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연구소소개 |
자유게시판 |
추천사이트 |
운영자에게
기초세미나
|
연구세미나
|
지난 게시판 모음
출판물 안내
|
논문/시론
|
콜로키움/토론회
|
연구원마당
|
참고자료실
|
과거 자료실 모음
권두언 | 정세-컬럼 | 특집-기획 | 논문-기획번역 | 현장-지역 | 연구소소식 | 기타
동향자료
|
주간동향과 초점
과월호 보기 (제106호 이전)
제목
내용
필자
전체
최근일년
최근한달
최근한주
전체
>>
과월호 보기
<<
(제106호 이전)
현장에서 미래를
>
수정하기
글쓴이
기자/글쓴이의 이름을 입력
이메일
이메일 주소를 입력
발행호수
제
호
분야 선택
==============
권두언
특집
컬럼
노동자민중세상
논쟁과 쟁점
연재-기획
시사만평
알림-소식
(노동자세상)
발행호수,기사의 분야 입력
발행일자
(형식: 2003.5.1)
현재 날짜와 다를 때만 입력
HTML
사용함
사용안함
'사용안함'도 기본태그 적용됨
제목
보조 제목
Textarea size config
지금현장은 이주노동자투쟁: 돌맹이처럼 굳세게 힘차게 변정필 / 국제사업위원장 명동성당 들머리, 이주노동자 농성투쟁 달력은 어느덧 200일을 달려가고 있다. 2003년 11월 15일 강제추방저지․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쟁취를 걸고 200여명이 명동성당 들머리로 진입할 때만 해도 그 누구도 이 농성장의 농성달력이 200일을 향해 달려갈 수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부의 후퇴! 그러나 멈출 수 없는 투쟁 지난해 11월 15일은 정부에서 고용허가제 시행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 성격을 띤 불법체류자 합동단속을 강력히 집행하겠다고 천명한 날이었으며, 전국의 이주노동자들은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보루로 농성투쟁을 결의하며, 명동성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5월 현재까지 4차례의 공식적인 합동단속이 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작년 겨울 8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의 공포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지난 4월 또 다시 2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자살을 선택했다. 서울 도심에서 농성투쟁을 진행했던 명동성당 농성투쟁단을 비롯해 성공회 농성단, 안산, 대구 등 전국의 농성장과 합동단속을 피해 쉼터에 모여 있었던 이주노동자들의 수는 천여명을 넘었다. 이주노동자들이 주로 일을 하던 지역에서 사장들은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을 쳐댔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호언장담하였던 고용허가제 시행을 위한 사전정지작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들은 제발로 걸어서 한국을 나가지 않았고, 결코 한국을 떠날 수 없다는 이주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은 한국정부를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1월 17일 정부는 그 동안 강경했던 입장을 바꾸어, 자진출국을 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산업연수생제 또는 고용허가제로 재입국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협상안을 내 놓았다. 이에 대해서 함께 농성투쟁전선을 유지해왔던 성공회 농성단은 정부안을 받아들이고, 농성투쟁을 해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명동농성투쟁단은 정부안은 또 다시 이주노동자들을 기만하는 내용 없는 후퇴안일 뿐이며, 끝까지 싸워서 한국에서 합법화를 쟁취하고 나아가 고용허가제가 금지하고 있는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결코 투쟁을 멈출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2월 6일 성공회 농성단이 해산한 이후, 명동농성투쟁단은 홀로 40만 이주노동자의 생존을 위한 투쟁전선에 외롭게 서야만 했다. 정부의 후퇴! 그러나 진정한 승리를 위해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아슬아슬했던 공동투쟁전선 그리고 그 파산 애초 11월 농성투쟁은 지금까지 이주노동자운동의 다수를 점하고 있었던 이주노동자지원단체와 이주노동자운동을 노동조합운동으로 조직하기 위해 악전고투해온 평등노조산하 이주노동자지부의 공동투쟁을 민주노총이 조직하면서 출발되었다. 80년대 말 한국사회에 이주노동자가 유입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주노동자 지원사업을 통해 끊임없이 이주노동자들을 모아낸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는 국내 이주노동자운동에서는 여전히 큰 역할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지원단체까지 함께 대 정부투쟁을 힘있게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나 출발 당시부터 이주노동자 지원단체와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 사이의 고용허가제에 대한 입장차이, 그리고 이주노동자 운동을 대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 지원단체와 이주노동자 자기조직화의 결과인 이주노동조합은 그 역사적 차이로 인해 삐걱거렸고, 결국 농성투쟁 돌입 첫날 공동농성투쟁단 건설 시도는 무산되어 결국 각각 농성투쟁을 진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동농성투쟁단은 끊임없이 공동의 집회와 논의를 통해 공동투쟁의 의미를 살려나가고자 노력했다. 공동의 기자회견과 집회투쟁을 통해 공동투쟁전술은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을 사회적으로 알려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실질적인 정부의 양보를 받아내기에는 미흡했다. 가장 큰 원인은 명동농성투쟁단이 이주노동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는 농성장을 비롯한 쉼터를 주도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전국적인 계획을 내고 집행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오히려, 공동투쟁기조에 긴박당하면서 전선을 전진시킬 수 있는 선도적인 투쟁을 계획․집행하지 못했다. 이 것은 바로 그 동안 지원단체가 이주노동자 운동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노동운동으로써 이주노동자 투쟁과 운동의 성과가 축적되지 못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대중투쟁의 가능성을 발견하다! 그러나 2월 6일 성공회 농성투쟁단이 정부의 협상안을 수용하고 농성투쟁을 접으면서 지원단체의 운동으로 대리되고 점유되었던 이주노동자 운동의 지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명동 농성투쟁단은 1월 17일 총회를 통해 정부의 협상을 거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다른 농성단이 정부 협상안을 받아들일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명동농성투쟁단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정부의 재입국안을 거부하면서, 이주노동자 자신의 목소리로 조직한 투쟁만이 이주노동자 자신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확인했다. 지역에서 성공회 농성단과 명동농성투쟁단이 무엇이 달라 농성을 따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던 이주노동자들은 성공회농성단의 결정에 대해 불신의 눈길을 보냈다. 정부의 산업연수생제 및 고용허가제로의 재입국안이 결코 이주노동자들의 대안이 될 수 없었고, 한국 땅에서의 삶을 몽땅 걸고 돌입한 농성투쟁의 성과로 받아들이기에는 절대적으로 미흡했기 때문이다. 한국 땅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로 인정받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욱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홀로 전선에 남게 되면서, 명동농성투쟁단은 농성투쟁단이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지역조직화를 결의했다. 지역의 이주노동자들의 불만과 불안은 여전히 극에 달해있었으며, 이 분노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명동농성투쟁단은 2월 10일 2,130명의 이주노동자 발의로 자진출국을 거부한다는 선언을 내고 자진출국거부 서명운동을 전국적으로 발의했다. 지역으로 내려가 이주노동자들이 직접 정부의 자진출국정책을 거부한다는 서명을 받았고, 농성투쟁 100일 기념집회에서는 70여명에 불과한 농성투쟁단이 1000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하면서 이주노동자 대중투쟁의 새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안산, 수원, 안양, 일산, 의정부 등 지역의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깃발을 들고 마로니에 공원으로 모여들었다. 더욱 거세진 정부의 탄압 그러나 명동농성투쟁단이 홀로 투쟁전선을 지키게 되자 정부의 탄압은 더욱 거세졌다. 정부의 자진출국정책을 거부하는 운동이 이주노동자들에게 확산되면서,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이 주권에 도전한다며 펄쩍뛰었고, 2월 21일 사회단체와 연계하여 불법집회에 참석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전원 연행․강제퇴거 시킨다는 방침을 천명하고 4차 합동단속에 들어갔다. 특히 4차 합동단속에서는 지역조직화가 활발한 지역을 표적으로 삼아 단속하면서 투쟁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지역은 얼어붙었다. 투쟁과정에서 연행된 이주노동자들을 석방하라는 32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투쟁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100일 투쟁에서 희망을 발견했던 농성투쟁단은 이제 다시 투쟁의 전망을 회의하고, 동요했다. 농성투쟁단의 재정은 고갈되어가고, 지역의 이주노동자들은 강력한 단속이 농성투쟁 때문이라며, 농성투쟁단을 외면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투쟁의 전망을 밝히지 못하고 농성장을 떠나가는 동지들이 늘어갔다. 그리고 명동농성단의 오늘 농성초기 40만 이주노동자의 대표로 자임하면서 농성투쟁에 돌입한 이주노동자들은 역사를 이해하고 있었다.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땅에서 더 이상 억압과 착취의 역사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역사를 써야할 시기가 왔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에 걸맞은 투쟁을 힘겹게 그러나 힘차게 끈질기게 진행해 왔다. 농성투쟁이 길어지면서 이주노동자들은 이제 스스로에게 농성투쟁이 남긴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물론 농성투쟁단의 이름에 내걸었던 바, ‘강제추방저지’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 쟁취’는 아직도 요원한 과제이다. ‘강제추방저지․미등록이주노동자전면합법화’라는 투쟁의 요구는 단기적인 투쟁으로 쟁취되지 못했다. 이제 8월 17일 고용허가제 시행을 앞두고, 이제 이주노동자들의 요구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투쟁해야 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을 노동자의 신분으로 실질적으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제도 아래서여야만 불법․합법의 문제 또한 해결될 수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고용허가제의 법제도 일부개선이 아니라, 노동자의 신분으로 한국 땅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비자 쟁취를 통해서만 모순적인 한국의 이주노동자 정책도 제자리를 찾고 노동자로써 일할 수 있다는 것도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이 명동 들머리의 이주노동자들, 아쉽게 농성장을 떠나간 동지들 또한 더욱 중요한 하나의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얻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한국 땅에서 노동하는 ‘노동자’이며, 스스로가 문제해결의 주체로 조직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의 투쟁을 통해 그 동안 종교계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되었던 이주노동자 운동을 한국의 노동운동과 결합한 운동으로 확장시켜왔다. 또한, 이주노동자운동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 속에서 그 발전 전망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농성투쟁단은 이후 이주노동운동을 책임질 수 있는 주체로 결의하고 단련되어가고 있다. 정부는 수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시행해 보기 전에는 어떤 변화도 없다는 입장을 여전히 고수하면서 8월 고용허가제 시행방침을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고용허가제 시행 이전에 이에 준하는 E-9비자를 통해 합법화된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으로 인해 고용허가제 아래 있는 사업장을 몰래 빠져나와 또 다시 불법이주노동자가 되고 있다. 고용허가제의 독소조항인 사업장이동의 자유제한에 걸려 사장아래에서 숨죽이며, 떠날 수 있는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늘어가고 있다. 끝난 줄 알았던 이주노동자 자살의 행렬은 올해 또 다시 이어져 4월 이후에 벌써 두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런 이주노동자들의 분노가 살아있는 한, 8월 시행예정인 고용허가제를 분쇄하기 위한 명동성당 이주노동자들의 농성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무너진 지역의 한 곳 한 곳을 다시 세우며, 또 다시 전국적인 이주노동자 투쟁을 만들기 위한 무거운 발걸음을 띠고 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다시 타오르게 될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의 불씨 또한 꺼지지 않았다. 아침 집회에 가기 전 아침식사로 우유한잔을 마시던 이주노동자가 말을 걸어온다. “우리 지치지 않아요. 돌멩이예요. 돌멩이처럼 굳세게”라며 내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명동성당의 이주노동자들은 잘 알고 있다. 자신들의 투쟁은 바로 한국 땅에서 인간선언이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길임을. 한/노/정/연
파일수정
미디어 주소
음성,동영상,플래시,PDF 파일 등 미디어파일의 주소(링크)
미디어 제목
※기사 제목과 다를 때만 입력
비밀번호:
목록보기
이전페이지
(구)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00-272) 서울시 중구 필동2가 128-11 상전빌딩 301호 Tel.(02)2277-7957(팩스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