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현장은/『현장에서 미래를』37(1998/10)

자기혁신 없이 금융산업노동조합의 미래는 없다

한 인 임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사무국장

1. 유례없었던 투쟁의지

지난 9월 29일 정오에 타결된 전국금융노동조합연맹과 시중 9개 은행장들과의 협상으로 98년 폭풍처럼 불어닥쳤던 1차 금융기관 구조조정의 막이 내리고 있다. 이 싸움은 노동조합이 철저히, 그리고 무참히 깨진 싸움이었고 그 결과는 가공할 수준이었다.

한국의 금융산업은 최근 10여년 동안 과거부터 노정시켜 왔던 관치금융과 부실대출을 극대화시켜왔으며 점포수는 폭증시켰으나 점포당 인원수는 폭감시켜 왔다.1) 97년초부터 인원 줄이기는 지속적으로 전개됐는데 그 방식은 명예퇴직이었으며 이는 최근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97년말부터 98년 3월까지 퇴출된 노동자 수만도 금융노련 산하 23개 사에서 거의 2만명에 달한다. 한국이 IMF관리체제하에 놓인 후 금융산업 노동자들은 한국의 경제위기,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멍에를 쓰고 힘겨운 투쟁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그 준비가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종금사들의 즉각적인 퇴출과 시중 5개 은행의 퇴출, 그리고 시중 비우량은행 9개 사의 폭력적인 해고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수만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고, 비정규직의 경우는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하다.

문제는 이번의 협상이 수십년의 금융노련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사전 조직화가 잘 되었고2) 조합원들의 참여도가 높았으며 그 투쟁의지 또한 공격의 양상만큼 강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중앙은 단 1%의 감원규모 축소를 위해 3만여명의 조합원을 밤새 거리에 앉혀놓았으며 급기야 파업을 철회해 버렸다. 금융노련 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한번도 제대로 시행되어 보지 못했던 '사복입기' 투쟁이 28일에는 지방의 전 점포에서 90%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이루어졌고 경남, 전남지역에 있는 금융노동자들 조차도 28일 서울 상경길에 올랐으며, 다음날 파업을 준비하기 위해 휴가원 등을 제출했던 노동자들이 95%에 다다랐다고 한다.

2. 지도부의 패배와 연대의 붕괴

이렇듯 보기 어려운 호조건으로 파업투쟁의 준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노련 지도부는 노동조합 스스로 노동자 자르기(그것도 97년말 기준 32%나)에 동의해 버렸고 상경한 노동자들을 극도의 허탈감에 빠지게 하였다. 더불어 여러 차례 어려운 과정을 거치며 공동투쟁을 약속했던 단위노조의 경우도 그들 중 몇은 가장 시급한 투쟁의 상황에서 연대의 전선을 깨고 이탈해 버림으로써 투쟁 전체를 흐리는데 충분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상황이 노정되면서 결국 역사상 유례없던 금융노련 투쟁은 메아리만 남게 되었고 1만명 이상의 추가 노동자 감축을 기다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97년말 대비 퇴직자수 및 98년말까지 감축되는 인원> (단위: 명, %)


조흥

상업

한일

외환

서울

제일

평화

강원

충북

97년말 현원

8,998

8,322

8,925

8,188

7,498

7,965

1,818

1,109

1,043

98년 9월20일 현원

8,151

7,780

7,352

6,965

5,955

5,952

1,480

939

772

98년 퇴직자수

(퇴직률)

847

(9.4)

542

(6.5)

1,573

(17.6)

1,223

(14.9)

1,543

(20.5)

2,013

(25.2)

338

(18.6)

170

(15.3)

271

(26.0)

연말까지 감축되는 인원

2,032

2,121

1,283

1,397

856

536

244

185

63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이 큰 투쟁에서 한번 깨지고 나면 그 후에 당하는 공격의 양상은 가늠하기 힘들다. 금융노련 역시 그랬다. 파업철회와 노동자 감축합의 이후 서울은행노조(금융노련 소속 시중은행 노조 중 가장 투쟁 경험이 많고 비교적 조직력이 앞서 있다)의 경우 매우 굴욕적인 '노사화합선언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3) 단위노조에서의 이러한 상황은 앞으로 더욱 노골화 될 가능성이 높으며 더 나아가 이는 한국노총의 지도력에도 큰 타격을 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금융노련의 투쟁이 왜 이렇게 막을 내려야 하는 지에 대해 판단해보자. 사실상 필자는 이 사태가 이미 지난 연말부터 '예상되었던' 일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올 초 정부에서는 기업구조조정을 이루기 전에 금융산업 구조조정을 먼저 단행하겠다고 천명했고 여기에는 경쟁력 없는 은행 퇴출(해외매각을 포함한 ; 서울은행과 제일은행은 여기에 속한다)이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에 대대적인 제1금융권 구조조정(이는 곧 감원과 점포 폐쇄를 의미했다)을 수반하는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종금사 폐쇄시기에 아무도 여기에 개입하지도 연대하지도 못했으며 퇴출 5개 은행의 문제가 터지자 급기야 해당은행 소속 조합원들은 파업에 들어갔다(이들 단위노조도 모두 파업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감원을 기다리던 '비우량'시중은행 노조들은 파업노조의 투쟁에 전혀 연대하지 않았으며 인수은행 노조조차 대단히 냉혹한 단위노조 이기주의에 빠져 투쟁에 전혀 함께 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뒤늦게 싸움을 시작한 9개 시중은행 노조의 투쟁에 연대해 줄 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당연히' '우량'은행 노조는 이번 싸움에 결합하지 않았다. 또한 '당연히' 9개 시중은행 노조의 연대도 제대로 안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들의 투쟁을 옭아매고 있는 조건은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크고작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두가지만을 지적해 보겠다.

3. 노동자 투쟁을 옭아매는 조건

1) 금융산업 노동자들의 중산층 의식

지난 6월 노기연에서 발표한 연구보고서4)에 의하면 구조조정기에 들어선 은행권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안전할 수 있다"고 나타났다. 따라서 우량은행 노동자들은 그 위기감이 실로 적고 부실은행 노동자들은 어떻게든 빨리 이 지겨운 상황이 해결되길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금속산업이나 기타 제조업 대공자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에 맞서 보여주는 의식이나 입장과는 사뭇 다름을 알 수 있다. 구조조정이란 결국 자본을 위한 합리화일 뿐, 노동자 자르기가 골자이다. 이러한 구조조정에 대해 은행 조합원들을 현장에서 조직화하고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로 남아있다.

그 이유는 크게 세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그간 사회적 통념상 고용불안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노동자계층이 금융권 노동자였다는 점이다. 또 이들은 각종 임금이나 복리후생 면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물론 성차별이나 불안정고용의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남성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승진이 보장되어 있었으며 퇴직 후에는 사회적으로 중산층이라는 계층으로 편입되는데 큰 장애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화이트칼라 노동자 의식'을 소유한 대표적 계층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이에 더하여 정부의 비호와 금융자본의 지불능력(자본에서 주장하듯이)은 금융노동자들이 이러한 의식 속에 안주할 수 있게 한 주요한 환경으로 분석된다.

2) 느슨한 노동조합 활동

위에서 설명한 금융산업 노동자들의 존재 조건은 결국 그들의 의식을 규정했는데 이는 노동조합 활동 양태 및 현재의 조직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장 노동자 인터뷰 과정에서 알 수 있었던 사실은 은행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대체적으로 무관심하고 노동조합의 지침이 각 점포 조합원에게까지 잘 전달되지 않으며 조합원 교육이 거의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은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는 이제야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노동조합에 대한 신뢰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또한 각 은행들은 주요사안이 발생했을 때 총파업의 경험이 없었고 한두 시간의 부분파업 경험 정도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 조합원이 동시에 단체행동을 했던 경험도 거의 없었다. 결국 본인이 직접 참여한 우직한 투쟁을 통해 승리의 벅찬 기쁨과 '노동자성'을 체험한 경험이 거의 부재했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지금까지 은행권의 주요 현안중의 하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격한 증가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초 노사정위원회에서 근로자파견제 도입이 합의되었을 때에도 노동조합은 현장의 투쟁동력을 어떻게든 모아내어 이 사안을 해결하기보다는 정치력을 발휘하여 대통령령이 정하는 비파견대상에 은행원의 업무를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했었다. 더불어 부실은행으로 명명되고 있었던 일부 시중은행에서는 노조 중앙에서 투쟁을 조직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사실 노조 중앙은 이를 수렴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4. 중산층의 몰락, 금융노동조합의 피나는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되었고 수만명의 노동자가 잘려나갔으며 29일 합의를 통해 또 1만명의 노동자가 해고 될 것이다. 제2금융권의 구조조정이 이런 식으로 끝난다면 금융산업에 남아있는 노동자는 그야말로 '신의 자식'이 되는 셈이다. 현재 남아있는 9개 시중은행 노동자 중 평균 5명에 1명꼴은 밥그릇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야말로 '중산층의 몰락'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금융노동조합이 조합원 내에 존재하는 '중산층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지금까지의 느슨했던 노동조합 활동을 피나는 노력으로 제고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금융산업노동조합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해질 것이다.

우선, 금융기관이라고 하는 특수한 조직에 뿌리박혀있는 기업내 관료주의를 극복해야 하며 더불어 조합원내에 만연해 질 수 있는 청산주의를 극복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금융기관 부실과 경영파행, 조직의 비민주성에 대해 경영진 뿐만 아니라 노동자나 노동조합의 책임도 적지 않음을 감안할 때 기업 조직 그 자체에 대한 혁신이 필요하는 것이다. 또한 이미 무력하게 져버린 싸움에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조합원내의 패배주의를 일소하는 것이 앞으로의 투쟁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관치금융이 지겨우니 정부의 간섭을 되도록 피하기 위하여 민영화가 되거나 해외자본에 매각이라도 되어서 경쟁력을 갖추고 동종업종 과다이니 우리 은행이라도 열심히 해서 타은행보다 인원감축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판단하는 경쟁력 이데올로기와 전면적인 투쟁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금융산업노동조합 내에서 일상적인 연대사업을 통해 노동자 동질성을 회복하고 큰 투쟁에서 두려움없이 함께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즉, 우선적으로 금융노련, 민주금융노련, 사무노련간의 정책적·조직적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사업과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해 가야 한다. 특히 현재의 금융산업 구조조정 조치들이 금융산업 내의 업종 전체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으며 향후 금융산업의 겸업화가 급진전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연맹노조들의 연대는 금융산업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을 지키는 기본 전제가 될 수밖에 없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만들어가야만 한다. 금융산업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서둘러야 한다.

------------- <미 주>

1) 노기연, {금융산업 구조조정 분석과 노동조합의 대응전략}, 1998년 6월. 이 연구보고서는 약 2개월간 금융노련의 요청을 받아 금융노련 소속 사업장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노기연이 연구한 결과이다. 이하 언급하는 연구의 내용이나 인터뷰 내용은 이 연구 과정에서 획득한 것이다.

2) <9개 시중은행 투쟁일지>


내용

8월

금감위, 9개 은행에 구조조정계획 제출요구

9/7일

9개은행 노조 기자회견, 총파업 경고

12일

조흥·외환은행 노조를 제외한 7개 은행노조 파업찬성

13일

상업-한일은행 감원계획 등 이행각서 제출

14일

노조-은행장 밤샘협상

15일

경찰, 은행장 '감금'혐의로 노조관계자 연행

16일

금융노련, 서울종묘공원 집회서 파업방침 확인

17일

34개 은행노조 대표자회의, 파업방침 재확인

18일

금융노련, 중앙노동위원회에 쟁의조정신청

19일

노조 모의파업집회

21일

은행 기획 및 인사담당임원회의, 위로금지급수준 등 감원계획 수정요청

22일

추원서 금융노련위원장 단식농성개시

23일

조흥·외환은행 노조 파업찬성

26일

경찰청, 파업시 공권력투입방침 공식화, 이헌재금감위위원장­박인상노총위원장 면담, 노사간 해결원칙 확인

27일

류시열 제일은행장-금융노련 지도부 접촉

 

3) 서울은행 노사간에 합의하여 발표한 '노사평화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해외투자자들의 자본참여를 전폭적으로 환영하며 투자자의 경영권 인수에 적극 협조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은 은행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단체행동을 자제한다.

△우리는 인수자의 경영기반 재구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인원, 점포, 무수익여신 부문의 추가 구조조정을 빠른 시일내에 마무리 한다....

4) 앞의 책.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