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왜 자본주의가 아닌가?



김 상 태

문화비평가





총파업은 부결되었거나 보류되었다. 피와 땀과 고름으로 범벅된 1초의 시간단축을 위해서든, 비록 자본의 항문으로 탄생되었을지언정 역사를 움켜쥔 상처투성이의 그 거인, 프롤레타리아의 토혈하는 위대한 이념을 위해서든, 한과 수모로 얼룩진 이 땅의 이 민중의 용트림을 위해서든, 지향되었던 그것은 하여간 지금 체념되었다. 그래서 5∼6월 총력투쟁의 가슴 벌렁이는 근육의 긴장은 갑자기 허공으로 흩어졌고, 미증유의 한국자본주의의 위기는 새로운 세계와 대안으로 비상해야 할 결정적 실마리의 하나를 손끝에서 놓치고 말았다. 노동자는, 또 오늘의 지도부는 이것을 무엇이라 말하고 있으며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가? 물론 우리는 바위같아야 한다. 모든 후퇴는 고달픈 문제들을 양산한다. 그럼에도 그것은 TV스위치만 꺼버리면 되는 월드컵 실황중계 따위가 아니다. 이 지루하고 끈적끈적하고 더딘 하루들을 우리는 어제처럼 오늘처럼 다만 헤치고 나아갈 뿐이다. 해서 여기 단 10분의 사색을 준비해 본다. 그리고나면 역시 언제나처럼 우리는 또 간다. 일하러 가고 싸우러 간다.

종종 인간성이란 말을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해야 했던 그런 노동이 시대를 불문한 초월성과 보편성을 가지는 것처럼 그렇게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인감됨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종종'이 사실은 간교한 은폐의 수사라는 사실이다. 이 '종종'은 인간이 인간적이어 하는 바로 그것에 물음표를 달고 그 실천과 운동에 부식의 맹독을 뿌리곤 한다.

'삼일 굶으면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

이 강렬한 상황설정은 그 강렬함으로 인해 무조건적인 진실을 웅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효과적인 문학적 표현이 그러하듯 이것은 단 한가지의 논증도 제공하지 않은 채 무서운 결론들을 도출시키고 주입시킨다. 이 경제적인 논설이 끌어낸 것은 '이기심' '약탈본능' '모든 도덕성과 인간적 신뢰와 우의의 허구성' '순수한 이념들의 무력함' 들이다. 놀랍게도 그게 본성이기 때문에 삼일 굶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과 그 생활은 기껏해야 가면 쓴 위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니 딴 생각말고 몸보신이나 하고 살라는 말이다. 우선 이 어처구니 없는 거짓말의 그 '거짓됨'이 문제다. 인간의 본성을 굳이 물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삼일 굶은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국민학생에게 물어보라. 둘 중의 어느 것이 더 공정한 관찰인가? 우리가 인간을 알고 싶으면 전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굶주림과 억압과 절망이 사라진 조건에서 관찰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인간이란 인간이 그 '본성'에서 일탈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관찰에 불과하다. 결국 '삼일 굶은 인간의 본성'이란 아무런 인간 본성도 아니다. 빗자루가, 바빠지면 사람을 때리는 매가 된다. 그러니까 빗자루의 본성이 '사람을 때리는 도구'라는 얘기나 다름없는 이 본성론은 애시당초 가당치도 않은 얘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당치 않기 때문에 논의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가당치 않은 거짓이 어째서 그토록 강력한 호소력을 갖느냐는 물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우리는 대답을 이미 그려내기 시작한다. 너무 커서 잘 보이지도 않는 그곳, 우리의 자리가 바로 메가톤급 식인 백상어의 벌린 입속이라는 사실을.

매일 빗자루로 맞는 아이는 빗자루의 본성이 아닌 게 아니라 사람 때리는 도구라는 확신 속에 있을 것이다. 삼일 굶은 인간의 본성을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가 거의 일상적으로 삼일을 굶고 사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증명의 가치도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직장을 가고 사람을 만나고 거리를 다니며 우리는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는 말을 마음 속으로 몇 십 번을 외치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크고, 모든 가족과 가정은 엉터리같은 문제들에 휩싸여 있고 장래는 얼마나 답답하고 먼 것인지 모른다. 모두가 하루 일주일은 그냥 그냥 살아도 1년 10년 30년을 생각하면 목구멍에 단내가 날 지경 아니던가? 그 속에서 '나' 자신과 '우리'의 순간들은 얼마나 야비하고 잔인하고 치사했는지를 '나'와 '우리'는 철저하게 알고 있다. 삼일 굶은 본성론을 우리의 현재가 도저히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빗자루에 맞고 산다. 빗자루의 본성은 방을 쾌적하고 깨끗이 하는 도구가 아니라 피멍들고 뼈가 부러지게 하는 몽둥이다. 이렇게 해서 이 소박한 본성론은 여기저기 차고 넘친다.

'도박을 해보면 그 사람 본성이 드러난다.' 옳거니. 그러나 우리는 왜 도박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동업을 해보면 그 사람 본성이 드러난다.' 옳거니 그러나 우리는 왜 자본가가 되어야 하는가? 원인과 결과의 도치는 여기에도 있어서 자본주의는 경제적 상품물신성의 신화이래로 모든 것을 이렇게 도치시킨다. 자본은 도치법의 명수이다.

비유나 우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좀더 학구적이고 냉혹하게 얘기해 볼 수도 있다. 분자 생물학이나 진화생물학 유전자학이니 하는 것은 우리시대의 또다른 신화이다. 이것들이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그 대중적 결론들은 한마디로 '끝내주는' 상상력을 부여해준다. 본래 자본주의적 과학은 고전주의 정치 경제학이 그랬다고 하는 것처럼 모순투성이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이것을 어떻게 구제하고 올바르게 세워놓는가는 여전히 계급적인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150년 전의 칼 맑스의 지평은 한 치도 변치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새로운 과학들은 그런데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가? 가만히 지켜보던 우리는 그 속에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은 그에게 부여된 규정일체의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할 수 있는 어떤 짓도 할 수 있으며 역사가 기록한 그 어떤 행동도 지금 반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천사요 성인일뿐만 아니라 살인자요 강도요 음탕무도한 무뢰한이다. 한데 재미있는 가설 중의 하나는 이 모두가 생물로서 인간이 자신의 유전자를 번식시킬 가장 유리한 조건을 쟁취하려는 제 전략의 진화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선 그들의 결론, 따라서 선한 인간에 대한 기대는 가망이 없다! 모두는 자기 유전자의 번식, 근사하게 말하면 저와 저의 가족과 근친에게 이득이 된다면 어떤 일도 이기적으로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신화 또한 삼일 굶은 인간본성과 동일한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의 결과를 그 원인으로 서술한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살아있었다면 꽤나 좋아했을까?

이 가설은 우리의 경험 일반에 근사한다는 점에서 한 번쯤 생각해봄직하다. 사람이 짝을 만나고 보금자리를 꾸미고 온 정성을 다해 아이들을 키우는 것. 신이 보기야 어떻든 사람 보기에 이만큼 빛나고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도 다시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사람에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인만큼 그것을 위해서라면 참으로 못할 일도 없다. '새끼가 공부를 하겠다고 하면 내 모가지라도 잘라 시켜준다'는 어느 아버지의 말! 때문에 위기가 생기면 여기에 대항해 싸울 어떤 전술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모든 생물의 유전인자가 동일한 DNA란 점에서 이 전술은 30억년동안 개발되어 왔으며 인간이 포유류란 점에서는 7천만년 이상 그중에 영장류란 점에서 천만년 이상 개발되어 온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조건과의 투쟁이다. 이 장중한 자연의 역사를 반추한다면 생명의 잔인함은 오로지 생명의 온전함에 대한 소망일 뿐이다. 소망은 굳이 말하자면 본래 생명됨의 소망, 함께 생존하고 창조하고 놀고 번식하는 것에 대한 소망이며 그것을 억누르는 모든 조건에 대한 투쟁으로서 잔인함이다. 생명은 삼일 굶어야 하는 조건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을 뒤집기 위해서 그는 30억년간 발전시켜온 모든 전술을 모조리 구사할 것이다. 그 생명이 지금 자본주의라는 조건 속에 있으며 그 이전엔 수천년의 계급구조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 생명의,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이제 말해보라.

하나 둘, 혹은 백이나 천이 이 자본주의의 비생명적인 게임의 규칙에 자신의 혼을 팔고 생존한다. 그것을 비난하기보다는 우리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 규칙에 동의해서 그 인간과 생명이 온전해진다면 우리는 총파업따윈 개에게 던져주고 말 것이다. 시위에 나간 한 여성이 최루탄 소리에 경기를 일으키고 연기에 눈물을 범벅이면서 '나는 정말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싶어'라고 말할 때 생명이 생명의 조건에 어떻게 투쟁하는가를 발견하는 바, 투쟁하지 않아 온전하다면 도대체 뭐하러 가두에 나가 뛰어다녀야 한단 말인가? 자본주의는 안된다.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그 숱한 사회적 과정들이 그 삶으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싫다, 인간이 싫다, 사는 게 싫다라고 탄식할 때 우리는 삼일 굶은 인간 본성론을 떠올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착각은 현실이 뒤집어 놓는다. 그건 인간의 본성이 아니며 생명은 결코 그 조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기업을 경영하는가? 일하는 노동자들의 대표가 할 것이다. 그는 권력과 돈 때문이 아니라 명예와 보람 때문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자기의 자녀들이 너무 소중해서 그만큼이나 소중한 동료들의 자녀들을 위해 또한 일할 것이다. 그의 지도를 받는, 그 지도를 선출한 노동자들은 마음으로부터 그 지도를 따를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규칙과 같은 권력에의 아부가 아니라 신뢰와 사랑과 존경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 수많은 본성론은 이 소망을 비웃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기를 한다. 이 온전한 생명의 소망과 삼일 굶은 본성론 중 무엇이 진실인지 눈찌르기 내기를 하자. 너희는 지금 우리의 눈을 확신을 가지고 찔러댄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온전한 생명의 소망이 너무도 간절하여 그것이 증명되는 그 어느날 너희의 눈알들을 모조리 뽑아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자. 도는 팽이만이 쓰러지지 않는다. 싸우는 사람만이 사람이며 싸우는 노동자만이 노동자다. 10년 100년 아니면 만년이라도 그렇게 간다. 10분의 사색은 이렇게 끝이 난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