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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20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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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통신 96년 상반기 투쟁의 상징, 명동성당 농성 노동동향 분석팀 ‘해고자 복직 없는 노사개혁 기만이다!’, ‘원직복직 아니면 죽음을!’, ‘114유료화 반대, PCS를 국민의 것으로!’, ‘재벌비호 이석채는 즉각 사퇴하라!’, ‘WE WANT FREEDOM!’, ‘WE ARE NOT ANIMAL!', '노동자는 하나다 외국인노동자도 노동자다!’...... 6월 7일부터 6월 20일까지 명동성당을 밤낮없이 울리던 함성이었다. 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그 해 6월 10일의 명동성당 농성이래 최대의 농성대오를 이루었다는 96년 6월의 명동성당 농성장. 6월 7일 「정보통신주권수호와 재벌독점 방지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범대위)」의 농성을 기점으로 6월 9일 외국인노동자, 6월 10일 해고 노동자, 6월 14일 민주노총 지도부의 농성합류, 6월 18일 공노대 단위노조 대표자 농성돌입 등 마치 달리는 기차에 승객이 불어나는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농성대오가 늘어났다. 특히 6월 14일 이후 민주노총 지도부의 농성참여로 명동성당은 96년 노동자 투쟁의 상징으로 자리잡혔다. 96년 임․단투는 지금까지의 임․단투와는 다른 조건 속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우선 민주노총 원년에 치뤄지는 최초의 투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전국 중앙조직 체계아래 처음 전개하는 대중투쟁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노동자 대중 속에 살아 숨쉬는 민주노총’ ‘40만 조합원의 희망’인 민주노총이 진정 그 40만 조합원에게 실질적인 희망으로 자리잡히고 신뢰를 쌓아가는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은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 발표이후 노사관계개혁위가 주도하는 정국에서 투쟁이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미 노동계 내외에서 많은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지만 야심찬(?) 신노사관계 구상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개선되고 있지 못한 노동현실을 드러내고 신노사관계 구상의 본질을 노동자 투쟁으로 폭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선봉에 바로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투쟁대오의 거대함과 다양함으로 연대투쟁의 거점으로 자리잡혔던 곳이 명동성당 농성장이었다. 통신 노동자, 외국인노동자, 해고 노동자 명동성당으로 결집 농성의 출발은 6월 7일 범대위가 농성에 돌입하면서부터였다. 범대위의 농성은 범대위의 투쟁목표와 한국통신노조의 필요성이 결합하여 만들어졌다. 범대위 입장에서는 6월 10일에서 15일로 예견되는 PCS사업자 선정 발표를 앞두고 그 전에 지금까지의 서명운동보다 강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투쟁의 절박함 때문에 농성에 돌입하게 되었다. 동시에 범대위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한국통신 노조는 6월 3~4일 선도투쟁으로 조직이 침탈받을 것에 대비하여 내부 조직력을 강화하고 침탈로부터 엄호와 지원을 조직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때문에 일일 농성집회는 한통조합원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농성장을 적극 활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8, 9일 까지의 농성장은 범대위와 한통, 그리고 독자의 집회 장소로 명동성당을 이용하고 있는 학생들로 유지되었다. 6월 9일 밤 11시가 되자 당일 오후 6시 성남 시청 앞에서 있었던 집회(‘외국인노동자 강제연행 및 구속자 석방’)를 마친 외국인노동자 20여 명이 농성장에 도착했다. 봉쇄될 것을 우려하여 한 두 사람씩 한국인의 보호를 받으며 농성장에 도착한 외국인노동자들은 여전히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매년 6월이면 불법체류자를 집중 단속한다는 핑계로 외국인노동자와 상담소를 탄압해 왔던 그대로 올해도 극심한 탄압을 받자 이번 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로 외국인노동자들이 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농성장이 조금씩 활기를 띄어 갔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부슬거리는 비를 맞으며 해고 노동자들이 농성투쟁 대오를 형성하였다. 이미 ‘공공부문해고노동자복직투쟁위원회(공해투)’는 6월 2일 공노대 총회에서 선포된 대로 해고 노동자가 선봉에서 공공부문 노동자투쟁을 선도한다는 기치하에 무기한 철야농성에 돌입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여기에 전해투가 결합하여 공공, 민간을 망라한 전국 해고 노동자들이 투쟁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다른 해와 달리 올해 농성에 돌입한 해고 노동자의 1차적 목표는 공공부문 해고노동자를 복직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공부문 해고자의 경우 정부가 인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진정으로 노사관계개혁을 원한다면 해고자의 복직은 전제조건이라는 명분도 있었고 이미 예견되고 있는 공공 5사의 공투를 염두에 둔 목표설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민주노총, 전해투, 공해투, 공노대가 힘을 합쳐 돌파한다면 그 여세를 몰아 민간부문 해고자 복직도 물꼬가 트인다고 보았다. 해고자들의 농성돌입으로 민주노총의 농성장 방문도 눈에 띄게 잦아졌다. 이제 농성장에는 노동자 투쟁의 대오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대오가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 잠자리는 비좁아 졌다. 민주노총, 공노대 지도부의 농성장 합류 그리고 6월 12일 전국단위노조대표자 결의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된대로 6월 14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농성에 합류하였다. 이미 이러저러하게 권영길 위원장의 농성합류가 알려져 있어서 플랭카드와 텐트가 늘어난 것 이외에는 농성장이 표면상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성명서에도 밝혀져 있듯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농성합류는 ‘전국적 투쟁을 조직하기 위함’이었고 ‘민주노총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모든 투쟁을 책임지겠다는 선언’이었다. 반가운 일이었다. 외국인노동자 보호법 제정을 외치는 외국인노동자, 해고자 원직복직을 외치는 해고 노동자, 통신주권 수호를 외치는 범대위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을만 했다. 마지막으로 18일 공노대 단위노조 대표자들이 20일로 예정돼 있는 공공 5사의 연대파업을 총력지원하기 위해 농성장에 합류하였다. 이렇게 하여 민주노총, 공노대, 공투위, 외국인노동자, 범대위 등 각종 조직이 농성에 함께 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공공5사 공투의 주력부대인 한통과 지하철이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성장은 이미 상반기 투쟁의 중요한 거점으로 비춰지기 시작했다. 요구의 수평적 나열로부터 ‘해고자 복직’으로 그러나 농성대오는 늘어났지만 공통의 프로그램은 일일 정리집회를 함께 갖는 정도였다. 의식적인 프로그램을 갖는 집회도 아니었고 농성장 지도부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 밖에서 보기에 민주노총이 농성장 지도부로 보였을지 몰라도 농성장에는 그날의 투쟁을 전체적으로 평가하고 공동의 규율을 강제하는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민주노총이 할 수도 있었고 한다면 반대할 사람도 없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이미 임투를 전체적으로 관장하지 못한 채 결합한 어려움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 한국통신 대오가 주축일 경우는 자연히 통신주권 수호와 정통부를 향한 분노 어린 구호가 자주 외쳐졌고, 해고자 대오가 중심일 때는 해고자 원직복직이 주요 구호였다. 요구의 수평적 나열이 안타까웠는지 언제인가 한국통신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룬 정리집회에서 권용목 사무총장은 “왜 해고자 복직이 두번째 요구로 나옵니까. 해고 노동자들은 노조를 지키기 위해 활동하다 해고된 사람들입니다. 이제부터 해고자들의 복직이야말로 우리가 쟁취해야 할 첫번째 요구로 만듭시다”고 해고자 원직복직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것은 한통의 투쟁이 마무리 될 때까지 계속된 문제제기였다. “각각의 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은 연대투쟁의 기운을 높여야 할 때인데 자기 노조에 해당하는 선동만 계속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에서부터 심하게는 “한통이 해고자 문제를 첫째로 하지 않는데 연대가 어떻게 가능하냐”, “114 문제야 금방 알아들을 수 있지만 도대체 통신주권 수호는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는 볼멘 소리들이 튀어 나오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일단 ‘공동투쟁 승리!’만 외치면 안심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마치 구호가 같으면 대오도 똘똘 뭉친 것 같은 착각마져 들 정도였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는 좀더 강력한 연대투쟁 대오를 만들고자 하는 바램에서 나왔음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마음에 안드는 구호를 선창한다고 따라하지 않고 딴짓하는 노동자는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요구가 수평적으로 나열되지 않고 하나로 집중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대중이 처한 조건을 서로 충분히 이해해야 가능하다. 공노대가 투쟁목표를 왜 6개나 걸고 있는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공동목표의 순위는 수시로 변했었다. 그러다 5사 간에 어떠한 합의과정이 있었는지, 또는 합의과정 없이 자연스럽게(?) 된 것인지는 알 길 없지만 해고자 복직 문제가 우선 순위로 확실히 올라온 것은 6월 2일 조합원 총회에서부터였다. 결국 타결은 기업별 노조로 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요구를 하나로 확정하는 것은 의식수준만의 문제로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요구가 틀려 연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외국인노동자 투쟁 이것에 비하면 그 깊이야 어찌되었든 외국인노동자들의 구호는 늘 함께 외쳐지곤 했다. 10일부터 본격적인 농성에 들어간 외국인노동자 25명은 하루 두번씩 매일 같은 시간에 성당 입구에서 집회를 했다. 그때마다 그들의 모습은 30분에 걸친 한국인 상담인의 가두선동보다 10배 이상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것은 그들이 단지 외국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몇몇 사람은 윗통을 벗고 몸에 구호를 적기도 하고, 몇 사람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한국의 법은 눈이 멀었다는 뜻). 나머지 사람은 구호를 잔뜩 쓴 흰티셔츠를 입고 서로의 몸을 쇠사슬로 엮은 채 억양은 이상하지만 또렷한 한국말과 간단하지만 의미전달이 분명한 영어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너무나 처절한 그 모습에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꽉 막혀오고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눈에 무엇을 말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을 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고민은 너무나 단순(?)했다. ‘아침도 컵라면을 먹던데….’ 그들이 규율있게 농성하는 내내 다른 동지들이 한 일은 서명에 동참한 것밖에 없었다. 농성대오를 함께 꾸리지도, 우리의 문제로 끌어 안기 위한 진지한 고민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 땅에 12시간 노동의 댓가로 월 4만원을 받는 외국인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십니까. 외국인노동자 문제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차별의 하나입니다. 자본은 자신의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 결국 어떤 형태로든 차별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노동자는 하나로 맞서야 합니다”고 정리집회 때마다 강조한 최정규 외노협 집행위원장의 선동은 아주 설득력이 있었지만 외국인노동자들의 처절한 절규는 아직 우리의 ‘도덕심’을 슬쩍 건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6월 19일, 대중적 열기의 고양과 교섭 타결 드디어 공공 5사의 냉각기간이 끝나고 파업이냐 해산이냐의 갈림길에서 조합원 2,000여 명이 철야농성을 벌였던 6월 19일은 명동성당 농성 기간 중 가장 뜨거웠던 순간이었다. 오후 7시부터 한국통신 조합원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오후 10시 약 2,000명의 조합원이 명동성당을 꽉 메웠다. 조계사에 3000명, 서울대에 5,000명을 포함하여 수도권만 1만명, 전국적으로 3만여 명이 결집했다는 소식을 조합원들은 미쳐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굳이 이를 몰라도 조합원의 열기는 대단했다. 어느 평조합원의 말대로 “00지부가 이정도로 참여했”으니 굳이 전국상황을 듣지 않아도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계사는 담배도 규찰대가 사다 줄 정도로 규율있게 집회를 진행하고 있데요” “부산은 총회 장소인 동아대로 진입하지 못해 장대비를 홀랑 맞고서도 전열이 흐뜨러지지 않는데요” “전국 3만이라니! 드디어 한통이 해내는구나. 파업까지 안가도 승리다”는 생각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12시가 지나자 이제 지하철 조합원이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모습은 투쟁에 나서는 모습이라기보다 투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술취한 조합원만 아니라 술을 사 갖고 오는 조합원도 심심찮게 보인다. 그리고 자리가 모자란 탓도 있겠지만 성당 안으로 쑥 들어가 지하철만의 대오를 형성했다. “지하철도 이제 함께 들어가는 거예요?” “글쎄 모르겠는데….” 시큰둥한 대답에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것은 금새 한통 노동자들의 열기로 지워지고 가슴 벅찬 순간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한통의 집회로 집중시켰다. 그 힘은 분명 한순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3월 11일부터 2주간 전개된 공공부문 해고노동자 공동투쟁 결합, 3월 23일 공공노동자 결의대회 결합, 5월 가두서명전, 6월 2일 공노대 총회집회에 3만여 명 참석, 6월 3~4일 전국 현장 간부 1,500명의 선도투쟁, 6월 11일 간부 철야농성 돌입, 6월 15일 지하철과의 공동집회 및 명동성당 철야농성 등 숨가쁘게 진행되어 온 조직과 연대투쟁의 결과가 응축되어 있는 것이었다. 하늘을 찌를듯한 노래소리, 함성소리에 금새 새벽 2시가 넘었다. 지금까지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지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하고, 구호 외치고, 지부장 결의 듣고, 노래하고, 구호하고. 이것이 농성 프로그램의 전부였다. 장장 6만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는 집행부의 프로그램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지하철의 연대투쟁 연설도 없고, 민주노총, 공노대의 지지연설도 없었다. 정말 파업에 들어갈 생각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점점 깊게 확인돼 갔다. 3시경 집회가 정리되고 한통 조합원은 노숙에 들어갔다. 술도 이미 많이 풀렸다. 성당 앞에 있는 편의점의 ‘김삿갓’이 동이 났단다. 새벽 5시쯤 농성장에 없었던 지하철 간부가 나타났다. 그리고 급히 지나가며 하는 말 “8, 15, 100”이란다. 지하철이 타결되었다. 한국통신은 무언가 긴급회의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조계사에 있어야 할 지도부도 오고 지금까지 안보이던 간부도 보인다. 지하철은 농성대오를 모으고 타결된 내용을 발표했다. “임금인상 8% 입니다” “우~”, “조합비 가압류 100% 풀었습니다” “와” 박수. “해고자 15명 복직되었습니다” “우~”. 그리고는 집행부가 미쳐 집회를 마무리하기도 전에 뿔뿔히 흩어졌다. 한국통신 유덕상 위원장이 중본으로 들어갈 차비를 하려고 텐트 밖으로 막 나오는데 그때까지 술을 먹고 있던 평조합원 한사람이 얼른 일어나 “고생하십니다”며 맥주 한잔을 권한다.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얼른 마신 뒤 “교섭이 있어서 가 보아야 겠습니다”며 황급히 간다. 그리고 날이 완전히 밝자 만약의 공권력 투입에 마지막까지 버틸 대오였다는 조계사 대오가 명동성당으로 합류했다. ‘조계사가 풀렸으니 이제 한통도 끝났구나’ 집행부가 대오를 모았다. 그리고 경기본부장이 타결된 내용과 7시 30분부로 업무복귀 명령이 내려졌다는 위원장 명령을 전달하였다. 임금인상이 많이 되어서인가. PCS 문제는 교섭조차 못해서인가. 지금까지 열심히 투쟁해 온 모두의 노력이 너무 가상하게 느껴져서인가. 지하철처럼 하나로 나타나는 반응이 없었다. 단지 모두 찜찜한 표정들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업무복귀를 서둘렀다. 눈깜짝할 사이에 한번의 폭풍이 지나간 듯하다. 20일 오후가 되자 밤새 있었던 상황에 대해 소감에서부터 성급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농성장을 맴돌았다. “그 정도의 힘으로 주저 앉아버리다니 말도 안되” “내가 뭐라고 했냐. 지하철 안가면 한통도 못간다고 했잖아” “전국적으로 3만이 모인다는 것이 말이 쉽지 휴~ 언제 이런 기회가 또 오겠냐” “한통 타결 내용은 완전히 돈으로 도배한 느낌이야” “이제 조폐는 어떻게 하니...” 등 너무나 아쉬운 마무리였고, 이후가 우려된다는 반응에서부터 “지하철의 내부를 모르는 사람들이 파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들하지. 만약 파업에 들어가서 손배 50억 아니라 100억 맞고 해고자 곱배기로 나오면 그들이 책임지냐”며 타결이 옳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었다. 본격적인 투쟁평가는 뒤로 미루기로 하자. 물론 94년 6.24. 전지협 총파업 이후 지하철 6대 집행부 최대의 과제는 ‘훼손된 조직과 투쟁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95년 투쟁에서도 51억 손배, 35명 해고, 조합비 가압류 등 산적해 있는 과제중에 겨우 풀었던 것은 가압류 50%의 해제뿐이었고, 그나마 해고자 복직 문제는 제대로 교섭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투쟁을 마감했었다. 그러다 보니 해고자 복직 문제는 더이상 미룰 수는 없는 제1의 과제로 떠올랐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공부문의 연대투쟁이 “94년 총파업 이후 탄압으로 야기된 침체와 피해의식을 과감히 극복하고 자신감을 되찾은 계기였고, 캄캄 절벽과도 같았던 해고자 복직의 물꼬를 튼” 것이었다면 그것은 성과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95년 혼자 외롭게 싸우다 지하철 못지 않은 타격을 입은 한국통신 역시 이번 공공부문 연대투쟁이 ‘노동자는 단결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계기였다면 그것 역시 성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 파업을 파국(?)이라고 일컫는 마당에 투쟁력을 바탕으로 극대화된 교섭력을 민주노총이 발휘하여 타결로 이끈 것도 조직적인 측면에서 보면 성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공부문의 공투가 공공 5사로 출발하여 공공 2사의 투쟁으로 마무리되어 버린 감을 지울 수가 없다. 더구나 전국전선의 최전선에 공공부문이 있었고 그 한복판에 한통과 지하철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너무 조급한 마무리였다. 타결로 조합의 실리는 얻었다. 그러나 전국전선을 민간부문의 투쟁으로 그리고 하반기 노동법개정 투쟁전선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또한 투쟁을 통해 얼마나 대중들의 의식을 높여 내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보았을 때도 19일의 투쟁은 대중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기에 너무 부족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가 단위 조합만의 과제일 수는 없을 것이다. 조합의 실리도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좀 더 일찍부터 전국투쟁과 개별 사업장의 투쟁을 묶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했어야 했다. 바로 뒤늦게 구축된 전국전선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이번 공공부문의 공투는 ‘전면투쟁이냐 굴복이냐’ 중 하나를 선택한 투쟁은 분명 아니었다. 작년 같았으면 공권력의 침탈을 받았거나 굴욕스런 타협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권력의 침탈도 굴욕스런 자괴감도 없었다. ‘노개위’가 몰고온 상황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게도 된다. 남겨진 전해투, 외국인노동자들 20일 오전 그동안 단식농성에 들어갔던 지하철 전위원장 4명이 지하철의 타결과 함께 단식을 풀고, 지해투가 농성을 풀었다. 공노대는 특별한 결의없이 자연스레 해산한 눈치였다. 범대위도 오후 4시에 앞으로도 지속적인 투쟁에 들어가기로 결의하면서 농성을 해산했다. 민주노총은 폭풍이 휩쓸고 간 흔적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넉넉해진 농성장 밑으로 외국인노동자가 자리를 옮겼다. ‘잠자리는 넓어져서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농성을 해산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외국인노동자의 눈빛과 전해투 상황실장의 “범대위는 계속 농성하면 안되요?”라는 말에 뭔가 답답함을 느낀다. 아마도 외국인노동자들이 외친 ‘노동자는 하나다!’에 걸맞는 행동을 끝까지 보여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밑으로부터의 대중투쟁이 만들어 낸 이 기간동안 명동성당의 농성은 무엇보다도 임투계획이 없었던 민주노총을 농성에 합류시켰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다. 그것은 민주노총이 투쟁의 구심으로 설 것을 단순히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대중투쟁의 힘으로 이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5월까지 민주노총의 임투방침은 ‘임․단투는 각 연맹별로 진행하고 민주노총은 정치적, 정책적 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노개투와 사개투에 집중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전지협이 제안한 민주노총, 공노대의 공투본 구성 제안이 회의절차의 정합성에 어긋난다는 단순한 이유에 밀려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불과 몇 주전의 이러한 모습에 비하면 민주노총 지도부의 농성합류는 분명 발전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많은 한계와 아쉬움을 남기고 있지만 사상 초유의 공공부문 연대투쟁도 일정한 성과를 올렸다. 이 모든 성과는 바로 노동자 스스로 떨쳐 일어나 투쟁을 다짐하고, 조직하고, 실천한 결과이다. 그 힘이 교섭력을 증강시켰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교섭력은 바로 단결과 투쟁의 기운에서 발휘될 수 있을 뿐이라는 교훈은 96년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평가하는데 있어 놓쳐서는 안될 가장 큰 줄기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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