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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진 승리, 하지만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 강 상 구/ 민주노동당 연대사업부장 WTO 각료회의 투쟁 참가기 도착, 투쟁의 시작 기다리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30시간이 넘는 비행,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밀림과 그 옆에 닿아 있는 카리브해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칸쿤에 도착했다. 돈 많은 미국의 부자들이나 온다는 초특급 휴양지 칸쿤에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한다.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3만 명의 빈민층이 사는 구 시가지와 에메랄드 빛 바다를 끼고 늘어서 있는 호텔존.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모습은 호텔존의 정확히 중간쯤에 위치한 컨벤션 센터에서 WTO 각료회담이 열리고, 거기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바리케이트 너머 구 시가지에서 투쟁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더욱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현지의 긴장감은 9월 9일 아침에 있었던 발대식에 멕시코 경찰이 과민하게 대응한 데서 어렵지 않게 드러났다. 60~70명의 한국투쟁단은 숙소 앞에서 간단한 발대식을 했는데, 갑자기 나타난 멕시코 경찰들이 대오를 둘러싸고 발대식을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행사를 계속 진행하려는 한국투쟁단과 이를 멈추게 하려는 경찰 사이에는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중간의 한국 실무자들은 당황했다. 급히 걷은 현수막, 그리고 조금 일찍 마치게 된 발대식. 첫날의 이 사건은 장시간 비행으로 지쳐 있던 한국투쟁단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투쟁단은 다음날과 며칠 후에 있을 두 차례의 큰 규모의 시위에 참여하고, 이런저런 포럼 및 세미나에 참석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뿐 이후 투쟁의 파고가 어느 정도가 될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경해 동지의 자살, 투쟁의 격화 9월 10일 국제농민공동투쟁의 날. 숙소 내 상황실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킬로미터 제로’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바리케이트 앞에서 한국 투쟁단 중 한 명이 자해를 했다. 게다가 지금 사람들이 다치고 난리다. 빨리 약을 들고 뛰어나와라.” 이것이 전해들은 이야기의 전부였다. 우리는 뭔가 일이 크게 터졌음을 짐작하고, 곧바로 약을 챙겨 숙소를 뛰쳐나왔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곳곳이 경찰의 봉쇄로 막힌 상황이었고, 우리는 숙소에서 킬로미터 제로까지 택시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밀림 속에 낸 작은 쪽길을 돌아 2시간 만에 도착했다. 찌는 듯한 폭염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망연자실한 표정. 도착하자마자 간단한 상황을 전해들은 나는 그날 오후 5시에 있을 기자회견문을 써야 했다. 해외 언론에서는 이미 이경해 씨가 사망했으며, 자살한 것이 아니라 바리케이트 위에 앉아 있다 실수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사고가 난 것이라는 내용의 보도가 나가고 있었다. 상황을 분명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수첩을 꺼내들고 이경해 씨는 WTO에 항의하기 위해 자해한 것이며, 현재 병원에서 치료중이라는 내용의 회견문을 써내려 갔다. 하지만, 짧은 기자회견문 준비를 마치는 순간 다시 들려온 소식은 이경해 씨가 결국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전체 대오는 병원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대오를 쫓아 뒤따라가며, 다시 기자회견문을 정리했다. “오늘 이경해 동지의 죽음은 한국 참가단과 수많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깊은 슬픔을 주었다…이경해 씨는 WTO와 초국적 자본에 의한 농업의 피폐화,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 말살에 항의하기 위해 분명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날 밤 병원 앞의 투쟁은 촛불시위로 시작하였다. 한국투쟁단과 주변에 함께 모인 해외의 활동가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끼며,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병원 앞의 작은 거리는 사람들로 메워졌고, 곳곳에서 촛불이 하나둘 켜졌다. 한번은 한국투쟁단이 추모의 노래를, 한번은 외국의 활동가가 이경해를 생각하며 발언을 했다. 한국투쟁단은 그 발언에 이어 투쟁의 결의를 밝히고, 또 다른 외국의 활동가는 끝까지 같이 싸우자며 다시 노래를 불렀다. 그날 한국투쟁단은 긴 논의 끝에 동지가 돌아가신 자리에서 천막 농성을 할 것, 매일 6시에 촛불시위를 할 것, 그리고 각종의 추도 대회를 할 것을 결정하였다. 투쟁의 과정에서 강제추방 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으나, 이를 염려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싸우러 왔고 이제 비로소 싸움은 시작되었으므로, 할 수 있는 모든 투쟁을 하면 그뿐이라는 분위기가 투쟁단 전체를 감쌌다. 천막은 새벽쯤 쳐졌고, 사람들은 농성을 시작했다. 다음날 우리의 농성장은 전 세계 WTO각료회담 저지 투쟁의 해방구가 되었다. 각료회담을 취재하러 왔던 수많은 기자들이 농성장으로 몰려왔다. 그리고 그 보다 훨씬 많은 칸쿤의 시민과 외국의 활동가들이 연대하기 위해 농성장을 찾았다. 꽃을 들고 영정을 찾은 칸쿤 시민, 쌀밥과 수박을 싸들고 찾아왔다는 멕시코의 한국 교민, 각료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칸쿤에 왔다가 찾아온 남미 어느 좌파정부의 외교부장관, 그리고 농성 기간 동안 하루 150명분의 음식을 제공해주기로 약속한 비아깜페시나 까지, 이들 모두는 한국투쟁단에게 깊은 위로를 보냈고 우리의 투쟁을 성원했으며 함께 연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미 며칠간의 투쟁으로 많이 지쳤을법한 한국투쟁단은 번듯한 호텔 대신 숙소로 삼은 천막 아래와 그 주변에서, 몇몇은 쓰러져 있기도 하고 몇 사람은 외국 활동가와 대화하면서, 그리고 대부분은 이리저리 분주히 움직이면서 추모대회를 치르고, 6시 촛불집회를 사수했다. 투쟁의 중간에 우리는 해외와 국내 언론의 동향을 주시했다. 이경해 동지가 자결한 첫날부터 시작된 왜곡보도를 적절히 통제해야 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투쟁에 대한 폄하는 국내보다는 오히려 해외의 언론이 심했다. 투쟁의 방식으로서 ‘자살’을 택하는 문화가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탓인가? 기자 브리핑장에 온 어느 미국 언론은 이경해 씨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 하는 따위의 질문을 하면서 우리를 가미가제식 투쟁을 하는 집단으로 매도하려 하였다. 우리는 “권력에 항의하기 위한 한국민중투쟁의 역사에서 ‘자결’은 때때로 있어온 일이다. 하지만, 이경해 씨의 자결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하며, 또 다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WTO 각료회담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고 우리의 입장을 밝혔다. 바리케이트를 무너뜨리다. 투쟁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투쟁단에 대한 해외 활동가들과 칸쿤 현지 시민들의 환대는 대단했다. 칸쿤 시내에는 투쟁 소식을 진보적 관점에서 전파하기 위해 독립미디어센터IMC(Independent Media Center)가 차려져 있었다. 이곳에는 원래 기자 신분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지만, 한국투쟁단만은 예외였다. 우리들은 그야말로 ‘얼굴이 신분증’이었다. 처음 IMC에 갔던 날, 외국의 활동가들은 내 손을 잡고 등을 토닥여주었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건물의 이곳저곳에는 온통 한국투쟁단의 사진과 기사로 도배되어 있는 신문이 잔뜩 쌓여 있었다. 길을 걷다 만난 칸쿤 시민은 우리를 보고 ‘노 알라 오엠에쎄(No a la OMC)-WTO 반대’를 외쳤다. 어떤 택시노동자는 택시비를 받지 않기도 했다. 거리에서 우리를 만난 많은 현지인들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고, 어느새 익혔는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이경해 씨의 자살 장면, 한국투쟁단의 투쟁 장면이 반복해서 방영되었다. 이경해 씨 죽음 이후 한국투쟁단은 그야말로 세인들의 관심의 가장 중심에 있었으며, 동시에 WTO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9월 13일 국제민중공동행동의 날에는 약 3000여명의 활동가들이 시내에 집결했다. 물론, 그 선두에는 한국투쟁단이 섰으며 뒤를 이어 각국의 농민, 학생, 노조원 등이 줄을 이었다. 집결한 활동가들은 킬로미터 제로까지 행진하였고, 곧이어 바리케이트 앞으로 집결하였다. 각국의 투쟁단은 각자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고, 일부는 춤을 추었으며, 아예 악단이 통째로 참가하여 연주를 하면서 행진하는 대오도 있었다. 바리케이트 앞에 모인 대오는 한 동안 계속해서 구호를 외치고 춤을 췄다. 한차례 쏟아 부었던 비는 대오의 열기를 식혀주었고,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사람들은 바리케이트 너머의 경찰과 그리고 그 너머의 지배자들과 맞서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동아줄을 몇 가닥으로 더욱 굵게 엮은 한국투쟁단은 전농을 중심으로 전체 대오의 맨 앞으로 행진했다. 사람들은 한국투쟁단이 가는 길을 터주었고, 한국투쟁단은 바리케이트 가장 앞쪽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바이케이트 돌파 투쟁이 시작되었다. 일군의 여성 활동가들이 바리케이트에 뛰어 올라 절단기로 철망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서 대오는 소리를 지르고, 구호를 외쳤다. 묘하게 잘 어우러진 꽹과리와 이름 모르는 외국 활동가의 타악기 소리는 투쟁의지를 더욱 고조시켰다. 절단기로 웬만큼 철망이 제거되자 이번엔 한국 투쟁단이 굵은 동아줄을 들고 바리케이트 위에 올라갔다. 이제 시작이다. 꽹과리 소리는 점차 커지고 다른 한 쪽에 있던 악단의 음악 소리 역시 귀를 더욱 세게 울렸다. 한국 투쟁단과 외국의 활동가들은 손을 겹쳐가면서 동아줄을 잡았다. 이윽고 전농 동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동아줄을 힘차게 당기는 수백의 대오들. 바리케이트는 그렇게 몇 차례 시도 끝에 붕괴되었다. 당시의 느낌 그대로를 말하자면, 철제 바리케이트는 아주 쉽게 ‘찢어져버렸다.’ 붕괴된 바리케이트 앞에서 전체 대오는 한국투쟁단의 주도로 WTO 화형식을 진행했다. 투쟁이 진행되는 순간에 모든 활동가는 하나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집회를 하면서 ‘Down Down WTO’를 외쳤고, ‘인터나시오날레 솔리다리떼’를 외쳤다. 같은 시각, 전날 강제추방을 결의하고 투쟁에 나서기로 했던 결사대는 컨벤션 센터 앞에서 WTO반대 구호를 위치며 기습시위를 벌였다. 투쟁의 승리와 평가 결과적으로 이번 각료회의는 최종 선언문을 남기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9월 14일 WTO 제5차 각료회담이 최종 선언문에 합의하지 못하고 결렬되자 전체 투쟁단은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에 빠졌다. 한국투쟁단은 해외 연대 단체의 활동가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모두들 들뜬 분위기였다. 빛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각료회담 무산이 우리 투쟁의 결과라고 평가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다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지금 이번 투쟁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하다. 우선, 이번 투쟁의 준비가 지극히 미흡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칸쿤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사실 이번 투쟁에 대해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5월경부터 이번 WTO 각료회담 저지 투쟁의 의미를 WTO․국민행동 집행위원회를 중심으로 국내에서 제대로 알리기 위한 노력이 있었고, 각료회담 전에 국내에서 이러저러한 투쟁을 하자는 제안들이 문서상으로는 빼곡했지만 실제로 힘있게 진행된 사업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의 힘있는 투쟁 없이 달랑 현지 투쟁단을 보낸 꼴이니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투쟁이 제대로 될 리는 별로 없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만약 이경해 씨가 자결하지 않았어도 투쟁이 성공적이었을까라는 가정은 일리가 있다. 둘째, 투쟁을 진행하면서 각료회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제대로 공유가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투쟁을 승리하고 나서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농업협상에서 유럽과 미국의 대립이 아니라, 미국과 G22와의 대립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싱가포르 이슈에 대해서 개도국의 반대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투쟁단 전체 차원에서 공유하지 못했다. 셋째, 위와 같은 정치 지형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정치지형에 걸 맞는 적절한 투쟁 전략수립이 없었다. 이는 각료회의가 무산된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이후 투쟁전략에 대한 국제적으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넷째, 각료회담에서 논의된 12개 의제가 모두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투쟁은 주로 농업 문제에만 집중됐다. 물론 농업이 이번 각료회담의 핵심의제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교육․보건 등 서비스 협정 관련 투쟁, 싱가포르 이슈 관련 투쟁은 매우 미흡했다. 특히 WTO 각료회담이 일괄타결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서 12개 의제 중 하나만 합의가 되지 않아도 협상타결이 안된다는 점을 볼 때, 이후 각료회담에서 혹시나 한 의제가 타결되더라도 다른 의제에 대한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 WTO DDA 협상 전체를 좌초시킬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이를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의제에 대해 각 사안을 전담할 대중적 투쟁 주체를 세워놔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칸쿤 출발 전에 발생했던 비행기표 구입 등의 실무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WTO 반대 투쟁에 대한 국내 민중운동의 관심과 역량 배치 정도가 심각하게 낮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WTO․국민행동 사무국은 지나치게 과중한 업무를 맡아야 했고, 결국 실무 처리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 투쟁으로 WTO 문제는 비로소 운동진영 내부에서 관심을 얻기 시작했다. 그 관심을 적절한 실천으로 바꿔내고, 이후 계속될 WTO 투쟁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기대만큼의 역량배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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