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이은숙
◎ 작성일:2000.07.31(월)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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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선언
{노동전선} 1998년 9월호. 노동과 경제 (4)
1998년 8월17일 러시아가 일부 국채(GKO)에 대해 지불유예(모라토리움)를 선언하자 전세계 각국의 금융·외환시장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 매스컴에서는 국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저울질하면서 '세계대공황의 시작'을 공공연하게 활자화하고 있다.
러시아는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자본주의국 및 국제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추구해왔다.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대통령직에 있는 옐친은 1992년 12월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을 총리로 기용, 긴축정책 및 사유화(민영화) 등 IMF(국제통화기금)의 제안을 지지하고 일부 이행하면서 그러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체르노미르딘은 1998년 3월 옐친에 의해 돌연 해임되었다가, 모라토리움 선언 직후인 8월22일 5개월만에 다시 총리직에 복귀함으로써, 그가 추진해온 자본주의화의 결과이기도 한 러시아 경제위기의 수습(?)에 다시 종사하게 되었다.
그동안 러시아는 서방 선진자본주의 각국, 특히 유럽 각국의 초국적 자본이 앞다투어 투자하는 신규투자처로서 각광(?)을 받았는데, 이번에 모라토리움을 선언함으로써 민간채권액 304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독일을 비롯하여, 70억 달러의 미국, 69억 달러의 프랑스, 42억 달러의 이탈리아, 35억 달러의 오스트리아, 22억 달러의 네덜란드 등이 우선 채권회수 불능 처지에 놓이게 됐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선언은 우선 이들 채권국들이 채권회수대책 마련을 중심으로 러시아 위기의 세계적 파급을 저지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가운데, 중남미 지역의 주식 및 외환시장을 뒤흔든 데 이어 유럽 각국 및 아시아의 자본시장을 동시에 강타하면서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제위기는 냉전체제 종식 이후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되면서 소위 '개혁'을 추진해온 러시아에 현대 자본주의의 불안정한 경제위기 상황이 덧씌워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러시아의 경제위기는 러시아 일국 차원의 것이 전혀 아닐뿐더러, 본질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난마같이 얽혀 있는 통합구조와 초국적자본에 의해 조장되고 있는 불안정성의 심화 구조 속에서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위기가 전세계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경제 위기도 마찬가지지만, 러시아 국내의 정정불안이라든지 국내경제구조의 문제들은 세계적 차원의 자본축적의 위기가 폭발하는 시점과 계기에 대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80년대 중남미의 외채위기 이후 90년대 중반에 벌어진 전례 없는 아시아 각국에서의 금융·외환위기 과정이 보여주었듯이, 현대의 세계경제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언제건 위기를 표면화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는 어느 나라건 세계자본주의의 불안정한 위기의 폭발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70년대 중후반부터 과잉축적(과잉생산)으로 인한 구조적 위기상태에 놓여 있는 세계자본주의가 80년대 이래 그들의 '위기극복' 프로그램으로서 채택한 '신자유주의전략'이 '위기극복'이 아니라 '위기심화'의 길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러시아가 명시적으로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어온 지난 7~8년 여 동안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의 담지체로서 IMF는 러시아 '개혁'에 깊이 간여해 왔다.
그런데, 러시아라고 하는 국가는 여느 자본주의 나라들과는 달리 비자본주의적 길을 걸어온 곳으로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이를테면 '새로운' 시장에 해당된다. 그러나 아직 자본주의적 메카니즘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잠재적' 시장이다. 그러니까 세계자본주의 각국으로 볼 때는 '개발해서 확보해야 할', 그렇지만 대단히 먹음직스러운 미개척지가 아닐 수 없는 곳이다. 요컨대, 자본축적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해줄 이윤율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세계자본주의의 상황, 즉 과잉축적의 심화에 따른 이윤압박과 이윤실현을 위한 시장확대가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말하자면 과잉자본의 새로운 투자(투기)처이자 가까운 미래에 이윤확보를 보장해줄 것 같은 곳이기도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러시아가 순탄하게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어가서 현대 자본주의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구조적 위기(공황)를 완화시켜 줄 하나의 상쇄요인으로서 작용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한 길을 걸어가게 하기 위해 미국을 위시한 선진 자본주의 각국과 그 수족으로서의 IMF 및 세계은행은 러시아에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인데, 이러한 사정들도 있어서 작년부터 몰아친 아시아지역의 경제위기가 러시아에 상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원에 러시아를 지원할 때 IMF는 아시아 각 나라와는 달리 별다른 이행조건을 달지 않았다. 그렇지만 IMF 및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 은행들이 러시아의 '개혁'방향으로 제시하고 정치/경제 및 기타 다양한 방법으로 압력을 행사하면서 자본관계의 확산과 소위 러시아의 '연착륙'을 유도한 기본방향은 말할 것도 없이 '신자유주의'이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선언은 우선, 올 들어서만 가장 최근에 러시아에 50억달러를 퍼부으면서 아시아 경제위기의 러시아 상륙을 막아보려 했던 IMF의 지원노력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아시아지역의 경제위기가 러시아로 상륙한 것이다. 5개월동안의 세르게이 키리옌코 총리 내각이 러시아의 루블화 방어를 위해 집중적으로 자금을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국적 자본은 러시아에서의 자금회수 압력을 거두지 않았다. 올들어 특히 옐친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제기된 가운데 건강악화설과 200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권력쟁탈전 조짐 등을 서방 국가들은 '정정불안'으로 파악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에의 투자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회의의 근저에는 러시아가 자본주의 세계의 요구에 조응한 정치체제 및 경제체제를 안착시켜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는, 세계자본주의 자체의 불안정성이 아시아지역의 위기와 일본의 경제상황 악화로 인하여 자체적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었던 점이 '한가로이' '잠재'시장인 러시아의 '연착륙'을 기대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80여년 동안의 비자본주의길을 걸어오다가 자본주의의 실험을 시작한 러시아의 경제위기는, 이제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크게 위협하는, 자본주의 '내부'의 문제가 되어 있다. 러시아 모라토리움 선언 이후 약 2주간에 걸쳐, 베네수엘라,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각국의 주가와 통화가치가 일제히 폭락했고, 이러한 중남미 시장의 혼란상황은 독일 영국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주요국과 일본의 주식가 폭락으로 이어졌다.
미국에는 역영향이 가속화하고 있다. 관측자들은 미국의 상황을 "딜렘마"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전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투자처는 미국 뿐"이고, 그래서 국제 유동성 투기자본들이 미국으로 밀려들고 있는데, 이로 인해 미국의 채권수익률이 대폭 떨어지고 있어(최근 미국 재무부가 발행한 30년 만기 채권수익률이 최하 5.39%까지 인하) 미국 국내금리(연 5.5%)보다 낮아져버리게 되었고, 국제자금이 미국으로 몰리는 상황이 더욱 심화되므로 금리인하 압력이 높아지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유일한 호황국으로서 남아있는 미국으로서는 당장에 금리인하를 단행할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의 여파로 전세계 주가가 동시폭락사태를 빚어낼 때 유일하게 미국채만 영향을 받지 않고 강세를 유지했는데, 그것은 일본의 엔화와 독일의 마르크화의 추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확대재생산"을 의미한다는 자본측 자체적인 진단이 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러시아의 경제위기가 수습될 것인지, 아니면 전세계적인 공황이 아시아에서부터 시작해서 중남미를 거쳐 유럽과 일본으로 확산되고 끝내는 미국이 더 이상 버팀목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주저않는 세계공황의 행진곡의 한 소절인지에 대해서는 지금시점에서 아무도 속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에서 자본주의는 비등점을 넘어서 끓어 넘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 할 것이다. 그 위기의 본질적인 측면은 자본주의에 구조적인 '과잉축적' 경향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그리고 그것을 노동자와 민중의 배제를 통한 자본축적조건의 재구성을 통해 해소해나가려고 하는 현대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전략이고, 러시아는 이러한 세계자본주의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감하게'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자체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5개월만에 복귀한 체르노미르딘 총리의 경제정책은 지금까지 언표된 바에 따른다면 명백하게 신자유주의적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적 금융자본의 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의 골간을 짜고 그 정책을 실행해 왔던 체르노미르딘 총리가 급격하게 러시아 경제정책방향을 수정하리라는 기대는 성급하다. 그렇지만, '계획경제로의 복귀 가능성'도 일부 매스컴이 '우려'로서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 국내의 계급관계, 그리고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90년대 이래의 '개혁'방향이 전격 수정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국내의 계급 힘관계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한 방향타 수정은 그러나, 미국 및 독일을 위시한 국제 금융자본의 움직임을 포함하여 초국적자본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전세계적인 자본의 신자유주의 전략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과 대치까지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러시아의 위기에 대한 초국적 자본 및 미국 등 서방 선진자본주의 제국의 대응은 자못 아시아 혹은 중남미에 대한 대처에 비해 무게감이 더해질 수 있다. 더욱이 세계대공황에 대한 우려가 날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 시점에서 터진 러시아의 모라토리움선언과 경제위기는 아시아의 위기가 세계대공황의 시작이었다는 관측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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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9/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선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