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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6 22:12:07
박성인
[차문석] 한국전쟁으로부터 벗어나기, <프로메테우스>2005.10.05.
한국전쟁으로부터 벗어나기

차문석 프로메테우스 편집위원, 사회비판 아카데미 회원, 성균관대 연구 교수
<프로메테우스>2005.10.05.

20세기에 야기되었던 대부분의 전쟁은 전쟁 시기에 자행되었던 온갖 비인간적 살상과 비극뿐 아니라 전쟁 이후에도 그 전쟁의 정치적 타결과는 상관없이 오랫동안 인민들에게 죽기 전에는 치유될 수 없을 상처를 남겼다. 이는 상징조작을 통해 국가주의적 아이덴터티를 인민에게 부과하여 국가이성을 인민의 일반의지로 둔갑시키는 근대 국가들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모든 전쟁이 확고한 정의의 목표(가령 악을 응징하는 전쟁)를 갖고 있는 것처럼 인민들에게 제시되었고 특정 전쟁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을 국가 권력은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당시뿐 아니라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것의 비극성은 더욱 강화된다. 
그렇게 인민들에게 제시된 전쟁 중에서 냉전 시기에 가장 커다란 규모로 치러진 한국전쟁이야말로 전쟁 당시의 비극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후유증에서도 처절할 정도로 특별하다. 한국전쟁이 전쟁 당사국 중 어느 일방의 승리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휴전으로 마감되었다는 점, 전쟁 참가국들이 아직도 한반도의 정치경제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 열전 이후 전쟁을 수행했던 남과 북 사이의 지속적인 분단구조와 상호간의 적대적 공생, 적대적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이라 믿어지는 민족주의적 요소 등은 그 후유증의 양상을 더욱 광범위하고도 치열하게 만들었던 구조적인 요인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해석에서 지식인에게 가해진 국가폭력

한국전쟁은 3년 1개월 2일(1950.6.25~1953.7.27)동안 전개되었으며, 한반도의 미래 운명에 엄청난 비극적 영향을 미쳤던 폭발적인 사태였다. 이 전쟁은 남북한 인민들에게 ‘문화적 예외주의’(한반도의 홀로코스트!)로 각인되었다. 한국전쟁은 냉전을 가시화시킴으로써 인민들에게 냉전의 심리적 회로판의 역할을 하게 된다. 남측에서는 “상기하자 6.25!”라는 슬로건이, 북측에서는 “미제의 각을 뜨자”는 슬로건이 자연스럽게 유통되면서 전쟁은 자신의 효과를 영속시켜 왔다. 특히나 한국전쟁은 남북한에 억압적인 권위주의 체제의 수립을 자극하고 유도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지 60년, 한국전쟁이 휴전한 지 52년을 맞고 있는 오늘날의 한반도에서 최근에 한국전쟁은 또 다시 자신의 비극적인 얼굴을 내밀었다. 이른바 강정구 교수 사건을 계기로 전쟁의 상처가 다시 한번 곪아 터진 것이다.
지식인들에게 가해진 국가 폭력의 역사는 지난 10년 동안에만도 드물지 않았다. 1994년 7월에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대학 교재가 국가보안법상 이적 표현물로 분류되어 장상환 교수 등 일군의 학자들이 권력이 주도하는 재판정에 섰으며, 1998년에는 최장집 교수가 『한국 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이라는 책에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으로 미화했다는 이유로 이른바 ‘최장집 교수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최근 2005년 8월에 강정구 교수가 인터넷 신문에 ‘맥아더를 알기나 하나요?’라는 칼럼을 썼고, 여기서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면서 동시에 내전이었다’고 말한 부분이 문제가 되어 고소당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입장은 한국 사회에서 그가 어떠한 신념 체계를 갖고 있는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사태를 더욱 폭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친북이냐 반북이냐는 이분법적 구도가 모든 이들에게 강요되고 있다는 것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5년이라는, 역사적 화해가 충분할 수도 있었을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시각차이와 이념을 둘러싼 논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여기에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불굴의 시금석으로 우뚝 서 있다.

혁명전쟁, 통일전쟁, 그리고 한국전쟁

최근 10여 년 동안 ‘한국전쟁’에 관한 학자들의 입장에 대해서 공적 폭력으로 사적 폭력으로 대응해 왔던 한국사회의 마녀 재판식 공격은 어찌 보면 역사적인 유추를 통한 새로운 국면의 상상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것 같다. 북측의 입장을 전제하기는 하지만, 민족해방전쟁, 통일전쟁, 통일내전 등의 용어가 한국전쟁의 성격을 설명하는데 동원될 때 학자 자신이 그러한 입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 한 마녀 재판에 걸려들게 되어 있다. 그러한 용어가 사실 전쟁의 대부분의 당사자들이 내거는 담론인 것이며, 그리고 ‘적어도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전쟁이 갖는 성격이라고 언급할 때는 그것을 온전히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용어는 당시 전쟁에 착수했던 권력 지도부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공식적으로 드러낼 때 표현하는 수사이며, 또한 그들이 기대어 왔던 역사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역사란 다름 아닌 혁명 전쟁의 역사이기도 한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이 인민들에게 심어준 커다란 유산이 있었다면 바로 사회는 변화하는 것이며 변화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이는 어느 정도 계몽주의적 신념이자 당시의 급진주의자들이 사회에 부여한 신념이기도 했다.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는 신념은 의식적인 투쟁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전환되었다. 이리하여 급진적인 정치적 이벤트를 추구하는 이념, 즉 혁명 이념이 탄생하였으며, 이러한 이념에 기반한 혁명 조직의 창출, 급기야 이러한 이념과 조직에 의한 혁명 전쟁이라는 것이 당연히 의제로 오르게 되었다.
19세기에는 이러한 노력들이 ‘운동’ 혹은 ‘조직’으로 나타났다면, 20세기에 이러한 급진주의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이벤트를 통해서 사회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기를 갈망하는 세력들을 낳았는데, 이는 20세기의 급진주의적 노력들이 불가피하게도 다양한 전쟁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1917년을 전후로 발생했던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은 사실상 반인민적인 전쟁을 회피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고 이는 평화와 빵을 갈구하면서 진행시켰던 혁명이었다. 그러나 볼세비키의 혁명 역사 서술 과정에서 이러한 혁명적 과정은 무장한 혁명 세력이 폭력을 수반하여 승리하는 과정으로 장엄하게 서술되었던 측면이 있다. 한 때 이것은 혁명의 교과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게다가 중국공산당의 21년 간의 혁명전쟁(1928~1949년)도 라틴 아메리카를 비롯해 20세기 혁명 모델이 되었다. 해방 이후 북한(지도부)이 한반도의 붉은 혁명을 ‘전쟁’이라는 기획으로 자연스럽게 몰아갈 수 있었던 것도 이전의 이러한 혁명적 역사들의 무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제국주의와 대항해서 일어났던 1959년에 완결된 쿠바의 혁명 전쟁, 1965년 통킹만에서 불붙었던 베트남의 반미 혁명 전쟁은 모두 20세기에 혁명을 꿈꾸는 세력들이 그 혁명을 기획할 때 염두에 두어 왔었던 역사적 경험이었다. 20세기 최중반(1950년)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익히 알고 있는 북측의 혁명정권이 존재했다는 사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전쟁을 시작하였나. 여기에 답해서는 안 된다”

1950년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그 성격에 대해서는 장기간에 걸쳐 논쟁이 되어 왔으며, 한국전쟁 자체가 치열했던 만큼이나 이 전쟁에 관한 논쟁의 역사도 치열했다. 이제는 다 알게 된 지식이 되었지만, 기존에는 남침설이 전통주의설로서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으며, 이를 잇는 최근의 계보는 박명림의 연구서『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2003)였다. 또한 북침설을 주장하는 논의들도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굽타(K,Gupta)의『한국전쟁 어떻게 시작되었나』(1988)와 버쳇(W.Burchett)의『자력갱생의 북한현대사』(1991)가 그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객관성을 인정받고 있는 논의를 종합하면 전쟁을 시작한 측은 북한임이 확실하게 인정되고 있다. 재미학자 방선주가 북한 노획문서를 소개한 것이라든지(“인민군의 말단부대가 6월 17일에 명령을 받고 전선에 배치되어 23일까지 전투태세를 완료하여 25일의 명령으로 진공을 개시”), 前조선인민군 고위직에 있었던 주홍성의 면담(“2주일 전에 명령이 나와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전선으로 이동… 지뢰 제거는 전투개시 이전에 확실히 행했다”)과 사리원에서 징집당했던 한길여라는 인민군 병사의 잡기장(“공격준비 완료는 금일 저녁까지이다. 23일”) 등은 이 전쟁이 북측의 개시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전쟁을 결심했던 것은 당시 남북한의 내부 역학과 한반도를 둘러싼 다양한 힘의 평행사변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전쟁은 미국, 소련, 중국 등 한반도에 어떤 형식으로든 관련이 있는 국가들의 결심이 또 한 측면에서 작용하지 않았다면 발생할 수 없었던 전쟁이었다. 게다가 전쟁이 어느 정도 예고되었던 측면이 존재하는데 바로 냉전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하여 사고할 때, 엥겔스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역사의 무대에는 무수히 서로 교차되는 힘의 양, 무수한 힘의 평행사변형이 존재하며, 이들이 상호작용하여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그 당시 남북한 쌍방이 모두 전쟁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남북한 간의 전쟁을 원하는 ‘의지’와 ‘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가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하여 이 전쟁의 책임을 전적으로 떠넘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갈등의 조짐이 역력한 가운데 일방이 주먹을 먼저 내밀었다고 그가 ‘악의 축’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미국의 남북 전쟁, 1차 대전, 2차 대전 등의 20세기 수많은 전쟁에서 우리는 누가 전쟁을 시작하였는가를 가려내어 그 국가를 폭력적으로 응징하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 우스운 사태가 한반도에서 50년을 유령처럼 배회해 왔던 것이다. 오히려 이는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せ潁?정당하게 서술하려는 국가권력의 욕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특히 1980년대 후반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전혀 새로운 시각이 등장하면서 적어도 화해 가능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해석들이 등장했다. 주지하듯이 브루스 커밍스(B.Cumings)의 『한국전쟁의 기원』(1981)이 그것이었다. 1980년대에 커밍스가 내놓은 진단은 대단히 적절한 것이었는데, 커밍스는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 이 물음에는 답을 내놓을 수 없다… 이 물음에는 답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전쟁을 시작한 측을 찾아내어 몰매를 때리려는 폭력적인 태도를 지양하고자 했다. 잘못된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여러모로 진리이다.

김일성과 이승만의 차이: 실행

당시의 남북한이 갖고 있던 상황에 대한 인식을 보더라도 ‘전쟁으로 가는 길’에 제동을 걸기가 힘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헌법에는 대한민국 국토가 한반도 전역에 미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는 수도는 서울, 임시수도는 평양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리하여 한반도 전역을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두 개의 국가가 출현한 것이며, 이들은 서로 상대방을 외국세력의 괴뢰정권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평화적 수단이 아닌 군사적 수단으로 상대를 타도하고 영토의 완전지배를 성취할 수밖에 없다고 믿게 되었다. 만주파, 연안계 등의 북한 지역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의 혁명 노선이라는 것은 전쟁을 통하지 않고서는 상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김일성과 박헌영은 ‘국토완정’과 ‘완전독립’을 내걸었다. 공식적으로는 남한에서의 혁명을 기다린다는 입장이지만 숨겨진 의도는 남진을 통해 남한의 정권을 타도하고 국토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1947년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모든 조선 사람들이 희망하는 단합된 민주조선의 건설은 단지 남한에 있는 반동적인 매국노들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으며, 1950년 1월 19일에는 “통일을 위해서 북한에 혁명기지를 건설하고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남한에 있는 반역자들을 쓸어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승만은 얼마나 달랐나. 당시 남한 측 이승만의 북벌이나 북진통일도 전쟁 발발에 상당한 무게로 작용했음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공공연히 ‘북벌’과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1920년대 난징(南京)의 국민당 정부가 ‘북벌’을 통해서 군벌을 타도, 중화민국에 의한 국토통일을 성취한 것을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의 신문들도 “북진의욕”을 과시하면서 “때는 왔다”, “통일의 기회는 바로 이때다”고 말할 정도로 이승만의 북벌론은 완강한 것이었다. 결국 이 전쟁이 북한 측의 남침으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즉 김일성의 남조선해방과 이승만의 북진통일이 각축하던 때에 남침이 가능해 진 것은 김일성이 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군대를 준비할 수 있었다는 점, 이 너무나 단순한 이유가 결정적이었다.

한국전쟁은 내전의 성격을 가진 국가간 전쟁이자 국제전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한국전쟁의 기원이라기보다는 한국전쟁의 성격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성격을 놓고 권력과 학술진영 간에, 그리고 학술진영 내부에서 치열하게 공방이 있어 왔고, 국가 권력 측에서는 이에 대해 법적 폭력까지 서슴지 않고 행사해 왔다. 사실 한국전쟁은 많은 성격들이 복합적으로 뒤엉켜있는 전쟁이다. 그것은 내전이자, 국가간 전쟁이었으며, 미국ㆍ소련ㆍ중국뿐 아니라 십 수 개의 국가들이 개입하여 참전했던 국제전이기도 했다. 우선 내전의 성격을 갖는 것은 김일성과 이승만 등 남북한의 지도부가 통일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는 사실(김창순, 1961; I.F.Stone, 1952; 백학순, 1999), 토지소작 문제를 중심으로 한 계급 갈등과 남한 내 빨치산(partisan)과의 교전, 남한 내 혁명 세력에 대한 북한의 지원 등이 군사적 충돌로 전변되었다는 사실(B.Cumings, 1981 &1990; J.Merril, 1989), 그리고 특히 북한 측이 38선 이북 지역에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치영역을 확대하여 한반도 전역의 ‘완정’(完整)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和田春樹, 1995; 서동만, 2005)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미 1948년 남북한에서 모두 단독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이 전쟁이 국가간의 전쟁이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게다가 1950년 6월 27일에 미국이 참전을 결정하고 그 해 7월 7일에 유엔군 사령부가 설치되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특히 미국의 맥아더(D.MacArthur)는 1950년 9월 15일에 전격적으로 인천상륙을 시도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켰고, 이후에는 중국을 포함하여 한반도에 핵전쟁의 공포를 가져왔다. 맥아더의 욕망을 제지하지 못한다면 미국ㆍ중국ㆍ소련을 포함한 많은 국가들이 자동 참전하게 될 3차 대전, 그것도 핵전쟁이 터질 것이었다. 적어도 이러한 측면에서 맥아더는 아무리 보아도 한반도에서 비극을 초래할 수 있었을 인물 중 손꼽히는 후보였다는 점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현재 갈등하고 있는 인천의 맥아더 동상의 철거를 둘러싼 사태들은 맥아더에 대한 진지하고도 객관적인 학문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맥아더에 대한 일반의 무지는 그 동안 사회에 개입할 용기가 없었던 지식 사회의 부산물이다. 일부 무속인들이 맥아더 귀신을 사당에 ‘모시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한국전쟁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변태적으로 이해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사실 1950년에 미국에서는 제임스 버넘(J.Burnham)이 조지 케넌(G.Kennan)의 영향력을 넘어서고 있었는데, 이는 미국이 세계 모든 전선에서 “역동적인 적”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며 더 이상 봉쇄 정책이 아닌 “공세로의 전환”할 것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미국에게 한국전쟁은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것까지 염두에 둔 전쟁(커밍스,『악의 축의 발명』, 2005)이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은 “할 수 있는 곳 어디서든지 분쟁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로버트 러벳의 1950년 3월의 발언). 이러한 공세로의 전환은 한국전쟁을 통해 가능해졌는데, 1954년에 애치슨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한국이 와서 우리를 구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야말로 미국이 봉쇄 정책에서 “해방”으로 도발적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지도부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해방 전쟁’이었다는 역설이 탄생하게 된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도 역시 ‘미국 지도부의 입장에서 볼 때’ 해방전쟁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성격은 전쟁에 참여했던 국가들의 다양한 욕망의 그물 속에서 뒤엉켜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특정 국가의 입장에서만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정하고자 하는 것(가령,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통일내전) 자체가 매우 위험한 진술이 될 수 있으며, 한반도에 확고하게 뿌리 박혀 있는 냉전적 히스테리, 분기하고자 기회만 엿보는 보수세력들, 권력의 폭력적 개입 등이 예상 가능한 절차로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국가적 폭력에 맞서 ‘학술적 저항’이 필요하다.

최근까지 한국전쟁과 관련되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학술ㆍ진보 진영이 반드시 숙고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지점들이 존재한다. 한반도뿐 아니라 많은 사회가 20세기를 전쟁이라는 사태를 경험하면서 거쳐 갔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만큼 전쟁에 대한 기억을 국가가 독점하는 곳은 드물 것이다. 이미 최근까지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자료들이 공개되었으며, 자신이 객관성을 유지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리 힘들이지 않고도 한국전쟁의 다양한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학술 진영에서 진행되어 온 한국전쟁 연구는 이제 세세한 부분까지 들춰내고 묘사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사회에 그러한 연구결과가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 사회라는 곳에는 미국인들조차도 인정하는 사실관계를 오히려 한국인들이 부정한다. 그 뿐인가. 다양한 보수집단들이 미국인보다 더욱 미국인답게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지 않는가. 게다가 이들 보수집단들의 활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정치인들과 권력집단은 오히려 이를 확산시키고 이들에 앞서 학자들을 억압적 국가기구를 통해서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학술적 논쟁을 통해 사회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법적 권력을 통해서 판단한다는 것, 즉 사실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봉쇄하고 국가가 최종 심급에서 판단을 내린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며 개탄스런 일이다. 사회모순에 짓이겨져 자살한 죽음을 정신과 의사가 정신병리학적으로 진단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우스운 것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전문 학술적인 연구를 법학자도 아닌 법관이 관장한다는 사실이 어찌 우습지 않은가. 나아가 이러한 사태에 직면해서 학술진영에서 어떠한 형태의 ‘학술적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강정구 교수 사건이 발생했던 침묵의 여름이 가고 나면 이제 모든 것이 얼어붙는 침묵의 겨울이 지속될 것이다.

경계해야 할 폐쇄적 상대주의

‘학술적 저항’ 행위만을 촉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에 대해 ‘드물게’ 공개적으로 발언했던 학술 진영의 입장도 다소간 객관성을 가장한 측면이 없잖아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강정구 교수처럼 북한 지도부의 의도를 너무나도 순수하게 해석하는 입장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다. 과연 북한 지도부가 한국전쟁을 순수하게 ‘해방’과 ‘통일’이라는 기획 속에서 상정했으며 개시했다고 믿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북한 국가의 일반의지가 전체 인민의 일반의지였다고 어떻게 감히 확정할 수 있는가. 왜 하필 맥아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유독 북한의 입장에서만 한국전쟁을 해석해 주었어야 했는가도 의문이다. 결국 북한 측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통일내전’이었는데, 사실은 그 전쟁은 ‘누가 봐도 정당한 것’이었다는 진술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맥아더는 통일 내전을 분쇄하러 들어온 전쟁 주구였으며 민족주의적 과제인 통일의 파괴자이자 원흉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맥아더를 보는 시선도 북한 측의 시선인 셈이 되었으며, 그래서 이 사실을 남한에서는 수긍할 수 없게 되는 묘한 폐쇄적인 상대주의가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통일내전’이라는 담론에 사용되고 있는 ‘통일’이라는 지극히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용어의 역사성에 대해서 재고해야 한다. 1945년 해방 직후에 ‘통일’이라는 것은 권력 지도부와 인텔리들이 희구했던 담론이었을 뿐이다. 한반도의 미래를 ‘통일’이라는 담론 하나로 몰아갔다는 것은 고단한 ‘삶의 영위’에 직면해 있었던 민초들의 의지와 결코 일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통일 내전’ 혹은 ‘혁명 전쟁’이라는 시나리오는 매우 反민중적인 시나리오였던 셈이다. 지금까지도 ‘통일 내전’의 정당성 및 그것의 민족주의적 과제를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통일내전’의 정당성은 통일을 위해서 이러한 내전을 다시 한번 불러 오는 것도 정당하다는 논리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해방과 통일을 위한 전쟁 때문에 인민들의 현세의 만족과 행복이 연기되어야 하며, 다가올 좀더 나은 세상의 약속에 복속되어, 즉 유토피아에 복속되어 현세의 인민의 욕망을 억누르는 전쟁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수십 년 동안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인민의 신체를 불구로 만들었으며 억압해 왔다. 커다란 변동, 공포, 사람들이 가정을 떠남으로써 야기되는 가족의 붕괴와 같은 수난들이 발생하였으며, 전쟁의 보편적인 고통은 모든 방법과 경로를 통해서 인민들에게 숨어들었다. 전쟁은 오히려 순간적인 것이었으나 그 효과는 영속적이었다.

한국전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한국전쟁은 전쟁 그 자체라기보다는 효과 속에서 재연되고 있다. 그 효과 속에서 전쟁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전쟁으로 재연되는 것을 막고 이를 평화에 관한 이야기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그 효과를 잠재워야 한다. 전쟁 그 자체를 ‘찰나적이고, 흐릿한 존재’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 홉스봄(E.Hobsbawm)의 지적처럼,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참가자들은 극단적인 우파의 대열을 형성하였고 폭력적인 ‘야수’의 무리를 이루는 최초의 흐름이 되었던 것처럼, ‘북한의 통일내전’인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보수는 이러한 ‘야수성’을 나름의 합리성(우파진영의 제국주의 논리)에 기대어 드러내고 있다. 오히려 어쩌면 이 통일내전이 이들 보수주의자들을 ‘반공이데올로기’가 호명하는 국가적 도덕과 윤리로 무장한 얀센주의자들로 거듭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이러한 보수 집단의 비호 아래 수십 년 동안 모든 환각과 모든 허구와 모든 헛된 희망과 모든 좌절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이제 문제는 통일 자체를 평화체제로 유연하게 사고할 필요성이 제기되는데, 이것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회피하면서 혁명적 과제들을 성취할 수 있는 또 다른 계기들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한국전쟁에 대해 남한이면 남한, 북한이면 북한과 같은 특정 국가(아니면 북한의 입장에서 혹은 남한의 입장에서)가 지닌 일종의 당파성과 ‘절대성’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객관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는 학자들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함정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이는 바로 국가보안법과 같은 남한 국가의 폭력적 근육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절대성이지 않은가. 북한 또한 그 절대성은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억압적 기구를 통해 보호되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그 절대성의 논리를 학술적 영역으로 그리고 객관성의 영역으로 끌어내려 해체시킴으로써 그 주제 자체(한국전쟁)가 갖고 있는 긴장과 폭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남침이냐 북침이냐, 해방전쟁이냐, 통일내전이냐에 모든 것을 옭아매는 절대성이라는 알약을 더 이상 삼켜서는 안 된다. 코제브(A.Kojève)가 어디선가 말한 것처럼, 학자들은 자신의 개인적 가치를 강제로 국가에 떠넘기는 데 대항해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적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 자신의 특수한 가치는 순전히 종속적인 상태에 남게 된다.



   [정희찬]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미국의 군사패권, <월간 사회운동>58호, 2005.10.

박성인
2005/10/27

   [백낙청-하승창 대담] "어깨에 힘 빼고 통일 하자", <프레시안>2005.10.06.

박성인
2005/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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