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현장에서 미래를』38(1998/11)

도시빈민의 오늘과 내일

양 연 수(전빈련건설준비위원장)

들어가는 말

IMF시대를 맞아 대량실업의 발생은 곧 도시빈민의 대량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만큼 분배의 몫은 작아지고 고통의 전가는 커진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 고도 산업사회의 문턱에 서있는 우리나라는 선진 산업사회와는 달리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미명아래 독점재벌체제를 비호·강화하는 쪽으로 성장해옴으로써 부의 집중과 집적으로 사회보장제도와 부의 분배를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1만달러를 올리고도 걸식아동과 길거리에 거지들이 우글거리는 참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같이 잘 살아 보자며 허리띠 졸라매자고 독려했던 정부는 정치인, 재벌들의 뱃속만 채워주고 대다수 시민대중은(한때는 중산층이라는 환상에 젖기도 했지만) IMF를 맞아 거품경제가 걷히자 하루아침에 도시빈민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500만 이상의 도시빈민이 국민최저생활 이하에서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부의 분배와 사회보장 없는 경제건설은 아무리 외형적인 성장이 확대되더라도 부익부 빈익부 현상을 초래하여 국민총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1. 도시빈민의 발생, 원인과 성격

이 땅의 빈민들은 일제 식민지시대 수탈정책과 이민정책으로 도시빈민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그후 8·15와 더불어 미군정의 원조와 6·25를 거치면서 이농민과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판자촌이 형성되면서 도시빈민의 대량화시대로 접어들었다. 특히 미군정의 식민지배정책은 일제 적산 불하과정의 특권·특혜로 벼락부자들을 만들어, 이후 신식민지 독재권력과 매판자본의 결탁에 의해 부의 독점이 확대·재생산되는 근거가 되었다. 즉 8·15농지개혁의 실패, 60년대 이후 저임금 저곡가에 기초한 경제개발계획, 70년대 독점재벌 위주의 국가경영은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과정이었다. 80년대는 민중의 지지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군부독재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차관도입과 군산의존을 확대함으로써 외세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게 되었고, 정경유착이 노골화되었으며, 무분별한 농산물 수입은 경쟁력 없는 영세농가의 파산으로 이어져 농민들은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노동자와 서비스업에 종사할 수 있는 젊은층과 일부 여성을 제외하고는 무자본, 저학력, 무기술의 대중들이 도시 변두리 산비탈 등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달동네 가마니촌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으로, 80∼90년대를 거치면서 신제국주의 경제질서에 깊숙이 편입되어 외연적 경제성장을 거듭하며 한때는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고 세계화를 부르짖고 축배를 들기도 했지만,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비난과 우려가 가시기도 전에 금융독점자본의 첨병인 IMF의 마수에 의해 구조조정이다, 경제재편이다는 구실로 기업통폐합, 대량해고 등 미증유의 실업대란이 발생하여 대다수 국민생활이 빈사상태에 이르고 있다. IMF에 예속된 국내 독점자본은 더 거대한 독점을 만들기 위해 외자를 더 많이 끌어들여 경쟁력을 높이려 하고 있지만 거대 선진자본과 맞서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특권·특혜를 통한 무차별적인 경쟁을 통해 독점을 강화함으로써 국내의 소자본, 영세업자, 중소기업 등의 파탄을 초래하고 있다. 이것은 대량실업과 노동자에 대한 노동력 착취로 이어져 도시빈민의 확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대개 노가다, 일용서비스직, 파출부, 노점상 등이 되고 있으며, 적은 수입 때문에 달동네, 비닐하우스 등에 기거하며 언제 내쫓길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기도 한다.

2. 철거민 투쟁과 자주적 조직화

산업화 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던 70년대 들어, 산등성이에 다닥다닥 게딱지 같이 붙어있던 부로크집과 청계천변의 움막집을 강제철거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반독재민주화투쟁을 위해 일어섰던 4·19의 좌절과, 군부독재의 칼날로 움츠러들었던 학생운동이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민중속으로 파고들려는 때에, 경기도 광주대단지에서의 철거민들의 자발적이고 폭발적인 폭동은 빈민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학생·지식인들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중 일부는 빈민지역에 또아리를 틀기도 했다. 불만이 있는 곳에 변화의 목소리가 나오고, 탄압이 있는 곳에 변혁의 불씨가 타오를 수 있다는 교훈은 신념과 의욕이 넘친 청년학도들을 야학과 봉사활동 등으로 빈민들과 접목하게 만들었다.

한편에서는 일부 활동가들이 종교적 온정주의와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초기단계를 제외하고는 투쟁의 기피와 개혁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면서 때로는 변혁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형태는 사상적 열정과 종교적 구원주의가 뒤섞여 본질의 폭로와 선전보다 불만의 공유와 고통의 나눔이라는 수준에 머무는 정도여서 빈민들을 주체화시키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빈민운동에 투신했던 활동가들이 군부정권의 강력한 탄압에 움츠러들어 종교적 보호막으로 들어가 선교활동의 본산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결국, 도시빈민들은 잘못된 체제의 가장 극심한 피해자이면서도 변혁운동의 주체로 서지 못하고 순간순간의 저항에 머문 채, 강제철거와 노점상 단속 등에 무기력하게 당하면서 신세 한탄속에 80년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두환 군화발 밑에서 시작한 80년대, 광주민중항쟁에서의 도시빈민들의 비타협적 투쟁과 처절한 죽음은 빈민운동의 폭발적 변혁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본의 논리에 따른 건설독점재벌의 마수는 재개발 논리를 내세워 달동네 무허가촌을 강제철거하였고, 근대화에 따른 대규모 국제행사의 개최를 이유로 환경개선이라는 미명하에 대대적인 철거가 강행되었다.

80년대 목동 철거를 시발로 상계동, 사당동 등에서의 무차별적인 철거는 당장 보금자리를 붸겨날 수밖에 없는 철거민들의 자발적인 저항과 조직화를 가져왔다. 초기 투쟁과정에서는 미숙한 경험과 미조직화로 종교단체에 의지한 싸움이 많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온정주의에 입각한 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어, 새로운 대중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아직 때가 이르다, 또는 종교적 보호막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등의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대중조직에 대한 요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내세에서 잘살기를 바라며 현실을 내 탓으로 돌리는 의식으로는 엄혹한 현실에서 주체적 권리를 확보해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우려와 기대속에 탄생한 [서울철거민협의회](서철협)는 이후 혁혁한 투쟁과 헌신적인 활동으로 철거민 운동의 구심으로 서면서 빈민운동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서철협이 있기까지는 철거민들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다. 광주대단지 철거민 폭동 이후 서울시가 목동을 공영개발로 계획하며 재개발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투기적 요소를 최소한으로 줄여 값싼 주택을 공급하려 했다. 그런데 목동은 아현동 양평동에서 붸겨온 사람들이라 살고 있는 곳이었다. 또다시 대책없이 붸겨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100여회의 격렬한 시위, 점거 농성을 벌이며 투쟁하였다. 그 결과 무허가 가옥주는 재산권을 인정받고, 세입자는 임대아파트 입주권 등을 쟁취하게 되었다. 목동 철거민 투쟁은 철거민들의 최초의 조직적 투쟁이자 학생운동과의 연대투쟁의 단초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이 투쟁은 격렬한 투쟁을 감당하지 못한 지도부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운동성을 갖춘 중앙지도부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건설독점자본의 탐욕은 값싼 빈민지역에 계속 눈독들이며 재개발권을 얻어냄으로써 복부인들을 쌀찌웠지만, 이리저리 붸기던 철거민들은 그 과정에서도 도시빈민운동의 주체로 설 수 있었다.

3. 근대화에 따른 노점상 투쟁과 조직

60∼70년대 개발독재를 통해 어느 정도 경제개발을 이룬 정부는 세계화에 따른 국제행사를 많이 갖게 되었다. 그런데 업적과 체면을 과시하고 싶은 독재권력의 권위적 발상에 따라 노점상을 "체면 구긴다"고 생각하고 무차별 단속을 감행했던 것이다. 물론 그속에는 유통의 독점화라는 자본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었다. 엘리트 관료적 선민의식이 노점상의 생존권을 짓밟고 고통으로 몰아갔다.

이에 노점상들은 83년 시청앞에서 1,000명이 모여 집회를 연 것을 시발로 계속적인 단속에 산발적으로 저항하면서 일부 선진적 노점상들이 조직화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자기 계급을 조직하는 것이 변혁의 원동력이라는 인식과 의지로 노점상 조직에 앞장서 숱한 시행착오와 좌절을 겪은지 3년만인 87년 10월 [도시노점상복지회]를 만들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살벌한 군부독재 시절이라 유인물 하나도 식은 땀을 흘리며 뿌려야 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터라, 친목단체로 하자는 의견도 있고 해서 부득이 운동적 냄새가 안나는 복지회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맞으면서 단속의 고삐가 더욱 조여지고, 생존권 자체를 위협받는 처지에 이르자 노점상들은 물불 안가리고 싸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직도 강화되고 위상도 높아져서 그야말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그후 87년 12월 대통령선거와 88년 4월 총선을 최대한 활용하여 조직확대에 박차를 가한 결과, 정회원과 준회원이 15,000여명을 헤아리는 조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다음해인 88년 여름, [전국노점상연합회](전노련)로 개칭하여 명실공히 전국노점상들의 구심으로서 빈민운동의 변혁을 주체적으로 이끄는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88년 6월 13일 성균관대에서 치러진 노점상 생존권결의대회는 노점상 투쟁사상 최대인 2,000여명이 동원된 집회로, 투쟁의 열기 또한 격렬하여 전투경찰과의 싸움에서 노점상 17명이 부상으로 입원하는 둥 3일 동안 계속된 싸움으로 세간의 관심과 성원을 불러일으켜 노점단속 유보라는 일차적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노점상들은 이날을 노점상들의 승리의 날로 정해 해마다 승전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후 노점상자립법 제정과 노점상문제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민중의 정치적 참여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4. 도시빈민단체의 연대와 통일

이렇게 성장한 노점상연합회와 철거민 조직은 끊임없는 탄압과 투쟁속에 강화되면서, 도시빈민의 소외와 고통의 현실은 빈민들의 무지와 태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한다는 인식하에, 가난과 차별을 없애는 보다 큰 틀의 전선운동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전국빈민연합 건설을 추동하여 89년 11월 [전국빈민연합]을 건설하고, 이어 전국노점상연합회, 전국농민회 등과 협력하여 전국적인 통일운동체인 전국연합 건설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전빈련은 빈민운동의 지평을 더욱 넓히고 다양한 운동의 틀을 포용한다는 취지로 전국빈민협의회를 건설한 바 있으나, 대중에 기반을 둔 단체와 활동가 중심의 단체간의 정서적 갈등과 대립은 핵심단체인 전노련과 전철연의 탈퇴로 이어져서, 결국 해체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전노련과 전철연은 그동안의 부진한 활동을 반성의 계기로 삼고 빈민운동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전노련과 전철연 중심의 [전빈련건설준비위원회]를 95년 4월 다시 띄우게 되었다. 그러나 준비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전빈련 건설을 위해 활발한 부문사업을 벌이던 본인이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사건으로 구속되자, 미처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전빈련은 3년여의 긴 동면에 들어갔다. 98년 봄 출소와 더불어 다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전빈련준비위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과 11월 8일 민중대회를 힘있게 치뤄내고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5. 도시빈민 운동의 나아갈 길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의 한 부분인 금융독점은 불가피하게 IMF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지만 외채를 더욱 많이 들여온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소위 문민정부의 초기 외채는 5백억 달러였는데 정권말기 IMF위기를 맞이할 때는 1,000억 달러가 불어난 1,500억 달러가 넘었었다. 이것은 외채를 무조건 많이 끌어온다고 경제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소위 신자유주의는 정부지출 축소와 민영화, 기업규제 완화 등을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대량실업으로 이어져 대다수 인민의 생활을 저하시키고, 나아가 사회불안과 소비감소로 산업자체를 위축시킨다는 것이 현재 IMF의 교훈이다.

여기에서 가장 고통받는 계층은 도시빈민이다. 따라서 도시빈민은 절박한 고통과 곤궁을 해결하기 위해 부의 분배를 요구하고 변화를 추동하는 선봉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상대적 박탈감과 분노는 권력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나 가장 비타협적이고 혁명적인 형태를 띨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도시빈민의 기회와 여견의 차이는 개별적, 고립적이어서 기회주의적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변혁의 대열로 묶어 세우기가 어려운 점도 많다. 그러나 도시빈민의 현재와 같은 처지와 고용구조는 일시적이나 우연적인 것이 아닌 자본과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기존의 사회체제가 존재하는 한 도시빈민운동은 개별자본에 대한 개별적 투쟁으로 자신의 생존권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총자본의 산물인 국가권력을 상대로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 이는 도시빈민운동이 그 시작에서부터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그 무산계급적 입장은 변혁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6. 신자유주의에 맞선 민중들의 역할과 과제

지금까지 우리는 반독재민주화투쟁을 같이 해왔다는 이유로 보수인사를 권력의 담당자로 지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수인사들은 결코 민중의 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김영삼정권과 김대중정부를 통해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의 입장에 서기보다는 가진자, 재벌들을 위한 정책적 입장에 노골적으로 서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경유착으로 재벌독점은 강화되고 급기야 과잉투자, 중복투자로 인해 IMF지배의 치욕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통과 절망은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정부 통계로도 200만의 실업자가 생기고 비공식부문까지 합하면 연400만의 실업자가 넘쳐나고 있으며, 노숙자와 거지가 우글거리고 있다. 너도나도 노점상으로 달려드니 노점상 해먹기도 힘들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보수권력이 만들어 놓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신자유주의자들의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독점자본의 규제완화, 민영화 등으로 아무리 외채를 끌어오고 생산을 높인다 해도 결국은 생산의 무정부상태에서 이윤율저하와 불황의 반복심화를 가져온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나 미국이 무역흑자와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다지만, 지금 경제위기를 예고하고 있듯이 자본주의는 어떻든 사멸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본다. 소련과 동구가 무너질 때 사회주의는 끝나고 자본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호들갑을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오늘날 자본주의의 병폐가 세계를 파탄시키고 있다. 자본주의는 역시 수많은 민중들의 땀과 희생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다시 한번 증명된 이상 대안이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는 길로 모색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저항은 이미 세계적인 추세로 나타나고 있다.

결코 IMF체제는 신자유주의적 방법으로 극복될 수 없다. 왜냐하면, IMF가 신자유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민중진영은 무분별한 자본의 경쟁으로 인한 자원의 낭비와 비효율성을 막고 국가의 부가 보다 공정하게 분배되고, 국가정책이 환경친화적으로 수립되고, 주체적 자립경제를 바탕으로 국제협력 관계를 수립해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보수정권의 속성과 구조상 이러한 과감한 정책실현은 어려우므로 민중 스스로 민중권력의 창출을 서둘러 준비하여 민중의 고통과 소외를 해방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제 98민중대회를 시발점으로 전 민중이 이 땅의 주인으로서 모든 역사를 주체적으로 보듬고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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