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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번호 |
943번 |
등록일 |
2000-10-06 00:00:00 |
| 글쓴이 |
박용준 |
글쓴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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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호수 |
59 |
분야 |
4 |
| 제 목 |
올림픽과 구경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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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본다
올림픽과 구경꾼
박 용 준
연구원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은 일종의 정치적 방학이다. 이 기간에도
물론 노동은 이루어지고 그 결과물을 둘러 싼 각종의 꽁수와
체제의 협잡은 쉴 줄을 모르지만 적어도 방송과 언론에서 이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투쟁은 방학을 맞는다. 개발할 것이 더
없을 것 같은데 아직도 개발 중인 이 영원한 개발도상국의 지배
세력들은 올해 시드니를 통해서도 온 나라 근로 대중들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을 온통 올림픽으로 떼워 버린 후, 온갖 정치적
책임으로부터 비켜가려 하고 있다. 연예인 침실에까지 카메라를
밀고 들어갈 정도로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면서도 방송 채널 선택권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 나라의
방송사들은, 나라 살림이 어려워 몇 푼 안 되는 대북 식량
지원도 어렵다는 마당에, 3개 채널에서 같은 종목을 동시에
생중계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그것도 모자라 밤 시간에는 녹화 중계로 재분석의 기회를 주고,
새벽에는 올림픽 하일라이트와 관련 종목 전문가의 해설로
확실히 요약 정리해 준 후, 몇 시간 뒤 아침 뉴스에서는 오늘의
경기 일정을 미리 알려 주는 치밀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 나라 사람들은 도대체 올림픽을 피해 갈 도리가
없다.
물론 올림픽은 재미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올림픽이 겉으로
내세우는 숭고한 헛소리를 귓구멍 한 번 살짝 긁어 주고 내버릴
수 있는 현실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늘날 국가와 자본이
첨단 과학을 동원해서 인간 육체의 한계와 벌이는 싸움을
재미나게 감상할 수 있다. 굳이 인종과 국가의 틀을 덧씌우지
않더라도 말이다. 별 생각 없이 보더라도, 훌륭한 육체를
가졌다는 인간들끼리 경쟁하면서 뛰고 헤엄치고 꺾고 붕붕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심심하지 않다. 더구나
현재의 세계화된 미디어 기술과 결합되면 이것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구경거리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점 때문에 올림픽에는
자본이 빠질 수 없다.
세계적인 독점 자본들이 올림픽 공식 스폰서의 자리를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전세계 수많은 인구가 TV를 통해
시청하는 광고 효과 때문이다. 시드니의 경우 코카콜라, IBM,
비자카드, 삼성 등 국제 스폰서 11개와 호주 국내 후원사 등
24개 업체가 소위 ‘밀레니엄 파트너’로 선정되어 자기 상표를
올림픽 경기장 구석구석에 갖다 붙이고 있다. 이들이 내는
후원금만 5억 호주달러(약 3500억원)라고 한다. 그러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 엄청난 적자를 기록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올림픽이 원래부터 이렇게 남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 기점이 된
것은 1984년 LA 올림픽에서부터라고 한다. 위성 중계료와 각종
광고료 등 돈이 되는 전략은 모두 동원하여 장사의 모범을 보인
이 올림픽에서는 주최한 시와 후원한 자본 모두가 이익을 봤고
게다가 각 후진국의 지배 세력이 이를 국내 정치에 활용하는
것도 빠지지 않았다. 역시 미국은 비즈니스의 나라다.
여기서 선수들은 걸어 다니는 광고탑이 된다. 이미 운동경기로
돈을 버는 직업인이 된지 오래고 일부는 스스로가 ‘움직이는
자본’이라 할만큼 이 광고탑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훌륭한 직업 의식을 갖추고 있다. 일례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미국의 농구대표선수들은 자기들이 입고 있는
트레이닝복 메이커가 자신들의 개인 스폰서가 아니라는 이유로
성조기를 망토처럼 걸쳐서 이 메이커를 가리고 시상식에 나갔을
정도이다. 또한 미국의 육상스타들이 나이키와 리복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을 제공받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이들이 올림픽 외에 프로선수로서 국제대회에 나가서 받는
상금과 출연료, 광고료는 일반인의 상식을 초월한다. 한때 100m
세계 기록 보유자였던 캐나다의 도노반 베일리와 200m 세계기록
보유자인 미국의 마이클 존슨이 가졌던 라이벌 전에서는 각각
출연료가 50만 달러, 우승자 상금이 150만 달러였다고 한다.
각자 주 종목의 중간인 150m를 뛰었다니까 여기서 이긴 베일리는
10m에 1억, 1초에 1억을 상금으로 챙긴 셈이다.
바야흐로 올림픽은 월드컵과 함께 전지구적인 쇼가 되었다.
그런데 올림픽이 원래부터 이렇게 노골적인 장사였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기억에도 희미하고 언제 그랬는지 실감도 나지
않지만 불과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올림픽은 ‘적어도
규정상으로는’ 아마추어들만 참가할 수 있는 대회였다고 한다.
1974년 개정되기 전까지 올림픽헌장은 아마추어를
1)생계수단으로서 (스포츠가 아닌 다른) 직업이 있는 선수
2)스포츠 참여를 통해 보수를 받은 적이 없는 선수 3)헌장26조를
위배하지 않는 선수로 규정했고, 1)직업을 중단하고 장기
트레이닝을 통해 경기능력 향상을 위한 기회를 부여받은 국가
아마추어 2)위와 같은 목적으로 의무를 면제받고 있는 군인
3)운동 능력을 이유로 장학금 또는 그밖의 특전을 받으며
교육기관으로부터 편의를 제공받는 선수는 올림픽헌장 26조의
아마추어 제한 규정에 위배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규정은 우리 같은 일반인들에게는 그래도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자본의 상업주의와, 현재는 동구권
사회주의의 소멸로 위축되어 있는 국가주의를 배제하고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일반인들의 개인적 참여가 가능한, 따라서
일반인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세계대회로서의 의미를 담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대부분 흑백필름에서나 볼 수
있는 추억이 되었지만, 과거 특히 서구의 경우 올림픽 참가
선수들은 물론 메달 수상자 중에도 일반인들을 심심하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이 때도 이 ‘일반인’들은
계급적 지위에 따른 시간적 금전적 문화적 자원의 격차로 인해
대부분 교수, 의사, 기업인 등 부르주아에 속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규정조차 제대로 준수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1952년 헬싱키올림픽 이후 소련 등 동구권의 국가
아마추어(State Amature) 선수들의 참여와 196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국가들의 상업주의에 의해 완전히 무시되었다.
올림픽이 이렇게 된 것은 근대올림픽의 시작과도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의 부르주아인 쿠베르텡이 올림픽운동을 벌인 동기 중에
하나는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에 있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청년들이 독일청년들에 비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약해서 전쟁에 졌다고 보고 스포츠 교육을 통해 프랑스를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나라들 역시 올림픽을 통해 이
같은 패권주의를 국내외적으로 활용한 것은 자명하다.
서구강대국들은 근대올림픽을 국가 패권주의와 정치, 이데올로기
대결로 오염시켰다. 히틀러의 독일은 올림픽을 국내외 정치와
전쟁 준비에 활용했고 극도의 인종주의를 드러냈다. 1964년의
동경올림픽은 일본이 전범국으로서의 책임을 벗는데
이용되었으며 1968년 멕시코올림픽은 국내의 반정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데 활용되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학살로
집권한 군사 정권의 정권 유지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 1984년 LA올림픽은 오늘날의 비즈니스 올림픽의
교과서가 되었다.
근대 올림픽이 이상으로 삼고 흉내내려 했던 고대올림픽도 그리
아름답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애초의 탄생 사연에서 알 수
있듯이 올림픽은 역설적으로 전쟁의 결과이자 배타주의의
산물이다. 올림픽기간에는 전쟁도 멈추고 경기에 임했다지만
그건 그리스 도시국가들 끼리만의 얘기일 뿐이다. 아테네까지
달려간 그 병사가 죽어가면서도 전하려 했던 것은 그리스 외부의
적국이었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이겼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죽음을 애도해서 우리끼리는 평화롭게 살자고 만든
게 올림픽이다. 즉 이들에게 그리스 외부는 그냥 변방의
오랑캐였고 올림픽을 통해 도모하려던 평화는 같은 신을 모시는
‘선택받은 민족의 평화’이다. 일종의 선민의식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는 얘기다. 그때의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인데 이란은
현재까지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고 있다.
육체와 정신이 조화된 인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당시 시민계급들 즉 노예소유주인 남자들만의 얘기다.
여성과 노예들은 참가할 수 없었던 극히 귀족적이고 가부장적인
대회였다는 말이다. 평소에도 소위 육체와 정신을 조화할 기회가
널려 있는 특권 계급들이 모여서 경기를 하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단 말인가? 초기에 우승자에게 월계관만 수여하던
아마추어적인 수수함도 고대올림픽 후기로 갈수록 상금과 특권의
규모가 커지고 거기에 발맞춰 이 같은 특권을 노리고 장기적인
훈련을 실시하는 참가자들이 늘게 되었으며 도시국가들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하층민 가운데 신체조건이 뛰어난 자를
고용해 신분을 속이고 출전시키는 등 점차 프로화되었다고 한다.
이같은 양상은 근대 올림픽도 마찬가지였다. 근대올림픽 초기
당시의 정말 꼴같잖은 특권 계급들은 소위 ‘젠틀맨
아마추어만’을 진정한 아마추어로 쳐주었다고 하는데 이 젠틀맨
아마추어라는게 전혀 직업을 갖지 않는 경기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 ‘직업 없이도 놀고먹을 수 있는
유한계급’이 진정한 아마추어란다. 심지어 어떤 대회는 아예
직업에 종사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참가를 불허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귀족 중에서도 유한 계급만이 참가할 수 있는
일종의 계급 장벽이었던 셈이다.
현대의 올림픽이라고 이와 다를까? 고대올림픽과 근대초기의
각종 운동경기들이 특권 계급들만의 놀이였듯이 현대의 올림픽과
스포츠는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계급화 되었다. 차이점은 출전
자격을 인위적, 제도적으로는 제한하지 않고 자본과 국가가
실질적으로 통제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구사회주의권의 올림픽 출전자들은 국가의 지원 아래 노동과
병역을 면제받고 장기적인 훈련을 거친, 실질적으로 프로와
똑같은 아마추어들이었고, 말하자면 그쪽 체제에서 특권을 얻은
자들이었다. 이들이 올림픽의 아마추어리즘을 조롱하면서 여러
종목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게 되자 서구자본주의 국가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규정을 뜯어 고쳐 프로선수들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미국이 완전히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육상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이제는 국가와 자본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올림픽은 물론 웬만한 대회에는 제대로 참가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성공한 스포츠선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자본이 되고 개인으로서 부르주아의 성원이 된다. 이렇게
구경거리로서의 스포츠는 국가와 자본이 관리하는 하나의 산업이
되었고 그 중 가장 커다란 이벤트의 하나인 올림픽은 돈과
첨단과학, 그리고 약물의 축제가 되어 버렸다 ― 요새의 약물
투여는 시합 직전의 일회적인 투여가 아니라 근육 강화 등을
목적으로 장기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심지어 지난 1997년
국제육상연맹은 금지약물 복용선수에 대한 징계 기간을 4년에서
2년으로 단축시켜 버렸다. 그래서 성화가 아니라 달러에
주사기를 꽂고 봉송해야 한다는 농담이 나왔다고 한다 ― 지금
올림픽 스타디움을 달리고 있는 선수와 일반 근로대중 사이에는
최소한의 생물학적인 동질성 외에 다른 공통점이나 공감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 모든 사태의 귀결은 바로 소외다. 이게 소외가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전세계 노동자와 근로대중들은 올림픽이라는
운동경기에서조차 구경꾼 신세가 되었으며 오로지 스포츠 자본의
이윤확보를 위한 재료이자 수단이 되었다. 자동차용 휘발유에
붙는 세금이 70%를 훌쩍 넘어도, 전기세가 두 배로 뛰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올림픽중계 보느라 밤을 새는 이 나라
사람들은 그 극단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냥 재미있는 쇼로 가볍게 볼 수도 있지만 구경꾼 신세가 그리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경우도 선수들이 뛰어 다니는
것을 TV로 보고 있노라면 밖에 나가서 달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아직도 간혹 있다. 청소년 때나 그러는 거라고들
하지만 청소년 때는 맘놓고 달릴 수 있었나? 간혹은 나도 전날
몸에 쌓인 니코틴을 싹 털어 버리고 온몸에 깨끗한 피를 펌프질
해 주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정신의 요구이기 이전에
육체의 요구에 가깝다. 그러나 오늘날의 근로대중들은 이를 위해
여러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요새는 개인적으로 운동을 하려고
해도 시간과 돈을 내야 한다. 내가 사는 봉천동에는 사방을
둘러봐도 공공 운동시설은 물론 그냥 달릴 만한 곳도 마땅치
않다. 봉천동뿐만이 아니라 서울 거의가 다 그렇고 일전에
살았던 다른 도시 역시 마찬가지다. 간혹 운동복 차림으로
골목길을 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탁한 공기는 물론이고
엇갈리는 길이나 모퉁이를 지날 때는 자동차에 조심해야 한다.
주변의 공공시설은 차치하고라도 하루의 노동에 지친 몸은
들어가서 자고 싶을 뿐이며 그게 아니더라도 일단 시간이 없고
돈이 아쉽다. 거의 날마다 체육진흥기금인지 세금인지를 내고
있는 것 같은데 정작 자기 자신의 체력 육성은 날아가고 없는
것이다. 간혹들 우스갯소리로, 전철 안에서 철봉하는 사람
얘기를 하면서 황당하다고 웃을 때가 있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내가 가끔 그런 충동을 느낀다.
스포츠 산업의 성장은 자본주의에서, 특히 한국 같은 나라에서
근로대중의 체육을 질식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매리언
존스가 금을 몇 개를 따든 마이클 존슨이 이번에도 금을 따든
말든, 모리스 그린이 세계 기록을 세우든 말든 그게 인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경기를 마친 후 서로에게 축하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이 갑부 선수들의 대부분은 올림픽 사이사이에도
각종 국제대회에서 자주 얼굴을 맞대는 사이다. 평소에 크고
작은 대회에서 같이 쇼를 벌이다가 올림픽에서 큰 건 한번
터뜨리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 오가는 따뜻한 포옹은 그래서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우정인지 뭔지가 아니라 직업적 계급적
동료의식에 가까워 보인다. 자본과 첨단과학과 직업정신으로,
때로는 약물로 육성된 이 육체들의 기록이 인류의 기록인가?
그렇다면 나는 인류가 아니었다는 얘기겠지.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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