의 '지원'책을 지렛대로 하여 과잉설비의 철저한 파괴를 추진하는 것이다. 원래 아시아 국가들의 과잉생산은 미일 다국적기업이 아시아에 무정부적으로 투자를 집중한 결과에 다름 아닌데, IMF가 '지원'의 대가로서 제시한 조건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이들 국가들이 안고 있는 과잉설비의 파괴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결국 제국주의는 과잉생산공황을 아시아 역내에 한정시키는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기아자동차의 도산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적인 자동차 산업의 과잉설비가 가장 판매력이 약한 한국의 자동차 제조업체에 파급효과를 미쳤다고 생각하면 알기 쉽다. 세계를 시장으로 하는 상품들은 세계적으로 경쟁을 하기 때문에 가장 경쟁력이 약한 나라의 가장 경쟁력이 약한 기업이 희생되게 된다. 이것은 자동차만이 아니라 모든 국제적 상품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금력이 약해 제품의 품질에 문제가 많은 동남아시아의 발전도상국에 파급효과가 미쳤다고 해서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결국 도산이나 통화 불안은 태국이나 말레이지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고, 세계에 공통적인 난문제이다"(邱永漢, [世界大不況のゴングが鳴った ----東南アジア經濟危機はドル基軸通貨體制動搖の序章] {VOICE} 98년 1월호).

IMF가 태국이나 한국·인도네시아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한 융자조건을 일별하면 알 수 있는 것은, 금융시장의 완전자유화, 대외개방을 의무화하고 있는 점이다. 제국주의의 대리기관인 IMF는 금융 '지원'을 지렛대로 하여 개발도상국의 금융시장을 지배할 교두보를 쌓으려 하고 있다. 총액 550억 달러의 한국에 대한 금융 '지원'의 틀이 일단 결정된 후 서둘러 유럽 수개국에 의한 20억 달러 추가 갹출이 결정되어 최종적으로 총액 570억 달러가 된 배경에는 이들 국가들이 자국의 금융독점의 서울 진출을 원호할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아시아 각국의 통화가 투매되고 외화 부족에 빠진 것은 자본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거래를 제한해 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반대이다. "미국과 유럽 주도의 (지나치게 빠른) 시장개방"이야말로 "아시아 금융위기를 초래한" 원흉이었다(로렌스 R. 클라인, {WEDGE} 97년 12월호 인터뷰). 특히 무역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출입이 자유로운 단기금융시장을 개방한 것이 완전히 반대 효과를 냈다. 고금리를 노려서 아시아 국가들에 눈사태처럼 몰려든 투기성의 과잉자본은 아주 커다란 벌이를 한 끝에 위험을 느끼자마자 쏜살같이 도망쳐 나갔다. 이것이야말로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이 통화위기를 초래하게 된 근본적 요인에 다름 아니었다.

아시아를 두루 사 모으는 미·유럽 자본

아시아의 통화와 주가가 대폭락한 결과, 이미 파산했던가, 파산하고 있는 현지 기업을 구미의 기업이 매수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오고 있다. 워낙 통화가치와 주가가 단기간에 반값 이하로 하락해버렸기 때문에 지금이라면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여 싸게 후려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칸기출판사가 발행하는 {월간 아시아}는 4월호에서, "구미자본이 휩쓰는 아시아의 '바닥값'"을 특집으로 다루면서, "일목요연! 우량기업의 주가가 보여주는 '아시아'의 바겐세일"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아시아의 우량기업 12개사의 작년 5월부터 금년 1월까지의 주가 하락율을 실었다. 그에 의하면, 태국의 방콕은행이 70.2%, 방콕랜드사(부동산) 85.6%, 인도네시아의 바리트 퍼시픽 팀버사(목재제조) 72.2%, 말레이지아의 페르사한 오토모빌 내셔날사(자동차 악세사리) 79.8% 등으로 되어 있다.

"미국·유럽의 다국적기업은 21세기의 대경쟁에 대비하여 아시아에서의 기반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정부·재무성과 IMF(국제통화기금)는 구제자금 공여를 무기로 아시아 각국에 자금시장 개방이나 일족지배형 재벌의 해체, 적대적 M&A(기업 매수·합병)의 용인에 의한 영미형 경제구조로의 변혁을 실현하려고 압력을 강화하고 있다. (중략) / 아시아에서의 M&A는 97년 실적으로 520억 달러로 전세계의 3%에 불과한데, 한국의 재벌 주력기업을 필두로 하여 동아시아의 기업이 마치 바겐세일의 양상을 보여주려 하고 있다"(奧村皓一, ["今が買い時"--- "アジア"を買い漁る米歐資本], {エコノミスト} 98. 3. 31.).

미국의 공산당 기관지 "피플즈 위클리 월드"는 98년 1월 24일호에 이렇게 쓰고 있다.

"한국에서 발생한 사태, 그리고 동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 임박해 있는 위기만큼 현대제국주의의 약탈적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예는 없다. 주가 및 통화의 하락에 의한 위기 - 이른바 '호랑이' 경제가 흐느껴 울면서 붕괴되어 가는 위기가 시작되는 가운데 미국과 유럽의 거대 다국적기업은 위기에 허덕이는 산업을 후려쳐 사기 시작했다. / 이 위기를 한층 악명 높게 한 것은 - 그것이 위기의 근본원인이지만 - 이 위기가 미국·유럽·일본의 금융당국·IMF·국제적 대은행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 취했던 정책, 즉 거액의 차관에 의존하여 개발하게 한 자금정책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아시아 각국의 예기치 못한 자국 통화의 절하에 의해서, 마치 이 지역에서 환 시세 절하 경쟁이 전개된 것과 같은 효과가 생겼다. 그 결과 경쟁력이 저하된 중국이 다시 한번 인민위안(人民元)의 절하에라도 나선다면, 혼란은 더욱 심화되면서 악순환에 빠진다. 그것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하고 싶다. 작년 말 클린턴 정권의 중국에 대한 외교노력은 이 한 점에 모아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의 불안 요인 '중국'

작년 10월에 홍콩의 주식시장이 폭락한 직후 중국의 주룽지(朱鎔基) 부수상(당시)과 미국의 루빈 재무장관, 그리고 IMF의 수뇌 등 3자가 회담하고, 홍콩 달러의 미 달러 펙(peg)제(주4)의 유지를 위시하여 4개 항목에 걸쳐서 합의하고 있었음이 11월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방미 전후에 명백해졌다. 그 근저에는, 중국의 4대 은행이 적자경영의 국유기업에 대출한 융자금이 동결되어 거액의 불량채권이 발생하고 있고, 그 규모는 8,000억 위안(元), 대출 총액에서 점하는 비율은 20%라고 할 정도여서 이것이 세계경제의 새로운 불안정요인으로 되고 있다는 공통의 인식이 있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 역자) 미국의 홍콩 달러의 달러 펙제를 지지하는 대신에 중국은 홍콩 달러 및 인민위안(人民元)의 절하를 단념한다는 내용으로, 양국의 당면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중국 경제는, 아시아 통화위기의 여파를 받아서 홍콩 경제가 벽에 부딪치고, 지금 그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홍콩 달러의 펙제 유지와 인민위안의 절하 회피 정책은 격렬한 부작용을 수반하였다. 홍콩 경제는 고금리 때문에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고, 기업 도산이 속발하고 있다. 홍콩을 경유한 대륙으로의 외화 유입이 줄고, 중국의 수출이 둔화되었다. 국유기업을 주식회사화해서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하여 재건을 꾀하려고 했던, 중국공산당 제15회 당대회가 그렸던 국유기업 개혁 시나리오에 차질이 생긴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셋째로, 총수요 확대책을 둘러싼 일본과 미·유럽 제국주의간의 책략과 책임전가이다. 미국은 아시아 각국에 의한 대미수출의 증강을 저지하고 부담을 전가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 긴축정책을 전환하고 감세 등에 의한 내수 확대책을 채용하도록 '일본책임론'을 내세워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하시모토 내각은 국내의 경기대책상으로도, 마지못해 재정구조개혁법의 보류, 감세와 공공사업을 주로 하는 경기 자극책을 모색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앙과 지방을 합쳐서 529조 엔(98년도 말 예상), GDP(국내총생산)의 1년분이라는 거액의 재정적자를 안고 있어, 몸을 움직이기가 어렵다.

지금 세계 어디를 바라보더라도 당장 총수요 확대책을 채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나라는 거의 없다. 일본에게 큰소리로 내수확대를 요구하고 있는 미국은 99년도에 30년만의 흑자예산을 짜고, 작년에 의회와 합의한 2002년도의 재정균형계획의 3년 전 달성을 노리고 있다. 서유럽 국가들은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정한 통화통합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 한 해의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의 3% 이내로 억제하는 긴축정책을 채용하고, 사회보장제도를 위시한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의 권리박탈을 강행하고 있다.

IMF 관리하에 놓인 아시아 국가들이 엄혹한 긴축정책을 강요당하고 있음은 모두 아는 대로이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구 소련·동유럽 국가들 또한 마찬가지 상황에 놓여 있다. 아시아 통화의 폭락을 목격한 지금, 동유럽·중남미 등의 무역적자국은 자국 통화가 투기꾼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위험을 공통으로 느끼고 있고, 일제히 재정긴축이라는 예방조치를 강구하고 있다([中歐諸國, 緊縮政策に拍車 --- アジア型通貨危機回避狙う] {日本經濟新聞} 97. 11. 7; [ブラジル, 通貨防衛優先 --- 財政健全化へ緊急卽50項目, 景氣後退に懸念] {日本經濟新聞} 97. 11. 11).

노동운동의 국제연대 가능성

태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IMF가 강요하는 융자조건에 대해서 헛된 저항을 시도했지만 상처투성이인 채 분쇄되었다. 이들 정부의 수뇌들도 지금까지는 IMF에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권이 IMF를 애먹이고 있는 것은, 달러 펙제의 채용이나 국민차 구상 등을 말하면서 수하르토 일족과 그 추종자들이 스스로의 권익을 지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지, 결코 근로인민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염려해서가 아니다. IMF의 '지원'을 받지 않고 경제를 재건하려 씨름하고 있는 말레이지아의 마하티르도 위기를 근로인민에게 전가하여 극복하려고 하는 점에서는 그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세계적인 산업재편과정이 아시아 지역을 휘몰아 지금 실로 유럽과 미국의 한 줌의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형태로 추진되려 하고 있다. 고경(苦境)에 처한 아시아의 민족자본은 대규모적인 구조조정(사업체제의 재구축)을 단행하면서, 유럽과 미국의 다국적기업과의 제휴 혹은 계열화, 나아가서는 흡수·합병까지 시야에 넣고 스스로의 생존을 꾀하고 있다. 노동자의 대량해고, [노동력의 유동화]와 [고용의 유연화]라는 현대제국주의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기초한 공격이 노동자계급에게 퍼부어지고 있다. 생성 도상에 있는 아시아 국가들의 노동운동은 자국의 부르주아지만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다국적기업과도 직접적으로 대치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노동운동과 개발도상국의 노동운동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제국주의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고 투쟁전선을 구축할 조건이 전에 없이 확대되고 있다. 각국의 내셔널센터(노동조합 중앙조직)는 물론, 국제자유노련과 그 계열하의 국제산업별조직도 IMF의 '구조조정정책'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나 WTO(세계무역기구)가 추진하려 하고 있는 '다국간투자협정(MAI)'에 일치하여 반대하고 있다.

계급적 민주적으로 쇄신된 AFL-CIO(미국노동총동맹·산업별회의)의 스위니 회장이 금년 1월에 멕시코를 방문하였다. 스위니 회장의 멕시코 방문의 목적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개정할 투쟁에서 멕시코 노동자에게 공동투쟁을 호소하는 데에 있었다. 이 방문에서 AFL-CIO는 그 전부터 교류관계에 있었던 정부계(政府系)의 멕시코노동자동맹(CTM)이 아니라 갓 결성된 비정부계의 노동조합 센터인 '노동자전국회의(UNT)'와의 제휴에 과감히 나섰다. UNT와의 회담에서 스위니 회장은 협정 발효 후의 멕시코의 대외채무의 증가에 주의를 환기하고, '자유무역'이나 '경제개방'을 강요하는 IMF의 정책을 비판. "NAFTA는 은행이나 다국적대기업을 위해서 체결되었다"고 발언하고, 반년 이내에 양국의 의회에 대해서 협정의 개정안을 공동으로 제출하기로 합의하였다({しんぶん赤旗} 98. 1. 27.).

다국적 자본과 투쟁하는 시대

1960년에서 1990년까지 30년 동안에 아시아 국가들의 계급구성은 크게 변모하였다. 노동자계급은 3배로 증가하여 전체 취업인구에서 점하는 비율을 40% 가까이 높였다. 노동자계급의 증대 속도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빨라졌다(友寄英隆, [東アジアにおける資本主義の發展と階級構成の變動], {經濟} 96년 6월호).

부르주아 저널리즘을 흉내내, 오는 21세기를 '아시아·태평양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동시에 국제주의적으로 결합한 이 지역의 노동운동이 다국적 독점자본과 본격적으로 투쟁하는 시대인 것이다.

<미주>

1) NAFTA는 94년 1월1일에 발효하였다. -- 역자.

2) 쏘련도 브레튼우즈 협정에 서명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달러 살포가 '반(反)쏘적' 성격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점은 애초에 상정되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달러 살포 그 자체는 IMF체제에 처음부터 상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달러 살포(=미국의 국제수지의 인위적 적자) 없이는, 한편에서는 여타의 국가들이 국제결제수단으로서의 달러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없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따라서 미국의 독점자본은 제2차 대전을 통해서 2배나 증대시킨 생산력에 의한 상품가치를 실현할 판로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 즉 미국의 국제수지의 적자에 의해서만이 작동할 수 있는데, 이는 곧바로 기축통화 달러의 가치 하락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불환국민통화인 달러에 기반한 IMF체제의 근본적인 모순이었다. -- 역자.

3) 1958년의 오기(誤記) -- 역자.

4) 홍콩 달러를 발행할 때마다 그 준비금으로 일정 비율의 미 달러를 예치함으로써 홍콩 달러와 미 달러간의 고정환율을 유지하는 제도. -- 역자.

한/노/정/연


번역 : 채만수 /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