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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YPE HTML PUBLIC "-//W3C//DTD HTML 4.0 Transitional//EN"> <!-- Document Start --> <P STYLE='font-family:"휴먼명조";font-size:19px;color:"#000000";text-align:center;line-height:17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파병철회, 촛불집회에 대한 단상 몇 가지<SUP>¶</SUP><A HREF="#FOOTNOTE1"><SUP>1)</SUP></A>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center;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center;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center;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A NAME="#1727636203"></A> <TABLE border="1" width="88px" height="33px"cellspacing="0" cellpadding="0" style='border-collapse:collapse;border:none;'> <TR> <TD height="17px" width="88px" valign="middle" style='border-left-width:0.10mm; border-left-color:#000000; border-left-style:none;border-right-width:0.10mm; border-right-color:#000000; border-right-style:none;border-top-width:0.10mm; border-top-color:#000000; border-top-style:none;border-bottom-width:0.12mm; border-bottom-color:#000000; border-bottom-style:solid;'><P CLASS=HS16> 정 현 진</TD> </TR> <TR> <TD height="16px" width="88px" valign="middle" style='border-left-width:0.10mm; border-left-color:#000000; border-left-style:none;border-right-width:0.10mm; border-right-color:#000000; border-right-style:none;border-top-width:0.12mm; border-top-color:#000000; border-top-style:solid;border-bottom-width:0.10mm; border-bottom-color:#000000; border-bottom-style:none;'><P CLASS=HS17> 연구원</TD> </TR> </TABLE>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친미적 성향이 굉장히 강한 필리핀조차 파병을 철회하는 마당에 한국 정부의 파병 강행결정은 온 국민을 분노에 휩싸이게 할 정도로 막무가내이다. 그리고 얼마 전, 미국 의회 산하의 ‘9ㆍ11 테러진상조사위원회’는 “대량살상무기 보유와 알-카에다와의 연계성을 입증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발견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부시 정권의 의도적인 정보조작과 왜곡이 드러났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역설적이게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세계의 평화수호자로서의 가면을 썼던 미국 내부에서 이라크 전쟁의 부당성이 공식적으로 입증되는 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지금 미국과 영국은 혼란에 휩싸여 있다. 부시<A NAME="#1728402071"></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0.gif" width=431px height=0px >와 블레어는 평화는커녕 전쟁을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이 빈틈을 파고들고 있는가? 파병철회투쟁의 의지와 결의, 김선일씨의 사망에 대한 우리의 책임, 평화를 바라는 염원은 과연 부시와 블레어의 심장을, 노무현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는가? 지난 파병철회투쟁을 바라본다면 비판적인 평가를 벗어나기 힘들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A NAME="#1737183392"></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1.gif" width=240px height=23px >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그 중에서 촛불집회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CLASS=HS53> 1. 촛불집회의 성과와 한계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6월말은 김선일씨의 피랍과 사망으로 그 전까지의 파병철회 투쟁과 비교하여 새로운 국면이 창출된 시기이다. 파병철회라는 쟁점이 다시 대중적으로 회자되기 시작했으며 광화문의 동력을 중심으로 투쟁동력이 상승의 국면을 그리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촛불집회의 조직과 대응이 어떤 효과들을 낳았는가를 중심으로 평가가 가능하겠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6월말의 정세는 확실히 대중들 사이에서도, 운동주체들 사이에서도 긴급한 정세임을 직감할 수 있는 시기였다. 학생운동 진영 내에서 농활폐기 논의가 오갔다는 점만 보아도 주체들의 정세에 대한 반응의 정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급박하기 조직되었지만 21일의 집회 대오가 1,000명을 넘었으며 26일의 집회는 10,000명을 넘었다. 30일의 집회까지도 비슷한 수준의 집회동력을 유지하였다. 확실히 상승의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이 시기의 촛불집회의 성과는 크게 두 가지<A NAME="#1728402072"></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2.gif" width=431px height=0px >이다. 하나는 미약하나마 긴급하게 운동주체들이 대중을 조직하여 그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빠르게 확보해주었다. 매일의 촛불집회의 일정은 운동주체들에게 최소한의 강제를 하는 효과를 가졌다. 동시에 촛불집회는 이 시기 파병찬성의 여론으로 급격하게 우경화, 반동화 되는 대중의 정서를 최대한으로 막아내는 역할을 하였다. 최소한 찬성과 반대의 여론이 팽팽히 맞서는 정도의 긴장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분명 빠르게 조직된 촛불집회는 일정정도의 성과를 낳았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A NAME="#1737471261"></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3.gif" width=161px height=23px >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급박한 정세에서, 최소한의 대중판으로서의 자기역할을 넘어 파병철회투쟁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결정적인 전술로까지 격상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여주는 예들이 21일의 집회, 26일의 집회, 30일의 집회이다. 시민들의 자유로운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파병반대국민행동 지도부의 판단은 조직된 대중, 운동주체들의 아래로부터의 자기행동과 분노의 표출을 적절한 선에서 통제하고 제어하기 시작했다. 김선일씨의 피랍과 사망으로 형성된 대중들의 불만과 투쟁의지를 보다 공격적인 전술로 연결시키지 않고 단지 촛불을 드는 것, 평화를 염원하는 것에‘만’ 머무름으로서 대중들의 분노는 적절한 선에선 통제되었다. 촛불집회가 하루 이틀 정도의 급박한 대중판으로서의 의미는 있을지언정 이것이 파병철회투쟁의 전반을 장악하게 되면서 오히려 조직된 대중은 집회에서 실망을 안고 돌아서기 시작했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이 시기 가장 핵심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사안은 전술의 변화를 빠르게 모색하지 못한 점이다. 그리고 이를 추진할 수 있는 세력은 학생운동진영이 유일한 단위였다. 30일 학생운동 차원에서 독자적인 전술이 도모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준비는 아주 미비한 수준에서, 급하게 조직되어 전술에 대한 공유 정도가 낮았고 이를 전체적으로 책임지고 대오를 운영할 단위가 불분명하였다. 대오를 빼야 하는 것인지 밀어 붙여<A NAME="#1728402073"></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4.gif" width=431px height=0px >야 하는 것인지 조차 판단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그러나 먼저 지적되어야 하는 점은 학생운동진영이 농활<A HREF="#FOOTNOTE1"><SUP>1)</SUP></A>의 대중적 연기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관악의 경우 이 논의가 진행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30일 이후의 정세의 <A NAME="#1737183394"></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5.gif" width=240px height=23px >변화가 짐작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 단대는 농활의 폐기를 결정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오히려 30일 이후 학생운동단위가 각 학교와 서울을 비우고 농활과 환활의 현장활동으로 집중할 경우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전선의 공백을 바라보지 못했다. 학생운동진영이 취해야 할 태도는 정세의 불안함 때문에 농활과 같은 안정적인 사업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정세의 급박함 속에서 정세를 책임진다는 앞서가는 태도여야 한다. 그러나 학생운동진영은 이에 대한 고민을 실천적으로 진행하지 못했고 결국 각 학교와 서울은 심각한 전선의 공백을 드러내게 되었다.<A HREF="#FOOTNOTE2"><SUP>2)</SUP></A>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농활의 대중적 연기를 결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학생운동단위가 전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변화를 모색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결국 농활을 대중적으로 연기하지 못한 상황에서 몇몇 조직이 선도투의 형식으로 전술들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 선도투마저 대중단위의 대중선동의 계획과 맞물려 진행되지 못함으로서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없<A NAME="#1728402075"></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6.gif" width=431px height=0px >었으며 ‘우리는 했다’ 정도의 자위적 평가 이상의 것을 남기지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진행은 파병반대국민행동의 한계적인 실천을 극복하고 전술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단위인 학생운동이 자기 역할을 포기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A NAME="#1737471262"></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7.gif" width=161px height=23px >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김선일씨의 피랍과 사망으로 파병철회의 쟁점이 다시 부각되었지만 운동진영은 이를 더욱 높은 수준의 대중투쟁으로 끌어 올리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파병반대국민행동 지도부의 촛불집회에 감성적 불만과 토로는 있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전술을 도모하지 못함으로서 종국에 대중들의 실망과 무기력함만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A NAME="#1728402076"></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8.gif" width=431px height=0px >고 말았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CLASS=HS53> 2. 쟁점과 주장의 문제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서울지역에서 학생운동단위가 농활 및 현장활동으로 대부분의 대오가 빠지면서 파병철회의 쟁점은 희석화되기 시작했다. 객관적인 정세는 김선일씨의 피랍과 사망에 대한 정부각처의 책임론이 부각되면서 언론에서도 외면되기 시작했으며, 파병철회의 쟁점 자체가 대중들 사이에서 다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최대한으로 막아내고 최소한의 전선을 유지할 동력은 대부분 서울을 떠나 농활과 환활 등 현장활동에 집중하고 있었다. 30일까지의 정세에서 오류로 지적되었던 점들의 결과들이 이 시기에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나마 남아 있는 대중들 사이에 무기력함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이 시기의 변화는 대중들의 촛불집회에 대한 분노들이 가시적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노는 전술에 대한 문제에서 촛불집회의 슬로건에까지 다양하게 제기되었으며 노무현 정권 퇴진의 요구들이 대중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시작했다. <A NAME="#1737183395"></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9.gif" width=240px height=23px >이러한 흐름은 7월 10일 만민공동회의 개최로 이어졌으며 기존의 촛불집회의 형식에 반대하고 직접적인 대중행동을 기획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그러나 상황은 이미 많은 부분 역전되기 시작했다. 파병철회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정도, 운동 주체들의 정세에 대한 결합정도, 학생운동진영의 파병철회운동의 전망과 방향 등 투쟁의 국면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들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이러한 과정에서 다시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이 파병반대국민행동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태도이다. 투쟁을 주도<A NAME="#1729431284"></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a.gif" width=431px height=0px >해나가는 지도부로서 파병반대국민행동은 현실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의 내부구성이 어떻고의 문제를 떠나 어찌되었든 전체 국면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말이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이러한 조건에서 앞서의 집회의 문제와 더불어 높아진 대중의 투쟁의지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을 주장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파병반대국민행동은 대중들 사이에서 촛불집회에 대한 분노가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지금까지의 투쟁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새로운 투쟁의 방식들이 필요하다는 제기가 되는 시점에서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유지했다. 단지 파병의 문제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첨병 노릇을 하고 있는 노무현에게 더 이상의 희망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파병철회투쟁의 전반적인 과정은 노무현 정권 퇴진의 요구와 그에 걸 맞는 공격적인 실천으로 조직되지 못하였다. 언제나 촛불을 들고, 노무현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것뿐이었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명확히 해야 한다. 더 이상 노무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보다 공격적으로 노무현 퇴진의 요구를 걸고, 그에 걸 맞는 공격적인 전술의 배치를 도모해야 한다. 더 이상 촛불집회의 한계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점거하고, 실<A NAME="#1728402077"></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b.gif" width=431px height=0px >질적으로 파병을 철회시키는 투쟁을 전개할 수 있어야 한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A NAME="#1737471263"></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c.gif" width=161px height=23px > </P> <P CLASS=HS53> 3. 학생운동 무엇을 할 것인가?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학생운동진영이다. 사실 파병반대국민행동의 한계적인 실천에 반대하여 다시 공격적이고 조직적인 실천을 아래로부터 조직할 수 있는 단위는 학생운동단위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7월 4일 제 학생운동조직들이 모였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학생운동단위의 공동의 실천을 도모하자는 것이 목표이다. 그러한 목표 속에 7월 17일의 학생운동단위의 사전집회가 기획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계적이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17일의 집회는 7시 광화문 촛불집회의 사전집회 격으로 조직되었다. 처음부터 7시 광화문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결정하고 사전집회를 열었다. 학생단위 집회에서의 과격한 발언, 청와대로 가자, 미대사관으로 가자는 실천적 주장은 처음부터 상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잠깐의 몸싸움이 전개되었고 이내 몸싸움은 정리되었다. 집회를 조직했던 주체들은 많은 판단을 했을 것이다. 대략 500정도의 대오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한계적이라는 판단도 했을 것이고, 보다 준비된 전술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 당장의 17일의 집회는 그렇게 진행할 수 있다. 전술의 수준을 조절하고 다음의 전술을 위한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의 전술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회성의 <A NAME="#1737183396"></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d.gif" width=240px height=23px >집회 이상의 계획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미 학생운동진영 안에서도, 각각의 주체들에게 파병철회의 쟁점은 희석화 되었고 정세의 긴장감이 상당히 떨어졌다는 것을 그대로 반증하고 있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의 한계적인 실천을 극복하자는 애초의 동의지반도, 정세적 절박함도 어느 샌가 잊혀진 듯 하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A NAME="#1728402078"></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e.gif" width=431px height=0px >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지금은 다시 토양을 쌓아야 한다. 그것도 빠르게 쌓아야 한다. 잊혀지는 파병철회의 쟁점을 다시 학내에 대중적으로 선전ㆍ선동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생운동의 독자적인 전술을 도모해야 한다. 모든 것을 걸고 파병을 철회시키자는 결의를 내세워야 한다. 17일과 같은 집회로는 어렵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이를 위해 먼저 제 학생운동조직들의 모임을 강화해야 한다. 전술을 사전에 기획하고 이를 각 단위에서 철저히 숙지하고, 전술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여 계획된 판을 도모해야 한다. 이를 통해 제 학생운동공동모임의 실천적 위상을 높여야 한다. 학생운동진영에 의해 공격적인 전술들이 도모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지 전체 국면에 파장을 미칠 수 있다. 각 단위의 운동주체들의 자신감의 문제, 정세적 긴장감의 문제, 절박함의 문제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다. 이 힘은 당장에 7월말, 8월초에 파병을 철회시키는 거대한 힘으로까지 성장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의 무기력한 파병철회투쟁의 국면을 쇄신하고 새로운 국면을 창조할 수 있는 힘은 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바로 학생운동이 목표해야 하는 바는 바로 새로운 국면의 창출이다.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BR>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지금은 작지만, 계획되어 실천하는 그런 집회가 필요하다. 촛불을 드는 것을 넘어 단지 500의 대오라 할지라도 집회를 조직하여 참석하는 각 단위의 주체들에게 분노를 심어주고, 힘을 얻어 갈 수 있는 집회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것을 다시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가 지금 시기<A NAME="#1728402079"></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2f4f.gif" width=431px height=0px > 가장 관건적인 문제이다. <A NAME="#1727636207"></A> <TABLE border="1" width="51px" height="14px"cellspacing="0" cellpadding="0" style='border-collapse:collapse;border:none;'> <TR> <TD height="14px" width="51px" valign="middle" bgcolor="#000000" style='border-left-width:0.12mm; border-left-color:#000000; border-left-style:solid;border-right-width:0.12mm; border-right-color:#000000; border-right-style:solid;border-top-width:0.12mm; border-top-color:#000000; border-top-style:solid;border-bottom-width:0.12mm; border-bottom-color:#000000; border-bottom-style:solid;'><P STYLE='font-family:"휴먼굵은팸체";font-size:10px;color:"#ffffff";text-align:center;line-height:10px;text-indent:-10px;margin-left:1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한/노/정/연</TD> </TR> </TABLE> </P> <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3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21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P> <!-- Document End --> <HR WIDTH="300px" ALIGN="left"><A NAME="#FOOTNOTE1"><P CLASS=HS11> ¶. 이 글의 작성시점이 7월 23일이기에 많은 부분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당장에 기획되어 있는 24일의 집회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과 평가를 포함하고 있지 못한 점은 한계적이다. 동시에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투쟁이라는 점에서 앞으로의 변화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점을 미리 인지해야 할 듯 하다. 다만 이 글은 지금까지의 파병철회투쟁의 과정 속에서 필자가 느꼈던 몇 가지의 문제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바라보아 주었으면 한다. </P> </A><BR><A NAME="#FOOTNOTE1"><P CLASS=HS11> 1) 6월말과 7월초, 이때쯤이 되면 학생운동진영은 농활과 환활 등 현장활동을 진행한다. 농촌사회의 모순들이 결코 이 땅의 자본주의의 모순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니 오히려 농촌사회의 모순이 이 땅의 천박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농활은 운동적으로, 정치적으로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환활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농촌봉사활동이 아니라 농민학생연대활동을 간다. 그러나 운동으로서 제기된 농활이 과연 지금에 와서 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지 진지한 자기질문을 던져야 할 때인 듯 하다. 농활이 관성화 되었다는 케케묵은 논의를 다시 꺼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단지 과연 그것이 정세의 절박한 필요를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는가라는 한 가지의 질문과 답만 있으면 된다고 본다. 파병철회투쟁의 중요한 국면에서 과연 학생운동은 농활과 환활로 모든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 옳은가? 필자는 감히 ‘아니오’ 라는 대답을 하고 싶다. </P> </A><BR><A NAME="#FOOTNOTE2"><P CLASS=HS11> 2) 동시에 농활의 정치적 의미기 지금에 와서는 정세적 필요에 따른 운동적 요구가 아니라 과 학생회의 인자 몇을 조직하기 위한 필수적인, 포기할 수 없는 대중사업의 의미로 고착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파병철회로 모든 역량을 올인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농활을 가서 몇의 인자라도 남기는 것이 맞는가의 두 가지의 정치적 선택 중에 선택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각 단위의 주체들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갔으며 어느 누구도 자기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흐름에 끌려가는 상황이 연출되었다.</P> </A><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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