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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1
2006-07-27 21:06:32
박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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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철학이여 내려오게나!][10]
천상(天上)의 철학에서 지상(地上)의 철학으로 2.

- 생명의 지속성을 향하여-

박종성

  생명은 자기 보존적이며 자기 재생산적이다. 생명이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체가 연속적 운동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존이 불가능하며 더 이상 생명체이기를 그치기 때문이다. 이는 사유 속에서의 명백함이 아니라 물질적 존재로서의 명백함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여러 기능을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를 테면 노동할 수 있는 기능을 위한 휴식의 시간을 자신이 조절 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추상적인 얘기로 들리지 않기 위해 땅으로 내려와 보자.
  이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일반적으로 생존 그 자체를 위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자본가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적 특성인 지속 가능성과 어떤 관계로 설정되고 있는가? 생명의 지속을 위해  자신이 조절하는가, 아니면 외부적 강제에 의해 생명의 점차적으로 죽어가면서 생존이 가능한가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사회에서 생명의 지속은 외부적 강제의 틀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생명체 자신의 본연의 모습은 일그러진 형상으로 질식당하고 있다. 따라서 생명의 지속성은 자발적이지 못하고 강제적 조건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이 ‘강제’노동이기 때문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계약으로 은폐된 노동, 바로 강제노동 속에서 마치 자발성을 갖는 듯한 노동 또는 능동적 노동인양 취급되는 노동이다. 노동의 강제성은 이미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잉여가치의 비밀을 풀기위한 작업 속에 등장하고 있는 ‘노동력’ 개념에 함축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노동력 개념에는 지배와 강제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어서 단순한 의미를 넘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다.
  자신의 기능을 조절할 수 없는 것, 즉 강제 노동이라는 외부적 힘에 의해 노동하는 인간의 내면을 역으로 통제하고 지배하는 힘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이미 생명의 특성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한다.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의 지속을 위해 조절 능력을 자신으로부터 상실하고 외부의 조건에 의해 강제적으로 역작용당할 때 드러나는 종착역은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다. 조절 능력의 상실은 우리로 하여금 더 낮은 인간으로, 단순히 먹고사는 인간으로 전락시킬 것을 강요한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이율배반적 행위는 가치의 잣대에 의해 사용가치를 양화시키는 문제, 즉 질적인 것을 양적으로 것으로 환원시키는 문제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인간의 내면으로부터의 조절은 이렇듯 양적인 것, 외부적인 것에 의해 모두 환원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적 환원은 동시에 궁극적으로 생명체로서가 아니라 사물로서, 잉여가치의 수단으로서 취급하고 그 이유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의 집중을 그 전제로 이루어진다.
  자유계약이라는 틀 속에 은폐된 강제 노동이라는 조건 하에서 인간의 내면은 마치 양적으로 것으로 측정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잴 수 없는 것을 마치 잴 수 있다고 하며 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량화에는 생명의 지속이 없다. 이를테면, 노동력의 판매와 그 교환 속에는 생명체의 지속을 위한 노동력의 회복이 고려되고 있지 못하다. 자기 보존과 재생산을 위한 노동력의 회복, 다양한 문화적 욕구의 충족을 위한 활동의 시간 등등. 따라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생명의 지속에 대한 사고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간은 자발성을 결여한 인간, 자기 조절 능력을 상실한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의 지속을 위해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이다.
  앞서 우리는 노동력 개념이 사회적․정치적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좀더 밀고 나가 보자. 언급한 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노동력의 판대, 곧 ‘지출’은 계약에 의해 은폐된 ‘강제’이다. 여기서 문제는 생명체의 지속을 위해서는 생명체의 에너지의 지출, 즉 노동력의 지출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갖는 의미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생산 활동은 인간 노동력의 ‘지출’을 전제로 하며, 이 지출은 ‘사회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노동력의 지출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의미한다. 이때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노동력의 지출은 사회적 필요 시간을 의미하고 이는 곧 사회적으로 조절된 지출의 시간이다. 따라서 여기서 노동력의 지출은 사회적 조절원리를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노동력 지출은 지출에 대한 사회적 강제라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노동력의 지출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인데 , 이때, 노동력 지출이라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시간은(계급투쟁 속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의미를 넘어 계급관계로 확장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노동력 지출은 노동력에 대한 사회적 강제의 의미, 그리고 노동력 지출이 사회적으로 강제된 것이며 사회적으로 조절된다는 것은 계급관계를 의미하므로 노동력 지출이 담고 있는 의미는 정치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생산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자본가는 노동력을 소비해야만 한다. 이렇게 볼 때,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는 노동력 지출의 노동력 소비로의 전화이다. 노동력의 지출의 주체는 노동자이지만, 노동력 소비의 주체는 자본가이다. 이제 노동력 지출의 의미는 노동력 소비로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소비할 때 노동과정 전체에 대한 결합과 노동과정 전체에 대한 감독이라는 착취의 기능이 통일되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는 생산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 속에서 기능하고 있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소비할 때 그들이 규정하는 생산의 목적은 오직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성 없는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력의 지출에 대해 노동력의 회복을 사고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자본주의 사회라는 생명체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노동력의 지출은 노동자라는 생명의 비지속성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최대한의 잉여가치의 생산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 상응하는 노동자 계급의 저항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이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자본가에 대한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전면적이 계급의 대립 속에서 자본가 계급은 자신을 끊임없이 지도적 계급으로서 확립하고 유지, 발전하려한다. 이를 위해 자본가 계급은 노동에 대한 이유를 만들어 내며 노동의 사회적 목적을 사회의 보편적 이해로 둔갑시킨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의 목적은 노동력 지출의 주체들의 내부에서 자발적, 능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체 바깥에서 주어진다. 그것도 강제적으로 주어진다. 즉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목적론은 잉여가치라는 자신들의 형상이 노동자라는 생명체의 바깥에서 강제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렇듯 21세기의 자본주의 목적론은 형상이 물질을 지배하듯이 고대 목적론과 같은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
  소수의 이해가 보편적 이해로 둔갑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노동에 대한 사랑이다. 이렇게 노동에 신성한 후광을 덧씌우는 작업은 자본가 계급에게는 자신의 지도적 계급으로 군림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지독한 거짓말이지만 노동자에게는 물질적 이데올로기로서 생명을 위협하는 칼로 돌아온다. 이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에 대한 열정 속에서, 노동에 대한 사랑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생명 그 자체의 온전한 지속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자신의 생명이 위협당하고 순간, 순간 생명의 지속을 상실할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분명한 것은 이 사회에서 자본주의라는 생명체 유지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생명체로서의 노동자들은,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그 생명 자체가 기형화되거나 생명 자체의 비지속을 희생의 제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자본가에게는 화려한 꽃향기로 후각을 자극하는 노동에 대한 사랑은 오히려 이미 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의 썩어빠진 상처를 맡으며 살아가라는 고약한 냄새에 불과하다.

양윤순 (2006-07-29 11:14:43)

고마워요 세미나후 다시 혼자 정리해가며 글을 읽고 있어 거든요 많은 도움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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