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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번호 1020번 등록일 1970-01-01 04:58:58
글쓴이 정병기 글쓴곳  
발행호수 64   분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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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국제 공산주의 운동

국/제/노/동



국제 공산주의 운동사



정 병 기/연구부위원장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과 이념을 주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 일컫는다. 이 두 개념은 보는 이에 따라 정의와 구분을 달리해 왔거니와 사민주의 개념이 현실 정치무대에서 비중을 더해가면서 한층 더 복잡다단해졌다.

그럼에도 운동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개념들의 구분은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활동가와 노동자들의 운동을 올바로 해석 또는 비판하거나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고 결행하는 가운데 정립되어 왔다. 운동사를 충분히 천착한다면 이 개념들의 정의와 변천 과정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사의 실천적 측면을 제한된 지면에서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념의 정의와 구분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 운동사를 국제적 흐름과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이 글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개념 변천사와 국제 공산주의 운동사로 나누어 서술된다. 끝으로 결론을 대신해서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위한 제언이 곁들여진다.


1.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사적 소유에 기반하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원리인 개인주의를 대체하여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관리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건설하려는 사상이나 그 질서의 원리를 의미한다. 이 개념의 기원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경우 182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나 이설이 많은 가운데 대개 1926년경까지 정착되었다고 본다(두산동아대백과).

그러나 일반적 개념으로 총괄되는 사회주의 사상의 조류는 19세기 이후만 보더라도 200여 종에 달하여, 때로는 매우 상이한 전략과 전술을 내포하기도 했으며 구체적인 이상사회에 대해서도 다소 차이를 보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공산주의라는 개념과의 구분도 이루어지지 않아 두 개념은 흔히 혼용되곤 했다.

공산주의가 과학적 용어로 정의된 것은 맑스와 엥겔스의 ꡔ공산당 선언ꡕ(1848)에 와서 가능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스스로를 사회주의자와 구별하여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이는 자신들의 과학적․혁명적 사회주의를 당시의 공상적 사회주의나 개량적 사회주의와 구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후 공산주의는 주로 맑스주의와 동의어로 쓰이게 되었다.

맑스주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를 전복한 후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부르주아 계급을 소멸시켜 사회가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하면,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가 되는”(Marx and Engels, 1848, p.482) 완전한 자유와 평등의 무계급사회 곧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한다. 이 때 보다 높은 단계의 사회가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이며, 자본주의 전복 후 이 사회에 도달하기까지의 과도기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필요한데 이 시기가 곧 공산주의 제1단계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개념 구분에 대한 또 한번의 변화는 바로 공산주의의 양 시기와 관련된 레닌의 정의에서 비롯되었다. 즉 레닌은 러시아 혁명을 전후해 맑스의 공산주의 제1단계를 사회주의로 칭함으로써 사회주의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등치시킨 것이다.1)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개념 구분은 공산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 칭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개량성과 관념성에 대한 대응으로서 온전한 사회주의 사상의 실천을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이러한 면에서 맑스와 엥겔스에게 있어 공산주의는 적어도 개념적 차원에서 사회주의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2) 반면 레닌의 새로운 정의에서 사회주의는 아디까지나 최종단계인 공산주의보다 한층 낮은 단계의 사회 이념으로서 과도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결국 맑스와 엥겔스를 거쳐 레닌에 이르러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엄격한 개념 구분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개념 구분의 마지막 단계는 레닌에 이르러 사회주의로부터 확연히 차별화된 공산주의에 대한 구 사회주의 세력들의 대응에서 촉발되었다. 1923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intern)에 대항해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당, 사민당, 노동당들은 사회민주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을 창설하고 공산주의와 대치되는 사회주의 노선을 정립하기 시작하여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로 재건설한 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확립한 것이다. 이들의 사회주의는 점진적 개혁주의와 의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노동자들의 민주적 권리의 신장과 복지국가 실현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1970년대 서유럽의 유로코뮤니즘 일부와 1980년대 말 이후 동유럽의 탈공산주의의 일부도 현재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서유럽 사민주의자들과 동일한 사회주의 이념을 갖게 되었다.


2. 국제 공산주의 운동사3)

1) 공상적 사회주의

공상적 사회주의란 사회주의 운동사의 초반기에 나타난 모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운동의 이념들을 말한다. 이 시기는 대개 18세기 프랑스 혁명부터 1848년 혁명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맑스와 엥겔스의 ꡔ공산당 선언ꡕ이 1848년에 나온 것도 이 시기 구분과 무관하지 않다.

공상적 사회주의의 이념적 토대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16세기 중엽 모어와 캄파넬라에서 비롯되었다. ‘공상적 사회주의’라는 말 자체가 모어(Th. More, 1478~1535)의 ꡔ유토피아ꡕ에서 유래하는데, 이 저작을 통해 모어는 당시 태동단계에서도 자본주의가 인민들에게 결코 희망일 수 없으며, 그 근본적 원인이 사적 소유에 기반하는 것임을 파악했다. 모어가 추구하는 인간의 평등과 정의 및 발전은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공동소유와 공동노동에 기초한 이상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사회개혁론자 캄파넬라(T. Campanella, 1568~1639)도 과학을 중심으로 하기는 하나 자신의 저작 ꡔ태양의 도시ꡕ에서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한 공상적 이상사회를 그렸다.

이후 공상적 사회주의는 18세기 프랑스의 멜리에와 마블리에 의해 이론적으로 발전하여 19세기 생시몽, 푸리에, 오웬에 의해 하나의 사회사상적 조류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멜리에(J. Meslier, 1664~1729)는 비록 미래사회의 윤곽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봉건적 착취와 교회의 폐단을 공격하며 혁명적 전복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마블리(G. B. Mably, 1709~1785) 또한 사적 소유가 폐지된 후에야 모든 인간들의 행복한 삶이 보장될 수 있음을 강조하며 인민들의 혁명 수행 의무를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한편 이러한 공상적 사회주의를 토대로 바베프(G. Babeuf, 1760~1797)는 프랑스 혁명 후 처음으로 공산주의 혁명을 시도하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했다. 18세기 이후는 노동계급의 자연발생적인 저항이 촉발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노동계급의 이러한 열망과 투쟁의 영향으로 공상적 사회주의는 이론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실천적 측면을 함께 강조하는 한편 실천적 이론가들이 실제 등장하기 시작했다. ‘공상적 사회주의’가 사회사상적 조류로 자리잡은 시기가 바로 이때이며, 그에 따라 이 시기의 사상가인 생시몽, 푸리에, 오웬을 공상적 사회주의의 대변자로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자본주의 사적 소유의 모순을 파악하고 공동소유와 계획경제의 수립 등 매우 혁명적인 목표를 제시하면서 오웬의 경우처럼 노동자계급운동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자로서 이들은 공히 임금노동이나 계급적 본질의 문제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한계를 가졌다.


2) 제1인터내셔널(1864~1872)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기계파괴운동에 매몰되었던 초기 노동운동의 한계를 극복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프랑스혁명 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자본주의 자체의 극복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생겨나고, 이는 유럽 각 국의 혁명적 소그룹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공상적 사회주의 운동이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과학적 사회주의가 등장한 이후 적지 않은 노동운동 그룹들은 이 새로운 조류와 결합해 가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의 계급적 운동이 발전해 갔다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는 그러나 반동의 물결 또한 국제적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노동자의 단결 역시 국제적 수준으로 발전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국제노동자협회(IWA)라는 제1인터내셔널이 성립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1인터내셔널의 선구적 조직은 1844년 영국의 투사와 유럽망명자그룹이 조직한 우애민주주의자협회, 1855년 런던에서 조직된 국제저항위원회 등이다. 맑스가 과학적 사회주의에 입각해 주도했던 ‘공산주의자 동맹’이 제1인터내셔널 창립 조직들의 선두에 있었다고는 하나, 제2인터내셔널에 비해 맑스의 역할은 아직 한정된 수준에 머물렀다.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은 1862년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독일, 영국, 프랑스 노동자들의 토의의 결과였다. 그후 영국 노동조합지도자 조지 오저를 의장으로 하는 총무위원회(제1인터내셔널 창립준비위원회의 역할)가 성립되어 1865/66년 제1인터내셔널 준비회의인 런던회의를 주도하였다. 런던회의는 맑스와 프루동주의자간의 견해차가 뚜렷이 드러난 회의였는데, 이후 1866년 제1차 대회인 제네바 대회를 거치면서 제1인터내셔널은 맑스와 동시대 활동가들로서 역시 공상적 전통을 이어받은 바쿠닌, 블랑키, 프루동, 그중에서도 프루동과 과학적 사회주의자들간의 갈등의 장이 되었다. 2차 대회와 3차 대회에서는 맑스가 참석하지 못한 가운데 프루동주의자들의 주장이 관철된 시기였다.

프랑스 노동운동에 특히 커다란 영향을 미친 프루동주의는 근대 무정부주의의 아버지로서 ‘아나키(anarchy)’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조셉 프루동(P. J. Proudhon, 1809~1865)의 이념을 말한다. 프루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의 빈곤을 자본제적 계급관계의 산물인 가치법칙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노동자의 빈곤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모순들은 이상적 관념과 실제적 현실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발생하는 것, 곧 가치법칙이 ‘비이성적으로 적용된 결과물’이다. 프루동은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양하기 위해 ‘자유로운 상호부조조합’을 설립하고 이 조합들이 점진적인 ‘경제적 수단’으로 국가와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프루동주의자와 맑스주의자들간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제1인터내셔널에 의한 노동운동의 국제적 확장은 가히 괄목상대할 만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초기에는 냉소적이었던 바쿠닌주의자들도 1869년 바젤에서 열린 제4차 대회에서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하게 되었다. 프루동주의자들이 1년전인 1868년 제3차 대회 이후 영향력을 상실해 간 것과 달리 4차 대회 이후부터는 총평의회를 장악한 맑스주의자들에 대한 바쿠닌주의자들의 도전이 거세어졌다. 이러한 새로운 갈등은 특히 상속권 문제를 둘러싸고 첨예해졌는데, 바쿠닌주의자들은 상속권의 폐지가 곧 자본주의 철폐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론적 허점에도 불구하고 바쿠닌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둘러싼 표대결에서 승리하여 이후 인터내셔널에서 세력을 신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 극좌 프루동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파리코뮨을 중심으로 한 블랑키주의가 당시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도 대단했다. 블랑키주의는 1830년부터 1871년 파리코뮨까지 프랑스 노동자들의 중요한 지도자였던 오귀스트 블랑키(L. A. Blanqui, 1805~1881)의 주요 정치이론을 일컫는다. 블랑키는 맑스도 그 실천지향적 측면을 높이 평가한 것처럼 ‘4계절회’라는 비밀결사를 통해 혁명적 봉기에 일생을 바친 정열적 혁명가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논리구조를 극복하지 못하고 보통선거권마저 부인하는 등 혁명을 소수의 엘리트집단에 의한 봉기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이론적 미비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차원에서 자발적 노동운동을 주도해왔던 블랑키주의는 극좌 프루동주의와 더불어 파리코뮨 이후 세력을 확대해 갔다. 결국 제1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마저 블랑키주의에 의해 장악될 가능성이 커졌다.

제1인터내셔널내의 분파적 갈등은 비단 이들간의 삼파전만은 아니었다. 내부갈등의 결과 바쿠닌주의자들은 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되어 독자적인 활동으로 전환해 갔지만, 미국의 노동운동과 결합하고자 미국으로 옮겨진 인터내셔널은 독일 사민주의의 모태인 라쌀주의자들의 가입으로 분열이 한층 더 격화되었고, 제1인터내셔널은 결국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해산을 결의하였다.


3) 제2인터내셔널(1889~1914)

제1인터내셔널 해산의 사회․정치적 배경에서 탄생한 제2인터내셔널은 처음부터 약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갈등과 분열의 경험은 역으로 반영되어 단결에 지나치게 치중함으로써 사상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단결은 형식적 통합에 불과하여 제2인터내셔널은 제1인터내셔널과 달리 창립대회에서 강령과 규약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도 ‘메이 데이’를 국제노동일로 정하고 그 행사로서 가두시위를 전개한 성과는 있었다.

제2인터셔널의 사상적 배경은 엥겔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에 따라 맑스주의자가 수적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그렇지만 형식적 통합의 성격으로 인해 기존의 분파들이 맑스주의라는 대의 아래 느슨하게 결합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잔존해 있었으며, 주도적 분파 내에서조차 수정주의자들의 도전이 시작되었고 이론과 실천의 불일치까지 노정하였다.

국가주의자적 블랑키스트, 생디칼리즘적 바쿠닌주의자, 무정부주의적 프루동주의자, 러시아 농민사회주의자 일파, 영국과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일파와 맑스주의자 등, 7개 분파가 제2인터내셔널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중 독일사회민주당이 주도권을 장악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모순적 성격은 엥겔스의 실천적 지도를 받기도 했으나 근본적으로 라쌀(F. Lassalle)의 국가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 수정주의를 선택하게 된 독일사회민주당의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1891년 독일사회민주당의 ‘에어푸르트 강령’은 전반부에서 사회주의 혁명성을 명시하지만, 구체적인 행동강령에서는 베른슈타인이 작성한 자유주의적․개량주의적인 국가주의적 요구를 담고 있었다.

독일사회민주당 내 수정주의 논쟁과 더불어 제2인터내셔널의 분열과 해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반제국주의 전쟁’의 문제였다. 1914년 1차대전에 직면하여 독일사민당은 ‘조국방어’라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자국의 전쟁정책에 협력하였다. 이후 독일사민당의 분열은 사분오열의 양상을 보여, 급기야 당내 좌파들도 브레멘좌파, 직공혁명단 및 이후 독일공산당으로 발전해간 스파르타쿠스단으로 분열․분리해 나간다. 전쟁 수행을 위한 연립정부에까지 참가한 수정주의 주도의 독일사민당은 공산주의자 탄압에도 한 몫 하게 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의 해산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막상 1차대전이 발발하자 각국의 사회당, 노동당, 사민당의 이름을 가진 사회주의 정당들은 자국의 전쟁과 ‘조국방어’에 협력해 감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결국 전쟁 발발과 함께 해체되었다.

4)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1919~1943)

1917년 러시아혁명은 맑스 이래의 프롤레타리아 혁명투쟁의 이론적․실천적 성과물로서 국제노동운동과 공산주의 혁명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제1, 제2인터내셔널로 대표되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전선도 새로운 자기전망을 가지고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받았다. 전쟁을 앞두고 민족주의적 기회주의 입장으로 변질해간 제2인터내셔널 주도세력에 반대해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하자는 러시아 볼셰비키와 각국 사회민주당 좌파를 중심으로 1915년 짐머발트회의와 1916년 칸달회의를 거쳐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intern)이 창설된 것이다. 30개국 대표 51명이 참석한 창립대회는 공산주의 세계당조직에 의한 ‘공산주의 세력의 결속’과 혁명기치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소비에트 혁명을 천명하여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대원칙을 수립하였다.

코민테른은 제2인터내셔널의 경험에 대한 반작용으로 좌우기회주의 분파의 배제를 목적으로 하는 만큼 강력한 중앙집권적 가입조항을 채택하고 공산당 주도의 ‘노농동맹강화’ 그리고 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의 결합을 핵심적인 사업방향으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기본노선은 물론 소련의 사정과 국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임무가 추가되기도 하고 노선 전환을 겪기도 하였다.

일차적 변화는 1920년대 초반 소련의 신경제정책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량축적과 대중 획득에 중심을 두는 새로운 임무로 ‘노동계급 통일전선’이 추가된 것이었다. 이후 이 새로운 임무는 독일공산당 지부의 강령을 받아들여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가장 유리한 정치적 조건을 창출한다는 ‘노동자정부’론도 승인하였다. 그러나 1923년 작센과 튀링엔의 노동자 정부가 궤멸되자 ‘노동자정부’론은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에 따라 코민테른은 노동조합 운동의 전술인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통일전선도 전선의 저변을 확대했다기보다 사회민주당을 ‘부르주아 제3당, 파시즘의 일익’이라 규정하여 배제시키는 좌편향과 협애화를 초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경제공황에 따른 파시즘의 대두가 급류를 타게 되자 코민테른의 통일전선전술은 독일에서의 좌편향과 달리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는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형태로 사회당과 제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소련이외의 세계는 아직 ‘비혁명적’ 조건에 처해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 결과 1937년 제7차 대회 이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각국의 구체적 조건과 특수사정에 기초’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독․소불가침 협정으로 반파시즘 전선이 약화되기도 하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후에는 다시 ‘반파쇼전선’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이는 코민테른의 해산과 직결되는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국제적 대응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헤게모니를 확고히 한다는 노선으로 출발한 코민테른은 또 다른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을 앞두고 비공산주의 세력과의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계기로 재차 인터내셔널을 해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파시즘 세력에 대한 범동맹을 추구하면서 1943년 집행위원회는 해산을 결정한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완성과 파시즘에 대한 대응이라는 국제적 명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코민테른이 국제주의적 이념을 포기하고 특히 스탈린 시대에 와서는 소련의 국가이익을 옹호하는 외교적 도구로 전락하였다는 비판의 소지가 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다른 한편으로 각국의 사회당, 사민당, 노동당들이 전시에 소멸한 제2인터내셔널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부활시키는 동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5) 유로코뮤니즘

유로코뮤니즘은 1970년대 중반이후 소련 공산당에 대한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공산당들의 독자적인 노선을 칭하는 말이다. 이 용어는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바르비에리(F. Barbieri)가 1975년 말 죠르날레 누오보(Giornale Nuovo)에 처음 사용한 후 회자되게 되었다(배한동, 1987, p.9). 이후 서유럽 공산주의를 관통하는 통일적인 노선과 이념을 통해 학술적 용어로 정립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유로코뮤니즘 자체가 1970년대 생성기의 붐 이후에는 지속적인 조류를 형성하지 못함으로써 하나의 뚜렷한 개념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따라서 유로코뮤니즘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의 공산당들이 당시에 추구했던 국내외 정책들을 통칭하는 말로 이해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유로코뮤니즘의 대두와 성장은 일차적으로 소련의 체코 침공과 당시 3개국 공산당의 지지율 확대를 배경으로 했다. 1976년 이탈리아공산당(PCI)은 사상 최대의 득표율인 34.4%의 지지율을 획득했고, 1978년 프랑스공산당(PCF)은 20.9%의 득표를 통해 제3당으로 부상하였으며, 스페인공산당(PCE) 역시 1977년 합법화된지 1개월만에 9.4%의 지지율을 획득한 것이었다(배한동 1987, p.10).4)

이러한 성공이 대소련 독자노선이라는 일정한 정책변화를 동반하면서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정당들의 독자노선은 선거를 겨냥한 이른바 ‘선거사회주의’로의 전환은 아니었다. 이들의 독자노선과 약진은 한편으로 소련의 대외정책변화와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Timmermann, 1978, pp.21~23),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일정한 변화가 당시 68운동의 사회적 분위기와도 맞물림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5) 공산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로코뮤니즘 정당들은 여전히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정당이었던 것이다.

유로코뮤니즘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이념은 민족적, 의회주의적 공산주의 사상이다. 유로코뮤니스트 정당들은 소련의 대외정책에서 소련의 국가이익 추구를 보았으며, 동구권의 현실사회주의에서 더 이상 혁명의 범례를 추구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Timmermann, 1978, pp.21~23). 이탈리아 공산당을 선두로 이 정당들은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과 그에 따른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정당으로 잔존하게 되기는 했으나, 유로코뮤니스트 정당들은 구체적 집권전략에서 사민주의 정당들과의 차별성을 명확히 하는데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탈리아 공산당이 ‘공산주의’ 이념을 당명과 강령에서 삭제하고 사회주의 인터내셔날(SI)에 가입하게 된 것은 이러한 역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3.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위한 제언

동구의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한 후 공산주의 운동 진영의 변화는 가히 지각변동에 비유할만하다. 대부분의 이른바 ‘탈공산주의 정당’들이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서구 공산당들의 많은 부분도 사민주의화를 가속해가고 있다. 그것은 서구 사회에서의 혁명적 사회전환에 대한 회의와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관료성에 따른 ‘민주주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및 사민주의와의 차별성 확립의 노정을 밟아온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부침도 코민테른에 이르러서는 소련 공산당의 대외정책에 함몰됨으로써 국제무대의 민주성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회자되고 있는 ‘민주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관료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시된 절차적 의미에 한정된 듯 하다. 일견 절차상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 하더라도 한 사회의 지배구조와 작동방식이 궁극적으로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실질적 민주주의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실질적 민주주의를 담보하지 못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그 자체로 이미 절차적 민주주의라 할 수 없다. 수단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적합할 때 수단을 바꾸는 것처럼 실질적 민주주의를 담보하지 못하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현대의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는 이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담고 이를 합리화하는 자본주의의 한 담론에 불과하다.

공산당들의 사민주의화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의 관료주의가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를 구현하는 방법이 되지 못하였다고 공산주의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절차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발전과 전체의 행복이 조화를 이루는 공산주의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임을 의심하고 포기하기보다 새로운 절차와 수단을 강구할 것이 요구된다. 일국의 혁명뿐만 아니라 세계의 혁명을 위해서도 공산주의 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추구한 인터내셔널의 경험을 거울삼아 새로운 시도가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재건공산당을 비롯한 여타 좌파 정치그룹들이 공산주의 사회의 구현을 목표로 지속적으로 활동하거나 지지도를 높여 가는 가운데 유럽과 세계에서 새로운 연대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한/노/정/연



》참고문헌《


두산동아대백과.

배한동(1987), ꡔ유로코뮤니즘 연구ꡕ, 서울: 형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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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필․윤용탁․진덕규(1997), ꡔ유럽 맑스주의의 전개ꡕ,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상분과(1989), ꡔ사회주의의 이론과 운동ꡕ, 서울: 한길사.

Carrillo, Santiago(1977), Eurokommunismus und Staat, Hamburg and Berlin: VSA.

Hudelson, Richard H.(1993), The Rise and Fall of Communism Boulder, San Francisco and Oxford: Westview Press.

Marx, Karl and Friedrich Engels(1848),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Marx Engels Werke, 4(1972), 459~493. Berlin: Dietz Verlag.

Timmermann, Heinz(1978), “Eurokommunismus im Wandel”, Heinz Timmermann, ed., Eurokommunismus: Fakten-Analysen-Interviews, 15~64. Frankfurt a. M.: Fischer Verlag.


1) 레닌이 이러한 등치를 통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과도기임을 거부했다는 비판은 온당치 못하다. 만일 이 비판이 옳다면, 레닌이 맑스가 말한 ‘완전한 공산주의 사회’를 거부하고 사회주의=공산주의라는 정식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기를 완전한 공산주의와도 등치시켰다는 논리의 비약이 따를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볼셰비키 정권을 관료독재로 매도하고 레닌이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였다는 비난성 비판에 불과하다.


2) 그러나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극복이후 실험될 여러 유형들 중 하나의 사회주의라는 의미는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는 어디까지나 필연적으로 도래할 새로운 사회질서이자 생산양식으로서 그 자체로 ‘온전한 사회주의’로 표현되는 것이다.


3) 유로코뮤니즘을 제외한 절의 사실 관계들은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상분과의 ꡔ사회주의의 이론과 운동ꡕ, Hudelson의 The Rise and Fall of Communism을 주로 참조함.


4) 물론 유로코뮤니즘과 관련하여 3개국 공산당들의 일정한 차이는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유연성이 그람시와 톨리아티의 전략에서 시작되었다면 스페인 공산당의 노선변화는 카릴로의 노력에서 찾을 수 있다(Carrillo, 1977). 반면 유로코뮤니즘에 가장 늦게 결합한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는 소련의 동구권 침공 이후까지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친소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안병영, 1982).


5) 68혁명 이후 선진국에서의 혁명 가능성을 재평가하기 시작한 트로츠키의 관점은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시사를 던진다(이용필 외, 1997, pp.5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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