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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번호 1827번 등록일 2005-01-01 00:00:00
글쓴이 강성윤 글쓴곳  
발행호수 105   분야 9  
제  목 이른바 ‘브랜드가치’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해

이른바 ‘브랜드가치’에 대한 맑스주의적 이해 「연세대학원신문」 2004년 12월 6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강성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원
kangsy @ dreamwiz.com




원고청탁을 받고 잠시 생각한다. 최근 여기저기서 떠들어대고 있는 이른바 ‘브랜드가치’에 대해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 비판의 입장에서 써달라는 요청이다. 흠, ‘브랜드가치’라...

1. 맑스주의 경제학은 ‘브랜드가치’를 설명할 수 있을까?


웬만큼 알려져 알다시피 맑스주의 경제학의 기초는 노동가치이론이다. 그리고 이 이론은 일반화된 상품생산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재)생산하는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브랜드가치’는 “브랜드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아닌 듯 하다. 먼저 브랜드를 독립적인 상품으로 볼 수 있느냐부터 시작해서, 그 브랜드를 ‘생산’하는 데 일정량의 노동시간이 필요하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1999년 6월 기준으로 전 세계 기업들의 브랜드 중 ‘가치’가 200억 달러를 넘는 것만 11개에 이르고 ‘브랜드 가치’ 세계 1위인 코카콜라의 경우는 무려 838억 달러에 이른다고 하니, 이를 노동시간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무망한 것이 아닐까? 에이, 19세기에 살았던 맑스가 21세기 자본주의의 획기적인 발전을 예상이나 했겠어? 노동가치이론 같은 낡은 이론으로 현대 자본주의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애당초 무리일 수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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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치와 가격, 그리고 '브랜드가치‘
그러나 과연 그럴까? 먼저 우리는 가치와 가격이라는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 맑스주의 경제학의 입장에서 가격은 가치의 ‘현상형태’이다. 상품생산사회에서 한 상품의 가치는 다른 상품과의 교환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는데, 그 교환비율을 우리는 교환가치라고 부른다. 이렇듯 한 상품의 가치가 다른 상품과의 교환비율로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 사회적 필요에 의해 사전에 인정된 노동이 아닌 오직 다른 상품과의 교환을 통해서만 그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적 노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품생산사회(자본주의 사회를 포함한)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개인의 독립적인 판단에 의해 상품이 생산되기 때문에 그 상품이 판매되어야만 비로소 그 상품의 생산에 투입된 노동, 즉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라는 개념보다 우리에게 훨씬 익숙한 가격은 한 상품의 가치를 ‘일반적 등가물’인 화폐상품과의 교환비율로 표현하는 형태이다.
중요한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상품의 가치는 이렇듯 가격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지만, 역으로 이 가격이 가치를 그 상품의 생산에 투입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라는 본래적 의미대로 표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노동가치이론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애덤 스미스나 데이비드 리카도와 같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노동가치이론과 맑스의 노동가치이론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노동시간으로 측정되는 가치로부터 직접적으로 가격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그리고 현실의 상품가격이 결코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노동가치이론을 부분적으로 포기하거나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던 그의 선행자들과는 달리, 맑스는 한 상품의 가격이 결코 노동시간으로 측정되는 가치로 ‘직접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별 상품의 가치와 가격은 양적으로 괴리될 수 있으며, 오히려 바로 이러한 양적 괴리를 통해서만 자본가들이 자신들이 투하한 자본에 대한 이윤을 투하한 몫에 비례하여 분배받는 평균이윤이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상품 전체의 총가치와 총가격은 일치하기 때문에 상품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는 가치법칙은 유지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법칙은 바로 이와 같이 가치법칙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에 의해서 관철되는 것이다.
더욱이 가치와 가격 사이의 이와 같은 모순적 관계는 가치와 가격의 양적 괴리의 가능성을 낳을 뿐 아니라, 가치를 전혀 가지지 않는, 즉 그 생산에 전혀 노동이 투입되지 않은 물건들도 가격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낳는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브랜드가치’를 설파하는 주류경제학(부르주아 경제학)은 노동가치이론을 폐기하고 눈에 보이는 가격만이 진짜 가치라고 우기는, 맑스가 부르주아 사회의 변호론자들이라고 불렀던 ‘속류경제학자들’의 후예이다.
이제 좀 뭔가 보이는 것 같다. 브랜드의 ‘생산’에 노동이 투입되지 않음에도 그 브랜드에 일정한 가격이 매겨지고, 또 실제로 판매되기까지 하는 것은 결코 그 브랜드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물건의 가격은 당연히 노동시간과는 다른 규정에 의해서 정해질 수밖에 없다. ‘브랜드가치’란 결국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는 가치가 아닌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결정되는 가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가격을 맑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3. ‘브랜드가치’의 본질 - 독점이윤(초과이윤)에 근거한 가공적 가격계산
맑스는 가치를 가지지 않는 물건들의 가격이 결정되는 방식에 대해 몇 가지 경우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주식이나 채권 같은 가공자본, 그리고 토지의 가격이 정해지는 방식이다. 어떻게 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일정한 기간 동안 정기적인 수입(이자나 지대 등)을 제공하는 무엇인가(주식, 채권, 토지)가 있다. 그렇다면 마치 이 수입이 일정액의 자본으로부터 발생한 것과 같은 외관이 생겨난다. 그래서 그 수입을 현재의 이자율로 나눈(할인한) 값으로 그 가격이 정해진다. 현재 이자율이 5%이고 연간 1,000만원의 지대를 낳는 토지가 있다면 그 토지의 가격은 2억원이라는 식이다. 물론 그 수입이 확정적이지 않고 불확실성이 큰 주식과 같은 가공자본의 가격은 그 수입에 대한 기대가 변화함에 따라 엄청나게 큰 폭으로 변화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가격이 0이 되어 아예 휴지조각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브랜드가치’, 즉 브랜드의 가격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가만히 살펴보면 ‘브랜드가치’가 높다는 기업들은 대부분 엄청난 독점이윤을 획득하고 있는 독점자본들이다. 독점이윤은 시장 지배력을 바탕으로 어떤 기업이 다른 기업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이윤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기업을 인수한다면 평균 수준의 이윤보다 더 큰 초과이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건 간에 추가적인 수입이 발생하면 그 배후에는 이윤을 낳는 신비한 힘인 자본이 숨어있다고 생각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머릿속에는 당연히 그 독점이윤을 제공하는 독점기업의 상징인 ‘브랜드’가 어떤 신비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아하, 코카콜라의 엄청난 독점이윤이 결국 코카콜라라는 ‘브랜드’의 시장지배력에서 나왔으니, 이 ‘브랜드’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어. 그러면 코카콜라가 연간 벌어들이는 독점이윤을 이자율을 비롯한 이런저런 요소를 고려해서 할인하면, 우와 역시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구나~.
‘브랜드가치’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막연함과 달리 그럭저럭 맑스주의 경제학의 현실설명력을 주장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런데 ‘브랜드가치’에 대한 이런 설명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거지? 나는 ‘브랜드가치’가 독점이윤에 근거한 가공적 가격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브랜드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며 노동자들을 닦달하는 자본, 정부, 언론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브랜드가치’를 높이기 위해, 즉 자신을 착취하고 있는 자본이 더 높은 수준의 독점이윤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더 열심히, 한눈팔지 말고 일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저들의 요구에 순응하여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모든 기업이 다 높은 ‘브랜드가치’를 낳는 독점이윤을 창출할 수 있을까? 19세기의 맑스는 21세기의 우리를 위하여 이미 답을 내려놓았다. 독점이윤의 원천은 결국 사회적으로 생산된 총잉여가치 중에서 비독점부문의 잉여가치를 이전해오는 것이지 결코 더 많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고. 결국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할수록 노동자계급 전체가 자본가에게 당하는 착취의 정도만 높아질 뿐, 모든 기업이 높은 독점이윤을 얻고 그 결과로 높은 ‘브랜드가치’를 얻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P. S.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며 지면의 제약상 지극히 압축적인 설명만 제시하였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거나 이 글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하는 독자는 이메일을 통해 연락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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