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이은숙
◎ 작성일:2000.07.30(일)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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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의 사회
국민대학원신문.1997.4.16일
실업은 곧 일할 권리의 박탈을 의미한다. 주류경제학에는 '자발적 실업'이라는 개념이 있어 이를테면 더 나은 일자리를 위해 일시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구직활동을 하는 경우를 말하지만 우리가 보통 '실업'이라고 할 때는 '자발적 실업'개념이 별 유효성을 갖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실업률은 정부 공식 통계로 지난 2월말 현재 3.2%(66만2천명)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수치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3년전인 지난 94년 2월에도 실업률이 3.2%에 달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절적 요인을 감안한 계절조정치를 반영하면 올 2월 실업률은 2.6%라는 것이 통계청의 발표이다.
문제는 현재 '실업문제가 심각하다'고 인식되고 있는 그 내용에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경기순환론의 견지에서 파악하는 경우이다. 현재 한국경제는 불황이고(불황을 부르는 경기침체의 원인에 대해서는 한국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냐 아니냐로까지 이어져 논란이 많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자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 불황은 상당기간 이어질 것이라고 보면서 그 일환으로 '실업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현대 경제는 일국적인 범위에서는 문제설정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전지구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세계경제 사정까지 고려할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 이러한 논지에서 나온다. 정부나 관변 쪽을 비롯하여 자본측에서는 이러한 사고에 더하여 소위 '경제위기론'을 제출하고 있고 '국가경쟁력 강화론'을 소리높이 강조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논지에 따르면 국가경쟁력을 높여서 경제성장률을 높여내면 실업은 감소할 것이라고 가정되어 있다. 그리고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장 핵심적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도록 노동자와 전체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고, 제도적으로는, 노동조합이 그 '공급독점자'로서의 지위를 거의 포기하고 회사에 협조해야 하며(즉 기업이 노조로부터의 규제에서 벗어나도록, 곧 노조는 기업을 규제하는 모든 단체교섭이나 단체행동을 '자제' 해야 하며), 노동시장은 '탄력화'되어야 한다. 지난 3월에 개정된 노동관계법은 이런 맥락에서 노동시장의 '탄력화'(이를테면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시간제 선택근로시간제 등의 입법화) 및 노동조합활동에 관한 규제 조항들의 강화 등 자본측의 요구들을 대폭 수용했던 것이다.
실업과 관련하여 위와 같은 논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자. 한 민간기업 연구소에서는 2월말 현재의 실질적인 실업률이 4.9%이며, 이미 실업자가 1백만명을 넘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 유럽형 만성실업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고, 경쟁력 회복을 위한 산업구조조정이 본격화될 경우 구조적 실업 심화로 실업자가 더욱 증대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주류경제학 논의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하지만, 이 보고서는 국내총생산(GDP)과 실업률을 연계하여, GDP 성장률이 만일 올해 5%로 작년보다 0.6%포인트 낮아지면 14만명이 실직하고, 1.1%포인트 낮아진다면 20만명이, 그리고 2.1%포인트 낮아지면 32만명 가량이 더 실직할 것이라고 추계한다.
이러한 논의들이 노동자들에게 갖는 의미는, 현실적으로 실업위협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장률을 계속 높여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의 의사결정에 전적으로 따라야 하며, 그 때문에 임금인상요구를 자제해야 함은 물론이고 절대로 파업이나 기타 쟁의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면서도 노동자들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높은 노동강도를 감수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실업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또다른 측면에서 파악한다면, 대단히 역설적이게도 위와 같은 논의가 함의하는 내용들 자체가 오히려 실업문제를 더욱 더 심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이를테면 물건 하나 만드는 데 이전에는 1시간이 걸리던 것을 30분으로 줄여서 1시간에 2개의 물건을 생산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 물건 1개를 생산하는 데 든 노동투입량이 1이었다면 이제는 0.5의 노동투입량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생산성을 향상한다는 것은, 향상 이전에는 1의 노동력이 필요했지만 향상 이후에는 0.5의 노동력만이 필요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컨대 100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에 100의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생산성이 2배로 증대한다면 이때 100대의 자동차는 50의 노동력만으로도 생산될 수 있다. 이때 만일 생산의 규모가 2배로 늘어서 200대의 자동차를 생산할 경우는 나머지 50의 노동력도 여전히 그 공장에서 일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한사람이 느끼는 노동강도와 노동밀도는 대폭 높아지겠지만). 그러나 생산규모가 100대로 일정할 경우 50의 노동력은 한마디로 '감원' 대상이다. 생산규모 문제는 시장에서의 제품판매 상황과 연계되지 않을 수 없고, 제품시장 상황은 전세계적인 시장수요와 연계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기업은 '최대이윤'과 '최소비용'을 철칙으로 삼는다. 모든(또는 노동자의 요구를 배제하고난 나머지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기업은 '이윤'을 중심으로 비용을 줄이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건비'를 줄이려고 한다. 감원 유혹은 모든 기업의 생리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실업문제는 실로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질 속에 원천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생산성향상 논리가 노동자들에게 갖는 함의는 실은 이러한 것이다. 좀 단순화시키면 생산성 향상은 감원의 원천이기도 하며, 감원은 비자발적 실업의 대표적 예이다. '정리해고' 입법화(이것은 사용자가 경영상의 이유로 노동자를 집단해고할 수 있게 한 것이다)를 비롯하여 노동시장을 '탄력화'해야 한다는 자본의 요구는 이런 맥락에서 파악이 가능하다.
이렇게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업문제가 예전보다 더욱 심각하게 대두되는 것은 자본의 소위 '신경영전략'에 의한 정규직 감원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중 증대를 통한 노동력 이용방식과 체계에서의 '유연화'추구 경향 때문이다. 흔히 '신자유주의적 공세'로 표현되는 정치와 경제에서의 자본측의 '탄력화' '규제(정부규제 뿐만 아니라 노조로부터의 규제)완화' 공세는 실업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경기순환에 따른 불황이라는 조건이 실업문제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이 와중에서 자본의 요구에 의해 언제든지 노동력을 '정리해고'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됨으로써 그 심각성은 설상가상이 되었다. 지난 12월부터 1월에 걸쳐 계속되었던 노동자총파업이 보여주었듯이, '정리해고'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안은 말할 수 없이 크다. 표면상의 실업률 수치가 주는 위압감 보다는 일하는 사람들이 늘 잠재적 실업자로 간주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사회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총파업으로 이어졌듯이 현재의 정부정책기조와 자본의 논리가 내포하는 사회적 위험성이 바야흐로 노동과 자본의 전면적인 대립으로 표면화되고 있기에 지금의 실업 시대가 더욱 심각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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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4/ 실업의 사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