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5차 각료회의 무산, 어떻게 볼 것인가?
류 미 경/ 자유무역협정 WTO 반대 국민행동 정책팀장
99년 시애틀에서 열린 WTO 3차 각료회의는 ‘새로운 무역협상
라운드’를 출범시키는 것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내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세기의 끝자락을 뒤흔든 이
사건은, 4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멕시코 칸쿤에서 재현되었다.
지난 9월 10~14일에 열린 WTO 5차 각료회의 역시 협상이 결렬된
채 종료된 것이다. 5차 각료회의는 2005년 새로운 무역 체제를
출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을 중간
점검하고, 앞으로의 구체적인 협상 일정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농업협상과 비농산물 관세인하에 대한
세부 협상방식의 기본 골격을 채택하고, 이른바 ‘싱가포르
이슈’의 협상 개시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각료회의에서 개도국들은
‘G22(농산물수출개도국그룹)’,
‘ACP(아프리카․카리브해․태평양 연안국가들)’
등으로 그룹을 형성하여, 도하개발의제와 이 협상을 주도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에 대한 불만을 강력하게 표출하였다. 2년 전
미국과 유럽연합은 도하개발의제 협상을 ‘개도국과 최빈국의
관심사항을 대폭 반영하여, 이들 국가도 자유무역의 혜택을 고루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이
협상라운드가 출범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개도국을 위한 무역협상이라는 도하개발의제에 대한 불만이
오히려 개도국들에게서 터져 나와 결국 협상 결렬에 이르게 된
상황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드러내주었다. 정작 미국과 유럽연합은 농업협상에서도,
싱가포르 이슈에서도 개도국과 최빈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세로 일관했다는 점은 이를 더욱 뒷받침해준다.
여하튼 도하개발의제가 식량, 에너지, 의료, 교육 등 민중들의
삶에 필수적인 공공 서비스를 상품화하여 자본의 이윤놀음의
대상으로 탈바꿈시키고, 초국적 자본의 소유권을 철저히
보호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면서 전 세계 민중들의 모든
권리를 박탈해 간다는 점이 이번 각료회의에서 그어진 여러 가지
쟁점을 통해 드러난 셈이다.
농업협정과 미국․유럽연합의 보조금
앞서 도하개발의제가 ‘개도국’을 위한 협상이라지만 정작
불만은 개도국에게서 표출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농업협상을 둘러싸고 그려진 쟁점을 자세히 살펴보면, WTO에
대한 거짓말을 한 가지 더 발견하게 된다. ‘완전한 무역의
자유화’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정작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연합은 자국의 농업생산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1년에
수 천억 달러에 달하는 보조금을 유지하겠다며 ‘무역
자유화’에 반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국적
메이저 농기업들이 국가의 보조금을 바탕으로 생산비를 절감,
농산물 가격을 낮추어 덤핑이 가능하도록 하고, 제3세계에는
전폭적인 시장개방을 유도하여 결국 농업 기반을 파괴하도록
하는 것이 미국과 유럽연합의 목표인 것이다. 유럽연합과 미국은
보조금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인데, 유럽연합은 수출보조금을
유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올해 마련된 공동농업정책(CAP)을
변경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미국의 경우,
GNP와 경제활동인구를 구성하는 비율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부분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상황, 특히 공화당 지지층과 공화당으로 흘러가는 정치자금이
대부분 농기업에서 형성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보호를
보장하는 것이 부시 정부로서는 사활적인 과제였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시애틀 각료회의와는 사뭇 다른 협상 구도가
형성되었다. 3차에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농산물 수출국
그룹(미국, 호주 등)은 전면적인 시장 개방을 이끌어왔고,
유럽연합과 일본이 주도하는 NTC 그룹(비교역적 관심 사항)은
수입국의 입장에서 미국에 맞서왔다. 당시 관세 감축의 폭과
기간을 두고 미국과 유럽연합의 입장이 마지막까지 조율되지
않아 결국 결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 5차 각료회의를
앞두고, 케언즈 그룹에 속하였던 개도국들은 G22(농산물 수출
개도국)라는 그룹을 형성하여, 미국에 농업보조금을 철폐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미국과 마찬가지로 수출보조금과 관련해
미국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유럽연합은 NTC 그룹을 떠나
미국과의 공조를 추구하였다. 이제 농업협상에서는 ‘미국과
유럽’, ‘G22’, ‘농산물 수입국(한국 일본 등)’이라는 더욱
복잡한 구도가 그려진 것이다.
농업협정을 둘러싼 대략의 쟁점은 이렇다. 농업협정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통해 이미 설정된 의제라고 하여
도하개발의제가 출범하기 전부터 협상을 진행해왔다. 올 3월
31일까지 ‘협상세부원칙’을 확정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에
앞선 2월에 제출된 하빈슨 초안(1차안)을 가지고 3월말까지
협상을 했으나, 합의에 실패하였다. 지지부진하던 협상은 뒤이은
7월 말 몬트리얼 비공식 각료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합의안을 마련하기로 하였고, 이에 따라 8월말
카스티요 일반이사회 의장이 2차안을 제출하였다. 2차안은
개도국의 주된 무역 통제 수단인 관세는 대폭적인 인하를
유도하고, 미국과 유럽연합의 ‘가격보전 직접지불’,
‘최소허용보조’, ‘생산계획하 직접지불’과 같은 국내보조와
수출보조는 미국과 유럽의 합의를 바탕으로 그 감축 비율을 대폭
완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번 각료회의에서는 2차안을
가지고 협상에 들어갔으나, ‘농산물 수출개도국’와 수입국
그룹이 미국과 유럽의 입장만을 중심으로 작성된 2차안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인도, 중국, 브라질, 태국 등이
속해있는 농산물 수출 개도국 그룹은 생산계획 하 직접지불
철폐, 수출보조금 철폐, 미국․유럽연합의 합의안에 제안된
관세 인하방식은 선진국에게만 적용하고, 개도국에게는
우루과이라운드 방식을 적용할 것, 특별품목 규정 부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또한, 수입국 그룹은
관세상한 철폐, 관세할당량 증량 반대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마련된 3차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특별품목 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개도국뿐만이
아니라 선진국에게도 적용되도록 확대되어, 수출개도국 그룹은
반대입장을 제출했다. 보조금과 관련해서는 생산계획 하
직접지불이 일정정도 감축하는 내용만이 포함되어, 여전히
미국과 유럽연합의 수출보조를 인정하는 방향이 제시되었다.
수입국이 요구한 관세상한 철폐와 관세할당량 증량 반대 요구는
포함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과 유럽연합의 국내보조 및 수출보조를 폐지하라는
농산물 수출개도국의 요구를 미국과 유럽연합은 수용하지
않았으며, 특히나 막후 협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
총력을 쏟아 부었다. 미국은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 중미 국가들을 상대로 비공식 회의를 갖고, 수출개도국
그룹에서 빠져 나오면 수입 관세를 인하해주겠다고
‘회유’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그러나, 수출개도국
그룹은 역시 여전히 미국과 유럽연합의 입장을 중심으로 작성된
3차안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결국 이번
각료회의에서도 농업협상 세부원칙을 마련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진행될 협상은 최종 제출된 3차안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한편, 미국의 보조금 문제는 ‘면화’ 문제에서도 불거졌다.
서아프리카에서 면화수출에 국가 소득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부르키나파소, 베닌, 차드, 말리 4개국은 미국의 면화
생산자들이 보조금을 바탕으로 시장을 독점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신들은 소득이 1년에 10달러나 줄어들고 있음을
지적하며, 면화에 대한 보조금 철폐와 이로 인한 손해에 대해
보상 조치를 요구하였다. 또한 이를 5차 각료회의의 공식의제로
다룰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세계은행의 경제개발 특별 융자를
받는 조건으로 환금성 작물로서의 면화생산을 확대해왔으나,
미국 등 선진국이 보조금에 의한 면화수출을 확대하면서 면화의
국제가격이 폭락해 국가 경제 붕괴 위기에 처한 것이다. 말리의
대표에 의하면, 미국의 면화보조금은 연간 30~40억 달러에
달해, 말리의 GDP를 상회하고, 미국이 아프리카에 지원하는
전체금액의 약 3배에 해당한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보조금은
2만 5천 호의 대규모 농가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지역의 면화생산농가는 약 1천만 호에 이르지만,
대부분 영세하고, 그중 대부분은 1일 1달러 이하의 금액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서아프리카 4개국의 요구는 결국 9월
10일 의제로 채택되었고, 아프리카․카리브해․태평양
연안 그룹(ACP) 대표들은 이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미국, 유럽연합, 호주 등 농산물 수출국들은 4개국의 제기가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비판했고, 조정에 나선 수파차이 WTO
사무총장 역시, 세계은행, IMF, FAO 등과의 연계가 필요하다며
WTO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모색하겠다는 입장만 밝혀,
개도국들의 불만은 더욱 증폭되었다.
결국, 초국적 메이저 농기업의 시장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한
미국과 유럽연합의 입장에 대해, 농산물 수출 개도국은 보조금을
철폐하여 자국 농산물의 시장접근을 확대할 것을 요구하며,
수입국은 점진적인 시장개방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최빈국은
역시 자국의 소농을 말살하는 보조금 철폐와 그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저항했고,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러한
요구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결국 협상 결렬을 이끈
것이다,
싱가포르 이슈 = 초국적 자본의 소유권 보장, 자본이동의
자유화
‘투자’, ‘경쟁정책’, ‘무역원활화’, ‘정부조달 투명성’
네 가지 의제를 의미하는 ‘싱가포르 이슈’는 협상 결렬을
이끄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96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2차
각료회의에서 이러한 이슈의 무역과의 연계성에 대한 분석을
개시하자고 결정됨에 따라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장 문제가 되는 ‘투자’는 지난 98년
OECD 내에서 추진하려다 실패한 “MAI(다자간 투자협정)”에
담긴 ‘투자자유화 조치’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단기성
투기자본까지를 투자로 정의하고, 해외자본을 국내자본과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하며, 투자 설립단계에서도 이를 위한
정보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외환위기 등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소유권을 철저히 보장받아 이윤을 남기고 손실
없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보호하며, 투자에 대해 이행해야 하는
의무를 부과할 수 없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경쟁’은 독과점, 카르텔 등 경쟁을 가로막는 각 국의 관행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을 의미한다. ‘무역원활화’는
‘국제무역절차의 간소화와 조화’라고 정의되며, 통관,
수출입허가, 등 모든 수출입 절차와 운송형식, 대금 지불, 보험
및 금융 등의 요건을 다룬다. ‘정부조달투명성’은 정부조달
분야에 있어서의 비차별, 투명성 등을 다룬다.
그런데, 이 의제들은 소유권, 생산, 소득, 수입, 외환 거래,
지불 균형 등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의 유출․입과 관련이
있는 정책들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무역 정책, 즉, 상품과
서비스의 국가간 교역에 관한 규범 및 규제의 내용을 초과한다.
미국과 유럽의 의도는 ‘무역’ 자유화를 초과하는 이러한
내용을 WTO 협상 의제에 포함시킴으로서, 제3세계로 하여금
투자를 자유화하도록 하여, 초국적자본이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면서 투기활동을 벌이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개도국들은 이렇듯 엄밀한 의미의
‘무역정책’의 범위를 초과하는 이 이슈가 ‘무역’과 관련이
없으며, 선진국에 의한 시장 개방 압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뿐이라며, 협상 개시 자체를 반대해왔다.
이러한 싱가포르 이슈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은 경과를 그리며
이루어졌다. 지난 4차 도하각료회의에서 유럽연합과 일본 등은
싱가포르 이슈협상을 개시할 것을 요구했으나 개도국들이 이에
반대하였고, 이에 따라 각료회의 선언문에는 협상 개시에 대해
‘분명한 합의를 전제로 5차 각료회의에서 정해지는 방식에 따라
협상을 개시할 수 있다’라고 표현이 담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슈에 관한 쟁점은 5차 각료회의가 시작되기 전 도하 각료
선언문의 이 문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선진국들은 이 문구가 ‘5차 각료회의에서 협상을
개시하되, 그 방식이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하는 반면, 개도국들은 ‘협상 개시 여부도 논의의
대상이다’라고 해석했다. 9월 10일 각료회의 시작과 함께,
중국, 인도네시아, 이집트, 방글라데쉬, 필리핀, 탄자니아,
베네수엘라와 자메이카 등 70여 개 국 개도국 정부들은 싱가포르
이슈 4가지 중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협상이 개시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뒤이어 9월 11일과 12일 사이
개최된 싱가포르 이슈 작업반에서는 21개국이 완강한 반대의
입장을, 14개 국은 4개 이슈 중 2개 의제에 대해서만 우선적으로
협상을 개시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싱가포르 이슈 워킹그룹
의장인 캐나다 무역대표 페티그루는 4개의 의제를 분리
협상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는 13일에 제출된 3차 선언문
초안에 반영이 되었다. 이에 유럽연합은 농업협상에서
개도국들의 양보를 유도하고자, 4개의 이슈 중 반발이 심한
‘경쟁’과 ‘투자’는 제쳐두고, ‘무역원활화’와
‘정부조달투명성’에 대해 먼저 협상하자는, 일정정도의
양보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개도국들은 이러한 입장에 더욱
반발하며 13일 밤에 개최된 그린룸 회의(유럽연합, 미국,
멕시코, 브라질, 남아공,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케냐)와 14일
오전 30개국이 참여한 그린룸 회의에서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정부는 4개 이슈
모두에 대해 협상이 개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결국
그린룸 회의가 14일 오후까지 계속되었으나,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여, 데르베스 의장은 결렬을 선언하였다. 농업협상에서
농산물 수출개도국 그룹이 미국과 유럽연합에 강력하게
대항했다면, 싱가포르 이슈에 대해서는 아프리카연합(AU),
아프리카․카리브․태평양 인근 국가 그룹(ACP)와
최빈개도국 (총 61개국) 등의 그룹들이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이다.
남은 이야기들
5차 각료회의에서 개도국 및 최빈국들은 ‘G22’,
‘아프리카․카리브․태평양 인근국가 그룹’,
‘최빈개도국그룹’ 아프리카연합(AU) 등으로 의견 그룹을
형성하여 미국과 유럽연합이 주도하는 협상에 반기를 들었다.
이로써 ‘자유무역의 혜택을 개도국과 최빈국이 고루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주장이 허구임이 드러났다.
또한 농업협상에서 미국과 유럽연합은 자국의 생산자들에게
유리한 국제 무역 규칙을 부과하는 것을 시도함으로써, 모두가
공평하게 혜택을 누리는 ‘완전한 무역의 자유화’를 이룬다는
것 역시 허구임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제시한 초국적
자본의 소유권을 철저하게 보장하고 이동의 자유를 추구하는
‘싱가포르 이슈’는 엄밀한 의미의 ‘무역’정책을 초과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독수리 오형제’가 알고 보니 ‘조류의
탈을 쓴 인간 오 의남매’였더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개도국에게 혜택을 주는 무역 자유화 협상 라운드’는 그 어느
단어도 ‘도하개발의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각료회의 무산 이후, 과연 도하개발의제가 정해진 바대로 2004년
말 타결되어 2005년에 새로운 무역 체제가 출범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또한,
‘합의를 기반으로 하는’ 다자 협상이 과연 효과적인가 하는
점에서 WTO 자체에 대한 유용성도 의심되고 있다. 그러나,
개도국들의 강력한 반발로 이끌어낸 5차 각료회의의 무산과,
그에 따른 WTO의 위기상황이 곧바로 세계 민중들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관세 철폐, 투자 자유화
등 WTO 도하개발의제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조치들을 지역별,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시도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으며,
이에 따라, 지역별,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FTAA(북미자유무역협정)과 함께
ASEAN+3, 한․중․일 자유무역협정 등 지역 협정 체결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다. 애초에 세계
사회운동 진영은 ‘식량 주권’, ‘토지와 종자에 대한 농민들의
권리’, ‘지식에 대한 민중들의 권리’,
‘의료․교육․에너지․문화’ 등 필수 서비스에
대해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 ‘의약품에 대한 권리’ 등이 WTO
도하개발의제에 의해 파괴되고 있음을 비판하였고, 이러한
권리들을 민중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각료회의
무산으로 인한 협상의 지연’이 이러한 민중들의 요구가
실현되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 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각료회의의 무산을 이끌었던 다양한 개도국 그룹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도 쟁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각료회의 무산에 크게 기여한 G22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이들이 농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서비스나 공산품에
대해서도 단결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WTO 내
‘남반구연대’를 구축하도록 하자는 입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농산물 수출 개도국’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보조금 정책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긴 했지만, 이들이 주장한
핵심이 ‘농업분야에서의 완전한 자유화를 통한 시장접근의
확대’라는 점을 볼 때, 소농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비아 캄페시나로 대표되는 소농들은 농업협정에
대해 소농들이 보호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보조금과 관세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토지와 종자에 대한 농민의
권리, 식량에 대한 민중들의 권리가 옹호되기 위해서는 식량을
상품화하여 시장의 논리에 내맡기는 WTO에서 농업이 제외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WTO 협상 구도 내에서 어떤
세력을 지원할 것인가 가 아닌, 전세계 민중들의 단결과 연대를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협상을 무산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빈곤을
확산시키고, 전 세계 민중들의 제반 권리를 박탈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대안적인 세계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점을 확인하자.
한/노/정/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