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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번호 1193번 등록일 2001-11-10 00:00:00
글쓴이 김종학 글쓴곳  
발행호수 71   분야 7  
첨부파일 특집(비정규직노동자).hwp - 46 KB
제  목 린나이코리아 비정규직노동조합

기획연재: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

린나이코리아 비정규직노동조합


이번 호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라는 제목의 기획연재를 싣습니다. 스스로 일어나 투쟁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삶의 힘겨움을 알릴 수조차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얘기들을 실음으로써 많은 동지들이 좀 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린나이코리아 비정규직노동조합의 김종학 수석부위원장을 전주희 연구원이 만나고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랫동안 투쟁하고 계시느라 수고 많으십니다. 부위원장님은 언제 입사하셨어요?

저는 정규직에서 전환된 케이스로 85년 현장직으로 입사해서 현장근무를 하다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영향을 받아 90년대에 현장에서 노조를 설립했습니다. 상집간부로 활동하다가 사무국장하면서 전임을 3년간 했구요. 그 후 위원장 선거를 했는데 우리가 다 졌어요. 이긴 쪽은 회사측에서 내세운 후보는 아니었는데, 그 당시 노노갈등에 의해서 상집이 분열되면서 한쪽은 한국노총 쪽으로 다른 한쪽은 전노협 쪽으로 갈라지면서 패배했습니다. 현장복귀해서 근무하던 중 회사측 압력으로 지방으로 발령이 났어요. 알고 봤더니 우리가 조합활동을 하면서 불신도 걸고 제약을 주니까 위원장이 사장하고 짜고 그렇게 한 것이더군요. 저는 인천에서 나서 자랐기 때문에 지방에서 사는 것이 힘들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올라올 수 있는 경우를 알아봤더니 사직서를 내면 인천지역 비정규직으로 채용해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계약을 하고 인천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면 비정규직으로 다시 시작하신거네요? 어떤 어려움들이 있나요?

네. 특수계약직은 90년에 시작되었어요. 저는 95년도에 계약을 하고 들어왔는데 처음에는 임금이 정규직과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임금인상도 없었구요. 계약직이라서 완전성과급제로 운영됩니다. 이렇게 인상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수수료라고 해서 떼 가고 하다보니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지지요. 물론 돈문제를 떠나서 생활하는 데 지장 없다고 말하는 동료들도 있어요. 열심히 일하면 많이 받을 수 있다는거죠. 하지만 여름철에는 일감이 거의 없는 편이고 동료들끼리 아귀다툼을 해요. 한 건이라도 더 해서 많이 벌어야하니까요. 여름철에는 평균 10건을 못해요. 한 건이 평균 3천원인데 그렇게 보면 3만원도 못 버는 거죠. 거기에 기름값, 식사비 등 빼고 나면 지방같은 경우는 한 달에 50만원 받기도 힘들어요. 서울에서도 100만원을 못 받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보통 하루 16시간 정도까지 일합니다. 그것도 자진해서 하는 건 아니구요. 사용자들은 우리들을 개인사업주라고 하고 있지만 사람이 일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 아닙니까? 동절기 세 달 정도를 그렇게 일하고 나면 몸이 축나는 것은 물론이고 체중이 4킬로씩 줄어요. 물론 돈 버는 맛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키는 대로 하지않으면 잘리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거죠. 그런 데서 불만이 많이 쌓여있어요.
게다가 정규직과의 차별대우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규직들은 모여서 체육대회하는데 비정규직들은 남아서 근무해야 하구요. 그리고 사내판매도 정규직에 국한되어 있어요. 이런 차별은 기본적인 것이고 동절기에 정규직들은 어차피 일을 하던 안 하던 월급제에다가 수당이 별도로 붙어요. 정규직들은 7시만 넘으면 일 안 할라고 하죠. 하지만 비정규직은 성과급제잖아요. 말을 안 들으면 지역을 변경시키구요. 여름에는 오히려 일이 없어서 힘든데 말이죠. 또 교육을 일년에 4박 5일 꼬박꼬박 실시하는데 그 기간에는 돈을 못 벌죠. 게다가 시험봐서 평가를 하는데 시험을 못보면 임금을 깎습니다. 비정규직은 임금을 깎으면서 정규직은 경고 정도에 그치죠.

이번 투쟁이 시작된 계기라면요?

올해 재계약 날짜가 11월말이었어요. 그런데 그걸 어느 날 갑자기 6월말로 바꾸더라구요. 비수기라서 실제로 일도 없고 그만 둬도 자기네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자는 의도겠죠. 원래 상호간에 어떤 계약조건에 대한 이의가 없으면 자동갱신이에요. 그리고 이의가 있으면 재계약 한 달 전에 제기하게 되어있는데 올해는 계약일에서 보름이나 지난 6월 15일에 새로운 계약서를 들고나온거 에요. 새로운 계약서에서 중요한 부분이 보증인제도인데 원래의 보증인제도는 2년 보증에 2천만원이었어요. 그런데 올해 들고 나온 제도는 10년 기간에 무한대 보증이었습니다. 전부 난감했죠. 또 한 가지는 상벌제도였는데 단계를 두고 임금 삭감 등의 제재를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분노한 것은 아니었구요. 직접적인 원인은 무한대 보증제도였습니다. 이런 조건으로는 보증을 세울 데가 없어요. 부모형제들도 보증을 안 서줍니다. 그래서 관리직에 항의했죠. 그랬더니 보증 못 세우는 사람은 그만 둬라 이런 식이고. 그래서 서울지역 동지들이 모여 의사를 서로 떠봤죠. 거기서도 관리자들이 감시하고 말을 못하게 했어요. 부랴부랴 차를 움직여 강원도 철원까지 갔어요. 저도 합류를 했는데 거기 숙소까지 관리자들이 쫓아와서 습격을 했어요. 여기서 물러서면 주도자가 잘리는 건 물론이고 이런 식의 탄압이 계속될 수밖에 없을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는 또 일반사업자라는 허울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노조를 결성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죠.
숙소에 관리자 10여 명이 들어와서 자기네 센터 근무조합원들에게 지금 당장 들어와라, 경고한다, 자른다는 식으로 협박했어요. 안면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심하게 했죠. 어떤 조직이든 단결하지 않으면 일부가 희생되는 것은 물론이고 전체가 굴욕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연결을 해서 그 와중에 39명이 빠져나와 총회를 열고 월요일에 조합설립신고를 했습니다. 회사측에서는 월요일에도 시한부 조건을 내걸더군요. 8시 20분까지 출근하지 않으면 전부 다 해고한다 하면서 가버렸습니다. 어차피 전부 해고된거죠. 조합원들이 마음이 약해요. 노조란 것을 알지도 못하고 살았으니까요. 회사를 두고 악덕기업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꺼려했어요. 그런 와중에 5일째 집으로 해고통지서가 날라오니까 진짜 분노하기 시작했죠. 우리가 회사를 어떻게 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무리한 요구를 낸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회장 면담을 요청했는데 그것도 거부하고 노조 설립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설립신고서 내고 3일 후에 나왔어요. 98명 전원요. 회사가 지노위에 압력을 가하니까 담당자가 필증을 내주지도 못 하구요. 필증 나오는데 13일 걸렸습니다. 그것도 특별한 사유도 없이 말이죠. 그동안 우리는 출근한 채로 움직였으니 준비도 없었고 쌈지돈 털어서 먹고 자고 하니까 비용도 만만치 않았어요. 그냥 설립허가만 나면 다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까지는 한국통신이나 건설일용노조에 대해서는 듣기만 했지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지 잘 몰랐어요. 어쨌든 회사 앞에서 항의라도 하려고 서울로 이동했습니다. 설립허가가 났으니 단체교섭 요청도 하구요. 그런데 회사가 계속 거부했어요. 면담신청도 거부했구요. 해고시켜서 아예 말살하려는 의도가 있었던거죠. 우리는 노조를 설립했으니 교섭하면 되겠거니 생각했어요. 만약 회장이 나와서 면담해줬으면 노조 필요없다고 나갈 사람도 있었을거에요. 오히려 탄압하니까 더욱 단결하게 된거죠. 그리고 그동안 쓰고 있었던 사업자의 탈을 벗고 노동자임을 스스로 알게 되었습니다. 회사가 임금착취와 최대노동력 착취를 위해서 비정규직을 만들었다는 것도 알게되었구요. 전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불만이 있어도 그냥 참았었죠.

사측의 태도가 예상외로 강경했던 것 같네요.

인맥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집요하게 탄압하고 회유하고 해서 아침에 일어나보면 사람들이 없어지는 거에요. 안에서 하는 얘기가 관리자들에게 다 들어가구요. 보름만에 20명이 없어지더라구요. 우리가 다른 건 몰라도 나가는 사람들을 막을 도리는 없더라구요. 그러면서 60명도 안 남았어요. 시작은 96명인데 지금 58명 정도 남아있어요. 물론 개인 사정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사람들도 있어요. 나가 있는 사람들은 소사장제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대체시켰거든요. 8월 23일 합법 파업에 돌입했는데 여기 인원 빼다가 거기에 집어넣은 거에요.

그 전에는 소사장제 아니었어요?

특수계약이라고는 해도 개별계약이죠. 우리는 그것을 근로계약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했죠. 그게 파업 들어가면서 소사장제로 바뀐거죠. 여기서 나간 인원들이 떳떳하게 개별계약하고 일을 하면 밉지는 않은데 우리 싸움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소사장제라는 것을 알고 나간거거든요. 그리고 그 밑에서 일을 하고 있어요. 제가 보기에는 이 싸움 끝나면 소사장제는 없어질겁니다. 개별계약이었던 것은 착취를 위해서였던 것인데 소사장제는 1.5배 정도의 비용이 드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걸 감수하면서 우리를 깰려고 하는거에요. 나간 사람들도 눈에 보이는 돈만 보고 일하는거에요. 우리는 싸워 이길 자신은 있어요. 그런데 어려운 부분은 나중에 나간 동료들을 어떻게 할거냐는거죠. 지금 조합원이니까요. 나중에 수용해서 같이 가야하는데 그 부분이 어려운거죠.

파업 진행하는 동안에 이탈한 조합원들이 개인적으로 찾아오거나 연락합니까?
저한테는 없어요. 조합원들한테는 꽤 있더라구요. 그런데 조합원들은 그런 얘기 잘 안해요. 정규직이나 관리직들과 전화통화한 그런 것들요. 얘기해도 나중에나 얘기하죠. 지금도 전화연락하고 주말에 집으로 가면 정규직들 만나는 사람들도 있을거에요. 개별적 관계들이 어떻게 유지되는지는 모르는거니까요.

이길 자신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근거로?

지금 물론 저들이 노조를 말살하려는 계획 하에 탄압하고 당연히 인정해야 할 노조와 근로자성을 인정 안 하고 주종관계를 부인하고 하지만 지금 날씨 추워지면 일감이 늘어난다는거죠. 우리는 서비스직이고 그런 업무는 2~3일 배워서 할 수 있는게 아니에요. 여기 60여 명 있는데 이 인원이 린나이 서비스의 4~50%를 차지해요. 신규사원으로 대체해서 올 겨울 못 납니다. 그래서 회사측이 더욱 발악하는거에요. 여기 있는 사람들 데려다가 일시키려구요.
저도 이겨야하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작년에 만들어진 비정규직 노조를 볼 때 생존율이 10%라는거죠. 한통계약직 동지들도 기술자들인데 추가로 비용을 들여서라도 정규직 전환 안 시킨다는거죠. 그래서 비정규직 투쟁이 장기화되고 어렵다는 겁니다. 단위사업장 차원에서 해결하기 어렵기도 하구요.
이 자체가 대정부 투쟁일 수밖에 없고 한통도 그렇지만 우리도 나가면 김대중 정권 퇴진을 외칩니다. 그렇지만 사용주는 결국 자기가 망하는 짓은 안 한다는거죠. 버틸 수는 있어도 망할 짓은 안 합니다. 그러면 손들게 되어있다는거죠. 조건상 우리도 한국통신처럼 점거 들어가고 하면 공권력 들어와서 쌔질 수 있지만 우리는 안 깨지고 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아까 전노협 소속이라고 하셨는데 그 때는 정규직이셨죠?

그때는 서비스직은 없었어요. 현장직이죠. 물론 지금도 가입은 가능한데 거기로 가입을 안하죠. 지금 정규직화 요구를 못하고 있어요. 우리가 비정규직 되는 날 비정규직 노동자 없어집니다. 지금 한 올의 실낱같은 희망만 있어도 합니다. 정규직 노조가 우리와 같이 할 수 있다는 희망이요. 우리가 인천공장 가서 집회하는데 공장 안에 들어가는 것을 노조 위원장이 막았어요. 자기는 이 회사 회장이 원하지 않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막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통도 그렇게 캐리어도 그렇고 정규직 노조가 있는 단위에서 싸우는 비정규직 동지들이 정규직화를 외치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여기는 저처럼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옮긴 인원이 많아요. 정규직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그 인원들은 다시 설 자리가 없어요. 여기 조직체계 자체가 정규직으로 들어갔을 때 임금에 대한 기준이 없어져버려요. 현재 월급제와 성과급제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월급제로 전환되면 임금이 많이 떨어지거든요. 물론 저희는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런 것은 안 따져요. 통상임금으로 따지면 비교치가 나오겠지만 조합원들이 그런걸 좀 두려워해요. 게다가 평균연령이 36세 쯤 되는데 실제로 설 자리가 없어요.

아까 말씀하실 때 투쟁과정에서 비정규직 확장의 의미, 정규직과의 차별에 대한 인식과 노동자성 회복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정규직화 요구는 기본적인 것 아닙니까?

조합원들과 상집간부들과 얘기한 결과 내용적으로는 정규직화에요. 지금 계약 자체만 없애주면 언젠가는 우리도 정규직화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거죠. 물론 당장이라도 조합원들 원하면 가야하죠. 그런데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들어가서 일하는거에요. 정규직화 요구 해야 하지만 지도부에서도 어려운 부분이죠. 정규직화 걸면 힘이 분산되거든요. 정규직화 걸면 1년도 못 갑니다. 그리고 지금 정규직으로 가서 일하는 것보다 비정규직으로 있으면서 정규직화되어있는 것이 유리합니다. 즉 고용만 안정적이면 그게 더 유리하다는거죠.

전문기술수준과 능력에 맞는 정당한 대우가 완전히 보장되는 것을 바라시는거죠? 그 자체가 다른 형태의 정규직의 모습을 갖는 건가요? 계약을 계속 갱신해야 하는데 그것이 불안정하지는 않나요?

불안정하죠. 그래서 요구사항에도 2년 계약이 되면 3번 연임한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8년은 먹고 들어간다는거죠. 일단 고용안정 확보하고 2년에 한 번씩 단체협약하고 하는 식으로요. 지금 40세 이상 된 사람들은 정규직화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요.

조합원들간에 엇갈린 판단이 있다는 건가요?

지금 보증 2천만원, 원직복직이 요구사항입니다. 그리고 하한선을 제시했어요. 먹고 살아야 일할 것 아니냐는거죠. 회사는 일 없을 때는 지출을 막고 일 많을 때는 부려먹으려고 하잖아요. 계약직은 비정규직으로 두되 내용적으로는 정규직화로 하자는거죠.

지금 몇 일째죠?

87일째입니다.

파업투쟁과정에서 노동자성을 깨달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내가 노동자니까 노동자 대우를 받기 위해 싸워야한다는 것보다는 분노해서 싸우는거에요. 제가 당해왔던 것에 대해서요. 일부 조합원들은 개인적으로 이 싸움이 끝나면 자기는 그만둘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해요.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화 요구같은 것 쉽게 못하죠. 세명인가 빼놓고는 전부 가장들이에요. 지금 삼십대만 넘어도 이 상태에서 정규직화되어서 먹고살기 쉽지 않거든요.

80여 일 싸우면서 어려운 상황들 많이 겪으셨는데 지금 남아있는 인원들이 투쟁을 통해서 바뀌어 가는 모습이 있다면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조합원들이 일정 시기가 지나니까 의식이 막 고양되더라구요. 감당을 못하겠어요. 집행부는 바쁘다보니 이러저러한 집회에 참석을 못해요. 그러다보면 조합원들보다 의식이 뒤떨어지는거죠. 오히려 조합원들에게 끌려다니게 되요. 집행부가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면 조합원들 원하는대로 갈 수밖에 없다는거죠. 건물 점거한 데 대한 손배청구가 들어와있는데 조합원들은 그런 것을 요구하니까 말릴 수 있는 기본 지식도 안 되구요. 당장 통쾌함을 느끼다가도 나중에 그것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구요. 지금은 또 달라졌어요. 자기들이 자제할 줄 알고 뚜렷이 자기 의견 낼 줄 알고 또 이 싸움을 장기전으로 보고들 있더라구요.
예를 들기는 어렵지만 처음에는 목소리 큰 사람들이 협조적이었어요. 상집간부도 몇 명이 빠져나갔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사람들 목소리가 줄어들고 아주 비협조적이었던 사람들, 조용했던 사람들이 서서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거에요. 적극적으로 바뀌구요. 또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면 박수치고 난리가 나죠. 조합원 중에 총각인 친구가 있는데 집에 몇 번 잡혀갔다가 돌아왔어요. 그 조합원 삼촌이 지금 소사장제로 들어가있는데 한 번은 부모님이 홍대에 있을 때 찾아오셨더라구요. 회사측에서 보낸거죠. 부모님과 한 시간 정도 얘기했어요. 결국 부모님들이 믿고 맡기고 가겠다고 하셨는데 그 다음날 삼촌이 와서 잡아갔어요. 이 친구가 대전 사는데 거기서 도망쳐 왔어요. 여기서 제일 나이어린 친구거든요. 그런 사례들을 보면서 버티고 있어요.

반대로 힘드신 부분은요?
아침이 되면 불안하죠. 누구누구 없다 하면서 조하원들 얼굴이 달라지니까 피가 마르더라구요. 새벽에 일어나서 머리수 세보고 하죠. 부산과 광주에서 20여명 올라왔었는데 광주팀이 회사와 밀물교섭하고 무더기로 도망갔어요. 그래서 수가 확 줄었죠.

조합원들이 명찰을 달고 있는데?

제가 제안한거에요. 저는 부천에서 근무했어요. 부천에서는 저 하나만 올라왔는데 처음에는 조합원들 이름도 몰랐어요. 전국사업장이니까요. 아무리 고민해도 안되겠어서 제안한게 명찰 다는거에요. 그래서 서로 이름도 외우고 얼굴도 외우구요.

투쟁과정에서 스스로 나가는 조합원들에 대해서 회사나 관리직들이 얼마나 회유하고 탄압했겠어요.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분노도 커지고 하지 않았겠어요?

지금은 농담으로 나가라고 해요. 그러면 죽어도 못 나간다고들 하죠. 고참들이 대부분 대의원 맡고 있는데 저녁마다 조합원 데리고 나가서 술먹고 해요. 그러면서 끝까지 가야한다 하면서 달래놓으면 다음 날 없어지고. 그래서 고참들이 자포자기하더라구요.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저는 짠돌이라 담배도 잘 안사오는데 고참들은 개인손실이 엄청 많아요. 그리고 떠난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보다는 사측에 대한 분노가 여기를 단합시켜주지요. 처음엔 나간 사람들 많이 미워하고 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이 많이 줄어들었어요. 밉지만 같이 가야 할 사람들이잖아요.

내부 분위기는 어때요?

술 좋아하는 사람 있고 당구치는 사람들도 있고 일찍 자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고. 내부에서는 지금 술 못 먹게 되어있어요. 술 먹는거 말리지는 않지만 사다가 밖에서 먹으라고 하죠. 그리고 시간 되면 불 끄고 자자고 하고. 큰 마찰은 없어요. 반성하고 규율도 만들고 하더니 지키더라구요. 청소도 깨끗이 하고 술 먹어도 조용히 하고 뭐 그렇게요.
현장직 있을 때는 파업 이틀만에 끝났어요. 회장이 두손 두발 다 들고 나왔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비수기라 어려울 수 있겠다 하고 시작은 했지만 생각한 것 보다 너무 달라요. 정규직일 때 하구요. 때려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뭐 그거야 일시적인 것이고 죽어도 해야죠.

린나이코리아 동지들은 다른 사업장의 집회에도 많이 참석하시는 것 같던데요?

처음에는 연대집회를 집중적으로 다녔어요. 연대라는 연락만 오면 무조건 나갔어요. 내부 프로그램이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집회신고 하는 것뿐인데 아무것도 할 게 없었어요. 그러면서 보고 배운거죠. 이런 사업장도 있구나, 우리만 싸우는게 아니구나 하고 느꼈죠. 조합원들이 우리 것도 해결 못하면서 왜 쫓아다니느냐 따질 때 이것은 우리 단사만의 싸움이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하구요. 지금은 연대 집회 나가는 것 즐거워해요. 시그네틱스 집회 가면서 많이 느꼈어요. 침탈당했다고 연락받고 가서 합류해서 싸우고. 조합원들이 생각보다 너무 잘 싸우더라구요. 남의 일이라고 생각 안하고 열심히 싸웠습니다. 우리도 저렇게 당한다,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당하면 끝이다, 밖에서 봐주고 힘도 되주고 소리라도 질러 줄 동지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죠. 경기보조원 기자회견할 때도 갔었는데 그쪽에 모여있는 동지들보다 저희들이 더 많이 갔어요. 이게 연대냐고 하더라구요. 그런 걸 통해 많이 깨우치는 것 같아요.
저도 15년간 진행되어온 비정규직이다 보니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산물이란 느낌을 잘 못받았어요. 막연하게 개인사업자라고 생각하고 세금도 세무서에 개인이 내고 이랬으니까요. 그러다가 재능교육을 보고 우리도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조합원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그제 파견철폐공대위에서 와서 말씀하시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아요. 우리가 열심히 싸워서 이겨야 남들도 보고 쫓아올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지금 87일째 투쟁해오고 있지만 그 전에는 교육이 세 번 정도밖에 없었어요. 상급단체 교육과 이랜드 위원장님 교육 정도 있었는데 그동안 교육다운 교육은 그다지 없었던거죠. 첨에는 서율연맹 도움 받았는데 그쪽 산하로 가기 어려워지면서 서비스로 상급단체를 바꿨어요. 그러면서 적극적인 지원을 못 받았습니다. 저희 사안이 애매했나봐요. 지금은 이런 저런 과정 거치면서 다 잘 될 수 있을거라고 봐요.

그러면 승리의 관건이 앞으로 무엇이라고 보세요?

여러가지 계획 가지고 있어요. 불매운동 선전전도 그중 하나죠. 나가 있는 조합원들이나 같이 못했던 조합원들을 같이 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 역량이 적어서 힘들어요. 노력해야죠. 이후에 싸움 끝나고도 같이 갈 수 있는 상황 만들어야 하고. 우리가 자신있다고 하는 부분은 린나이는 계절상품이 주종이고 겨울에 대부분 팔린다는 거죠. 9월 중순부터 11월까지 거의 일년의 80%를 판매해요. 여기 사람들이 소비자들을 직접 상대하던 사람들이라는거죠. 군대의 보병들이에요. 린나이의 얼굴이라 생각하고 일했던 사람들이라 불매운동도 충분히 먹힐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회사쪽에 타격강도가 세지면 세질수록 불안한 건 쟤네들이죠.

파업 진행하면서 가장 갑갑한 부분이라면?

불매운동 얘기했지만 누구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얼마나 열심히 발로 뛰느냐 하는건데 우리가 생산라인에 있으면 점거해서 생산 안 해버리면 그만이지만 우리는 그런게 없죠. 비수기에 시작해서 오래 끌고 오고 있는거에요. 페인트 투척 때문에 손배 2억 여원 들어어고 그러다보니 가족들이 걱정이 많지요. 조합원들이야 변호사가 와서 설명도 해주고 하지만요.

집에서는 뭐라고 하세요?

첨엔 지지를 많이 받았어요. 저는 현장에서 사내결혼을 했어요. 애가 둘 있는데 지금 중학교 다녀요. 지금은 늦둥이 하나 더 있죠. 처음엔 적극적으로 지지를 했는데 요새는 불안한가봐요. 그래도 크게 추궁하지는 않아요. 잘 싸우고 오라고 하지요. 일일주점 때 가족들이 많이 왔었어요. 다 오지는 못했지만요. 조합원들도 가족들이 격려를 해주는 모양이에요.

성과급제에 대해 얘기좀 해주세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여름에는 일이 없어요. 겨울에 많이 벌어서 여름에 처박는 식으로 되는거죠. 오토바이 타고 다니면서 일하구요. 죽는줄 모르고 다니는거죠. 가스렌지가 3천원이고 보일러가 4천원인데 돈을 받아다 회사에 주고 다시 회사에서 받는거죠. 보일러를 30건을 한다고 해도 12만원 버는건데 그럴려면 새벽까지 일해야 되요. 그래가지고 벌어서 모아놔야 여름에 먹고 살지요.

정규직과의 임금차이는요?

정규직은 정확히는 안 나와있지만 통상임금이 우리보다 많아요. 문제는 우리 근무시간이죠. 보통 밤 10시까지 일하고 10시 넘어서도 일을 해야해요. 정규직은 7시만 되도 일을 안할라고 하죠. 똑같이 먹고 살면서 말이죠. 하지만 비정규직이 탄압을 받는다면 정규직도 마찬가지에요. 센타장이 있고 사무실이 있고 직원이 있구요. 정규직 목표는 센타장이 되는거에요. 센타장은 과장급이구요.

보증인제도에서 10년 무한대 보증이라고 하셨는데?

고쳤는데 사고가 발생하거나 피해가 생기면 보상해야 되는거에요. 내가 보상 못하면 보증인이 지는거죠. 문제는 배상금액이 무한대이고 기간이 10년간이라는거에요. 우리는 그걸 노비문서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소사장제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지금 소사장제로 전환되면 특수고용형태를 다 해소하고 소사장제로 가는건가요?

제가 알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악랄한 것이 성과급제를 포함한 특수고용직이에요. 사측에서는 주종관계가 전혀 없다고 하는데 우리가 업무지시를 받아서 사람을 고용해서 업무를 맡길 수가 없어요. 소사장제에서는 도급관계로 일을 맡길 수 있게 되는거죠. 지금 소사장제로 전환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소사장제 밑으로 들어가게 되는거에요.

지금 투쟁과정에서 힘드신 부분은요?

조정신청 들어가서 합법쟁의 되면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기 어렵다는 판단 들더라구요. 이 상태에서 바로 타격투쟁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고민하다가 상급단체와 파견철폐공대위하고 논의한 것이 교섭권 위임이에요. 싸움하면서 교섭은 교섭대로 진행해야하니까요. 어려운 것이 어느 시점이 가장 조합원들이 잘 싸울 수 있는 시기일 것이냐죠. 전에도 실패해본 경험이 있어요. 조합원들이 내부에서 무너지는 것 못 느끼고 밀어붙이다가요.

앞으로 힘드시겠지만 열심히 투쟁하시고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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