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현장에서 미래를』37(1998/10)

노동운동의 탈계급화·탈정치화를 위한

최근의 시도들에 대한 비판

- {한겨례21}의 논조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

김 세 균

소장

1. 한국 노동운동, 어디로 갈 것인가?

한국이 IMF 관리체제하에 놓이게 된 이후 IMF의 구제금융과 김대중정권의 노력에 힘입어 외환위기는 오늘날 일정하게 진정되고 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이런저런 조치들이 오히려 실물경제의 위기를 악화시키면서 98년의 경제성장률이 -7%로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올 정도로 한국경제는 끝없은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더욱이 오늘날 세계자본주의는 언제 어떻게 세계적 규모의 대공황이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와 더불어 개방화, 자유화, 사유화, 유연화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동자·민중에 대한 김대중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내지 시장주의적) 공세 역시 날로 치열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한국의 노동자계급에게 다음의 두개의 길 중 어느 하나의 길을 선택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그 하나는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 그러나 이때의 경제란 '노동자·민중의 경제'가 아니라 '자본 중심의 경제'이다 ―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을 바람직하거나 객관적으로 불가피한 것으로 보면서 그 개편을 지지하거나 묵인하는 가운데 그 피해를 사후적으로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정권과 자본의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모든 수준, 모든 측면에서 저항하면서 위기를 만들어낸 근본원인을 해결하고 사회구조의 발본적인 개편을 위해 노력하는 길이다.

전자의 길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자본의 이익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추구하는 길이고, 후자의 길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노동자·민중의 이익을 중심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추구하는 길이다. 또한 전자의 길은 자본이 축적위기에서 벗어나도록 사회 전체가 황폐화되는 것을 용인하면서 단지 그 황폐화를 사후적으로 제한하려 하는 길이고, 후자의 길은 그러한 황폐화에 처음부터 반대하면서 위기극복과 사회발전의 새로운 대안을 추구하는 길이다. 나아가 전자의 길은 한국의 노동운동이 자신을 자본종속적인 운동으로, 그리고 부분이익을 대변하는 이익집단 수준의 운동으로 전락시키는 길이고, 후자의 길은 자신을 국가와 자본에 대해 자주적인, 보다 높은 수준의 계급적·정치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고 노동자게급을 사회발전의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상승시키는 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이란 단지 조합원 수가 증대하거나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사회발전의 참다운 대안적 세력으로 상승해 나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노동조합 조직율이 지금보다 높아지고 기업별노조체계가 산별노조체제로 전환한다고 할지라도 노동운동이 '경쟁'과 '효율'과 같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지금보다 더욱 포섭된다면, 그리고 많은 득표율을 지닌 노동자 정당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정당이 자본의 하위동반자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그러할 때의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 수준이란 조합원의 수가 적고 기업별노조체계를 아직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자정당이 조직되어 있지 않지만 자본과 국가의 공세에 대항하는 투쟁력을 잃지 않고 있는 현 시기 노동운동의 그것보다 낮은 것이다.

노동운동이 어떤 길로 나아가느냐는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만이 아니라, 다른 계급, 계층에게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하여 한국의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위기의 해결방향 등이 우리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 모두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문제로 부각되자 위기의 자본주의적 극복과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자신의 계급적 이익이나 사회 전체의 이익 실현의 전제로 보는 이런저런 세력들은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을 저지하고, 노동운동을 탈계급화·탈정치화시키기 위한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비록 일관되게 행한 것은 아니지만, 민주노조진영이 총파업투쟁을 몇 차례 시도하자 이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고 보다 노골적인 협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이 일정한 휴지기에 들어간 지금도 노동운동의 그러한 성장을 막으려는 시도는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사태를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그러한 시도가 단지 정권과 자본 진영에서 행해지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이전까지만 해도 노동자들의 생존권투쟁 등에 대해 일말의 연대를 표시해온 시민사회세력들까지 그러한 시도에 가세해 정권과 자본들이 내세우는 논리를 받아들이면서 노동운동이 변화한 시대에 걸맞게 혁신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글의 목적은 그러한 시도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는 데에 있다. 그런데 본인에게는 노동운동에 대한 한겨례21의 개입이 그러한 시도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이 글은 한겨례21의 논조를 비판적 검토의 주된 대상으로 삼으려고 한다.

2. 노동운동의 탈계급화·탈정치화를 위한 이런저런 시도들

김대중정권은 그간 독점재벌들과 더불어 위기부담을 노동자·민중에게 전가시키고 노동자·민중의 희생 위에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을 강력하게 추진해 왔다. 그렇지만 김대중정권은, '재벌개혁' 등의 요구를 제출하고 있는 데에서 드러나듯이, 자신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의 보호에 집착하고 있는 독점재벌들과는 달리, 이들 재벌들의 직접적인 경제이익을 일정하게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재벌들에 비해 실업대책의 강구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이 만들어내는 병폐의 사후적 제거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먼저, 그 이유는 재벌들의 이익과 일정하게 구분되는 정권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다. 즉, 정권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부터 '정통성'(legitimacy)을 확보해야 하는 강제 앞에 놓여 있다. 이와는 달리 정권이 자신의 정통성 확보를 도외시한 채 재벌들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는 데에만 집착한다면 경제위기의 도래와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대중들의 정권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크게 증폭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상황은 정권에 대한 국민대중의 불만이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다. 또한 김대중정권은 많은 서민대중의 지지를 받아 성립된 정권이기 때문에 이들이 등을 돌리면 정권의 기반이 금방 취약해지고 급속히 붕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음으로, 그 이유는 정권 자체의 이익이라는 '체제 내적인 자체 이익'보다 더욱 중요한 정권의 존립근거인 '체제 자체의 이익'과 관련된다. 즉, 정권은 자신이 기반하고 있는 사회·경제체제를 총괄적으로 관리하는 국가의 집행권력으로서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체제를 다시 안정적으로 재생산시켜야 할 최종적인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위기를 만들어낸 체제의 개혁 내지 수술이 많든 적든 요구되는데, 그러한 개혁과 수술은 불가피하게 (한국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재벌들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과 일정하게 배치되는 요소들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정권이 재벌들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일정하게 제한하고 구조개편이 만들어내는 병폐의 사후적 제거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하는 것은 위기극복이라는, 독점재벌들의 직접적인 이익을 일정하게 희생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는 그들의 '중·장기적인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나아가 정권이 재벌들의 직접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데에만 매달린다면, 이는 자칫 '정권 위기'의 수준을 넘어서는 '체제 위기'까지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중정권이 재벌들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일정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은 정권이 친노동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한국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독점자본들의 '(중·장기적인) 정치적 이익'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김대중정권은, 독점재벌들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의 보호에 집착한 나머지 경제위기의 도래를 재촉하고, 이로 인해 '총(독점)자본의 정권'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김영삼정권과는 달리, 한편으로는 자신의 취약한 권력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애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극복과 체제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해 독점재벌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보다는 이들의 중·장기적인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보호하는 데에 더 많은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정권 역시, '총(독점)자본의 정권'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낼 것인지의 여부에 따라 차이를 보일 수는 있겠지만, 김영삼정권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민중의 정권'이거나 '친노동자·민중 정권'이 아니라 '총(독점)자본의 정권'이다. 그리고 김대중정권은 총(독점)자본의 정권이기 때문에, 이 정권의 대노동운동 정책 역시 어디까지나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의 저지와 무력화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시민사회 세력은 그간 크게 보아 보수언론 등이 중심으로 되는 '수구적 시민사회세력'과 '한겨례신문'과 시민운동 단체들이 중심이 되는 '개혁적 시민사회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때 수구적 시민사회세력이 독점재벌 중심의 천민 자본주의와 비민주적 정치질서를 옹호해 왔다면, 개혁적 시민사회세력은 그러한 천민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우리 사회의 민주개혁을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런데 이들 개혁적 시민사회세력들은 한국이 경제위기에 처하고 IMF 관리체제 하에 놓이게 되자 한국의 경제질서가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편된 선진자본주의 형태로 변모해야 한다고 보면서 우리 사회의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지지하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김대중정권이 재벌개혁 등의 내용을 포함한 신자유주의적 개편에 착수하자 이들 개혁적 시민사회세력은 많든적든 '정권과 독점자본의 제2중대' 역할을 스스로 떠맡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유시장경제'의 열렬한 옹호자인 '경실련'은 김대중정권의 정책을 높이 평가하면서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재벌과 수구보수세력의 반대로 좌절되지 않도록 정권의 재벌개혁 정책 등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대표적인 시민운동단체 중의 하나인 '참여연대'는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지지하고 있지만, '경실련'에 비해 신자유주의적 개편이 만들어내는 병폐의 사후적 제거에 더 많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래서 '참여연대'는 예를 들어 기업경영의 민주화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소액주주 권리찾기 운동' 등에 적극 나서고 있으며, 실업자 보호정책의 강구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보수언론들의 각광과 정권의 주목을 받기에 족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운동은 재벌체제의 발본적인 해체 등을 주장하는 노동자·민중세력의 운동에 비한다면 보수언론에게는 참으로 '건전한' 시민운동이기 때문이며, 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해 주는 원군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민중적 시민사회의 활성화', '민중적 시민운동의 전개'라는 거창한(?) 구호를 내걸고 활동을 개시한 '참여연대'가 한 발은 아직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에 슬쩍 걸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지 못하고 있든,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성장을 저지하고 무력화하려는 정권과 독점자본의 제2중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 대표적인 비판적 정론지로 자처해온 '한겨례신문' 역시 이들 시민단체들의 노선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한겨례신문이 적극 옹호하기 시작한 재벌개혁이란 ('독점자본의 한국적 지배형태'인 재벌의 해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바의 '재벌기업들의 근대화'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도 한겨례신문은 그런 정도의 개혁을 특권화하면서 개혁을 위해서는 노동자·민중들 역시 불가피하게 고통을 분담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한겨례신문이 사설 등에서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는 한국경제의 구조조정 내용이란 대량실업의 발생 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는 참으로 친자본적인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겨례신문은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후원을 받아 종교계 지도자들을 앞세우고 이른바 '실업극복 국민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처럼 한겨례신문은 한편으로는 노동자·민중에게 대량실업 등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죄를 성수(聖水)로써 씻어 버릴 양 자신이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발생시키고 있는 실업에 사후적으로 대처하는 실업자 구제사업에 열성을 쏟고 있다.

이처럼 개혁적 시민사회세력들이 정권과 독점자본의 제2중대로 편입되어 감에 따라, 그 이전에는 느슨하게 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노동자·민중세력과 개혁적 시민사회세력간의 연대는 오늘날 ― 적어도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들과 관련하여서는 ― 깨지고 말았다. 그 연대를 복원하려면 이들 개혁적 시민사회세력이 다시 민중적인 입장으로 돌아오거나, 아니면 노동자·민중운동이 자신의 운동노선을 그러한 시민사회적 성격의 운동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이들 시민사회세력이 민중적 입장으로 되돌아 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가능할지라도 아마도 먼 후일의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지금은 이들 시민사회세력들은 노동자·민중진영에게 정권과 독점자본의 제2중대가 된 자신들의 뒤를 따를 것을 요구하면서 그것을 거부하는 노동자·민중세력에게 공격의 포문을 열고 있다. 그러한 시도는 특히 1998년 10월 1일자 {한겨례21} 제227호에 조준상 기자가 쓴 "노동운동에 쓴 약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의 글 (및 "벼랑에 몰린 '노사정 마차'"라는 제목의 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글들이 대변하는 특정한 입장은 조준상 기자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겨례21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 그런데 그러한 글들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한겨례21의 입장은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을 저지하고 노동운동을 자본종속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성격을 기본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3. "노동운동에 쓴 약이 필요하다"라는 {한겨계21}의

노동운동에 대한 훈계 비판

위에서 인용한 글들에서 한겨례 21은 노조운동 역시 자체 구조조정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하는 바, "IMF시대로 표현되는 변화한 사회·경제 환경에 걸맞는 '옷'을 입지 않으면 한국사회에서 노조운동의 미래가 없을 것이다"라고 단정한다.2)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한겨레21은 먼저, 87년 이후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한국의 노조운동은 그간 '고성장·저실업'이라는 유리한 여건에 힘입어 내부에 많은 문제점을 지니면서도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데에 '그럭저럭'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전형적으로 '자본이 잘 돼야 노동운동도 따라서 잘 된다는', 노동운동을 '자본운동에 종속된 운동'으로 보는 관점을 대변하는 견해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단은 경제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한국자본주의의 회생'이라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동운동에게도 상응하는 혁신이 요구된다는 훈계를 행하는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그러한 평가와는 달리, 실제로 한국 노동운동은 그간 무엇보다 개발독재체제에 의해 뒷받침된 '자본의 초과착취'에 대해 줄기차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발전해 왔다. 또한 그러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 한국의 노동자들은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동시에 많은 한계를 지닌 속에서도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고, 그러한 성장을 더욱 발전시킬 능력을 지닌 많은 선진 노동자들이 배출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은 앞에서 말한 글이 인용하고 있는, 과거에는 "'요구를 좀 더 관철하느냐, 덜 관철하느냐'라는 단순한 차원에서 교섭하고 투쟁하면 됐다"라고 하는 김유선의 자기비하적인 평가와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과정이었다. 그렇지만, 그간 한국경제가 고성장·저실업을 경험한 것은 국가와 자본이 탄압을 행하는 가운데에서도 일정한 물질적 양보를 통해 노동운동의 더 한층의 계급적·정치적 성장을 억제할 수 있게 만들고, 노조운동 내부에 경제주의적 경향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는 데에 기여했다. 그런 가운데 한국의 노동운동은 한편으로는 자신을 계급적·정치적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별 노조체계의 한계를 깨뜨리고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한겨례21이 권유하는, IMF시대로 표현되는 변화한 사회·경제환경에 걸맞고, 한국 노조운동의 미래를 보장하는 한국 노동운동의 상은 어떤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한겨례21은 '현실성 없는 최선'이 아니라 '현실성 있는 차선책'을 강구해 대중의 공감을 얻는 운동을 전개할 것,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기업별노조체계를 산별노조로 전환시킬 것,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적극 나설 것, 임금인상 중시형 운동을 지양하고 노조의 경영참가 등 전체 노동자를 아우르는 사안의 해결에 나설 것, 노사정위원회에 적극 참여할 것 등을 주문하고 있다. 한겨례21이 권유하는 처방에는 산별노조체계로의 전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 등 민주노조진영이 중요한 당면과제들로서 인식하면서도 그 과제들의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지 못했던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한겨례21의 처방은 그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수준을 뛰어넘고 있는 것인데, 여기서 특히 문제되는 것은 그 처방의 기조가 과연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에 기여하는 것 인지의 여부이다.

한겨계21이 내리는 처방의 기조와 관련하여 일차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노조운동이 '현실성 없는 최선책'을 추구해서는 안되고, '현실성 있는 차선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겨례21은 먼저 노조가 현 시기에 전면적인 생존권 사수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사회변혁적 전략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생존권 확보를 위한 요구란 생명체인 이상 생존권을 지켜야 하는 노동자대중이 어떤 조건 속에서도 양보할 수 없고, 다른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그들의 가장 기초적인 요구에 속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등이 conatus라고 부른 '생명보존의 욕구' 내지 현재적 표현으로 바꾼다면 생존권 확보를 위한 요구는 근대 초기의 부르주아 사상가들까지도 생명체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 속한다는 점을,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 공동체도 사회구성원들의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는 한 정당성을 상실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 점에서 한겨레21의 지적 양심은 이런 근대초기 부르주아 사상가들의 지적 양심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생존권사수 투쟁이란 사회변혁적 투쟁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들이 행하는 '가장 기초적인 최소요구 투쟁'일 따름이다. 때문에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전면적으로 위협받는 조건 속에서 전면적인 생존권 사수투쟁을 조직하는 것은, 설령 노조가 다른 투쟁은 제대로 조직하지 못할지라도,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조직해야 하고 조직하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할 노조운동의 가장 중요하고 일차적인 과제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벗'으로서 노동운동의 발전에 도움을 주려고 한다면, 한겨례21은 전면적인 생존권 사수투쟁을 사회변혁적 투쟁이라고 노동자들에게 경고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대중이 생존권 확보를 위해 전개하는 투쟁을 미력하나마 돕기 위해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생존권을 지키려고 하는 노동자대중의 가장 기초적인 최소요구조차 짓밟히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생존권 사수투쟁은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 점에서 생존권 사수투쟁은 단지 잠재적으로만 변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때문에 '전면적인 생존권 사수투쟁은 사회변혁적 전략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라는 진단이 암시하고 있는 바대로 노동자대중이 자신의 생존권을 사회변혁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지킬 수 없다고 믿는다면, 한겨례21은 '사회변혁적 전략을 채택하기에는 노동계 내부역량이 너무 취약하므로' 그런 위험한 도박에 나서지 말라고 훈수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대중에게 내부역량의 취약성을 한시바삐 극복해 생존권 사수투쟁을 사회변혁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마땅히 권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와 훈수는 사실은 자신이 노동운동에게 진짜 들려주고 싶은 처방을 내놓기 위한 요식절차에 불과하다. 한겨례21은 오늘날에는 "조합원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이 엇갈리는 상황"이 종종 생기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불가피한 고용조정이나 실질임금 삭감 없이 한국자본주의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노동운동은 '경쟁력'과 무관할 수 없다. 일정한 노사협조를 바탕으로 기업과 산업의 경쟁력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한국자본주의의 미래가 없는 게 현실이다."; "'양보' 없이 '쟁취'하는 데만 익숙해온 노조운동이 이른바 사회적 차원의 '주고받기'를 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이러한 언급들은 노조운동의 구조조정을 위해 한겨례21이 요청하고 있는 주문들이 사실은 자신들이 겉으로 내세우고 있는 '노조운동의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들이 걱정하고 있는 '한국자본주의의 미래'를 위한 것임을 드러내는 언급들이다. 한겨례21은 자본주의에 대한 물신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진보적 비판지로 자처하면서 외국의 좌파 지식인들의 반자본주의적 발언이나 사상도 때때로 소개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으로 보이는 한겨계21도 막상 한국 자본주의의 운명이라는, 자신들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긴박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자 그러한 지적 사치를 서슴없이 내팽개치고 있다 ― 그러나 이러한 지적 유희를 즐기려기보다는 자신의 본색을 숨김없이 드러내온 보수언론들이 휠씬 솔직하지 않는가! ―. 한겨례21은 노동자의 이익이란 자본의 이익에 종속된 것으로, 그리고 자본의 이익이 보장되는 조건 속에서만 노동자의 이익도 보장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한겨례21은 처음에는 노동운동의 내부적 힘의 취약성을 들어 사회변혁적 전략의 추구를 반대한다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생존권투쟁에 반대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자본의 이익을 넘어서는 노동자·민중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을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음을 실토하고 있다. 그래서 한겨례21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의 핵심적인 내용이란 이런 것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이여! 한국자본주의의 미래를 위해 불가피한 고용조정과 실질임금의 삭감을 감수하고 기업과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에 앞장서라.' 여기서 '한국의 노동자들이여! 당신들의 미래를 위해.....'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한겨례21에게는 다음의 답변을 들려주고 싶다.: '사회전체의 이익을 노동자·민중의 이익이 아니라 (자본축적 조건의 개선과 같은) 자본의 이익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는 한, 당신들이 주창하는 사회 전체의 이익이란 결국 자본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왜 한국의 시민운동이 그간 노동자·민중운동을 계급이기적인 운동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운동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옹호하는, 보편적 공공선의 확보와 사회정의의 구현 등을 위한 초계급적인 운동이라고 자처해 왔는가'도 한번쯤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그런데 엄청난 고용조정과 실질임금의 삭감이 이미 이루어졌고, 또 지금 현재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내부역량의 취약성 등으로 인해 한국의 노동자들은 계속 밀리면서 이제는 더 이상 밀리면 절벽 아래로 떨어질 벼랑 끝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노동자들이 전개하는 생존권 사수투쟁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자기방어적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한겨례21은 말한다: '양보 없이 쟁취하려고만 하지 말고 사회적 차원의 주고받기에 나서라'고. 그것도 "내부역량을 강화하여" 그러한 사회적 차원의 주고받기에 나서라고 주문하고 있다. 오히려 '내부역량을 강화하여 더 이상 밀리지 마라'고 조언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이처럼 한겨례21의 대노동운동 주문은 그 주문이 '한국자본주의의 미래'를 위한 것인 만큼 '노동운동의 미래'를 망가뜨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 노동운동이 '대폭적인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완전고용의 달성'과 '생활임금의 확보'와 같은 노동자대중 전체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자신의 가장 기초적인 계급적 요구의 기치를 내리고 이미 발생한 대량실업과 앞으로도 계속될 기업의 인력감축 및 임금하락 등을 인정하는 대신 경영참가 등을 획득하려고 하는 운동으로 전환한다면, 노동운동은 노동자대중 전체의 생활이 경제위기 속에서 계속 악화되는 것을 방치하는 '취업' 노동자들만의 운동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한겨례21의 그러한 주문은 '80%를 살리기 위해 20%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김대중정권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 이에 대해 한겨례21은 '우리는 최소한의 희생만을 원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를 들어 '정권은 20% 희생론을 내세우고 있지만 우리는 10% 희생론을 지지한다'고 해서 '정권과 우리의 입장은 다르다'고 강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견지해야 할 계급적 관점이란 '우리는 어떤 조건 속에서도 흥해도 같이 흥하고 망해도 같이 망한다'는 것이어야 한다. 더욱이 자본이 제시하는 이데올로기적 지평과 전망에서 벗어난다면, 함께 힘을 합쳐 일하고 정말로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경제를 회생시킬 길이 발견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렵다고 해서 처음부터 다 함께 사는 길을 '현실성이 없다'고 포기해서는 안되며, 설령 어려울 지라도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과제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겨례21이 주문하는 '현실성 없는 최선책'과 '현실성 있는 차선책'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겨례21이 말하는 '현실성 없는 것'이란 실업의 불가피성과 고용감축 및 임금 삭감과 같은, 정권과 자본이 위기 극복에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서 노동자대중에게 받아들이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한겨례21은 불가피한 고용조정과 임금삭감 등에 반대하는 것이 '현실성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노동자대중에게는 자신의 생존권을 지킴에 있어 양보할 수 없는,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들이다. 그러므로 '현실성 없는 최선책을 추구하지 마라'고 하는 한겨례21의 주문이란 사실은 '노동자들이여! 당신들의 사활에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나서지 마라'고 요구하는 것인 반면, '현실성 있는 차선책을 추구하라'는 한겨례21의 주문이란 '당신들에게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들을 해결하려 하지 말고, 자본이 들어줄 수 있는 다른 것들을 추구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겨례21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힌다.: "현실성 있는 차선책으로 대중의 공감을 얻어라". 이 말의 참 뜻은 이런 것이다.: '대중에게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들의 해결에 나서지 않으면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한겨례21은 노동운동에게 '쓴 약'을 먹이려고 정말 단단히 작심한 모양이다. 그러나 한겨례21이 '보약'이라고 마시기를 권하는 쓴 약이란 사실은 노동운동을 참으로 대중과 유리된 상층간부들의 운동으로 변질시키는 '독약'이다.

그런데 노동운동이 노동자대중 전체의 생존권을 지키고 노동자대중 전체의 생존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체제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해 나가려면, 노동운동은 비정규노동자들을 조직하고 현재의 기업별노조체계를 산별노조체계로 전환시켜야 하며, 민주노조운동의 전국적 단결을 도모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사업장별과 부분별의 다양한 요구사항들을 보편적인 계급적 요구로 집중시켜 그러한 계급적 요구의 관철을 위한 전국적 수준의 투쟁을 조직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화를 이루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간 민주노조진영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소흘해 왔으며, 기업별노조체계를 산별노조체계로 전환시키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결함은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겨례21의 비판은, 노동운동이 생존권 쟁취를 위한 투쟁 및 그것과 유기적으로 결합된 정치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그것과는 다른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운동에 집중할 것을 제안하고 있고, 산별체계로의 전환과 경영참가를 위한 운동 등을 결국 기업과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방편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점을 지닌다. 때문에 한겨례21의 제안은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운동의 탈계급화·탈정치화 및 노동운동의 자본종속적인 운동으로의 전락에 기여할 뿐인 것이다.

한겨례21은 자신의 제안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기업노조를 중심으로 나타난 '전투적 조합주의'를 "전투적 파업투쟁으로 임금인상을 따내는 노선"라고 규정하면서 이 전투적 조합주의가 이전에는 일말의 긍정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 현재는 기업별 교섭체제와 맞물려 경제주의로의 경도라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정리해고제 철폐를 주장하는 대부분 노조들이 그동안 전투적 조합주의 노선에 충실했던 대기업 노조들이라는 점을 들어 "민주노총이 내건 '정리해고제 철폐' 요구도 이런 전투적 조합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한겨례21은 민주노총이 현재 봉착하고 있는 여러 내부적 문제점들의 근원을 대기업노조들의 전투적 조합주의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민주노조운동이 '전투적 조합주의'의 문제점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한겨례21의 지적은, 그 극복의 방향 등을 문제삼지 않는다면, 옳은 말이다. 그러나 한겨례21의 전투적 조합주의 비판은 대기업노조 운동이 그간 성취해온 성과를 계승·발전시키면서 그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가지의 물을 비우기 위해 아이까지 함께 버릴' 것을 요구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한겨례21은 전투적 조합주의의 문제점을 경제적 투쟁에 상응하는 정치적 투쟁을 전개하지 못한 데에서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자신들의 눈으로 본다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고용조정 등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 이런 점에서 한겨례21에게는 전투적 조합주의란 경제주의이다 ― 대기업노조들이 그간 '너무 잘' 경제투쟁을 수행해 온 데에서 찾고 있다. 또한 그간의 대기업노조 운동이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점은 보고 있지만, 대기업노조원들이 그간의 투쟁을 통해 국가와 자본에 대항하는 보다 높은 수준의 정치투쟁을 수행할 능력을 키위온 점은 보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정리해고제' 문제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관철시키려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의 핵심고리이고, 따라서 최근의 현대자동차 사태란 단지 일개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정세에서는 자본의 그러한 공세가 전국의 모든 사업장에서 자본이 바라는 대로 그냥 관철될 것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그야말로 계급 대 계급간의 가장 치열한 대립지점이었음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겨례21은 정리해고제 저지투쟁을 단지 대기업노동자들의 경제주의적 이기주의의 발로로 보는 것과 같은, 참으로 반노동자적인 분석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겨례21은 "민주노총의 정리해고 싸움은 '유령'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라는 이화여대 이철수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적극적인 경영정책의 일환으로 행한 인원 감축에 대해 정당성을 인정해온 91년 이래의 법원 판례는 지난 2월에 법제화한 지금의 정리해고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노동계의 바램대로 노동법에서 정리해고가 완전 철폐된다고 해서 현실에서 행해지고 있는 정리해고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점, 현대자동차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현실은 '정리해고 최소화'로 나타났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정리해고제의 법제화가 오늘날 자신들의 고용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얼마나 어렵게 만들고 있고, 그들의 삶에 얼마나 많은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도외시하는 견해이다. 정리해고제가 법제화되기 이전이나 이후나 현실에 정말 변한 것이 없다면, 국가와 자본이 그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 그처럼 집요하게 정리해고제의 법제화를 위해 온 힘을 기울여 왔는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지를 묻고 싶다. 민주노총이 그간 유령과 싸워 왔다면, 국가와 자본 역시 유령과 싸워 온 셈이다. 그리고 한겨례21은 "현대자동차 사태에서 드러났듯 현실은 정리해고 최소화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사태를 옳게 설명하는 해석이 아니다. 오히려,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반대하면서 그처럼 완강하게 싸웠기 때문에 정리해고를 최대한 단행하려 한 회사측의 시도가 일정하게 제동이 걸리고, 정리해고를 그나마 그 정도 수준에서 저지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어야 할 것이다. 한겨례21은 정리해고제 철폐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본이 원하는 대로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을 막는 최대의 방패막이로 기능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투쟁과 관련하여서는 더 지적되어야 할 점들이 있다. 먼저 비정리해고 대상의 노동자들이, 한겨례21이 학계 일부의 견해라고 인용하면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슬기로운" 대안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경영참가권의 획득', '해고의 절차와 규칙의 확립', '해고자에 대한 실업보조금 신설' 등을 조건으로 정리대상 노동자들의 해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해고를 저지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려고 한 것이야말로 한국 노동자들의 위대성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예를 들어 1980년대에 그것과 비슷한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회사측의 정리해고에 협조한 미국의 취업노동자들의 태도와는 판이하게 대조되는 태도였다. 다음으로, 그렇지만 현대자동차노조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투쟁력을 신뢰하고 정리해고 불수용이라는 원칙을 끝까지 견지했다면, 임금삭감이 이루어지고 '명예퇴직'이라는 형태로 실질적으로 정리해고된 사태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할지라도 최소한 최종적인 정리해고만은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끝으로 현대자동차 노조지도부가 그 문제를 단위사업장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 전국적인 계급적 문제라는 점을 보다 깊이 인식했다면, 그리고 민주노총이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현대자동차 노조의 투쟁을 전국적 투쟁의 일환으로 확고히 편입시킬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면, 민주노조 진영은 '최소한' 현대자동차와 만도기계 정리해고 문제를 일괄 타결하는 데에 성공하고, 만도기계 노동자투쟁이 경찰병력의 투입에 의해 짓밟히는 사태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재벌개혁 하면 고용이 불안정해지는 것 아니냐'는 암묵적인 인식이 재벌그룹 산하 대기업 노조들에 널리 펴져 있다는 이유를 들어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노조운동 진영이 그 동안 줄기차게 재벌개혁을 주장하긴 했지만 ― 그러나 민주노총이 재벌개혁을 주장하고 있다는 지적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노총은 한겨례신문 등이 옹호하고 있는 재벌개혁 보다 휠씬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재벌해체'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 진실성이 계속 의심을 받아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존권과 삶을 지키려고 한다면, 노동자대중의 생존과 삶을 불안으로 몰아 넣는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에 단호히 반대해야 할 것이다. 재벌기업의 근대화에 기여하는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재벌개혁이란 노동자에게는 인력 감축과 노동강도의 강화를 가져오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리고 정치투쟁은 노동자들의 생존과 삶을 지키기 위한 핵심적인 경제적 과제들의 해결을 위한 투쟁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투쟁이어야지, '현실성 있는 차선책'을 제안하는 한겨례21의 조언대로 노동운동의 탈정치화를 초래하는, 그러한 과제의 해결을 비껴가기 위한 '탈계급화된 정치활동'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민주노총이 그간 총파업 투쟁을 남발해 힘을 소진시켰다는 한겨례21의 평가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노동자대중의 생존권이 미증유의 위기상황을 맞이한 상황 속에서 민주노총이 그 정도의 총파업 투쟁이라도 조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민주노조운동은 지금쯤 자체 와해국면에 빠져들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정도라도 투쟁을 조직한 덕분에 민주노조 진영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제1기 노사정위원회에서 조합원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정리해고제의 법제화 등에 찬성함으로써 야기된 민주노조운동의 위기와 그 위기가 만들어 낸 패배주의를 딛고 일어나 일정하게나마 투쟁력을 복원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복원에 기초하여 앞으로 더 큰 투쟁에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올해 총파업투쟁을 '남발'한 것이 힘의 소모를 가져왔다는 이러한 판단은 '노사정위원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민주노조진영 내부의 특정 부분들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면서 한겨례21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 벌이는 협상과, 산별연맹이 사용자단체와 갖는 중앙교섭은 본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고 지적하면서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제대로 힘차게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산별연맹이 사용자단체와 갖는 교섭과, 노조가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노사정위에서는 '총자본을 대변하는 정부'와 '개별자본들을 대변하는 사용자' 및 '노조'간에 ― 그것도 (대체로 친정부인사들로 구성되는) '공익위원들'이 끼여 있는 조건 속에서 ― 정부가 추진하려는 주요 정책이 관철되는 한계 내에서 교섭과 타협이 이루어지지만, 단체교섭에서는 노-사간에 1 대 1의 교섭과 타협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총자본을 대변하는 정부'와 '총노동을 대변하는 노조'의 지도부가 1 대 1의 관계에서 만나 교섭을 벌릴 때에만, 그 교섭은 '특정 부분의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산별연맹'이 '특정 자본분파를 대변하는 사용자단체'와 갖는 교섭과 같은 구조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에 제대로 힘차게 참여해야 하려면', 민주노총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의 하위 동반자로서 자신을 명백히 자리매김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추구하는 정부의 하위동반자가 되면, 이는 민주노총이 노동자대중의 생존과 삶을 자본을 위한 제단에 바치고, 노동운동을 자본종속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찬성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그간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태도 등에서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의 참여에 연연함이 없이 일관되게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조직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투쟁의 형태는 총파업 투쟁만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다양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민주노총이 그간 일관성을 보이지 못한 것은 노사정위에의 참여를 고집한 세력들이 '노사정위에의 참여'를 집요하게 요구한 것에도 크게 기인한다는 점을 우리는 또한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자본주의의 미래를 개척하는 데에 적합하게 노동운동이 혁신되어야 한다고 보는 한겨례21은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경향과 관련하여 '장미빛 미래'를 제시하면서 노동자 달래기에 나서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즉, 한국자본주의의 경쟁력이 "더이상 저임금에 바탕한 가격경쟁력이 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서울산업대 정이환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노조의 경영참가와 직업장 말단 단위까지 노동자들의 권한을 높이는 이른바 '권력이양'이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조의 경영참가 인정이나 하부로의 권한이양이란 대부분의 한국 자본가들이 아직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한겨례21의 예측은 일말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는 말일 수도 있다. 왜냐 하면, 취업노동자들이 자신의 동료노동자들을 실업자로 내모는 작업에 협력하고, 자신의 실질임금이 삭감되는 것을 감수하면서 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적극 나선다면, (김대중대통령은 노조의 경영참가란 소유권의 침해이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다고 엄포놓고 있지만) 어지간한 양식을 소유한 자본가라면 노조의 경영참가와 하부로의 권한 이양에 동의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자본가들이 아직 그런 어지간한 양식조차 소유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한겨례21은 잊고 있다. 게다가 그러한 예측은 자본주의의 미래를 장미빛으로 채색한 '포스트--포드주의자들'의 빗나간 기대를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어느 나라에서나 테일러주의적 노동분할이 소수 숙련전문 노동자들을 제외한 다수의 노동자들에게 재강화되고 있고, '권한의 이양'과 '노동의 인간화'가 아니라 '업무의 과중화'와 '신경집중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의 자본가들이 가격경쟁력에만 의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노조의 경영참가와 하부로의 권한 이양을 단행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노동생산성의 향상'과 '노동강도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고 착취를 한단계 더욱 고도화하는 방편이 될 뿐, 기업경영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민주적·노동자적 통제를 확대시키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러한 참가와 권한이양 등은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사회적·정치적 권리를 확장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쟁취해 내는 한에서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확보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4. 결론 : "누구로부터 돌팔매를 당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경제위기의 도래와 더불어 노동자계급에 대한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가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대두하고 있는, 노동운동의 계급적·정치적 발전을 저지하려는 시도들을 특히 한겨례21의 논조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았다. 그런데 그러한 시도들이 노동운동에게 요구하고 있는 주문은, 한겨례21의 그것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나다시피, 가장 중요하게는 다음의 두 개의 것, 즉 (1)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의 이익을 희생시킬 용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과, (2) 국가와 자본이 수용하기 어려운 '현실성 없는 최선'을 추구하지 말고, 국가와 자본이 수용할 수 있는 '현실성 있는 차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주문은 위기극복이라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대량실업의 발생과 임금 삭감들을 감수하고 자본과 국가가 들어줄 수 있는 다른 요구사항을 제출하면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완전고용의 달성과 생활임금의 확보 등은 어떤 조건 속에서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제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노동자계급의 가장 기초적인 계급적 요구사항이다. 때문에 그러한 주문은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존립근거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완전고용의 달성과 생활임금의 확보 등은 사회 전체의 이익에 반하기는커녕 그야말로 사회 전체의 이익에 합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이익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는, 한겨례21이 주장하다시피, 노동자계급의 생존권 요구가 사회전체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은 자본의 이익이 우선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생존권 요구가 사회전체의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나타나게 하는 사회적 관계를 혁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과제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겨례21은 기본적으로 위기 극복을 위한 자본의 논리를 대변하는 선상에서 '노동운동 혁신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문을 받아들이면, 한국의 노동운동은 그간에 자신의 투쟁을 통해 쌓아올린 위대한 전통을 폐기하고, 자신을 하루아침에 '자본운동에 종속된 운동'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노동운동은 노동자대중의 생존과 삶을 지켜 나가려면,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더불어 노동운동을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순응시키는 운동으로 전환시키려는 그러한 '혁신'에 단호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적 관계 전반이 중대한 변화를 겪고 있는 오늘날에는 어디에서나 '개혁'과 '혁신' 등이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는 용어로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에게도 마찬가지이지만 노동에게도 '개혁'과 '혁신' 그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개혁과 혁신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한겨례21의 '노동운동 혁신론'은 동시에 노동운동 내부의 특정 부분들이 제기하고 있는 '노동운동 혁신론'을 포괄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한겨례21은 다음과 같은 김유선의 말들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문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금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조합원의 이익을 일부 포기하는 아픔을 감수하는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조합원들로부터 돌팔매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현실성 있는 차선'을 제시하고 조합원들을 설득할 것은 설득하고 투쟁할 것은 투쟁해야 한다. '현실성 없는 최선'을 얘기하면서 조합원들을 투쟁에 나서도록 선전·선동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김유선은 이미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을 위한 제언"3)이라는 글에서 '정책참가'와 '노사정위원회의 적극적 활용'을 제창하고, 민주노총 제1기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을 '사회적 조합주의'라는 이름으로 옹호한 적이 있다. 나아가 그는 위의 글에 대한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박성인의 비판에 대한 답변인, {노동과 세계} 제37호에 실린 글에서 "현 시기 대중의 상태를 한 걸음이라도 더 진전시키는" 사회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그는, 그가 옹호하는 사회적 조합주의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동시적 추구를 내세우고 있는 남아공 COSATU의 사회적 조합주의와 다르다는 박성인의 비판에 대해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현시기에 사회주의를 목표로 내걸어야 하느냐"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민주노총의 목표로 사회주의를 내걸어야 하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남아공 COSATU의 사회적 조합주의론이 과연 그가 제창하고 있는 사회적 '조합주의론'이나 그가 옹호하고 있는 민주노총 제1기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론'과 운동의 기조에서 일치하는가 아닌가였다. 때문에 그러한 (도발적인) 반박은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현 시기 대중의 상태를 한 걸음이라도 더 진전시키는' 노력의 중요성이란 누구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다른 지점에 있다. 즉, (1) 그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조합원의 이익을 일부 포기하는 아픔을 감수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데에서 드러나다시피, 정권과 자본이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해 많든 적든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는 점에 , 그리고 (2) 노동에게 가해지는 그 공세의 핵심에 대한 저항을 그 저항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포기하거나 비껴가려고 하면서 정권과 자본의 그러한 공세를 성공시키기 위해 양보할 수 있는 부분에 운동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보고 있는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 신자유주의 반대, 착취와 억압의 폐지, 변혁 등을 내세우면서도 '개량을 위한 운동 상에서의 일보 진전'만을 중시하고 '변혁운동 상에서의 일보 진전'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신자유주의정권으로의 '정책참가' 등을 옹호하고 있는 이들의 일관되지 못하고 이중적인 언동과는 달리 ― 그가 '정책참가'와 '노사정위의 적극 활용' 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일관되고 타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본의 축적위기 타개를 노동자대중의 생존과 삶에 우선시키고 있고, 그로 인해 노동에 가해지는 신자유주의 공세의 핵심부분에 저항해 그 부분에서 한 걸음의 진전을 이루어내는 것이 지닌 중요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조합원으로부터 돌팔매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현실성 있는 차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사뭇 비장하기도 하다. 그러나 '조합원으로부터 돌팔매를 당할' 각오를 지닌 그 용기로써 차라리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돌팔매를 당할' 각오로 정권과 자본이 핵심적으로 추진하는 공세에 저항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자본축적의 위기가 심화되고, 그 위기가 노동자대중의 생존과 삶의 위기를 야기함과 더불어 노동운동 역시 오늘날 자신의 운동을 새롭게 개편하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 위기를 경험하면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앞으로 어떻게 개편될 것인가? 그 개편이 어디에서나 신자유주의 공세 하에 놓여 있는 세계 노동자 모두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그 말의 의미에 참으로 합당한 '혁신다운 혁신'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세계 전체를 놀라게 한 총파업투쟁을 조직할 정도로 놀라운 저항력을 보인 자신의 위대한 역사를 잊혀진 과거지사로 묻어버리는 '혁신 아닌 혁신'이 될 것인가? 그러한 갈림길에서 한겨례21을 비롯한 많은 시민사회세력들과 노동운동 내부의 특정 부분은 한국 노동운동이 한국자본의 하위동반자로서 다시 탄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자대중은 자신의 생존권과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그리고 노동자대중의 생존과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체제의 건설을 위해 나서지 않는 한 자신의 생존과 삶의 파탄을 막을 수 없는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자대중은 분명 '혁신 아닌 혁신'을 거부하고 자신의 운동을 계급적·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새로운 역사는 이 속에서 동터 오를 것이다. 아니 이미 지금은 새로운 역사가 이미 동터 오르고 있는 시대이다.

-------------<미 주>

1) 물론 한겨례신문이나 한겨례21 역시 많은 사람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동일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심적인 논조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2) 여기서 인용하는 모든 귀절들은 앞에서 언급한 글에서 인용하는 것이다. 쪽 표기는 생략한다.

3) {노동과 사회}, 1998. 9월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