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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번호 1774번 등록일 2004-10-01 00:00:00
글쓴이 남구현 글쓴곳  
발행호수 102   분야 9  
제  목 채소장의 글에 대하여

편집자 주 : 채만수 소장의 글 「(소)부르주아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 운동의 독자성」에 대해 남구현 교수가 보내 온 편지글입니다.
자료
2
채소장의 글에 대하여
남구현(부소장)




한노정연 동지들, 보십시오. 부소장 남구현입니다. 채만수 소장의 남구현, 이해영, 최형익에 대한 비판 글이 진보평론에 실리지 않게된 사태와 관련한 저번 회의에서 저는 일차적으로 한노정연 동지들이 관련 글들을 읽고 연구소의 입장을 정리해 주기를 요청한 바 있습니다. 저는 하나의 연구소는 무조건 하나의 통일된 입장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논쟁을 피하고 물타기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민중탄핵과 관련된 저희의 입장 글이 나가고, 탄핵, 선거 국면이 지난 후 한노정연에서 조직한 토론회에도 참여하여 저의 견해를 밝혔으며, 제가 소속된 관련 단체에는 공식적인 평가를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입장들을 제시하고 비판하는 과정은 우리의 인식 지평을 넓히고, 오류를 수정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최소한 동지적 관점에서 이견과 다른 관점에 대해 분명한 논지를 가지고 전개되는 비판과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경청하고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지금 제출되고 있는 몇몇 비판적인 글들은 민중탄핵 관련 좌파의 대응에 대해 공식적인 검토를 거친 글들이 아니라 다분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오독과 곡해에 가득찬 글들이어서 대응을 해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제 주변의 동지들과 제자들은 지역의 비리 척결과 민주화, 신자유주의에 반대 투쟁 등에 앞장서다가 구속되는 등 힘겹게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논의가 이론가들 사이의 현학적인 말싸움이 아니라 현실 운동을 위해 생산적인 결론을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지들은 저에게 문건들을 검토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중요한 쟁점을 지적해 달라고 요청한 바 있습니다. 이에 몇가지 지점에 대해 간략히 쓰고자 합니다.


1.
채소장은 -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의 과문과 무지를 힐난할지 모르겠으나 - 우리가 서당개 풍월에 불과한 지식을 가지고 사기꾼 기질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 실례로서 우리가 맑스가 이야기 하지도 않은 내용으로 사기를 치고 있다고 하고 있다. 물론 맑스가 무슨 이야기를 하였는가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며, 맑스가 이야기하였다고 그 자체가 진리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현실 모순을 어떻게 인식하고 현실 모순을 극복하는 운동을 어떻게 전개할 수 있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그러나 채소장이 맑스가 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우리가 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맑스를 가지고 거짓된 주장을 하는 ‘사기꾼’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맑스의 인용에 대하여 밝히고자 한다.

자료 2 • • •

우리의 글에 “‘노동자 계급을 제외한 모두는 반동’으로 보는 관점은 라쌀레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여타 소부르주아계급의 투쟁 역시 혁명적일 때가 있다”라고 쓴 부분에 대해 그는 과연 제 계급계층에 대한 라쌀레의 관점에 그러한 것이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서술은 사실 마치 나나 ‘민중탄핵론’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러한 관점을 가졌다고 암시하는 모략이라고 쓰고 있다. 우리는 거꾸로 이렇게 답하고자 한다. 우리의 글이 민중탄핵론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을 모략했는지는 차치하고, 라쌀레의 관점과 이에 대한 맑스의 입장은 맑스의 글에 오해의 여지 없이 제출되어 있다고. 고타강령 비판을 보면, “노동의 해방은 노동자계급의 과제일 수 밖에 없고, 노동자 계급에 대해 모든 다른 계급들은 오직 하나의 반동적 대중 (eine reaktionäre Masse)” 이라고 쓴 라쌀레에 대해 맑스는 공산당 선언을 인용하면서 부르주아지는 구 질서를 옹호하는 봉건계급과 중간신분에 대해 대산업의 주창자로서, 중간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로의 몰락을 앞두고 혁명적인 경우를 쓰고 있는 것이다.(MEW 19, 22-23)

한편 그는 반동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맑스는 우리가 쓴 맥락에서는 - 그러면 어떤 맥락에서 쓰고 있는지는 밝히지 못한 채 - 어디에서도 결단코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는 반동적 사회주의, 그 중에 하나의 유형인 진정 사회주의에 대해 쓰기를, 당시 독일의 진정 사회주의자들이 봉건 계급에 대해 점차 위협이 되어가고 있는 자유주의자들의 운동에 대해 부르주아적 개혁이 인민대중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반대함으로써 봉건 계급의 반동적 이해 관계에 복속하게 되었으며, 이는 이미 부르주아 사회가 발전해 있는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부르주아지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역사 사회적인 맥락에 대한 고찰이 없이 그대로 가져다가 주장한 결과라고 쓰고 있다. (MEW 4, 510-511) 우리는 이를 지금 우리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혁적 부르주아지 내지는 쁘띠적 개혁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없다고 반대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수구보수 세력의 이해에 기여하게 되는 경우에 대비하여 인용한 것이다.

만약 채소장이 맑스의 위와 같은 진술을 이러저러하게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면 그래도 경청하고 우리의 견해를 밝히고 논쟁을 할 수 있으나, 그는 이러한 부분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밝히지 않은 채 우리가 우리의 주장에 맑스의 의상을 입히고 사기를 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는 그의 말대로 과문과 무지를 힐난할 수밖에, 논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다.


2.
우리의 글에 대한 곡해도 도가 심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문제의식은 1)탄핵 정국은 노무현 정권의 개혁 부르주아지 또는 쁘띠적 개혁 (즉 과거 청산, 정치 개혁, 지역주의 청산으로 상징되는 수구 반동과 정치의 전 근대성에 대한 공격) 에 대한 수구 세력의 반동에 의해 야기된 것이고, 이에 반대해 촛불 부대, 광화문 집회로 상징되는 대중적인 중간 계급 운동의 동력이 결합되어 있으며 2)비록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이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정책 내용을 담고 있어 투쟁의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현 정세와 국면은 신자유주의 개혁에 의해 추동된 것이 아니고 일단은 수구 반동의 반동적 움직임에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민중탄핵론에서 가장 반동적인 세력이 노무현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이라고 보는 관점은 최소한 양비론적 수준으로라도 바뀌어져야하며 3)수구 반동과 함께 민중 탄핵에 나서는 것은 반동적 계급의 이해에 복속하게되는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지금의 정세에서 주된 공격의 방향을 어디로 하여야하는가 하는 점에서 이견을 제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앞뒤 좌우 거두 절미하고 우리가 오로지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지한 것처럼 낙인을 찍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의 논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는 현장에서 미래를에 실린 본인의 글에서 노무현 정권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이라크 파병, 그리고 원전폐기물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힘들므로 대중투쟁을 통해 노동자 민중이 해결해야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폈는 바, 이에 대해 노무현 정권이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고 씀으로써 편을 들어주었다고 곡해하고 있다. 물론 장황한 인용을 하면서 뒷부분은 생략하고 있다.


3.
이번 문제가 된 글의 마지막 부분, 즉 우리가 노동자 계급운동의 독자성을 버리고 소 부르주아에게 투항하라고 선동했다는 진술에 대해서는 노동자의 힘에서 조발논쟁이 벌어지면서 제출되었던 글에서 본인이 취했던 입장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채소장이 인용한 맑스의 글의 맥락은 다르게 이해되어져야 한다. 맑스의 글은 “공동의 적”을 두고 함께 투쟁하더라도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고 독자적인 행동 (여기에서는 도처에 부루주아 민주주의 후보와 나란히 노동자후보를 내세우는 것)을 견지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진술로 받아들이고 싶다. 맑스의 글에는 ‘공동의 적’에 대한 공동 투쟁이 전제되어 있으며, 탄핵 국면에서 수구 반동이야 말로 공동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동의 적이 개혁적 부르주아지 또는 쁘띠들인가? 만약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쟁점이 되어 탄핵이 진행되었고, 한민자 수구 연합이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 보조를 취했다면 개혁적 부르주아지 또는 쁘띠를 공동의 적으로 하는 전술을 고려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개혁이 쟁점이 되어 있는 마당에 민중 탄핵에 나선다면 누가 보아도 수구 반동과 함께 우리가 연대하여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공동의 적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입장은 어디에서도 독자성을 버리라고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채소장은 공동의 적에 대한 투쟁과 정치적인 독자성의 유지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탄핵과 관련된 쟁점은 아니지만 맑스는 여기에서 노동자 정치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적극적인 독자 후보 전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맑스는 독자적인 행동으로서 선거에 독자 후보를 내세우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데 반해, 채소장은 선거 때 마다 후보 전술 자체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독자적인 노동자 후보전술을 막아왔으며, 정치 무대가 맑스가 우려하듯이 부르주아와 쁘띠들에 의해 독점되도록 기여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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