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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양민학살, 북한서도 자행 셀리그 해리슨 / 우드로 윌슨 수석연구원 미군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지만 그들중 상당수는 아시아와 아시아 문화를 전혀 모르거나 어렴풋이 알았을 뿐이다. 미군은 한국인이나 베트남 사람들을 이상하고 열등하며, 미개한 것으로 생각했다. 미군은 천편일률적으로 이들을 인종적 폄하가 담긴 경멸적 용어인 ‘워그스’(지저분한 사람들) ‘국스’(황인종을 낮춰 부르는 말)등으로 불렀다. 노근리나 그밖의 남한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미국 당국은 주로 북한군이 피난민을 게릴라 침투의 방어막으로 삼은 전쟁초기에 일어난 혼란과 혼돈이라는 입장에서 설명한다. 그러나 이 비극에서 드러난 인간의 생명 경시는 미국인들이 오랫동안 아시아에 대해 품고 있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인종차별주의의 맥락에서만 이 해될 수 있다. 노근리 현장에 있었던 한 미군은 당시 자신의 부대장이 ꡒ저들을 지옥으로 보내, 모두 없애 버려ꡓ라고 말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이는 베트남 미라이 학살사건 뒤 미군이 공식보고서에서 베트남 양민 희생자를 70명의 ‘동양인’이라고 묘사한 것을 생각케 하는 것이다. 영국의 종군기자인 레지널드 톰슨은 그의 책 <크라이 코리아(Cr y Korea)>에서 ꡒ미군은 한국인을 ‘국스’로 불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본래 친절하고 관대한 미국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철저하게 파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ꡓ라고 썼다. 미 해병대원 한명이 한국 노인을 죽이는 것을 직접 본 톰슨 기자는 미군에게서 아무런 죄책감도 보지 못했다며 ꡒ미군들은 적에 대해 얘기하면서 그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미개한 유인원에 대해 얘기하는 듯했다ꡓ라고 썼다. 노근리 사건은 미국이 우방이었던 남한에서 저지른 일이라 더 분노를 자아낸다. 그러나 당시 북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났고, 특히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개입한 50년 10월 이후 후퇴하는 미군이 저질렀던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 24사단의 전쟁일지에 따르면 철수하는 길 주변의 마을과 식량을 모조리 파괴하는 것이 명령이었다. 미 제1기갑사단의 일지도 평양과 흥남, 원산을 초토화한 것은 이 지역이 적이나 남아있는 한국인들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적고 있다. 다른 미국의 공식 문서는 전쟁 초기부터 적이 숨어 있다고 판단되면 비행기의 네이팜탄으로 마을들을 초토화하고 피난민 행렬을 공격했다고 증언한다. 영국의 학자 컬럼 맥도널드는 학살은 양쪽 모두에서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문서자료를 통해 50년 10월 28일 북한 게릴라들이 강원도 지역의 한 한국군 야전병원에 들이닥쳐 의료진까지 모두 죽였다고 밝혔다. 황해도의 한 지역에서는 미군포로 15명이 살해 됐다. 동시에 맥도널드는 50년 후퇴하는 유엔군 사이에 퍼진 자포 자기의 분위기가 조직적이고도 무차별적인 파괴로 이어졌다고 강조했다. 참혹한 학살사건 가운데 하나로 북한이 주장하는 것은 서해안 신천에서 일어났던 부녀자 400명과 어린이 100명의 집단 학살이다. 1972년 신천의 ‘미군학살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안내자는 50년 신천지역에 주둔한 미군이 근처 산악에 근거지를 튼 북한 게릴라들에게 번번히 공격을 당한 후 이들의 은신처를 대라고 주민들한테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50년 12월 7일 400명의 부녀자 등을 지하 방공호로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고 했다. 그 건물 천장에는 휘발유가 부어졌다고 하는 구멍이 있었으며, 새로 만든 문틀 위에는 불길에 그을렸던 나무 서까래가 보였다. 안내원은 지하 방공호 천장 이곳 저곳에 붙어 있는 흔적들을 가리키며, 그것은 불에 타며 죽어 간 사람들의 핏자국과 살점이라고 말했다. 어두운 조명의 방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생각이 멎은 듯했다. 북한과 중국은 미군이 전쟁기간에 생물학 무기를 사용했다고 계속 주장해왔다. 최근의 연구는 미군이 두 나라에서 두달간 야전실험을 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98년 인디애나대학에서 나온 <미국과 생물학전: 냉전초기와 한국에서의 비밀>은 미국의 공식자료와 한국전 관련 중국과학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꼼꼼하게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은 미군이 52년 2월과 3월 감염된 벼룩과 진드기, 거미를 북한의 금화, 평양 등에 뿌려 역병을 유도했었다고 명확하게 결론 내리고 있다.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남한보다 북한사람들이 전쟁의 폭격으로 인해 더 깊은 상처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남쪽이 전쟁초기 북한군의 공습피해를 경험했다면, 북한은 3년간 공중폭격을 견뎌야 했다. 카터 에커트 하버드 한국학연구소 소장은 ꡒ북한주민은 3년간 미군의 폭격을 피해 지하방공호에서 살았으며, 비행기가 핵 폭탄을 떨어뜨릴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았다ꡓ고 강조했다. 그는 이 때문에 북한사람들이 ‘영구적 포위공격 심리상태’를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53년 휴전회담이 시작될 때도 미군은 폭격을 멈추지 않고 강화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폴란드의 제방을 붕괴해 나중에 전쟁범죄로 지목됐지만, 미군은 제재없이 북한지역의 저수지 제방을 폭격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지 40년이 넘었음에도 북한이 미국을 의심하는 것은 바로 이 ‘영구적 포위공격심리’ 때문이다. 이 심리상태는 북한이 한국전의 시대착오적 유산을 청산하는 데 집착하고, 군사정전위원회나 유엔 명령체제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전쟁의 공포스런 기억을 감안한다면 북한이 미군의 남한철수 입장을 완화한 것은 희망을 주는 신호다. 백남순 북한외상은 뉴욕방문기간에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긴장완화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미국이 결국은 철군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겠다는 ‘정치적 결정’만을 공표하면 된다고 말했다. 이런 화해 제스추어는 4자회담이나 판문점 장성급회담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99년 11월 1일 한겨레(http://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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