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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회 : 영국, 벨기에 - 악어고기가 우리의 식탁 위에 오를 날 2회 : 프랑스 - 혁명과 유행의 도시 파리 3회 : 프랑스 - 국왕이 갖지 못한 것을 신하가 갖고 있다니! 4회 : 이탈리아 - '올리브'의 생명력과 꿋꿋함으로 5회 : 이탈리아 - 나폴레옹이 무너뜨린 천 년의 영화 6회 : 오스트리아 - 죽은 자와 산자 7회 : 체코 - 집시 여인의 슬픔과 투쟁 8회 : 불가리아 - 마카레나 상품학 9회 : 헝가리 - 평양냉면 맛이 질긴 이유 10회 : 터키, 그리스 - 문명의 교차로에서 11회 : 체코, 루마니아 - 프라하의 봄 12회 : 독일 - 평화를 향한 외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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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을 마치며
처음 유럽탐방기의 연재를 시작했을 때, 필자는 유럽통합이라는 새로운 격변 속에서 유럽 진보단체들의 생각과 활동들을 국내의 활동가들에게 전하고, 거기에 덧붙여 유럽의 문화적 풍물들을 진보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지금 마지막 연재글을 마치면서 생각해보면 참으로 호기로운 생각이 아니었는가 싶다. 글을 써 가면서 위의 두가지 테마가 맥락없이 짬뽕이 되거나 아니면 어느 한편으로 기울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 독자 여러분들과의 약속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것도 큰 요인중의 하나임은 물론이다. 또한 '현장에서 미래를'이라는 잡지가 갖는 성격과 이 글이 적절하게 조화되었는가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이기까지 하다. 특히 IMF시대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을 겪으면서 유럽탐방기는 더욱 뒤틀린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다가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모든 문제들은 전적으로 필자의 능력부족과 게으름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히고, 독자 여러분들의 넓은 이해를 구한다.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기 위해서 우리의 투쟁도 세계화되어야 한다. 그 구체적인 실현방법에 있어서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점이 많지만 말이다. 이 글이 멀리만 느껴지는 유럽이라는 대륙을 진보의 시각에서 우리들 가까이 접해볼 수 있었던 공간이었기를 바란다. 그들의 이념,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화, 환경까지도 말이다. 그 속에서 독자 여러분들이 조그마한 연대와 교류의 의식을 싹틔웠다면 필자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고통의 근원과 우리의 근원이 같음을 인식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러분들의 건투를 빈다. |
평화를 향한 외침
이 산 하
서울대 법대 재학
헤겔에 대한 맑스의 승리 ?
새벽녘이 다되어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카이로스 유럽(Kairos Europa)이라는 단체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단체는 1989년에 세워진 유럽차원의 네트워크이다. 각국의 진보정당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독립적인 사회운동체이다. 약속시간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역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서 '철학자의 길'로 향했다. 변증법의 원조라 일컬어지는 헤겔이라는 대철학자의 산책로로 유명한 곳이다. 대철학가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고 싶다는 지적욕망에 몸을 맡겨 산책로를 따라 걸어 올라갔다. 산책로라는 것이 뭐 특별히 다른 점이 눈에 띨까만은 수억만 리 이방인조차 이곳으로 인도하는 대철학가의 진리에 대한 열정이 나를 주눅들게 한다. 그리 높지도 멀지도 않으니 묵묵히 표식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될 것이라는 여행안내책자의 말만 믿고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으나, 낭패를 보고 말았다. 어이없게 길을 잃고 말았는데, 어스름한 새벽녘이라는 핑계로 나 자신을 달래보지만 아무래도 이 산책로의 표식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나는 길을 잃었다는 낭패감에, 괜스레 이 대철학자에게 트집을 잡아보았다.
"난 오늘 헤겔이 거닐었다는 철학자의 길을 약 2시간에 걸쳐서 등반했어. 만만치 않은 뒷동산정도 되는데, 그 길이 아주 꾸불꾸불하더라. 우리나라 같으면 직선코스로 잡아놨을 법한 곳도 지그재그 형태로 만들어놨지 뭐냐. 결국 나는 길을 잃었지. 새벽5시부터 걷기 시작했는데, 아침 8시가 다되도록 산 속에서 헤맸어. 처음에는 하이델베르크 지도도 없이, 나의 방향감각만을 너무 의존해서가 아닌가 생각했지. 그러다가 나는 문득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어. 생각해보니, 내가 길을 잃게 된 것은 무작정 '표식'만 보고 걸은 결과였거든. 어쩌면 난 헤겔의 말만 믿고 따라가다가 길을 잃은 꼴이지. 그때 재미있는 생각이 들더라. 헤겔의 방법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맑스의 방법으로 이 상황을 탈출해볼까라는 치기어린 발상이 그것이었어. 절대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말고,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고전적인 도식있잖아. 우선 지형지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방위를 잡았지. 그리고 길이 아닌 곳을 뚫어 결국은 하산할 수 있었지. 헤겔에 대한 맑스의 승리지? 그렇지만 지금 맑스는 누구에게 당하고 있는 것일까?"(친구에게 보낸 엽서에서)
오후 2시경 카이로스 유럽이라는 단체를 방문했다. 이 단체는 당시 '공평한 유럽통화통합을 위해'(For a Just EMU)라는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었다. 근본적으로는 유럽통화통합에 대해 찬성하지만, 현재와 같은 조건에서 진행되는 통합에 대해서는 반대한다고 했다. 즉, 유럽내의 빈국(貧國)을 제외시키고, 각국 정부에 의해 주도되면서 시민들의 참여가 배제되고 있으며, 국가별, 계층별 차이를 심화시키고 있는 현실에서는 유럽통합이 백해무익하다는 것이었다.
바이런도 낙서를 즐겼나 ?
유럽에는 유난히 낙서가 많다. 특히 남부유럽(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에는 모든 벽면이 온통 낙서천지이다. 낙서라고 해서 꼭 문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회화에 가깝다. 규칙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무질서하고, 어떻게 저런 곳까지 낙서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곳까지도 어엿하게 예술작품이 그려져 있다. 지하철, 기차, 담장, 모든 공공장소, 건물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 모든 유럽의 기차(일부의 고속전철을 제외하면)에는 낙서가 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다. 어떻게 문화선진국이 이렇게 무질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길거리의 낙서에도 나름의 사회적 의미가 존재함을 놓쳐서는 안될 것 같다. 낙서에 대해 혼란, 무질서라는 표피적인 의미만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낙서가 갖는 또 다른 측면을 놓칠 수 있다. 아마도 낙서는 70년대 히피문화의 발달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지배적인 질서 및 현대 문명의 파괴성, 획일성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그들만의 대안적 생활공간을 건설하려는 의지의 표현이 낙서로 표출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이라는 도시에는 히피들의 생활공동체가 있는데, 엄청난 낙서와 그림들로 모든 벽면이 장식돼 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변질됐지만 말이다. 또한 스위스의 제네바에는 무주택자들의 대안적인 문화센터인 아르타미스(Artamis)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공간에 자신들의 언어와 욕망을 빈 공장터 전체에 펼쳐놓았다. 자신들이 점거투쟁을 했던 장면, 지배자들에 대한 희롱, 자신들이 그리는 이상사회 등을 모든 벽면에 그림과 글로 표현해놓은 것이다. 심지어 신전에까지 낙서가 휘갈겨져 있다. 그리스의 수니온 곶에 있는 포세이돈 신전의 커다란 돌에는 숱한 사람들의 낙서가 있다. 그중에는 터키제국에 대항한 그리스민족해방 전쟁에 참여한 영국시인 바이런의 것조차 있을 정도이다. 그나마 독일에는 낙서가 다른 유럽국가들에 비해 적은 편이다. 이탈리아의 경우 기차마다 알 듯 모를 듯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지만, 독일에서 그러한 모습을 발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엄격함을 특징으로 하는 독일인의 정서상 낙서가 갖는 무질서함를 쉽게 인정하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끔 발견되는 낙서된 채 움직이고 있는 독일의 기차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이성의 통제를 미덕으로 삼는 독일인들에게도 낙서의 여유라는 조그마한 공간을 발견할 수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유럽의 낙서를 보면서 진짜 부러운 것은 다른 곳에 존재한다. 그것은 유럽문화의 사회적 관용성이다. 기차의 겉 표면을 온갖 낙서로 덧칠해서 운행한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당장 기차 승무원이나 관리인이 문책당할 사건이 아닐까? 주류적인 사회질서에서 어긋나는 것조차도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관용성이 부럽다. 주류질서에서 약간만 이탈하더라도 파격이란 이름으로 배제되고 어떠한 논의의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는 숨막히는 사회구조를 지닌 우리에게는 이들의 관용이 부럽기만하다.
개선문뒤에 숨어있는 '평화의 외침'
브란덴부르크문에 제일 먼저 갔다. 베를린하면 제일 먼저 떠올라서였을까? 아마 거기에는 베를린 장벽이 조금은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 나의 첫 베를린 방문지로 택했던 것 같다. 그런데 장벽은 오간데 없고 덩그러니 브란덴부르크문만 남아 있었다. 장벽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브란덴부르크문은 내게 별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단지 독일제국의 승리의 외침만이 들려올 뿐이다. 1871년 비스마르크 재상이 이끄는 독일은 나폴레옹에게 당한 수모를 깨끗이 갚고 이 문을 통해 개선했다. 브란덴부르크를 지나 20여미터 갔을까? 문 뒤쪽으로 난 도로 한 중앙에 몸을 비틀어대며 뭐라고 외쳐대고 있는 동상이 하나 있었다. 나는 퍼뜩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팽팽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마치 독일 철학자 피히테의 "독일민족에게 고함"이라는 주제처럼, 그 동상은 열정적이고 긴급했다. "Ich Gehe Durch die Welt und Rufe, Friede Friede Friede" 이렇게 씌여있었다. "나는 세계로 나아가 외친다. 평화. 평화. 평화" 영광과 승리의 개선문, 브란덴부르크 뒤에 독일 민족에게 항상 평화라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상이 있다는 사실이 내겐 흥미롭다.
승리에의 환상 속에서 저질러졌던 인류에 대한 범죄를 잊지 말자라는 뜻일까. 세계대전을 두차례나 일으켰던 장본인으로서 뼈에 사무친 회한의 몸짓일까.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나의 머리를 짓누른다. 똑같은 전범국이지만, 일본과 독일이 전쟁의 패배이후 취했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유대인의 학살에 대해 무릎 꿇고 사죄하는 콜 총리의 모습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지듯이,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범죄적 행위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하는 편이다. 일본 수상 및 정치인들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조 히데끼 장군의 묘소를 성지화하고 신사참배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물론 파시즘에 대한 배격이 과거에 대한 반성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특히 실업문제가 악화되면서, 그 원흉을 이민족에게 돌리며 그들에 대한 공격이 부쩍 잦아지고 있는 독일의 사회현실을 볼 때, 파시즘은 현재진행형이며 그에 대한 투쟁이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지 않을 때 그것은 언제고 다시금 발호할 수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범죄적 행위을 반성하는 것은 파시즘의 발호를 막으려는 최소한의 조건이며, 최소한의 노력이 아닐까. 우리와 가까이 있는 이웃 일본인들에게 이 정도를 기대하는 것조차 무리일까.
새벽부터 걸어다녀서인지 피곤이 온 몸으로 밀려들어 왔다. 절룩거리면서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살당했다는 티어가르텐 ―숲에 가까운 대정원 ― 을 지나,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지나가는 사람을 위협하는 어느 기념탑에 다다랐다. 전승기념탑이다. 1870년 소위 말하는 보불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당시 독일재상 비스마르크가 1872년에 건설한 것이다. 대개의 전승기념탑이 그렇듯이, 사람에게 다가오는 그 위압감과 메마름이란 이루 형용하기조차 힘들다. 민족주의란 울타리 속으로 숱한 독일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파리 꼬뮨의 엄청난 희생을 불러일으킨 전쟁에서 승리했음을 자축하는 기념물이다. 조용히 그 옆에 앉아 이런 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낯익은 말소리들이 들리더니 곧이어 찰칵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게 무슨 탑인지 알고 찍는 건지... 그 외관이 사진의 배경만 될 수 있다면 무조건 찍어대는 한국 배낭객들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나는 왜 이곳에 왔는가 ?
베를린에 왔으니 당연히 가야 할 곳으로 나의 머리 속에 박혀있는 곳은 베를린 장벽이었다. 분단이라는 동일한 상황을 체험하고 있는 민족으로서 갖는 강박관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나의 발길은 이미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철을 타기 위해 천천히 인도를 따라 걸어가는 도중, 나는 그리 흔치않은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커다란 트럭하고 조그만 자가용이 접촉사고를 낸 것이다. 물론 자가용이 많이 찌그러졌다. 큰 트럭이 길 옆에 세워졌고, 트럭운전사가 내렸다. 그는 찌그러진 자동차로 향했는데, 그 사이 자가용 운전사도 밖으로 나왔다. 이들의 다음 행동이 어떻게 드러날까 무척 궁금했다. 한국에서 있을 법한 상황을 한참 신나게 상상하고 있는 사이, 그 둘은 막 대면하고 있었다. 자가용 운전기사가 손을 내밀자, 트럭기사는 흔쾌히 그 손을 덥석 잡으며 서로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얘기를 시작했다. 얼굴 붉히며 소리부터 질러대는 우리네 상황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독일인들이 이성적이라는 책 속의 어구가 맞다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베를린 장벽을 보기 위해서 나는 꽤나 고생을 해야 했다. 포츠담광장이라는 곳에 있다기에 그곳에 갔더니만, 고작 내 양팔 벌리면 딱 맞을 정도의 벽만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결국 베를린 중앙역 부근에 베를린 장벽이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거기에는 약 60미터정도의 장벽이 이어져있었다. 벽면에는 온통 peace, 平和, Friede 등의 글자로 뒤덮여 있었다. 중간중간 한국인들의 낯익은 글씨들도 보인다. 나는 왜 이곳에 왔을까? 냉전시대의 끝이 곧바로 평화시대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자본주의의 득의만만한 오만이 '평화'라는 이름으로 베를린 장벽 곳곳에 서려 있을 뿐이었다. 또 다른 전쟁과 폭력, 그리고 배제는 우리 주변 가까이에 존재하지 않는가? 오시(동독인)와 베시(서독인)라며, 서로를 비하하는 통일독일의 현실에서, 베를린 장벽의 관광용 초소(哨所)의 총구는 여전히 서로를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
나는 베를린 장벽에서 발걸음을 돌려, 옛날의 서베를린 중앙역으로 왔다. 거기에서 조금만 걸어나오면 부서진 채로 보존되어 있는 인상적인 교회를 발견할 수 있다. 빌헬름 황제 교회이다. 2차 세계대전때 폭격맞아 전소된 것을 부분적으로 복원하여, 현재와 같은 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독일인이 이 교회를 왜 파괴된 상태로 보존하려고 했는지, 그 의도는 정확히 모르겠다. 미국에 대한 분노? 나찌즘에 대한 경계? 아니면 둘 다? 그럼에도, 나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를 치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독일인의 정신이다. 지난 시절 우리는 중앙청 첨탑을 철거할 것이냐 보존할 것이냐를 놓고 한바탕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결국은 철거되었지만 말이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며, 그에 대한 평가는 대중들이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굳이 파괴의 미학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아도 말이다.
우리가 사랑했으면 하는 것
나는 함부르크에서 '사회주의'(Socializmus)라는 잡지의 편집부를 방문했다. 이들은 독일노총(DGB)이나, 사회민주당(SDP), 민사당(PDS) 등의 모든 주류 노동·정치운동세력들과 등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비판적 진보운동세력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의 우선순위 ― 재정·통화주의 ―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와 비판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채택되고 있는 공공지출의 축소,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적 방법에 대해 반대해야 하며, 오히려 공공부문 투자를 확대하는 등의 대안적 방법이 고민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완고한 계급타협체제의 대명사격인 독일에서 그것에 편입되지 않고, 진보적인 사고와 이론을 정립해내려는 노동운동세력을 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에겐 한없이 신선했다.
약 1시간 동안 무사히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나는 여행안내소에서 소개받은 어느 유스호스텔을 찾아갔다. 40대의 멕시코인과 젊은 노르웨이 친구와 함께 묵게 되었다. 멕시코인은 핀란드주재 멕시코 대사관에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누군가가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을 때, 멕시코라고 말하기 전에 항상 현재 핀란드에 거주하고 있음을 먼저 얘기했다. 아마도 멕시코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가 핀란드보다 더 낮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노르웨이 출신의 젊은 친구는 내게 자신의 나라에 와 본적이 있냐고 물어 왔다. 가보지 못했다고 말하자, 그는 노르웨이 안내책자 한 권을 떡 꺼내더니 20분 동안이나 노르웨이 관광명소들을 설명해주었다. 그만큼 자신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것일까. 그 친구는 다음날 체코의 프라하로 떠난다고 했는데, 이번이 벌써 다섯번째라고 했다. 콘서트도 보고, 건물도 고풍스럽고 해서 자주 간다고 덧붙였다.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일 듯 싶다. 그것이 조국이든 어느 도시든 어떤 사람이든 말이다. 사랑을 겉모습이 아닌 내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고 정의한다면, 자기 아닌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갖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로부터의 여유를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40대의 멕시코인도 그가 만약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조국(祖國)이 갖고 있는 내면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문화적 자치를 위해 완강히 투쟁하고 있는 멕시코 남부의 사파티스타 원주민들이 있고, 노동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멕시코 북부 자유무역지대의 노동자들을 볼 수 있는 한, 그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삶의 가치를 위한 투쟁보다 우리가 더 사랑해야 할 것이 있을까.
프라하의 봄
여행객이 프라하로 가는 길은 그리 순탄치 않다. 왜냐하면 서유럽의 모든 기차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유레일패스'가 체코에서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라하로 가는 기차에서는 여행객과 승무원과의 실랑이가 항상 끊이지 않는다. 체코 국가내로 들어가면서부터 추가요금을 물어야 하는데, 대개는 승무원들이 터무니없는 요금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프라하에 입성하는 데서부터 겪어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라하는 충분히 가 볼만한 곳이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현장을 직접 체험해본다는 것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해 동유럽 집시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프라하에 입성한 것은 아침 일찍이었다. 중앙역에서 잠깐 걸어나오면 곧바로 보이는 직선대로가 있는데, 이 곳이 바로 '바츨라프 광장'이다. 지난 68년 체코 민중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던 곳이며, 소련군의 탱크는 이곳 포도를 짓밟고 지나갔다. 밋밋해질대로 밋밋해진 길거리의 돌들은 바츨라프 광장이 간직한 유구한 역사를 있는 그대로 웅변해주고 있다.
1968년 8월 20일 오후 11시, 소련군과 4개국의 바르샤바 조약군이 동원되었다. 3∼4시간만에 모든 공항과 국경초소, 도시들은 수천 대의 소련군 탱크와 수천 수만의 바르샤바 조약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두브체크(당서기), 체르니크(국무총리) 등의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모스크바에 끌려갔다. 1956년 헝가리 민중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소련의 당지도자들은 또 하나의 친쏘 정부를 다루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두브체크는 하루빨리 사태가 '정상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바르샤바 조약) 군대를 즉각 마을과 도시들에서 원래의 근무지로 이동시킬 것을 합의했다. 그것은 당연히 각 지역에서 질서와 정상적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자체 기관의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 지금 우리의 기관들이.. 일반인들의 생활을 통제하기 위하여 (일련의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두브체크는 체코 민중들의 외침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말았다.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에 기반한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이라는 절규를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 묻어버리고 온 것이다.
두브체크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4만여 스코다 노동자들의 결의는 그 협상 결과를 '굴욕적 항복'이라고까지 표현했다. 1968년 8월 28일자 [학생](Student)지(誌)는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표를 맡았던 동지들은 야만적 침략군에게 완전한 항복을 했다. 그들이 어떠한 압력을 받았든지 간에, 그들의 행동은 공화국과 인민에 대한 배신이다 …… 그것은 우리들 스스로에 대한 배신일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 부여된 역사적 임무, 즉 스탈린주의라는 비인간적 구조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질서의 인간적 형태를 찾아야 하는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탱크앞에 맨몸으로 서 있는 시민으로 흔히 상징되는 '프라하의 봄'에 대해 쉽게 평가를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른 동유럽 국가 민중들의 저항이 그렇듯이 '프라하의 봄'에 대한 평가도 일반적으로는 양극단의 입장으로 갈려진다. 서방의 언론들은 두브체크(68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로 대표되는 공산당 개혁그룹의 반스탈린주의 운동으로 규정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소련군의 침공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집단들은 체코의 사회주의적 구조를 위험에 빠뜨리고 자본주의 사회로 회귀하고자 했던 사건으로 평가한다. 나는 구(舊)동구권 사회주의 체제가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들이 실시했던 계획경제 및 맑스-레닌주의를 표방했던 정치제도가 민중의 신뢰를 잃었다는 점에서 '프라하의 봄'을 자본주의 사회로 회귀하려는 세력들의 거대한 음모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물며 소련군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평가에는 더더욱 그렇다. 또한 나는 그 반대편의 평가도 동의하지 않는데, '프라하의 봄'을 반스탈린주의 운동이라고 규정하는 것의 이면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이라는 거만하고도 대단히 위험한 사고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구동구권의 몰락에 기대어 자본주의의 환호성을 질러대고, 모든 사회주의 체제 속에 있었던 동구 민중들의 저항을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또 다른 근거로 삼으려는 논리에도 반대한다. 그럼에도 내가 진정으로 슬픈 사실은 '민중의 국가'라는 곳에서, 민중들의 자율과 자치에 대한 욕망을 총과 권력으로 짓밟았던 역사 자체이다. 개혁의 기수라던 두브체크도 결국 소련의 요구에 두손을 들면서, 민중들의 열망을 대변하는 데 실패했다. 어쩌면 동구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오래전부터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련사회주의체제의 모국(母國)과 다른 어떠한 변화된 모습을 인정하지 않았던 역사에서, 대중들의 삶에 대한 자치와 자율에의 욕구를 억압했던 사실 속에서, 민중의 국가는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구(舊)사회주의체제는 티토주의로 유명한 구(舊)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이 스탈린주의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철저하게 배척했고,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민중들의 투쟁들을 탱크로 짓밟음으로써, 사회주의권내에서 자신들의 오류를 정정할 수 있고 보다 진보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조건과 기회를 스스로 없애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모순에 대한 자기 정화능력을 스스로 박탈시키는 과정에서 어찌 새로운 싹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계획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은 채 제멋대로 자본주의로 이행해가면서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숱한 악(惡)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는 구(舊)동구권블럭 국가들의 현주소를 보면서, 비록 가정이지만 민중들이 선택해야 했던 길은 자본주의도 아니고 구(舊)사회주의체제도 아닌 제3의 길이 아니었는가 생각해본다. 이에 대해 사미르아민(SamirAmin)이라는 세네갈 출신의 경제학자의 다음 언급은 많은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만일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가 완결된 형태의 어떤 고정된 정식이 아니라 대중적인 전략에 의해 전체의 연대를 달성해내고 세련된 수단을 통해 거대한 산업예비군을 근대적인 부문으로 점진적·조직적으로 이전시킬 수 있는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사회주의만이 이들 사회의 - 주변부, 반주변부 자본주의 사회 -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할 수 있다는(특히 중국의 혁명가들에 의해 개발된)테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산업예비군을 근대적인 부문으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단절, 즉 대외관계를 사회주의로의 긴 이행기의 민족적, 대중적 단계에서 요구되는 조건에 종속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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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정/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