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읽기/『현장에서 미래를』38(1998/11)

'제3의 길'은 진보노선인가?*

채 만 수(부소장)

지난해 여름의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금년 가을에 독일에서 '보수 우파' 정권에 반대하는 '좌파'가 집권하게 되면서 저들의 새로운 깃발, 곧 '새로운 노동당(New Labour)'를 자처하는 영국의 블레어 총리나 공개적으로 그의 정책노선을 지지·모방하고 있는 독일의 새 총리 쉬뢰더(사회민주당)가 내건 이른바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의 깃발이 새로운 진보노선으로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그 실패가 명확해진 '좌파'와 '우파'의 노선을 모두 지양하는 새로운 진보노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는 정말 진보로서의 내용을 갖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한갓 요란한 가면무도회에 불과하다. 그것은 진정한 '제3의' 무엇도 아니고, 좌우지간의 중도도 아니며, 단지 우파의 일부가 보다 더 우측으로 자리옮김을 하면서 벌이는 의도 있는 광대극에 불과하다. 이 광대극을 벌이고 있는 '우파의 일부'란 바로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 사회민주당(원들)인데, 이 때문에 이 광대극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본질 혹은 계급적 성격과 그 기능·역할 등을 읽어야 한다.

우선 이들이 내세우는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의 이론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대해서 보자.

이 광대극에서는 블레어나 쉬뢰더와 같은 광대 정치가들이 주연으로 열연하고 있지만, 어떤 연극이 광대의 연기력만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그 배후에는 역량 있는 대본작가가 있다. 바로 앤소니 기든스 등,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부르조아 언론매체는 물론 {한겨레} 등 소부르조아 언론매체에 의해서도 널리 선전되고 있는, 부르조아 사회(과)학의 기라성 같은 석학들(pundits)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른바 이론적 작업을 통해서 여러 상황극의 뛰어난 대본들을 쓰고, 또한 세계 각국을 순방하면서 강연·연설·인터뷰 등, 소질 있는 광대로서 실제 조연도 하고 있다. 이들의 대본에는, 그리고 이들이 강연·연설·인터뷰 등을 통해서 토해내는 재담들 속에는, 예컨대 '철학적 보수주의'니, '탈결핍경제·탈결핍사회·탈결핍질서'니, '성찰성'이니, '성찰적 근대화, 성찰적 참여'니, '인위적 불확실성, 인위적 위험'이니, '적극적 복지'니, '삶의 정치'니, '유토피아적 현실주의'니 하는 등등의, 관객들을 적당히 감성적으로 긴장시키는 매혹적인 어휘들이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러나 좀 흥분을 가라앉히고 들어보자면 찬연히 빛나고 있는 그 어휘·개념들은 사실은 암호와도 같은 것이어서, 나 같은 둔재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들으면 들을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관중과 독자에게 혼란만 자극하는 그러한 것들이다. 그 중간중간에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부정직한 메시지가 진하게 배어 있음은 물론이다. 일종의 '포스트 모던'한 수법이라고나 할까?

'근거 없는 일방적 매도'라는, 있을지 모를 항변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에 그 예를 들어보자. 그들이 주장하는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 개념을 책의 표제에서부터 강하게 표방하고 있으면서 국내에 번역되어 있는, 앤소니 기든스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BEYOND LEFT AND RIGHT)1) 가운데 장(章)의 제목으로 봐 여러 사람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할 것으로 생각되는 제7장 '적극적 복지, 빈곤 그리고 삶의 정치'라는 장에서의 서너 개 문단이다. (그의 저서의 어느 문장 어느 문단을 취해봐도 마찬가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잘라서 인용하고 있는 것 아닌가'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길게 인용한다.) 이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복지국가는 현재의 상태로는 지속될 수 없다. 지속된다 해도 점차 약화되거나 축소되기 쉽다. 그것도 복지원칙을 강하게 지지하는 정부에 의해서 말이다. 유토피아적 현실주의의 틀 내에서 가능한 대안 중 하나는 탈결핍질서를 증진시키도록 조장하는 것이다. 철학적 보수주의는 그러한 질서의 척도를 마련하는 데 상당 정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발생적 양식으로 이해된 삶의 정치와 결합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탈결핍사회는 국민국가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전 지구화된 사회이다. 또한 이 인위적 위험 그리고 더 넓게는 삶의 문제에 대하여, 생산성주의와 기술로 인해 발생하는 통제와 '해결책' 지향적인 근대성의 한계를 조정해 내는 사회이다." (p 195)

이 문단은 앤소니 기든스의 글 중에서는 '비교적 평이한 편'(?)이지만 역시 난해하긴 마찬가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하고 있는 메시지 혹은 의지는 아주 강력하다. 우선 무엇보다도, 그들이 '좌파'로 설정하고 있는 '복지국가'의 복지를 축소시켜야 하고, 자신들의 의지로 시키겠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자신들은 '복지원칙을 강하게 지지하는 정부' 및 '철학적 보수주의'로 표현되고 있는데, 특히 자신들, 즉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권을 '복지원칙을 강하게 지지하는 정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파렴치한 거짓이다. 본래부터 서유럽의 '복지'는 이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의식적인 이니셔티브에 의해서라기보다 노동자 대중의 압력에 밀려서 확립된 것이기 때문이고, 특히 자신들은 지금 명백히 이른바 '복지원칙'의 축소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음에 위 문단에는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가 현대자본주의의 독점자본의 핵심적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겠다는 메시지도 숨어 있다. "탈결핍사회는 국민국가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전 지구화된 사회"라는 언명이 그것으로, 이른바 '지구화' 프로그램에 대한 의지이다.

이제 위 문단의 뒷부분을 사실상 이해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생산성주의' 운운과 관련한 문단을 보자.

"생산성주의는 노동이 매우 분명하고도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곳에서 나타나는 정신이다. 실질적 의미로 이야기한다면, 노동은 근대적 사회생활에서 '근면'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오래 전에 막스 베버는 근대질서의 특징인 노동지향적 태도가 역사적으로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생산성주의의 문화적 근원 중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밝혀 내었다. 베버에 의하면, 생산성주의는 지불노동으로서의 '노동'을 여타의 삶의 영역과 철저히 분리시키는 정신으로 보일 수 있다.2) 노동은 도덕적 의미의 기수가 되었다. 그것은 개인이 스스로를 훌륭하게 생각하는지 아닌지 그리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게 느끼는지 아닌지를 규정해 준다. 또한 노동동기는 자율적인 것이다. 인간이 노동하고 싶어하거나 혹은 노동해야 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노동 자체가 무언가에 의해 규정되며, 노동하려는 욕구는 그 자체의 내적 역동성을 갖는다." (p 196)

서술이 이 정도에 이르면 나는 정말 독자들에게 나의 지적 무능력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정말 뭐가 뭔 소린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이다. 다만, 기든스가 "노동동기는 자율적인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데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는 명백히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임금노동의 타율성, 그 강제성을 은폐하는 주장이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임금노동은 결코 자율적이지 않고, 또한 그 자율성이 허용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든스는 노동을 그 사회적 형태로부터 분리하여 추상적 관념적으로 논함으로써 그 강제성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

아무튼 위 문단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 채 조금 더 나아가 보자. 그는 역시 이렇게 쓰고 있다.

"노동은 주로 남성의 역할로 규정되기 때문에 감정, 보호, 책임성에 대한 관심은 여성에게 부여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은 전통적인 것과 더욱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사회적 삶의 도덕망을 지키는 보호자가 된다. 단순 근대화 시기에 노동의 자율화는 성별 분업에 변화가 생기고 가족이 재형성되는 현상과 밀접히 연관된 것이다. 여성은 '사랑에서의 전문가'가 되었고 남성은 노동이 중심인 사회에서 감정적 근원과의 연결점을 상실하였다. 사적 영역으로 밀려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던 여성의 '사랑의 노동'은 노동의 자율성만큼이나 생산성주의에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근면'이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생산성주의는 경제적 가치가 사실상 무시되고 거부되는 '그림자 경제'를 가정한 것이었다." (p 197~8)

이쯤 되면 현대 부르조아 석학의 서술을 내가 얼마나 이해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는가를 절감하게 된다. 아무튼 그는 이후의 서술에서 "'근면'이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생산성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생산성주의로부터 벗어난 사회가 반드시 부의 창출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다. … 여기서 우리는 생산성주의와 생산성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p 199)고 말하는데, 이는 물론, 대부분의 부르조아 경제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그렇듯이, 생산성 개념을 이른바 "자본과 물적 자원의 생산성"(p 199)으로까지 부당하게 확대하고, 그 위에서 이 소위 '자본의 생산성'을 치켜세우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으나,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자.

그런데 이들 석학들의 이러한 어지러운 이론적 작업이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라는 기치가 명확히 하고 있듯이, 결국은 일종의 산술평균적 성격의 것이고, 경험주의적인 것이다. 그러나 본래 사회과학상의 진실, 곧 진보의 근거는 우리가 지금 발딛고 서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적 운동법칙 자체에 있는 것이지 그러한 과거 정책의 경험주의적 평균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운동법칙을 밝히고 그에 입각해 대응을 모색하는 대신에 관념적 개념조작으로 과거 정책의 경험주의적 평균을 구하는 저들의 작업은 그 방법 자체에서 우선 몰이론적(沒理論的)이다. 저들이 그들의 글 속에서 '근본주의'라고 이름 붙이면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대상은 사실은 부르조아 사회와 그 생산을 이론적 법칙적으로 이해하고 거기에서 진보의 근거를 찾으려는 사회과학상의 그리고 정치적 입장으로서, 이 역시 그들이 얼마나 몰이론적 태도의 옹호자들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저들이 아무리 수많은 암호와도 같은 어휘와 개념들로 수만 쪽의 지면을 화려하게 채우더라도 이는 결국 사회과학상의 진실, 계급대립을 은폐하기 위한 책동이고, 공허한 관념의 유희인 것이다.

저들이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내세우는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란 사실은 진정한 '제3' 혹은 '중도'도 아니고 극히 기만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 가면무도회를 '이론적으로' 선도하고 있는 앤소니 기든스 등의 설명에 따르면 이른바 '비버리지적 혹은 케인즈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와 '하이에크적 혹은 대처주의적인 신자유주의' 사이의 어느 지점인데, 이는 좌·우의 지평을 의도적 기만적으로 우측 극으로 극히 편중되게 좁히고, 거기에서 '중도'를 취하는 것이다. 비버리지적 '좌파'를 넘는 좌파의 세상은, 저들의 안목에서는, 존재하지 않거나 한두 마디의 말로 무시되고 있다. 그러한 한, 저들이 석학과 역전의 정치투사들이 아니었다면 저들에게는 필시 "우물 밖의 세상은 없다"는 비판이 가장 적절하겠으나, 그러한 바보이기에는 저들은 너무나 교활한 자들이다.

1970년대에 재차 격화된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반적 위기에 대한 독점자본의 반동적 대응으로서의 신자유주의의 파시즘적,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여기서 새삼 재론할 지면이 없다. 비버리지적 '좌파'가 얼마나 좌파적인가만을 간단히 보자.

저들에게 비버리지(W. H. Beveridge)가 '좌파'로서 문제되는 것은 1942년의 '비버리지 보고서'가 전후 애틀리(C. R. Attlee) 노동당 정권 하에서 성립한 사회보장 입법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자 웹(Webb) 부부가 주창했던 소위 '국민적 최저한(national minimum)'이 재론되고 있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권고한 사회보장의 수준 혹은 '내셔널 미니멈'은, 애초 고한산업(苦汗産業)·고한노동을 일소하고 사회적 생산을 점진적으로 사회주의화시킬 의도에서 웹 부부가 제안한 "노동자가 생산자 및 시민으로서의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저한도의 생활수준" 대신에, "개인의 노력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 "최저한의 생리적 수준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비버리지는 케인즈의 이론적 직계로서 독점자본의 옹호자였고, 1941년에 처칠의 보수당과 애틀리의 노동당간 연립정권 하에서 '비버리지위원회'가 구성되어 사회보장 문제를 논의되게 된 것도 전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급속도로 강화되면서 노동자 대중의 생존권이 심각하게 파괴되자 불온해져 가는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를 내세우는 자들이 편향된 '좌파'로 제시하는 비버리지적인 사회(민주)주의란 그러한 것이었다. 즉, 현대 사민주의 일반이 꾸준히 그 성격을 강화시켜 온 바의,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한 경향이고 그것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정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가 과거 서유럽 사민주의 정권의 그것보다도 훨씬 더 우파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노선이자 독점자본의 새로운 가면임을 의미한다. 그만큼 그것은 진보적이 아니라 보수·반동적이다.

저들의 몰이론적인 방법론을 전제하더라도, 좌·우파간의 진정한 '제3의 길' 혹은 '중도'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사정의 양측 기준점이 공정하게 설정되어야 한다. '좌파'의 지평이 정말 좌파로까지 연장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제3의 길' 혹은 어떤 형태이든 '중도'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비사회주의적이고 비자본주의적인 그 무엇', 즉 현실적 존재로서의 자본주의를 지양한, 그러나 비사회주의적인 그 무엇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무엇'은 현실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저들의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란 자본주의를, 그것도 그 모순·위기가 극도로 격화되어 있는 현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그 진면목을 은폐하여 구제하고자 하는 가면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본능적으로 계급적 후각이 발달해 있는 부르조아 언론이 그것을 화려하게 포장하여 선전하고, {한겨레}와 같은 소부르조아 언론들은 멋도 모른 채 어릿광대 춤을 추는 것이다.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가 독점부르조아지의 새로운 기치로서 득세하는 배경은 최근에 특히 격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위기 때문이다. 그것이 특히 서유럽에서 크게 발흥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위기가 서유럽에서 장기적인 불황과 고율실업으로 나타나고, 그 때문에 계급투쟁이, 특히 실업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노동자계급이 기본적으로 사민주의의 포로가 되어 있어서 그 성격과 지향에 한계가 있긴 하지만, 활성화되고 격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30년대에 자유주의적 전통의 독점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하자 케인즈주의적 사민주의가 그 구제자로 나서고, 이 국독자가 다시 70년대에 심각한 위기에 처하자 반동적 신자유주의가 폭력을 강화하면서 그것을 지탱해 왔던 것처럼, 이제 그 신자유주의적 국독자의 명운이 달린 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너울거리면서 이른바 '제3의 길', '새로운 중도'가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근래에 서유럽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적 변화를 "좌파 집권" 등으로 표현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다. 그러한 표현은, 서유럽 사민주의(정당)의 계급적 성격과 본질 및 지향 등에 대한, 그리고 서유럽에서 실제적으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거나, 그것들을 은폐하려는 목적의식의 소산이다. 그 변화를 최소한이라도 올바르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좌파' 앞에 적어도 한두 개의 수식어가 선행되어야 한다. "독점자본의 정치적 전위의 좌파 집권" 등으로 말이다. 현대의 사민주의란 '독점자본의 정치적 전위의 좌파적 이데올로기 혹은 강령'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란 결국 독점자본의 정치적 전위의 하나임을 명백히 해야 하는 것이다(그리고 이를 통해서, 오늘날 사민주의 혹은 '서유럽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노동운동권 내의 명사, 세력들이 결국은 누구의, 어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려 하는지를 명백히 해야 한다).

사민주의를 이렇게 성격 규정하는 데에 대해서는 현란한 반론들이 존재한다. 그 반론들은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장황하더라도, 그것을 논박하는 것이 물론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정교하고 장황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논박이 그만큼 귀찮은 작업일 뿐이다. 그런데 그들의 장황하고 현란한 반론 혹은 주장은 이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의해서 간단히 반증될 수 있다.

예컨대, 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유럽 통합의 프로젝트는 그 발생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독점자본의 우파인 보수당 및 그 정권들과 언필칭 '좌파'라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및 그 정권과 공유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예컨대 죠스팽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의 '좌파연합' 정권이나 쉬뢰더, 라퐁텐 등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의 '좌파' 정권은 보수당인 쥐페 정권이나 콜 정권이 추진하던 '유럽통합'이나 '단일통화' 창출 정책 등을 전혀 거부하지 않는다. 이견은 보수당(정권)과 사회민주주의정당(정권)간에 '계급적 이해의 대립'을 둘러싸고 있기보다는 국가간에 '국가적 이해의 대립'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들 프로젝트가 탈계급적인 것이기 때문일까? 전혀 아니다. 그것들은 명백히 서유럽 독점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고, 바로 그 때문에 우파와 이른바 '좌파'간에는 그 프로젝트를 공유해 온 것이다. ― 이를 부정하고, 즉 이러한 사실이 명확히 하는 바의, 이른바 '좌파'라는 사민주의 혹은 그 정당이나 정권의 독점자본가계급적 성격을 부정하고 그 노동자계급적 성격을 주장한다면, 이는 명확히 현실을 곡해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노선의 위기로부터 독점자본의 지배를 구제하기 위해서 지금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라는 기치 하에 사민주의가 나서고 있는데, 하지만 이번엔 그 구제가 별로 가망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거듭되는 위기·공황과 산업순환은 모순을 근본적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지양'할 뿐이어서, 새로운 순환에서 그 위기는 증폭된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이고, 지금 그것이 극도로 증폭된 형태로 폭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진정한 진보노선은, '제3의 길'이니, '새로운 중도'니, 혹은 '사민주의'니 하면서, 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기 원인을 은폐하고 그 위기의 파괴적 효과를 얼버무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성·필연성을 명백히 밝히면서 그 법칙성 혹은 필연성을 합목적적으로 지배하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근본주의' 혹은 '섭리주의'라는 부당한 딱지를 붙이면서 거부하고 있다. 이는 이들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중도'를 주장하는 자들, 물론 그것을 주장하는 광대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부르조아 석학들의 지적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정치적 의도를 담은 규정이자 태도이다.

'자유는 필연성 속에 있다'는 명제를 새삼 상기하여야 한다. (98. 11. 2.)

----------------<미 주>

* 이 글은 상명대학교의 학보(98. 10. 26)에 같은 제목으로 기고했으나, 마땅히 최소한 언급해야 했으나 지면의 제약으로 생략했던 글을 보완한 것이다.

1) "현재 아태평화재단의 책임연구위원으로 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는 사회학 박사 김현옥의 번역으로 도서출판 '한울'에서 1997년 10월 13일에 번역 초판이 출판되었다. 이하 본문의 인용문 뒤에 붙이는 페이지 수는 이 번역본의 그것이다.

2) 내 지적 능력의 한계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나는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 이외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문장구조로 봐서 이 문장은 "… 생산성주의는 … 정신으로 볼 수 있다"의 오역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는,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일본어 번역본을 참고했다는 어떤 언질도 주고 있지 않지만, 혹시 일본어의 "みれる"의 오역이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오역은 선의이지만, 거짓은, 그것이 적극적인 것이든 소극적인 것이든, 악의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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