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현장에서 미래를』39(1998/12) 총풍(銃風)별곡 김 상 태(연구원/문화비평가) 총풍이란
것이 불었었다. 기존 집권세력이 다시 대선에 승리하기 위하여 스스로
절대 적성국가로 규정한 북한에게 총을 쏘아 달라는 공작을 음모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앞뒤가 하도 기발한 사건이라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할 말이 없다. 물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 그것이 사실이냐,
현 정부야 말로 음모를 꾸미는 게 아니냐 등등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내가 입을 벌리는 상황이란 그런 것이 전혀 아니다. 내가 놀라는 건
권력투쟁의 회오리 속에 전개되는 가히 천재적인 테크닉들에 대한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 같은 일상인들은 이 기발한 깡패들과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 수 있었는지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차제에
떠오르는 생각들이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그러니까 총풍의 열외 별곡이다.
나는 간혹 사람이 침팬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침팬지 치타는 귀엽기도 하지만 그 하는 양이 대단히 야비하고 비굴하기도 하다. 쉬지 않고 두리번거리고 먹이에 약삭빠르며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것이 침팬지의 또다른 이미지이다. 그 중에 재미나는 것은 순위제라는 것이다. 침팬지 무리는 순위를 갖는다. 아주 엄격한 것은 아니라 해도, 이들 내부에서는 때로 생사를 가름하는 문제라고 한다. 물론 높은 순위, 특히 두목쯤 되는 '알파' 수컷에게는 먹이와 생식의 기회에 있어서 압도적인 우선권이 주어진다. 그건 그럴듯하다. 훨씬 인상적인 것은 하위 개체들이 이 순위제에 아주 적극적인 적응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두목의 위치가 분명할 때 하위 개체들은 본능적인 존경심과 맹목적인 지지를 보낸다. 내가 침팬지와 사람을 생각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사람들은 참으로 두목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 두목이 실상인즉 자기 것을 뺐었으면 뺐었지 자기 살아가는 데 하등의 도움이 안 되는데도 그렇게 한다. 정치적 열광의 본질 속엔 이 무의식적 본능이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엔 어떤 합리성도 자리하지 못한다. 모든 논리는 이 본능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논리이다. 다른 나라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지난 수십년간의 한국정치 사회과정은 어쩌면 이 순위제의 극단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순위제는 필연적인 지역성을 내포한다. 그것이 바로 텃새 행동이란 것이다. 두목과 하위개체들은 철저한 지역 헤게모니에 집착한다. 침팬지의 한 무리가 근접한 이웃무리에 가한 테러와 살해 행위를 기록한 동물학자들의 보고서를 읽노라면 - 시중에 그런 책은 얼마든지 있다 - 우리는 잠시 몸서리를 쳐야 한다. 그 잔인성뿐만 아니라 우리와의 유사성 때문에도 그러하다. 이렇게 보면 정치란 적어도 우리에겐 지역에 기반한, 상대방 두목을 둘러싼 공방이 그 핵심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전 세계 어디에도 해당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도에 있다. 우리 사회는 그 정도를 거꾸로 침팬지 쪽에 근접시켜 가는 것 같다. 하위 개체들은 어찌나 적응이 잘 되어 있는지, 당내에서는 당원들이, 지역에서는 지역주민들이 두목이 상처를 받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안달을 낸다. 총풍의 본질 또한 바로 거기에 있다. 모질게
고민하면 어디에도 답이 있는 법이다. 신집권 세력의 모사들은 얼마나
치밀하게 고민했을까. 총풍, 또 그 이전의 '세풍'까지 합하여 얼마나
기발한 작품인지 모른다. 그게 사실이냐고? 50여년 현대사를 보내고
그 점이 우리에게 중요했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을까? 상대방 두목에
대한 공격 이외에 그것이 한 가지라도 뭔가 의미를 갖는다면 손가락에
장을 지질 사람이 우리 중엔 수두룩하다. 사실여부가 어떻든, 검찰이
뭐라하고 법정 판결문이 무어라 말하든 탈세와 공작정치가 사라지거나,
최소한 사태가 나아질 거라는 걸 우리는 믿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총풍의 본질은 우리의 좌표와 상황에 대한 이정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저 개탄에 그칠 일이 또한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여기까지야 신물 날 만큼 들어왔으니까 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우리 자신은 어떠한지를 묻게 된다.
한 사회는 어떤 룰, 규칙 같은 것을 갖게 된다. 역사, 정치, 경제, 문화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그 한 다발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규칙이란 근본적으로 총생산에 대한 재화의 분배규칙, 그것을 만들어 내는 노동력 분배의 방법을 근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겐 어떤 규칙들이 존재하는가. 해방 이후 황무지에서 강제된 자본주의 체제의 건설은 과연 이 순위제 이외의 규칙을 가져올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승만 정권의 본질이 그것이다. '자 어떻게 나누어 먹을까. 복잡하므로 단순하게 하자. 두목을 분명히 정립시키자. 봉건적 징후가 농후한 한국에서 왕을 대신하는 두목의 이미지는 범국민적 정서다. 그 다음으로는 두목 주변의 동심원 순으로 분배하자. 불공평하다고? 아니다. 오히려 명쾌하다. 우리 그렇게 하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린 이런 규칙을 가지고 수십년을 살아왔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한번 정립된 규칙은 적당한 조건하에서는 양의 피드백으로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 규칙이 강화되자 나중엔 아무도 여기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다. 규칙을 거부하는 것은 자유지만 때문에 그는 총체적으로 분배에서 소외되고 만다. 바로 이때가 문제이다. 이렇게 되면 이 규칙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으시대거나 아니면 그 반대로 아부한다. 두목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 때문에 두목이라는 자들은 곧바로 사기꾼이 되곤 한다. 또 이런 순위제는 반드시 원시적 폭력성을 의제화하고 강화시킨다. 말투, 눈빛, 분위기 그 모든 것이 그러하다. 실로 숨막히는 일상이 고착되는 것이다. 90년대를 돌아보면 나는 이 순위제적 기형자본주의와 일정 정도 축적을 기초로 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노동자 세력간의 각축전을 생각하게 된다. 총풍은 첫번째와 두번째가 어우러진 절묘한 작품이다. 과거의 음모와 공작이 간첩조작사건 같은 그야말로 원시적 작품이라면 총풍은 훨씬 세련된 작품이다. 시민 운동권 일반이 TV 뉴스프로에서 장장 1분씩이나 상영되는 것도 참으로 전에 없던 일이다. 우리는 이 알 수 없고 아슬한 줄타기 위에 서 있었다. 해서 그런 생각도 한다. 진보운동 진영 일반은 이 줄타기와 상관이 없는 것인지.....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중요한 이유 또한 여기 있다. 이 숨막히는 규칙을 누가 어떻게 삭제시킬 수 있는가? 노동운동이 즉자적인 노동자계급이익 운동이어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땐 단지 이 규칙의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운동은 그 과정 속에서 해방된 자아상을 이미 창출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는가? 새삼 사색의 꼬리가 끝없이 일어서는 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