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제 성
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이 글은 최근에 약진을 보이고 있는 인도네시아 산업노동계급의 역사를 산업화 및 노동정책 변화와 관련지어 살펴본 글이다. 인도네시아는 2억 인구(세계 4위)의 대국이고 우리나라의 주요 무역상대국이자 투자대상국이라는 점에서 경제 관계가 밀접함에도 불구하고 연구자가 희소해 우리나라에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도네시아 산업노동계급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는 거의 미개척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야의 연구는 국제적으로도 드문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산업노동계급이 인도네시아 정치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인도네시아 정부가 추진한 노동집약적 수출지향 산업화의 결과로 산업노동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1990년대에는 수출산업지대에서 파업이 급증하는 등 산업노동계급의 약진이 계속되었다. 적도 인도네시아의 산업노동계급이 국제노동운동의 역사에 이제 막 동참하기 시작한 것이다.
1. 급진적 노동운동의 성장과 붕괴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은 네델란드 식민통치 시절인 1922년의 플란테이션 파업에서 시작되었고, 1922∼26년 사이에 다수의 노동조합들이 건설되어 민족주의 운동에 가세하였다. 그러나 식민 시대에는 근대 산업부문이 발전하지 못해 산업노동자들의 수가 적었고, 맹아적으로 형성된 노동운동은 식민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며, 민족주의 운동과 인종적 갈등으로부터도 독립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네델란드에 대항하는 독립전쟁(1945∼49년)을 거치면서 노동조합은 비로소 전국적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독립을 쟁취한 이후 1965년까지 노동운동의 전성기를 만끽했다.
비공산권 최대의 당원(1천만에서 2천만까지 추산)을 지닌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의 지원을 받았던 인도네시아노동총동맹(SOBSI)은 조직결성의 자유 아래 정치, 경제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정부는 노동자를 보호하고 노조 활동을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했다. 주당 40시간 노동 제한, 생리 휴가와 출산 휴가 보장, 산업재해 보상, 단체협상권 인정, 부당해고 금지 등을 포함하는 노동자 보호 입법은 당대 제3세계 수준에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957년 수까르노(Sukarno) 대통령의 외국인 기업 국유화 정책에 따라 군부가 국영기업을 소유하게 되면서부터 다시 노동통제가 강화되었다. 국유화 캠페인 과정에서는 사실상 노동조합의 역할이 컸지만, 일단 국유화가 실현되자 노조는 군부 출신 인도네시아인 자본가와 대립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민족주의적이었던 노동운동은 점차 체제의 파괴를 목적으로 삼게 되었고, 학력 있는 노동자들이 집중된 고임금 사업장의 파업은 임금 인상보다 경제적 혼란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수까르노는 시간이 지날수록 서구 열강에 맞서는 외교적 좌편향을 강화했고, 국가 이념을 반(反)자본주의적인 방향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무역수지가 악화되고 외환이 동이 나고 물가가 폭등했으며, 높은 인플레이션 때문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 사이에 실질임금이 40∼70% 까지 하락했다. 경제위기의 와중에서 1964년에 공산당이 농촌 세포를 동원하여 토지개혁을 강제로 실현하려 하여 농촌에서 급진적인 계급갈등이 발생했고, 이는 공산당과 친미적인 육군 사이의 필사적인 대결의 서막이었다.
1965년 공산주의 장교들의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육군의 일인자로 부상한 수하르또(Suharto) 장군은 공산당을 괴멸시켰고, 대량 학살을 방임하여, 많게는 50만에서 10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결국 수하르또는 1966년에 군대를 동원하여 수까르노에게 압력을 넣어 권력을 이양받았다. 수하르또는 네델란드의 식민군대, 일본 점령기의 보충대, 독립선언 이후에는 공화국군대를 거치면서 군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로 정치 안정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인물이었으며, 집권 이후 노동운동의 탈정치화를 지속적으로 꾀하게 된다.
2. 탈정치화 정책과 국가조합주의의 형성
1965∼66년의 끔찍한 경험으로 민중들 사이에 '공포의 문화'가 형성되었고, 이에 발맞추어 수하르또는 군부를 기반으로 관료 정치를 강화하고 민중의 정치적 동원을 배제하는 일련의 탈정치화 계획을 꾸준하게 추진했다. 공산당은 금지되었으며, 정당들은 3개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의 정당활동이 선거기간을 제외하고는 금지되었고, 군부가 합법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 경제를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수하르또 정권은 민간기업을 육성하고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는 등 성장을 강조하는 경제정책을 구사했다. 당시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과 함께 수하르또의 반공정권을 적극 원조해 주었다.
좌익적 SOBSI는 금지되었고, 그 공백을 군부, 민족주의자, 회교도들과 친밀한 노조들이 채워나갔다. 1973년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은 인도네시아노동자연맹(FBSI)이 결성되어, '위'로부터 만들어진 단일중앙조직이 노동자의 이익을 독점적으로 대표하는 국가조합주의(state corporatism) 모델을 형성했다. FBSI는 예산의 약 70%를 대통령의 희사에 의존하는 '어용 노총'이었다.
나아가 수하르또 정부는 '빤짜실라 노사관계'(HIP)를 제창하였다. 국가이념 '빤짜실라'(Pancasila)에 근거하여, 노동자와 경영자의 분쟁을 거부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한 협력, 가족적 화해를 강조했다. 그리하여 수하르또 정부는 파업을 국가공식이념에 도전하는 행위로 규정하였다.
1973∼74년과 1978∼79년 두번에 걸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석유가격인상은 비산유국들에게는 '오일 쇼크'였지만 인도네시아 같은 산유국들에게는 '오일 붐'이었다. 오일 붐으로 재정수입이 늘어나고 1971년부터 1981년까지 연평균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7.7%에 달했다. 국영기업 및 수입 대체 산업과 외국인 기업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진척되고 공장들이 늘어나자 식민시대 막바지부터 당시까지 정체되어 있었던 경제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1971년에 고용된 인구의 70% 이상이 농업 노동자였고 노동력 전체의 6%만이 제조업에 고용됐으며 제조업 노동자의 4분의 3이 작고 보잘것 없는 소규모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점차 농업 인구가 줄어든 반면, 다른 모든 부문이 성장하였는데, 특히 서비스 부문의 성장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산업구조의 변동이 서서히 산업노동계급을 성장시켰다. 공식통계로 볼 때, 1960년대 중반부터 1978년까지 파업 횟수는 많아야 년간 35회를 넘지 않았지만, 1979년에 72회로 껑충 뛰더니, 그후 3년 동안 매년 100회를 넘어서고, 1982년에는 200회를 넘어섰다. 수까르노 시대에는 주로 플란테이션에서 농업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는 파업의 90% 이상이 제조업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노동력의 과잉공급(고실업) 때문에 노동자들의 교섭력은 여전히 약했다. 일례로 어떤 시멘트 회사에서는 파업에 가담한 183명을 일거에 해고하고 바로 다음날 새로운 직원들을 채용하기도 했다.
3. 노동집약적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성장
1980년대 초 국제 석유가격의 하락으로 인한 경제위기는 파업의 기세를 꺾었다. 국제유가가 1981∼82년에, 그리고 1986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각한 수준으로 폭락하자, 10년 넘게 유지된 오일 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인도네시아 재정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동안 추진되어온 수입 대체 산업화를 약화시키고 외자와 저임금에 기반한 노동집약적 수출지향 산업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산업화 전략을 수정하였으며 그에 걸맞게 정부의 노동통제도 더욱 강력해졌다.
1983년에 새로 임명된 인력부 장관은 안보질서 회복 사령부(Kopkamtib) 사령관 출신의 은퇴한 장성인 수도모(Sudomo)였는데, 그는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적인 '안보차원의 접근'을 강력하게 표방하였다. 그는 1985년에 노동집약적 수출지향산업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 FBSI를 인도네시아근로자연합(SPSI)으로 대체시켰다.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이전에 비해 노조활동은 훨씬 중앙집중화되고 지부의 자율성이 약화되었다. FBSI의 의장(Agus Sudono)과 달리 SPSI의 의장(Iman Sudarwo)은 뚜렷한 노조활동 경력이 없었고 국제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영향력이 없었다. 노사분규에 대한 강력한 개입이 잇따르면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1987∼88년에는 파업이 40회 이하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수도모 재임기에 인도네시아 경제는 극적으로 불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노동집약적 수출지향산업화의 결과, 의류, 섬유, 제화 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새로운 수출 주력업종으로 등장하고, 제조업 고용 인구도 늘어났다. 남성의 경우에 전체 고용자에서 제조업 고용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1971년 6%에서 1990년에 10%로 증가했고, 여성의 경우는 11%에서 15%로 증가했다. 한편 1990년에 산업노동자는 약 1천2백 여 만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노동자들의 수가 늘었다는 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수도 자까르따 주변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집중되어 있어, 도시 실업자들과 합쳐질 경우 엄청난 정치적 폭발력을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도시에서 자라거나 태어난 새로운 세대 노동자들에게 도시생활과 공장생활은 그들의 '선배'들처럼 일시적이지 않았고 시골은 더이상 과거와 같은 '피난처'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당연히 이들은 도시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공장의 작업환경과 임금에 대해 이전 세대보다 진지하게 문제 삼았다. 공식적인 이익대표가 조합주의적으로 통제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노조의 '밖'에서 각종 비공식적 모임들을 만들었다. 그것은 토론회, 학습회, 계모임 같은 소모임 형태를 띠었다. 노동자들이 개발한 이러한 대안적 조직들은 노동자들 사이의 경험과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그들을 둘러싼 사회환경에 대한 이해를 얻는 수단이 되었다.
노동집약적 수출지향 산업화는 노동문제에 관한 사회적 관심을 증대시켰다. 정부가 노동집약적 수출지향 산업화를 위해 새로 끌어들인 외국자본은 대부분 한국, 대만, 홍콩의 동북아 자본들이었다. 이들 동북아 기업들은 수입대체 산업화 시기에 내수시장을 노리고 들어온 외국자본들과는 달리 저임금만을 노리고 들어온 '냉혈적'인 기업들이었다.
외자기업들의 열악한 작업환경과 가혹한 노무관리는 피해 당사자들인 노동자들의 분노를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언론의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한인기업을 비롯한 외자기업들에서 발생하는 폭력, 성추행, 학대에 관한 소식들이 인도네시아 일간지에 빈번하게 실리곤 했다. 외국기업의 저임금 공세는 자국민들을 모욕하는 처사라며, 저임금으로 외국기업을 매료시키려는 정부의 '광고 전략'이 이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 사이 인도네시아 법률구조재단(LBH)을 필두로 하는 시민단체들은 1980년대 동안의 포괄적인 인권문제 뿐만 아니라 노동권 신장 캠페인, 노동자 교육, 노동자 관련 소송 등의 활동을 벌여 노동문제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1987∼88년부터 해외 노동운동조직들도 인도네시아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하여 집중 성토하고 나섰다. 대표적으로 국제자유노련(ICFTU)과 미국산별노조연맹(AFL-CIO)에 의해 제기되었는 데, 특히 AFL-CIO는 보호주의적 무역-노동조건 연계 입법을 제안하여 미국 무역정책에 반영하였다. 이에 따라 1994년 1월 미국의 재무장관은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노동조건을 포함한 인권문제의 개선과 일반특혜관세(GSP) 공여를 연계시키겠다고 발표하고 본격적인 압력을 가했다.
4. 신노동정책 : 발전주의에서 온정주의로
노동을 둘러싼 긴장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수하르또의 인기는 점차 하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과거의 협력자들과 조언자들이 죽거나 은퇴한데다, 부통령 지명을 둘러싼 갈등으로 군부와의 관계가 멀어져 수하르또는 결국 가족들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수하르또 자식들의 사업은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정가에서는 1988년부터 시작된 수하르또 대통령의 다섯번째 5년 임기가 마지막 임기가 될 것이고 1993년에 72세가 되는 수하르또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만연되면서 '승계논의'가 시작되었다. 수하르또의 권력은 여전히 확고했지만 그 정당성은 빈번하게 '도마' 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수하르또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수하르또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노동집약적 수출지향 산업화에서 비롯된 긴장을 완화하고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노동정책의 변화를 꾀했다. 수하르또는 1988년에 민간인 출신 코스마스 바뚜바라(Cosmas Batubara)를 인력부 장관으로 임명하였고, 바뚜바라 장관은 단체행동, 노동조직, 임금에 관한 정책을 변경하였다. 바뚜바라 장관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는 데는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으며, 여기에는 경영진의 잘못이 크다면서 종전의 관행에서 벗어나 파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1990년에 수하르또 대통령도 수까르노 시대에 발령되어 핵심기관과 프로젝트에서 파업을 계속 금지했던 '1963년 대통령령'을 철회함으로써 인력부 장관을 지원했다. 이 법령은 국가적으로 긴급하게 성사되어야만 하는 핵심사업에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모든 국영기업과 상당수의 민간사업체들에서 파업을 금지하는 근거로 남용되어 왔다.
또한 바뚜바라는 노동자들로부터 신망을 잃은 SPSI의 취약성을 비판했다. 그는 노사관계의 안정을 위해서는 SPSI의 정통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수하르또 대통령도 경영자들에게 SPSI의 지부 설립을 방해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1980년대까지의 국가조합주의가 노동자의 조직화와 대안적인 노동조직의 출현을 저지하는데 주력하는 소극적 정책이었다면, 1990년대의 조합주의는 노동자들을 적극적으로 단일중앙노조에 끌어들이고 지부를 증대시키려는 적극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바뚜바라는, 1970년대 초반에 도입되었지만 엉성하고 유명무실했던 (지역별)최저임금제를 내실화하기 위해 1989년 최저임금체제를 정비하는 입법을 도입하였다. 인력부 장관이 밝힌 최저임금제의 목표는 노동자 개인의 '최소한의 육체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정부 평가에 따르면 당시의 임금은 목표치의 60%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는 1990년을 '임금의 해'로 선포하고 노동자의 복지향상이 향후 25년간의 경제발전 계획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역설했다. 인력부 장관은 최저임금을 인상 조치했으며, 경영자들에게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재판에 회부되어 (아주 적은 벌금이나 짧은 구금이지만) 처벌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노동정책에 국한하여 보면 개발도상국의 발전주의(developmentalism)는 임금의 비교우위를 유지하고 노사관계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단체행동권을 강력하게 제한하는 정책을 의미하는데 유가하락 직후 수하르또 정권의 선택은 수도모의 강력한 노동통제정책에서 알 수 있듯이 일시적으로 발전주의의 길에 근접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1990년대 노동정책은 발전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온정주의적인 정책이었다. 온정주의(paternalism) 정책은 정부가 민중 생계와 관련된 가격을 통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그것은 주요 먹거리 가격과 생필품 가격을 시장 가격 결정에 내맡기지 않고, 저렴하게 유지하고 저임금업종의 노동자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최저임금제를 도입하고 강화하는 것을 말한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일찍이 생필품 가격을 통제하여 이를 값싸게 유지해왔다. 이에 더하여 노동정책에서도 온정주의를 도입하여 노동생산성이나 공급과잉된 노동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최저임금을 계속 인상하였다.
온정주의는 정부의 정당성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특히 인도네시아 노동정치의 특수성으로 인해 온정주의의 효과는 더욱 증대되었는데, 인도네시아 노동정치의 특수성이란 노동집약적 산업의 주력이 동북아 자본들이고, 경제적 부의 대부분(상장기업의 73%로 추정)을 극소수(약 3%로 추정) 화인(華人)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종적인 균열에 따라 부의 불균형이 심한 나라에서 외국자본의 횡포가 더해지니 당연히 토착인들의 인종주의적 분노가 축적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정주의는 권력자를 민중이익의 '자애로운 수호자'로 부각시키고, 정부를 어느 정도 약자의 편을 들어 공동체의 '균형을 맞추는 존재'로 부각시킨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공격은 정부가 아니라 '이기적인' 자본가들에게 가해진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수하르또 정부는 정치 안정을 더 선호했다. 인구 대국 인도네시아는 300여개의 종족들이 약 202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13,667개의 섬에 분포되어, 580여개의 방언을 사용하며 사는 세계 최대의 군도 국가이기 때문에 민족통합이 제1의 국정목표이며 민족통합을 위해 정치 안정은 매우 긴요한 요건이다. 따라서 경제 성장이 정치 안정에 해가 되면 성장을 지연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정치 안정은 32년간 집권한 수하르또 개인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5. 쇄도하는 노동자 파업과 그 성과
전환적 분위기에서 파업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 1만 4천 갓자 뚱갈(Gadjah Tunggal) 노동자들의 파업은 1990년대 인도네시아의 강력한 노동자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회사의 기물이 파괴되었고, 군대가 출동하여 분규를 진압해야만 했다. 1991년 한 해만 해도 130건의 파업이 발생했고 1994년에는 639건이나 발생하였다. 이러한 유래 없는 파업은 1991년까지 경공업 위주의 수도권 산업 지대인 자보따벡(Jabotabek)에 주로 집중되었었지만 1992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서부 자바(West Java)에서 동부 자바(East Java)와 수마뜨라(Sumatra) 등지로 확산되었다. 파업의 주요 쟁점은 최저임금 준수를 비롯한 임금문제였다. 1991년 분규의 70% 가까이가 임금문제로 발생했다. 많은 파업이 정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고용주들이 빈약한 최저임금마저 지키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런 파업투쟁에 힘입어 정치운동가, 인권운동가, 현장에 기반한 노동운동가들이 결합하여 독립노조(SBM)를 출범시켰다. SBM은 SPSI의 독점적 이익대표에 도전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런데 설립자들 가운데 바딱족(Batak) 출신 변호사 묵타르 빡빠한(Muchtar Pakpahan)을 비롯한 몇몇 활동가들이 SBM의 내부 분열에 환멸을 느끼고 1992년 4월에 인도네시아복지노조(SBSI)를 만들었다. SBM은 분열로 유명무실해졌지만 SBSI는 1993년에 27개 주의 79개 지부, 총 3만7천 여명의 회원을 포괄했다.
결국 SBSI도 1994년에 수마뜨라 최대도시 메단(Medan)에서 4만의 노동자가 가담한 노동자폭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빡빠한을 비롯한 핵심인사들이 투옥되면서 붕괴되었지만, 이러한 도전을 경험하면서 SPSI는 내실을 강화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SPSI는 1994년 2월 미국의 무역-노동조건 연계압력에 대해 '맞불'을 놓기 위해 1시간 동안 전국 총파업을 시도했고, 1997년의 '신노동법' 제정 과정의 공청회에서 이미지 쇄신을 위해 적극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정부에 압력을 넣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SPSI의 지부의 수가 계속 늘어나서, 1994년 10,569개에서 1995년에는 12,738개가 되었다(회원은 약 3백만명이라 주장). 이에 상응하여 준노조 기능을 하는 노사협의회 수도 3,938개에서 5,266개로 불어났다.
정부는 노동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계속 인상하였다. 1993년에 기용된 인력부 장관 압둘 라띠프(Abdul Latief)는 1993∼1994년과 1995∼96년 회계년도에 최저임금을 각각 30∼40%씩 인상하였다. 이러한 인력부의 전환 정책에도 불구하고 군부의 노동문제 개입은 지속되었다. 군부의 노동운동 탄압 중에서 국제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졌던 사건은 '마르시나 사건'이었다. 1993년 5월 군 영지안에서 23세의 여성 노조활동가 마르시나(Marsinah)가 강간당한 뒤 살해된 이 사건은 인도네시아 군부의 노동문제 개입의 비인간성을 드러낸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국제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국내외 비판이 거세어지자 정부는 1994년 1월 노사분규에 군을 투입하지 않기로 법률을 개정하였다. 군부의 노동문제 개입은 여러 각도로 계속되지만 일단 단위사업장 분규에 대한 군부의 개입을 막은 것은 노동운동의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효과적인 저항으로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에 대한 규제가 점차 완화되어 최근에 작은 '결실'을 보았다. 1997년 9월에 의회에서 노동자의 파업권을 보장하는 '신노동법'이 통과되었다. 물론 여전히 파업은 공장 밖으로 번져 나와서는 안되고 동조파업은 불법이지만, 파업 1주일 전에 서면으로 고지해야 한다는 조건을 준수한다면 단위사업장 수준의 파업은 법적으로 이제 전혀 제한 받지 않게 된 것이다.
6. 경제적 파국, 정치적 개방, 그리고 노동운동의 미래
막 시작된 산업노동자의 권익투쟁은 최근의 경제적 파국과 정치적 개방으로 인해 다시금 전환의 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IMF 구제금융 수용이후 경제 성장을 마감하고 아시아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그리고 수하르또의 32년 장기집권이 막을 내리고 정치적 개방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온정주의적 노동정책은 당분간 가동되기 어려워 보이며, 노동 대중에게 시련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경제적 파국에 따른 물가 폭등은 최저임금제의 효과를 무력화시키고, 공장의 파산은 실업자들을 양산하며, 재정긴축을 위한 생필품 보조금 삭감은 노동자들의 생계비를 상승시키고 있다.
그러나 예정된 시장화가 노동대중들의 생계를 계속 위협할 경우 노동자들은 온정주의라는 '베일'이 벗겨진 국가를 상대로 새로운 '계급 전쟁'을 벌일 가능성도 있다. 이번 위기를 계기로 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와 임금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온정주의에 만족해서는 안되고 국가의 전체적 사안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수 있다.
경제적 파국에 뒤이은 정치적 개방은 노동조직의 활성화와 시민세력(민주화운동)과의 연대를 촉진할 것이다. 이와 함께 SBSI 의장 빡빠한의 석방은 민주노조운동의 만개를 예고하고 있다. 노동대중의 시련과 노동조직의 진군이 2000년대 인도네시아 노동운동을 규정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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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정/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