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과 차별성을 두기위해 이른바 ‘문민정부’로 출발한 현
정권은 개혁의 깃발을 내걸고 우리 사회의 고질적 부정과 비리를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3당 합당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현
정권은 수구세력 특히 ‘반북세력’에 발목을 잡혔다. 지난 해
8․15 대사면과 복권 조치에서도 개혁의 대상이었던
정치인과 경제계의 인사들을 풀어 주었다.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자들에게 정치권에서 면죄부를 준 꼴이 되고 말았다. 파행적
현상은 얼마전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검찰의
‘공소권 없음’의 판단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검찰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도 무혐의 처리를 하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기발한 궤변을 늘어 놓으면서 우리
사회의 건강한 상식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논리에 빗대어 보면
당연하게 ‘성공한 비자금’은 밝힐 수도 처벌할 수도 없게
된다. 5․18 사건에 대해서 ‘정치적 판단’을 한 검찰이
‘법률적 판단’을 제대로 할리 없는 것이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 및 금융소득종합과세, 그리고 북한
수해를 지원하는 문제에서 나타난 당정간의 불협화음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개혁은 커녕 각 정당들은 앞을 다투어 자기가
‘보수본당’이라고 소리친다. 이래선 안된다. 국민들의 불신만
높아갈 뿐이다.
이 과정에서 ‘문민정부’는 ‘문민독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더구나 김영삼 대통령은 외국언론으로부터
‘문민황제’라는 타이틀을 얻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뿐만 아니다. 계속된 대형 사건에 대한 현 정권의 무능력하고
무원칙한 대응을 보고 국민들은 문민정부의 국가경영력에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그것이 지난번 지자제 선거에서
나타났다.
요즈음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심한 몸앓이를 한다. 정치는
무능을 벗어나 무력화되고 있다. 재벌중심의 경제는 중소기업을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을 누리고 있다.
세계화는 많은 대중들에게 고통의 분담을 요구하면서 가진
자들에게는 이른바 ‘무한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혜택을
주고 있다. 따라서 부의 분배와 사회복지와 노동 및 환경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시장경쟁의 논리가 판을 친다. 교육정신은 아예 숨조차 쉬지
못한다. 엘리트주의, 기능주의, 실용주의, 경영지상주의가 판을
친다. 독일은 유치원 단계에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조기특수교육’과 ‘천재교육’을 금지시켰다.
고소득과 높은 지위에 있는 부모들의 자식을 겨냥한
‘지능교육’은, 인간이 공동생활의 출발점에서부터 같은
조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출발점 평등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 독일 헌법재판소가 판례로 확정한 이 ‘출발점 평등의
원칙’은 우리에게는 석기시대의 유물이 되어 간다.
그래서 우리는 요즈음 세계 여러나라에서 거론되고 있는
‘사회자본(social capital)’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한
나라의 사회자본을 지탱해 주는 두 버팀목은 공동체
구성원끼리의 ‘신뢰감’과 단체활동의 ‘참여도’이다. 우리도
몇년 전부터 심각할 정도로 사회자본의 감소와 그 폐해를 실감해
왔다. 그 실감은 “이래서는 안되는데”라는 말로 구체화되었다.
서양에서 말하는 사회자본은 불과 얼마 전에만 해도 우리의
고유한 풍경이자 기본적 정신질서가 아니었던가? 하버드 대학의
로버트 푸트남 교수는, 여러가지 과학적 조사방법을 통해 TV가
미국의 사회자본을 파괴하는 주범이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좁은
땅에서 사는 우리는 자동차와 아파트가 덧붙여져서 증폭된
피해를 겪고 있다.
심지어 작년 한 해만도 2600여명의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8만여명이 산재를 당했다. 또한 산재를 심사하는
제도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그런데도 정부와 기업은 이 문제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1만 불의 국민 소득을 눈앞에 둔 현 시점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문제는 우리 사회가 개발만능주의와
성장지상주의에서 비롯한 경제발전을 엄청나게 하고 있지만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 같은 수준으로 경제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리현상’ 때문일 것이다. 종교가 사랑과 자선의
실천장이 아니라 ‘사교클럽’이 되고, 여러 부문에서 이른바
지도급 인사들은 먹이 사슬을 이용해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양극화될 수밖에 없고, 힘의 논리가 판을 치고,
대화와 타협은 물건너 가고 말았다. 정신과 원칙은 퇴색하고,
기능과 실용만이 큰 소리 친다. 어느 곳에서도 어른을 보기가
힘들다.
인도의 휼륭한 지도자인 간디는 이 세상에 일곱가지의 사회악이
있다고 말했다. “원칙이 없는 정치, 노동이 없는 생산, 도덕이
없는 상업, 양심이 없는 쾌락, 특성이 없는 교육, 인간성이 없는
과학, 희생이 없는 종교예배”가 그 내용의 전모이다. 마치 현재
우리 사회를 겨냥한 말인 것 같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북한문제 때문에 갈팡질팡하고 있다. 지난해
나웅배 통일부총리가 “일본 고베 지진 때의 지원을 고려할 때
북한의 공식 요청이 없어도 2백만 달러 정도는 정부가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민자당이 매몰차게 항의했다.
티격태격하는 국면에서도 나웅배 총리는 “국제관례와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북한을 지원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서 자신의 발언을 연거푸 주장했다. 나웅배
총리는 한완상 총리처럼 팽(烹)을 당했다.
여러 곳에서 텃새 노릇을 하는 반북세력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정책의 뒷덜미를 잡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이들은 개혁의
걸림돌이다. 민족문제를 풀기 위한 정부의 태도도 “민족이
우방을 우선한다”는 김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보인 것과는 달리
수구적 편향을 보인다.
이같은 흐름에 언론이 한 몫을 톡톡히 해낸다. “탈냉전의
시대로 접어들고, 문민정부가 등장한 후에도 여전히 냉전적
시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언론의
보수성을 들 수 있다. 언론은 시대를 앞서 가고 계도의 본분을
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의 대부분은
보수일색이다.”(교수신문, 1996년 1월 29일) 특히 신문과 방송
데스크에서 군림하는 ‘언론귀족’들이 “냉적적 사고 확산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은 이들이 반공헤게모니의 체제블럭에
속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에 거슬리는 논리를 내세우는 이
이데올로그들은 북한의 ‘신정(神政)체제와 열성신도 분위기’를
거들먹거리면서 ‘상호주의’를 외쳐댄다. 이 냉전주의자들은
북한정권이 주체사상을 버리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려는 자세가
되어있을 때에만 도와주어야 한다고 추임새를 넣는다.
하지만 북한문제는 그렇게 일방적 잣대로 잴 수 있는 게 아니다.
북한의 경제는 전방위적 어려움에 부딪쳐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지난 7월에서 8월까지 세차례나 북한에 583mm의
장대비까지 쏟아졌다. 국토의 75%가 물난리를 겪었다.
500여만명의 이재민이 생겼고 68명이 죽었다. 북한당국은
1백20여 국에 긴급원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북한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다. 르완다의 난민촌을 돕고
있는데 국내의 고정후원자가 10만 명에 이른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돕기 위해서 펼쳐지는 ‘사랑의 빵’ 운동에
무려 350만 명씩이나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유엔인도지원국(DHA)과 세계식량계획(WFP)도 세계 여러 나라에
북한돕기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일본의 총련 등도
이불과 옷가지와 의약품과 식량을 보냈다. 우리 종교단체와
시민단체들도 정파를 뛰어넘어서 돕고 있다. 게다가 미국과
일본마저 북한을 돕겠다고 나섰다. 특히 미국은 식량난에 따른
북한체제의 급격한 위기가 한반도의 안정은 물론 자국의 전략적
이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거나 뒷북만 친다.
지금 우리는 분단체제를 뛰어넘어 민족통일이 민족해방의
지상과제라는 사실을 곱씹어야 한다. 따라서 ‘지역할거주의’를
털어버리고 모든 부문에서 개혁의 물꼬를 터야 한다. 5․18
서명과정에서 느낀 점은 여러 교수들이 5․18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의 처벌 못지 않게 관심을 보인 게 바로 현
정권의 개혁실종에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많은 국민들은
진짜 개혁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다.
이제 노동자들이 상호주의적 사고를 지양하고 북한돕기에 발벗고
나설 때이다. 열린 마음, 공존공생, 민족화해, 민족통일로
거시적 인식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면
안된다. 노동자들이 빠른 시일 안에 전국단위로 북한돕기에 앞장
서야 할 때이다.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