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의 핵심은
이제 '일자리 늘이기'여야 한다
이 무 열
책만드는 노동자
가면무도회는 끝나고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추악한 몰골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쪽에는 구겨져 버려지는 인간들의 참혹한 모습이 그득하고, 다른 한쪽에는 불시에 새어나간 금고 속의 돈을 벌충하고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타 한몫 잡으려고 눈이 벌개진 무리들의 철면피한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들어오며, 그 어간에는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형제자매들을 애써 외면하고 어떻게든 튼튼한 가지를 붙잡고자 연신 잔머리를 굴리는 인간 군상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어른거린다.
경제위기와 함께 인간의 목숨값은 땅에 떨어졌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삶의 뿌리가 뽑힌 채 생존 그 자체를 위해 인간의 최소한의 위엄까지도 내다팔고, 그나마도 팔 곳을 찾지 못한 많은 이들은 거리로 나섰다.
참으로 후안무치하고 가증스런 말들이 사람들의 지친 몸과 마음을 짓찢어놓는다. '경제살리기'라는 지상과제를 앞세운 협박과 공갈은 이제 노동대중에게 노골적으로 목숨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말인즉슨, 이러다가는 배가 통째로 뒤집혀 모두가 죽으니 일단 20%가 내려 80%가 살아난 뒤 그 80%가 배를 열심히 고쳐서 앞에 내린 20%를 구하러 오겠다는 것이다. 그 20%가 내리는 곳은 아무데도 의지할 것 없는 망망대해이고, 또 언제 배를 고쳐 돌아오겠다는 것인지 기약도 없다. 말로는 1∼2년 운운하지만 그럴 수 있으리라는 근거는 사실 아무것도 없고, 설령 그 감언이설을 믿어본다 해도 망망대해에서 1∼2년을 살아 견딘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해서 그 말에 덧입혀져 있는 달착지근한 포장을 벗겨내면, 이런 내용물이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낸다. '네가 내려야 우리가 산다.' '너희가 죽어야 내가 산다.'
도대체 이 세상의 어느 누가 다른 이의 삶을 박탈할 권리를 부여받았단 말인가! 제대로 된 인간의 입에서 어떻게 '너희가 죽어야 우리가 산다'는 말이 천연덕스럽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저들의 입 속에서는 틀림없이 이런 말이 뱅뱅 돌 것이다. "그러게 미리미리 대비를 하지. 어차피 세상은 정글이고 삶은 전쟁인걸. 정글 속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머리를 잘 써야지. 날 보라구. 전쟁에서 이기려고 난 이렇게 대비를 했고, 이런 수를 써서 이렇게 자리를 잡았잖아. 그동안 하고 싶은 일 다하지 못하며 치른 희생들, 그 과정에서 겪은 위험과 난관들, 목숨 건 결단으로 그 고비를 넘긴 것들을 다 이야기하자면 대하소설 한 편으로도 부족해. 그러니 난 내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어.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근본부터가 너희하고는 다른 족속이지. 그런데 너희들하고 함께 있으면 내가 받을 보상이 줄어들고 혹 재수없으면 나까지도 함께 죽을지 몰라. 그러니 너희들이 죽어 줘야겠어.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게 정글의 법칙인 걸 몰랐느냐 말야. 이 머저리들아!"
저들의 관점에서 보면, 위기가 닥쳤을 때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이 냉혹하게 버림을 받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위기시에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개인이건 기업이건 집단이건 나라건 간에 모두가 사투를 벌여 이긴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졌는데 노약자나 병약자나 부상자나 무능력자는 버리고 가야지 함께 가려다가는 다 죽는다는 것이다.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네들이 자신보다 더 큰 힘에 짓밟혀 죽음을 강요당하는 것과, 대중들의 불만이 도를 넘어 자기네들의 돈벌이와 우아한 삶을 보장해주는 판 자체가 깨져버리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그 숱한 난관을 헤치며 갈고닦아온 인류의 공생의 예지가 조롱받는 야만의 시대로 돌아왔고, 생존 전쟁은 그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 명제가 되었다.
자, 이제 우리도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치밀하게 생존 전략을 짜야 할 때다. 삐끗하면 벼랑에서 미끄러지고 만다. 기본이 되는 몇 가지 전제와 조건을 살펴보자.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 자신의 노동력 외에 사실상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우리 노동자는 예나 지금이나 개인적으로는 자본이 돈벌이를 위해 펼쳐놓은 그물 속에 어떻게든 기어들어가 자신의 삶을 구해야 하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저들은 우리의 이런 존재의 취약성을 잘 알기에 끊임없이 우리를 이간질하여 자신들이 요리해 먹기에 좋은 상태로 만들려 한다. 경제위기 속에서 저들이 하는 농짓거리를 보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조직 노동자와 비조직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와 일용 노동자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자와 그밖의 광범한 노동대중, 고용 노동자와 실업자,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사업장 노동자, 사기업 노동자와 공공부문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와 생산직 노동자, 산업별 부문별 노동자간, 직종과 직급간, 조합간부 및 활동가와 일반 조합원 사이를 갈라놓지 못해 안달하는 저들의 몸부림을! 사실상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비조직 노동자와 광범한 노동대중들에게 묘한 제스처를 보여 대기업 중심의 조직 노동자들에게 반감을 갖게 만들려고 획책하는 저들의 술수를!
난 지금 잘려나가는 20%엔 들지 않을 거라거나 저건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거나 저 사람들과 우린 다르다거나 하는 안이한 생각을 했다가는, 그날로 노동자의 대의는 훼손당하고 대오는 무너지고 만다. 각자 자신의 사업장에서 자기 기반을 지키고 다지고 확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작업은 반드시 전체 노동대중을 고려하면서 행해져야만 한다. 노동대중 전체의 생존권이 벼랑에 몰린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하여 노동대중을 저들의 간계에서 빼어내 노동자의 대의에 결집시켜야 한다. 노동자는 하나다. 하나가 될 때에만 진정한 노동자이다.
'경제살리기'라는 절대 명제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누구를 위하여'라는 단서가 붙는 상대적인 것으로 변화돼야만 한다. '경제살리기'가 과연 가능할 것인지조차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거니와, 또 어떤 식으로 살아날 것인지에 따라 노동대중의 삶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일의 명제는 '경제살리기' 자체가 아니라 '노동대중의 생존권'이 되어야만 한다. 어렵게 경제가 살아난다 한들, 그 과정에서 20%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면, 나머지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경하할 일이겠는가. 그 과정에서 죽어나간 사람에게 다시 살아난 경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황천에 가서라도 '경제살리기'에 밑거름이 되었노라고, 내 죽음은 헛되지 않았노라고 위안을 삼겠는가, 아니면 다른 이들이 그 큰 공을 기려 사후 서훈이라도 내리겠는가.
'경제살리기'는 마땅히 노동대중의 생존권 보장과 함께 가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명분도 서지 않거니와, '경제살리기' 자체가 가능하지도 않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순순히 내놓을 사람이 있을 리 없는 이상, 문제가 더 크게 불거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선상에서 '경제살리기'를 위한 '구조조정'에 '고용조정'이나 '정리해고'가 핵심 사항이나 필수 사항으로 다루어지는 풍토 자체에 이제는 분명하게 제동을 걸어야 한다. 국민경제가 그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적어도 아직까지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 되는 이상 비효율적인 요소들을 개선하여 생산성을 높이자는 '구조조정' 자체에 반대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 창끝이 노동대중의 삶을 향하는 한 거기에는 더이상 아무런 긍정적인 의미도 없다. '구조조정'은 경제 자체를 살리기보다는 노동대중의 삶을 구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야 하며, 공식 실업자가 150만을 넘고 실제로는 400만을 넘어선 지금, 이제 '구조조정' 자체도 일자리를 늘리는 방안을 짜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한다. 이것은 저들이 보기엔 황당한 생각일는지 모르지만, 노동대중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쫓겨나는 사람의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운운하며 대다수가 살기 위해서는 소수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자에게는, 두말 없이 그자리에서 다른 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너부터 죽으라고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그러고 난 뒤에 아무리 열악한 상황이라고 해도 그 속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 일자리를 늘리거나 적어도 유지하지 않는 '구조조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자리를 유지하고 늘리는 데 들어가는 최소한의 비용은 다른 모든 비용에 우선하여 지출돼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천명해야 한다.
경제 위기의 책임을 무차별적으로 모두의 탓으로 돌리는 태도는 단호하게 배격해야 한다. 요즘 TV에서 깜찍한 아이들을 내세워 1인당 외채가 500만원이라며 각성을 촉구하는 광고는 모든 국민을 범법자로 몰아 부담을 떠넘기려는 그런 간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순진한 백성들로 하여금 한끼 식사로 밥 한 그릇에 반찬 둘이면 충분할 텐데 반찬을 셋이나 놓고 먹은 게 캥기게 하여 책임을 지우려는 그런 야비한 작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빌린 사람 따로 있고 쓴 사람 따로 있고 흥청망청 날린 사람 따로 있고 경영이나 관리에서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 따로 있는데도, 굳이 그렇게도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고 싶다면, 국난이 닥쳐 많은 이들이 생사의 기로에 처했으니 무엇보다도 먼저 가진 자가 곳간을 열어 없는 이들에게 나눠주고 한데 힘을 합쳐 새출발을 시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절규해야 마땅할 것이다.
잘못을 밝혀 책임을 묻는 것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다. 이제 밝힐 것은 웬만큼 다 밝혀졌듯이, 이번 경제위기는 재벌기업의 무리한 차입경영과 사업확장, 금융기관의 무모한 외화도입과 해외투자, 정부의 경제정책과 외환관리 실패, 국제금융시장의 투기성 개입, 보다 넓게는 세계 규모의 과잉축적과 국제금융시장의 과잉 비대화, 국내외의 과잉생산 등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일어났다. 원인이 드러났으면 바른 방책을 찾아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책임자에게는 책임을 물어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게 해야 한다. 물론, 일자리를 유지하고 늘리는 데 필요한 비용도, 그밖의 구조조정에 필요한 비용도,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여 새롭게 사회 체계를 재편하는 데 필요한 비용도 원칙적으로는 모두 그들이나 그 과정에서 이득을 본 사람들한테서 끌어 내야 한다. 이것이 이제라도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첫걸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 '경제살리기'라는 미명하에 내가 살기 위해 너희들이 죽어줘야겠다는 소리를 계속한다면, 그들에게는 이렇게 갚아주어야 한다. "너희 한 줌의 인간쓰레기들이 없어지면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다."
요즘 부쩍 늘고 있는 사회보장과 사회안전망에 대한 요구는 일자리 늘리기 요구의 보조 수단으로 자리매겨져야 한다. 사회안전망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백번 낫고 변변찮은 것보다는 잘 갖추어진 것이 백번 나은 거야 두말할 나위 없지만, 실업수당이나 그밖의 장치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 경우 받을 수 있는 임금에 미치지 못함은 물론이거니와, 남들처럼 떳떳이 일하지 못하는 데 따르는 상실감이나 인간성에 대한 모욕, 내일에 대한 불안감을 보상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일자리를 달라는 요구를 폭풍처럼 강화함으로써, 오히려 저들로 하여금 돈벌이 판이 깨질까 두려워, 자신들의 기득권이 송두리째 날아갈까 두려워 먼저 제의해오게 만들어야 하는 성격의 것으로서,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체제의 시궁창인 산업예비군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요컨대 우리의 요구와 행동은 저들이 갈수록 버려 가는 인간을 지키는 것, 모든 이가 자신의 일을 갖고 위엄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를 피비린내 진동하는 정글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며 사는 인간적인 사회로 재구축하는 것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과정은 저들에게 방안을 제시하고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차하면 우리가 조종간을 잡겠다는 의지와 힘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만 우리의 생존 전략도 솟아나온다. 호랑이처럼 사방을 날카롭게 주시하며 황소처럼 우직하게 걸어가자.
오늘 이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줄기찬 투쟁은 여러 가지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제위기의 한가운데에서, 과잉생산의 표본인 자동차 산업의 핵심 사업장에서, 초미의 관심사인 정리해고 문제를 둘러싸고, 강력한 노조의 지도하에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현안인 '구조조정' 문제는 물론, 경제위기시의 노동대중의 생존권 확보 문제, 앞으로의 자본과 노동간의 힘 관계, 미래의 한국사회의 기본 틀까지도 좌우할 수 있는 핵심 고리다.
위기일수록 승리의 전범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탄탄한 진지를 근거로 노동대중의 힘과 뜻을 결집시키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다. 진심으로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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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노/정/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