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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YPE HTML PUBLIC "-//W3C//DTD HTML 4.0 Transitional//EN"> <!-- Document Start -->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P> <P CLASS=HS15> 문화연구와 문화정치 </P> <P CLASS=HS23> 노동자 문화와 노동자 문화운동과의 방향 탐색을 위하여 </P> <P CLASS=HS12> <A NAME="#2036052161"></A> <TABLE border="1" width="145px" height="35px"cellspacing="0" cellpadding="0" style='border-collapse:collapse;border:none;'> <TR> <TD height="18px" width="145px" valign="middle" style='border-left-width:0.10mm; border-left-color:#000000; border-left-style:none;border-right-width:0.10mm; border-right-color:#000000; border-right-style:none;border-top-width:0.10mm; border-top-color:#000000; border-top-style:none;border-bottom-width:0.12mm; border-bottom-color:#000000; border-bottom-style:solid;'><P CLASS=HS16> 신 병 현</TD> </TR> <TR> <TD height="18px" width="145px" valign="middle" style='border-left-width:0.10mm; border-left-color:#000000; border-left-style:none;border-right-width:0.10mm; border-right-color:#000000; border-right-style:none;border-top-width:0.12mm; border-top-color:#000000; border-top-style:solid;border-bottom-width:0.10mm; border-bottom-color:#000000; border-bottom-style:none;'><P CLASS=HS17> 교육위원장/ 홍익대 교수, 경영학</TD> </TR> </TABLE>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A NAME="#2036052162"></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1ad0.gif" width=375px height=68px >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여기서는 현 시기 계급정치 지형 하에서 노동자 계급정치를 위해 정리가 요구되는 문화연구와 문화정치에 관련된 몇 가지 문제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따라서 논의는 철학적, 이론적 검토보다는 주로 실천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진행하고자 한다. </P> <P CLASS=HS12> 현 시기는 자본 운동의 전지구적 확장 위기의 시기이며, 새로운 축적양식에 조응하는 주체화 양식으로서 대처주의를 필두로 제3의 길, 혹은 생산적 복지주의 등 신자유주의적 ‘문화통치’가 전면화되는 시기이다. 동시에 이 시기는 68년 이후 페미니즘, 인종주의 반대 운동, 환경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의 발전 속에서 부정되고 예감되었듯이,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그 충격과 여파가 좌ㆍ우파를 막론하고 세기말적인 허무주의(nihilism)와 비합리주의(irrationalism)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이 시기는 기업이나 매스 미디어, 그리고 정부의 공식 담론들에서 문화와 관련된 담론들이 크게 증가한 시기이기도 하다. 80년대 이후로 경영담론에서 폭증한 기업문화 담론과 포스트모던한 활주 혹은 탈주(flight)를 고무시키는 스타일리스틱한 경영기법들이 기존 관행을 파괴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실업의 공포와 초과착취를 이용하는 낡은 경영기법과 더불어 등장하는 시기이며, 전세계적으로 대중문화산업에 대한 대규모 자본 투자와 초국적 기업들의 미디어 산업 통폐합이 진행되는 가운데, 대중문화와 관련된 평론과 출판, 그리고 독립적 문화기획가들이 양산된 시기이고, ‘민족 통일’의 세기 혹은 ‘문화의 세기’를 맞이하기 위한 막대한 재정투자와 정책적 탐색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P> <P CLASS=HS12> 이러한 정세적 변화가 야기하는 제 양상들 중 현 시기 우리사회에서 ‘문화’ 관련 담론들의 증폭 현상과 그것이 진보적인 실천운동과 연구 진영에 미쳐 온 영향에 초점을 두고 노동자 계급정치와 문화정치와 관련된 주요 쟁점들을 확인해보고, 이러한 검토를 통해 현시기 노동자 문화연구와 문화운동의 방향에 대한 시사점들을 생각해 본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첫째, ‘문화’에 대한 통념들과 그것들의 정치적 관심영역들에 대해 검토한다. 실천운동 부문들 중, 특히 ‘문화운동 부문’에서는 일찍부터<A HREF="#FOOTNOTE1"><SUP>1)</SUP></A>문화운동의 독자성을 주창해 왔으며, 새로운 운동 노선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들의 논쟁과 탐색은 그리 큰 성과를 보이지 못한 채, 한편으로는 정통적인 선전 선동의 도구로서 문화에 대한 편협한 관점을 견지하도록 하거나, 아니면 그 반사물로서 전문가주의 기술 이데올로기 혹은 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에 깊이 침윤되어 신자유주의적 문화통치의 거대한 파도에 몸을 싣는 ‘파도타기’로 나갈 위험을 갖고 있다. 이들이 생각하는 문화는 과연 무엇이고 계급적 실천 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보편적 인간발달로서의 교양수준 함양’으로 보는 문화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념화에서부터 후기 구조주의적 ‘기호적 표현 실천’으로서의 문화 개념화,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과정’으로서 문화를 보면서 문화라는 용어의 개념적 엄밀성 자체를 의문시하기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접근들이 문화라는 통념 혹은 범주를 둘러싸고 경쟁해 왔다. 이에 따라서 ‘문화정치’와 관련한 매우 다양한 실천과 접근들이 역사적으로 논쟁을 벌여 왔다. 문화범주에 대한 간략한 역사적 검토와 문화정치를 둘러싼 실천들의 역사적 맥락을 영국의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P> <P CLASS=HS12> 둘째, ‘노동자 문화’ 연구의 역사적 발전과 경향들을 검토한다. 노동자 문화라는 통념은 특정한 사회적 범주로서 다양한 부류의 노동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시키는 상상적 혹은 지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자체는 양면성을 갖는데, 그 하나는 노동자 문화라는 개념은 놀라움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반응 혹은 관리상의 목적이건 간에 지식인들의 ‘상징적 전략’의 산물이라는 점이다.<A HREF="#FOOTNOTE2"><SUP>2)</SUP></A>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문화는 노동자들의 조직 혹은 권력 및 제도를 매개로 하여 노동자들의 이상(유토피아)과 과거의 전통에 근거하여, 의미 있는 즉,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질서 있는 계급적 동일성을 구성하고 노동자의 계급적 주체성 혹은 개별적 수준에서 정치적으로 활성화된 정체성 형성과 계급적 실천 활동의 준거를 마련하기 위한 의미 생산 과정 혹은 기호적 실천(signifying practices)의 산물이기도 하다. 즉, 노동자 계급정치의 한 형태로서 노동자 권력으로의 통합과 동원을 위한 정체성 형성 시도의 산물이다. 따라서 노동자 문화에 대한 연구는 다분히 ‘엘리트주의’ 혹은 ‘도구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서 영국의 노동자 문화연구는 애초의 계급적 관심으로부터 노동자 청소년 하위문화에 대한 관심을 거처 문화상품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소비자 수용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연구로 선회하였으며, 전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제도화되어 공식 교과과정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문화연구는 문화정치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신수정주의 혹은 문화민중주의,<A HREF="#FOOTNOTE3"><SUP>3)</SUP></A> 문화제국주의로 비판받고 있는 문화연구의 흐름이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 </P> <P CLASS=HS12> 셋째, 상호 경쟁적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문화정치적 기획들이 현 시기 남한 사회에서의 계급정치적 문화기획으로 혹은 주요 실천 운동 조류들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문화 관련 담론들이 크게 증가한 시기는 90년대 초반이라고 할 수 있다. 왜 문화에 관한 담론이 그렇게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경제적 호황 및 문민정부의 등장 혹은 80년대 시작된 칼러 TV 방영 등등의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에 대해서 보다 엄밀한 분석이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적 문화통치의 기조가 점차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일상 생활에 대한 상품화 혹은 식민화가 보다 확산되어가고 있는 자본의 위기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90년대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문화에 대한 관심의 증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재의 급진적 문화 연구 및 운동의 조류들과 계급정치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한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8> 1. 문화와 문화 정치: 문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화정치는 의미에 대한 투쟁, 즉 의미의 고정화, 재정의 및 변경을 둘러싼 투쟁을 포함한다. 상징체제 혹은 특정하게 배치된 기호표현의 계열들은 권력의 전략적 배치이며, 고정된 의미들의 통로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정당화로 동원된다. 문화정치는 또한 주체성을 둘러싼 투쟁이다. 문화적 정체성과 주체성은 문화적 형식들을 통해 일상적으로 상상되고 재생산되며 강화된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화는 사용자에 따라서 매우 다른 의미를 갖는 경쟁적인 범주이어서 그것의 개념적 정의를 둘러싸고 첨예하게 입장이 갈라져 대립한다. ‘문화’에 대한 단일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문화는 용어 사용자에 따라 문명 혹은 가치를 의미하기도 하고, 총체적 삶을 포괄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사회적 삶을 문화로 환원시키는 문화주적 경향은 이데올로기로서 문화를 보는 관점과 대립한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화인가 이데올로기인가? 너무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은 맑스주의 계급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인식이며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영국의 CCCS 전통에 의지하는 대부분의 현 시기 문화 연구들은 대체로 양자의 그람시적 타협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찾고자 한다. 예컨대, 영국의CCCS의 견해를 대변하는 강명구 교수는 “이데올로기는 문화 위에 작용한다고 봄으로써 양자를 통합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는 톰슨과 영국 CCCS의 존슨에 의지하여, 그람시적인 체험된 문화로서 혹은 상식으로서 아래로부터의 구성되는 문화를 통해 위로부터 부과되는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에 적응하거나 거부하여 대항 헤게모니로 나갈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사회적 관계를 ‘경험하는 주체’에게 작용한다고 본다. 그는 톰슨을 따라 구조주의 맑스주의의 이론주의적 경향을 비판하면서, “문화는 생각이나 느낌일 뿐 아니라 실천을 의미”하며, 그 구체적 문화형태는 언어, 예술, 지식뿐 아니라 계급집단의 집합적 행위, 하위집단의 스타일, 정치적 담론 등을 포함하고, 나아가 계급경험을 매개로 하여 계급의 고유함과 정체성을 지닌다는 톰슨의 정의를 통해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통합적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톰슨은 “생각, 느낌, 욕망, 도덕적 신념, 주체성 등 의식형태들은 별도의 제도적 영역을 통해 나타나기보다는 모든 존재조건의 영역에서 형성되고 표현되는 것으로 본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나 제도적 영역보다는 ‘일상적 실천’(?)을 통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A HREF="#FOOTNOTE4"><SUP>4)</SUP></A> 이러한 이해는 비개념적 절충과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A HREF="#FOOTNOTE5"><SUP>5)</SUP></A> 이에 대해서는 영국문화 연구의 방향 선회와 관련해서 뒤에서 살펴본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화에 대한 접근을 개념적 정의 및 그와 관련된 문화정치, 그리고 유럽의 근대국가 형성과 민족적 통합과정 속에서 문화 담론이 갖는 위상에 초점을 둔 역사적 이해라는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 살펴보자.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9> 1)문화에 대한 정의와 문화정치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화의 다양한 정의를 검토한 레이먼드 윌리암즈에 따르면, </P> <P CLASS=HS12> ⅰ)문화는 “지적, 정신적, 미적 개발 과정 일반”과 같이 문화는 읽기 능력, 학업 혹은 세련된 억양이나 취향 등에서 드러나는 ‘획득된 정도’, ‘교양 수준(cultivated)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자유주의적 인간주의자들이나 초기 맑스주의적 견해에서 드러난다. 문화정치적 관심: 개인의 전면적 발달을 위한 접근가능성, 문화민주주의, 교육과 문화제도, 문화정책. </P> <P CLASS=HS12> ⅱ)“사람들, 일정 시기 혹은 집단이 공통의 정신(common spirit)을 매개로 하여 획득된 특정한 삶의 양식”으로서 문화를 정의하는 입장은 문화가 집단, 사회, 하위그룹 등의 속성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 정의는 소위 ‘인류학적 정의’로서 문화는 복수적이고, 특정 집단에의 소속이 문제시되는 경우 사용된다. 즉, 문화는 ‘차이’로서 인식된다. 이러한 정의는 여성주의 담론이나 탈신민주의의 재현의 정치 담론에서 네 번째 정의와 더불어 중요한 구성 요소로 작용한다. 문화정치적 관심: 차이의 적대로의 발전, 관계 형성과 그를 위한 재현방법의 개발이 지닌 중요성, 연합, 동맹의 문제, 배제와 동일성의 변증법. 다문화주의 비판. 독자적 공간의 확보 및 기획 문제. 소속의 전략과 민족 및 국가. 문화적 정체성. 문화민주주의. </P> <P CLASS=HS12> ⅲ)지적 작업 혹은 지적 실천, 특히 예술적 활동으로서 문화 정의는 가장 널리 통용되는 정의이다. 여기서의 문화는 음악, 문학, 그림, 조각, 연극, 영화 등이 된다. 주로 학교, 화랑, 미디어, 출판 등 ‘문화기관’들에서 비정치성을 표방하면서, ‘보편적 가치나 진리 혹은 인간성의 고정된 표현’과 같이 제도적으로 여성, 유색인, 노동자 계급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문화생산을 배제하거나 주변화시키는데 사용되는 정의이다. 문화에 대한 이와 같은 고급예술로의 개념화는 대중문화 산업과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서 도전 받고 있으나, 여전히 첫 번째의 정의와 더불어 공식문화로 통용되는 규정력을 제도적으로 상징적으로 발휘하고 있다. 문화정치적 관심: 문화에 대한 접근과 문화민주주의. </P> <P CLASS=HS12> ⅳ)현대의 문화연구들이 주로 의존하는 정의로서 “특정한 사회질서가 소통되고, 재생산되며, 경험, 탐구되는 기호적 표현의 체계”로서 문화를 정의하는 것은 분리된 영역이 아닌, 경제, 사회, 정치적인 모든 제도들의 특정한 차원으로서, 의미, 가치, 주체성을 구성하는 일련의 물질적 실천으로서 문화를 정의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언어나 건축, 기타 제도들과 같이 특정한 문법, 관행, 스타일 혹은 양식으로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생산되고 유통되며,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는 규정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물질화된 기호적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정의는 모든 실천들이 갖는 기표적 실천의 측면, 즉, 의미작용의 측면에 초점을 둠으로써 권력과 주체 위치 및 주체화 양식 사이의 관계, 그리고 정체성의 구성 혹은 의미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투쟁으로서 정치, 이데올로기적 과정이 지닌 중요성에 주목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재현(representation) 중심적인 기호학적 텍스트 분석과 ‘재현의 정치’에 초점을 둠으로써, 실제적인 공간적 배치나 관리시도, 점유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투쟁으로까지 나가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문화 정치적 관심: 재현의 정치, 이미지, 주체화 양식, 대중문화 비판과 새로운 분석. 퍼포먼스. 의미작용 분석.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영국의 경우를 보면, 리버럴 휴머니즘(주권, 합리적 개인, 자유의지)과 맑스주의 모두 보편적 인간성의 전면적 발달을 중요하게 보았다. 조단과 위든(Glenn Jordan & Chris Weedon)의 논의를 통해 영국 노동자 계급의 문화정치를 간략히 살펴보자.<A HREF="#FOOTNOTE6"><SUP>6)</SUP></A> </P> <P CLASS=HS12> 노동자와 빈민들과 무정부 상태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으며, 사회통합에 관심을 갖고 있던 자유주의적 인간주의자(liberal huminist)인 매튜 아놀드(Matthew Arnlod)나 공리주의자들은 ‘문화와 교육’은 계급, 종교, 종족성, 인종, 성 등을 초월한 ‘계몽’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하였으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의 개발을 통해 전면적인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고, 그리고 모든 개인들은 그들의 기본적인 인간성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하고, 그들의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문화와 교육 영역에서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주장했다.<A HREF="#FOOTNOTE7"><SUP>7)</SUP></A> </P> <P CLASS=HS12> 영국에서 초등교육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접근이 가능해 짐에 따라(1871년 의무교육 실시) 조직노동자들이 급격히 성장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 목적은 다르지만, 모두 공식 고급문화(High Culture)로부터 노동자 계급을 배제하는 것은 사회 전반의 정신적(spiritual), 지적 퇴화를 가져온다고 보고 공식 고급문화에 대한 접근을 강조했다. 특히 사민주의적인 경향의 노동자 교육협회(the Worker's Educational Association, 1903)와 맑스주의적 경향의 노동자 대학(the Plebs League, 1908)은 개인의 지적, 윤리적, 정서적 발달에 있어서 공식문화가 중요하다고 보았다.(고전 문학 읽기 교육, 글쓰기 운동) 1945년까지 영국의 노동자 문화정치는 주로 ‘고급문화에 대한 대중의 접근을 위한 정치’(문화 민주주의)에 초점이 맞추어졌었다.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은 부르주아적 공식문화의 주요 소비자가 되었다. 당시의 영국 사회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보다는 고전작품 자체를 높게 평가하였다. 노동자교육협회는 문화를 누구나 향유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이 노동자에게 지식과 숙련, 도덕적 자질,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보다 잘 이해하게 할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과정이 충분히 이루어질 때, 노동자들은 생활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할 것으로 보았다. 반면 맑스주의자들은 문화는 계급사회의 산물이며, 그것이 생산되는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중간계급에게 속해 있는 문학, 예술, 교육에 모든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혁명가로서 이들은 노동자 계급에 속한 인민들이 부르주아 공식문화를 계급사회와 역사적 과정의 반영으로서 다르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다르게 읽기’를 통해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와 혁명적 사회 변화의 기제들에 대해 이해할 것으로 보았다. 혁명 이전에 대안적인 문화전통을 생산하는 것은 중요시되지 않았다. 여하튼 이러한 과정을 통해 노동자 계급 문화수용자들은 자유주의 인간주의자들의 영역에 침투해 들어갔다. </P> <P CLASS=HS12> 영국은 전후에도 자유주의적 문화정치는 미디어의 발달과 보급과 대중문화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급문화를 보편적인 인간발달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는 정책을 추구해 왔다.(사회적 결속을 위한 common culture 중시 정책) 그들은 대중문화에서부터 모더니즘 시각미술, 오페라에 등등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만, 오페라나 고전 음악작품, 모더니즘 미술 등과 같은 고급미술에 제도적 우선성을 부여함으로써 다양한 차별의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이것은 전후 여성주의 및 인종주의 문화정치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문학과 예술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특정한 사회집단의 문화를 전체로서 민족을 대표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문화적, 제도적 실천을 정당화한다. </P> <P CLASS=HS12> 반면 영국의 노동자 조직이나 좌파들은 사회와 역사에 관한 유물론적 이론으로 자유주의적 개인과 문화에 대한 정의에 도전하였다.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였지만, 맑스주의 정치는 개인들의 계급 주체화 혹은 정체성 형성이라는 계급투쟁의 문화적 차원을 중요시하였다.(예, 자본주의 사회관계 속에서의 소외비판) 당시 이들은 전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대한 낭만주의적 이미지에 의존하면서, 자본주의가 문학과 예술의 퇴화는 물론 사회와 노동계급의 퇴화를 야기한다고 보았다. 20세기초에 맑스주의자들도 공식문화는 개인적 발달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노동자 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할 수 있게 하는 ‘교육 수단’으로서 문학과 예술을 보았으며, ‘계급적 정체성’ 형성을 위한 문화적 형태를 창조하는 것을 중시했다. 노동자 대학에서는 “조직하기 위해 교육한다”는 모토 하에 활동하기도 했다. 1939년까지 성인교육의 주요 쟁점은 문화와 계급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사민주의적 혹은 민중주의적 경향을 띠었던 노교협은 고전 교육을 위한 주어진 교과과정에 의존하였으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를 위한 실러버스 개발에 관심을 가졌으며, 노동자 대학이나 공산당은 자유주의자나 민중주의자들이 말하는 ‘편파적이지 않은’(impartial) 교육과는 다른 역사와 계급적 관점에 의거한 대안적 교육을 제공하고자 했다. </P> <P CLASS=HS12> 이 당시 문화정치는 한편으로는 공식문화(고급문화)의 해방적 역할을 강조하여 개인의 발달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이해를 증대시키는 것을 강조하였다. 다른 한편은 글쓰기와 같은 문화 생산에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한 것을 강조했다. 당시의 글쓰기는 주로 일상생활, 사랑 및 자연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도덕적 사회주의자, 노동자주의자, 맑스주의자들의 사상으로부터 영향받았다. 당시 영국에서는 문화적 수준에서의 독자적인 계급투쟁과 문화의 생산과 소비에 노동자들이 직접 참여할 것을 촉구한 러시아의 Prolectcult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문화적 전통의 향유와 비판적 인식, 노동자들의 목적에 근거한 문화유산의 전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문화의 개발 등 노동자들의 문화에 대한 접근과 전유, 새로운 토대 위에서 과학과 예술을 재조직하고 확장하는 것이 당시의 혁명적 문화정치의 목표였다. </P> <P CLASS=HS12> 그런데 통일전선은 계급의식적인 노동자적 문화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자유주의 지식인들과 논쟁을 야기시켰다. ꡔ좌파평론(left review)ꡕ을 중심으로 전개된 논쟁은 ‘문화 위기의 시기’에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파시즘과 투쟁하기 위해서, 이데올로기적인 확실성, 고정된 가치를 주창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아놀드의 보편적 진리의 장소로서 고급문화에 초점을 두게된다. 대중 문화 산업의 급속한 발달 속에서 안정성을 확보하고, 대중화, 상업화해 가는 문화가치를 보존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에 릭워드(Edgell Rickword)는 대중문화가 미적 가치가 거의 없는 허위의식의 원천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문화는 상품으로서 인식되어 갔으며, 이와 더불어 그에 대한 탈신비화도 진행되었다.(진정한 문화에 대한 반역이라는 예술가들의 비평들) 1930년대 이러한 대중문화의 확산은 좌우파 모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다. 미적 감수성(aesthetic sensibility)과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별능력을 강조하면서 고급문화에 구현된 진정한 문화가치를 구제하려는 시도와 더불어(F.R.Leavis) 좌파평론의 많은 이들은 고급문화와 대중(대량)문화 사이의 구분을 해소하는 ‘문학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주장했다. 이들의 많은 생각은 “계급의 무기로서 예술, 예술가는 쁘띠 부르조아적 태도로서 개인주의와 엄격한 규율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는 것, 예술적 창조는 체계화 조직화 집단화 계획화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당의 확고하고 세심한 지도아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예술가 및 작가들은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를 학습해야 한다는 것, 창조적 예술의 방법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방법이라는 것, 프롤레타리아트 문학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창조될 필요는 없다”는 것 등 러시아 맑스 레닌주의적 문화정치에 대한 생각에 크게 의존하였다.(당의 도구로서 예술) 이에 대한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도구주의라는 비판 역시 거세었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회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강조하는 가운데 모더니즘보다는 리얼리즘을 지지하였다. 따라서 내용에 대한 형식의 적절성이 비평의 주요 주제였다. 문학비평에서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주의적 이념이 드러나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반면, 노동자 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전문가주의적 입장(professionalism)에서의 반대도 다양한 이유로 제기되었다.(급진적 대중문화에 대한 지지와 전문적인 작가들에 의한 생산 강조, 문학적 가치문제, 이론 및 이데올로기적 입장 문제 등) 그러나 맑스주의나 자유주의 지식인이나 모두 당시의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통일전선) 아도르노는 이러한 파시즘적 전체주의 요소들을 전후 미국에서의 팽창하는 문화산업과 광고들에서 다시 발견한다.<A HREF="#FOOTNOTE8"><SUP>8)</SUP></A>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당시의 영국에서는 문화 민주주의에서의 상당한 발전이 있었으며, 좌파평론도 이에 주목하면서 고급문화에의 접근 확대와 더불어 새로운 관점을 개발하는데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지지하였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문화활동을 고무하였으며, 이데올로기나 미학적 순수성을 도그마틱하게 강조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문화와 계급이익, 지배와 종속의 권력관계의 재생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좌파 비평과 문화이론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유물론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보다도 단순히 대중의 참여를 강조하는 경향도 있었다.<A HREF="#FOOTNOTE9"><SUP>9)</SUP></A>(노동자 계급문화 정치와 문화민중주의의 혼재와 대립)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9> 2) 역사와 문화과정 그리고 ‘노동자 문화’ </P> <P CLASS=HS19> : 문화담론과 민족과 제도로의 통합 문제, 차이와 관계 </P> <P CLASS=HS12> </P> <P CLASS=HS12> ‘문화’의 정의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문화’라는 용어는 전통, 민족, 국가, 제도, 공동체, 정체성, 문명, 엘리트, 형식, 스타일, 구성적 성격, 특이성, 보편성, 일상적 삶, 양식들, 가치, 규제, 통합, 질서, 상징, 언어, 감수성, 의미, 미학, 문학, 예술, 교양, 교육, 형성, 자연, 야만, 기술, 실천, 과정 등의 개념 범주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용어이다. ‘문화’라는 용어는 그래서 정의하기도 힘들고, 연구 대상도 명확하지 않아서 독자적 연구분야로 독립해 있지도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라는 용어는 16세기 이후 근대국가의 형성과 세계시장 및 유럽의 형성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담론상의 주제가 되어온 용어이기도 하다. 20세기 들어서도 대중적인 문예 작품의 보급과 사회적 분화가 증대하고 미국과 같이 냉전하에서 유럽적 경향과 차이를 갖는 다양한 이질적인 지방적 전통을 전체로서 국가 혹은 민족으로의 통합의 필요성에 근거하여 이를 이용하고자하는 정치적 국면 하에서는 여지없이 등장하는 것이 ‘문화’ 담론이었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화담론은 역사적 제도 및 질서 형성에서 전략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P> <P CLASS=HS12> 역사적으로 ‘문화’ 담론은 특정한 지배적 민족으로의 여러 이질적 민족들의 차이를 지칭하는 동시에 그것을 중심으로한 헤게모니적 질서로의 위계적 통합 과정을 표현하는 성격을 띤다. 그 이면에는 항상 권력의 지배적 형성체로서 국가가 있고, 특정한 문화적 정체성에의 동일화 속에서 특정한 공동체적 삶과 그 성원으로서의 죽음은 주체에 의해 자발적인 것으로 수용된다. ‘문화’는 이처럼 이질적이고 특이한 것들을 차별적으로 위치지우고, 상징적 질서나 실제적 제도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P> <P CLASS=HS12> 20세기들어서 서구 산업사회에서는 사회적 분화가 급속히 증대하면서, 그리고 다양한 종족적 이산(diaspora)이 증대하면서 특정한 영토 내에서의 민족적, 종족적 이질성도 증대하고, 계급적 차별성도 증대하였다. 이에 따라 추상적 분류 도식에 따라 사회집단간 차별성을 분절화하여 국가 혹은 지배적 민족으로의 통합을 꾀하는 정치적 동원과 배제가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정치적 통치 목적으로서 ‘문화’에 대한 전략적 관심이 증대하였다. 19세기 영국에서의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들의 계급적 분열과 모순을 은폐하는 사회적 안정과 민족적 통합의 필요성에 대한 ‘문화와 교육에 대한 관리적 관심’에서 그러한 양상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종족적, 계급적 차이에 근거한 문화적 다양성을 구분하여 인식하는 정치ㆍ사회적 추상화 혹은 환원 과정이 작용한 결과이다.<A HREF="#FOOTNOTE10"><SUP>10)</SUP></A> 지배 혹은 통치 목적에 따른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과 차이의 인정과 이의 민족 국가로의 차별적이고 위계적인 통합이 이루어지면서,<A HREF="#FOOTNOTE11"><SUP>11)</SUP></A> 그리고 문예 상품에 대한 대량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엘리트적 고급문화는 대중성과 또 다시 차별화되고, ‘문화’라는 용어는 대중화되었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화적 정체성(cultural identity)의 형성 혹은 발견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차이의 인식을 바탕으로한 통합과 차별화의 제도들, 혹은 상징적이거나 실제적인 폭력의 위협 속에서, 특정한 종족적 혹은 구조적 차이들 혹은 특이성의 범주들이 전략적으로 동일화하는 모순적이며 역사적인 정치 이데올로기적 투쟁 과정이다.<A HREF="#FOOTNOTE12"><SUP>12)</SUP></A> </P> <P CLASS=HS12> ‘문화’ 담론의 역사적 등장은 기존 질서와의 차이를 스스로를 드러내는 운동으로서 의미를 갖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내부ㆍ외부라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계 구분의 변증법이 작동한다. 문화적 정체성은 이 내부 외부 구분의 작동 효과이다. 다양한 생활상의 종족적 특이성들은 혹은 공동체는 문화담론 속에서 하나의 차이로 인식되고 추상적 구분 도식 속에서 타자(다른 종족적 차이들)과 동일성의 원리에 따라 차별적 동일성들로 위치지워 지고, 정치적 혹은 관리적 대상으로 설정된다. 이 과정은 차이나 특이성의 주체 측면에서 보면, 특정한 전통으로 즉, 특정한 문화적 정체성으로의 상상적 동일화(identification)이며, 소속(belongingness)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으로서, 국가와 민족 혹은 종교적 제도들 매개로 한, 상징적, 실제적 폭력에 ‘종속되기’의 역사이다.<A HREF="#FOOTNOTE13"><SUP>13)</SUP></A> 따라서 민족국가나 종교와 같은 특정한 공동체 혹은 제도로의 소속은 다수로의 종속과정이며, 전략적 성격을 띠는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단일하고 총체적이지 않다. 어떤 경우는 성공적이지만, 어떤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특이성의 차이들 혹은 종속시키는 제도 등과 관련된 주체는 이데올로기적 관계 속에서 있는 특정한 주체형태이고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은 이차적이고 전략적인 동일화 과정의 산물이다.<A HREF="#FOOTNOTE14"><SUP>14)</SUP></A> 그러나 알튀세르와 페쇠가 보여주듯이, 그 과정은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의 물질적 효과로서 제도 및 다양한 국가장치를 매개로한 폭력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지속적이고 가차없는 계급투쟁 속에서 획득되고 실현되며, 바로 그것을 통해 지배를 실현한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하여, 그 지배는 통일적인 주체 형태로 말끔하게 봉합하는 과정이 될 수 없다. </P> <P CLASS=HS12>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나’, ‘우리’, ‘너’, ‘그들’과 같은 정체성은 이미 있었기보다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략적 동일화 과정의 산물이며 이차적인 효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화적 정체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특정한 기존의 전통의 발명 혹은 발견과 그것들로의 소속됨 혹은 동일화를 말하는 것이다. 곧 ‘문화’는 동일화의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과 특정한 정체성으로의 개인의 전략적 소속과 관련된 이데올로기적 과정이다. 즉,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 속에서 기존의 특정한 ‘문화적’(헤게모니적) ‘전통’(혹은 유증된 정체성)으로의 동일화가 이루어지는 과정과 관련된다. 그것은 곧 궁극적으로 목적으로서의 특정한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으로의 통합 과정이다. 정체성은 기존의 동일화할 목적으로서 이상적인 혹은 새로이 변형된, 그리고 현재의 조건들에 근거해서 미래로 투영된 ‘전통’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결국, 문화 과정(cultural process)은 이질성의 분절과 차이의 확인 그리고 이의 단일 형태로의 환원이 상상적, 실제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계급투쟁의 과정이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언어를 포함하는 상징체계와 제도적 폭력(예컨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이다. 문화연구 및 문화정치의 주요 관심 분야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및 제도와 이것들이 매개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그리고 노동력의 일상적 재생산과 강화일 것이다. (특히, 대중들의 일상적 실천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강화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가족 및 종교제도, 교육제도에 의한 신비화와 관리적 실천들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으로 투쟁하는 것)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화’ 개념 및 문화담론의 타자와의 관계성, 환원성, 통합성, 통치 목적성, 전략적 성격,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과정으로서의 성격에 대한 역사적 인식에 바탕을 두고, 우리시대의 노동자 문화 정치 실천을 고려해 볼 때, ‘노동자 문화’ 담론은 이중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노동자 문화’ 담론은 첫째,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 속에서 노동력 재생산을 포함한 사회적 관계의 생산 및 재생산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투쟁과정 즉, 헤게모니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와의 지속적인 투쟁 과정 속에 있는 특정한 담론구성체(discursive formation)를 구성하며 그에 속하고 있다. 둘째, 노동자 문화 담론은 동시에 다양한 이질적인 삶의 형식들에 대한 노동자 권력에 의한 분절화와 이에 근거한 특정한 문화적 정체성(혹은 전통의 발견과 세련화)으로의 통합 혹은 환원과 노동자 권력이 지배적인 상징체계로의 통합의 과정 속에서, 그리고 노동자의 변혁적 운동 실천 속에서 새롭게 창조되고 발견되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전망 혹은 실천적인 이데올로기들 및 실천들, 생활양식들을 담아내는 가운데 형성되고 정련 과정을 겪는 방식으로 풍부화 되는 모순적 성격을 띤다. </P> <P CLASS=HS12> 이러한 모순은 노동자 문화정치가 이중적인 전선과 대면하도록 한다. 그 하나는 노동자 운동 실천 및 노동자 일상적 실천에서의 지배 이데올로기와의 지속적인 투쟁의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 정치 혹은 노동자 문화정치가 노동자들의 다양한 이질적인 삶의 양식들과 그 원리들, 특정한 노동자 범주들과의 대면 속에서 보편성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면서,<A HREF="#FOOTNOTE15"><SUP>15)</SUP></A> 스스로를 풍부화해 가는 가운데 직면하게 되는 것으로서, 노동자 정치, 노동자 운동 및 대중적 실천 이데올로기 속에서 드러나는 상징적, 실제적 폭력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이를 넘어서려는 각성 하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조직적, 정치적 관계 양식’의 발견을 위한 실천적인 투쟁 전선이다. 예컨대, 그것은 성적, 인종적, 지역적, 세대적 차이들과 정신-육체 노동의 차이들과 모순의 가능성과 현실화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예상하며 극복하려는 적극적이고 무한히 개방적인 투쟁과 실천의 변증법적 운동일 것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이렇게 보면, ‘노동자 문화’는 노동자들의 다양하고 이질적이고 특이한 대중적, 계급적 경험과 가치나 풍속 등 삶의 방식과 그들이 생산하고 표현한 산물들을 하나의 ‘보편화된, 보편화하는 전통’으로서 그리고 그것의 미래로의 투영 혹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이상’으로서, 노동운동과 노동자들이 처한 구조화된 삶과 관련된 지배적인 제도들(노조나 당, 지역공동체 등)을 매개로 하여 통합해 가는 정치 이데올로기적 과정인 동시에 그 자체의 모순과 한계를 넘어서려는 무한히 개방적인 새로운 실천들일 것이다. 그것의 전제는 노동자 주체와 ‘노동자 문화형성체’로의 동일화를 가능케 하는 조건의 형성일 것이다. 그러한 조건을 형성하고자 대중 혹은 노동자들과 관계 맺고 운동에 투심하는 이들 역시 동일한 과정을 거처 형성된 담지자들이다.<A HREF="#FOOTNOTE16"><SUP>16)</SUP></A> 이와 같이 보면, ‘노동자 문화 운동’은 대중과의 관계 속에서 노동자 주체의 형성 가능성과 문화적 동일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탐색하고 강화하는 실천 운동이며, 동시에 노동자 문화의 풍부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관계성 창출의 개방적 실천 운동의 한 영역일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문화운동’은 노동자 정치 운동을 구성하는 한 영역인 동시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을 준비하고 강화하는 활동을 포함하는 대중 및 노동운동 조직과 그들의 정치 조직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실천 이데올로기들 및 지배이데올로기적 요소들과의 각성된 이데올로기 투쟁의 효과이며, 한 형태일 것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8> 2. 노동자와 문화 연구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현대의 문화연구는 단지 문학의 분과에만 속하지 않고, 정치학, 철학, 사회학, 미디어 연구 등 광범한 분과들에 걸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P> <P CLASS=HS12> 토니 베넷(T. Bennett)에 의하면, 문화연구의 특징은 1)상이한 종류의 권력관계의 맥락에서 문화적 실천과 제도들이 기능(방식)에 관심을 갖는 ‘다분과적 접근’으로서 이는 대안 혹은 초월이 아닌, 문화와 권력의 특정한 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여러 분과들로부터 다양한 관점을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연구 대상으로서 문화와 권력, 특히 삶의 양식으로서 문화 및 공식적인 고급문화, 그리고 가치, 신념, 능력, 일상생활, 습관, 행위형태를 주입하는(inculcate) 문화적 실천들, 제도, 분류체계에 관심을 둔다. 하지만, 그 대상은 열려 있다고 본다. 3)권력관계에 관심을 둔다. 즉, 계급, 젠더, 인종, 식민주의 및 제국주의 그리고, 문화와 권력이 상호 연결되는 방식과 형태에 관심을 갖는다. 이를 통해 문화와 권력에 관한 이론화 방식 개발해서 적합한 사회적 행위자들이 이러한 문화관계에서의 변화를 초래하는데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4)제3의 교육기관으로서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연구 결과에 대한 지적 자원으로의 이용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사회운동(여성, 흑인, 반식민지주의) 그리고 문화 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이 수행하는 문화관리 문화 향유의 매개 문제에 주목한다. 곧, 주어진 역사적 조건하에서 문화와 권력관계의 특수한 기능 방식,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는 조건들의 분석 추구한다는 것이다.<A HREF="#FOOTNOTE17"><SUP>17)</SUP></A> 앞에서 살펴본 윌리암즈의 문화정의들에 조응하는 포괄적 연구대상을 설정하고 있다. </P> <P CLASS=HS12> -영국의 통속 드라마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자들의 생활에 대한 대중적 통념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이해와 연결된다. 상식적 통념으로서 계급에 대한 생각은 문화적 차원과 밀접히 관련된다.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고, 옷입고, 집을 장식하고 여가시간을 소비하는지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그람시와 톰슨의 영향을 받은 영국 CCCS 류의 대중문화(popular culture) 연구는 이것에 주로 초점을 두고 노동자 문화를 연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 이해는 문화적 다양성을 이해하는데는 유리할지 몰라도, 구조적 측면, 즉, 교육과 경제적 관계에서의 차이와 불평등을 은폐하거나 무시하는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 경향을 띤다. 그러나 맑스주의 계급이론에서는 구조적 불평등의 측면에서 계급을 정의하고자 했으며, 계급 불평등을 변형시키는데 문화정치의 목표를 두는 경향이 있어 왔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한편, 대중문화는 상징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일종의 지식인들의 지적 게임의 산물이다. 18세기 식으로 말하면, 교양문화와 대중(저급)문화의 구분 속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과정 속에서 발견된 지식인들의 생산물이다. 미학적 측면에서 보면 대중문화의 발견은 고전주의(형식적, 무미건조함, 무감동함)에 대한 낭만주의의 반동이다. 일반인들의 생동감 충동들, 자발성, 무소유성, 초연함(‘자연스러움’) 등의 (기계적 현재와 대비되는) ‘유기적인’ 과거의 투영으로서 미래에 대한 신화와 관련된다. 정치적 차원에서 대중문화의 발견은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 산업화, 민주주의. 풍습과 지역성, 그리고 민족적 동일화 과정과 관련된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그런데, 영국에서의 대중문화 연구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톰슨이나, 호가트 및 윌리암스 등과 같이, 민중주의적 감성이 강하게 작용해왔던 문화정치의 영향하에서, 그리고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되는 대량적 문화상품(mass culture) 공세 하에서 노동자 ‘계급 문화’의 보존에 대한 관심 하에, 노동계급 출신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학술적 대중문화 논의 역시 대중문화에 대한 정치적 참여의 맥락에서 발전하였다.(“문화와 사회 전통”) 이들은 모두 노동자 교육과 사회주의적 계급정치에 강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문화연구를 진보적인 사회변혁의 도구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A HREF="#FOOTNOTE18"><SUP>18)</SUP></A> </P> <P CLASS=HS12> 영국 문화연구의 두번째 단계는 호가트와 스튜어트 홀에 의해 주도된 버밍햄 대학의 CCCS이다. 그들은 초기에는 문화비평과 문화 형식들의 해석에 초점을 둠으로써, 문화와 사회 연구 전통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1963-4년) 그러나 일련의 내부 토론을 거치고 6-70년대의 사회변화와 사회운동에 대한 반응으로서, 연구소는 미디어를 포함한 문화 텍스트 속에 있는 계급, 젠더, 인종, 종족성, 민족성 이데올로기와 재현 사이의 상호작용에 초점을 두기 시작했다. 신문, 라디오, TV, 영화, 기타 대중문화 형식들이 수용자들(audiences)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두었고, 수용자들이 어떤 요인들이 수용자들로 하여금 상이한 맥락에서 상이하게 미디어 텍스트를 해석하고 이용하는지를 분석하였다. 60년대에서 80년대 초반에 이르는 이 두시기 동안 문화연구소는 알튀세르와 그람시에 준거하여 맑스주의적 접근을 취했었다. 이 시기에 수행된 연구들은 비교적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문화산업 비판과 유사하게 노동자 계급의 체제내적 통합 경향과 혁명적 의식의 쇠퇴, 맑스주의 프로젝트의 실패의 문화적 조건에 관한 연구들이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이들은 문화산업의 대량문화 공세(mass culture)가 노동자 계급의 자본주의 사회로의 통합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새로운 소비자 및 미디어 문화가 새로운 자본주의적 헤게모니 양식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들은 문화가 이데올로기적 재생산과 헤게모니의 한 양식이고, 여기서 문화형식들이 개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사회 조건에 적응하도록 유인하는 사고 및 행동 양식을 형성하는데 기여한다고 보았다. 또한 이들은 영국의 문화정치 전통에 따라,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동일하게, 문화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이라고 보았으며, 고급문화를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대해 저항하는 힘으로 보았다. 후에 영국의 문화연구는 미디어 문화와 수용자 해석과 이용이 갖는 저항적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반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량 소비문화를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유력한 동화 형식이라고 비판하였다. </P> <P CLASS=HS12> -애초부터 영국의 문화연구는 대항적 하위문화(하급문화, subculture)의 저항적 잠재력, 노동계급 문화의 잠재력을 증식시키고, 청소년 하위문화에 있는 자본주의의 헤게모니적 문화 지배에 대한 저항 잠재력(?)에 정치적 초점을 두어서,<A HREF="#FOOTNOTE19"><SUP>19)</SUP></A> 하위(급)문화 집단들이 어떻게 지배적인 문화형식과 정체성에 저항하며, 자신들의 스타일과 정체성을 창조하는지를 주로 분석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8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영국의 문화연구는, 과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운동과 같은 고급문화(High Culture)에의 참여와는 달리, 미디어 문화 상품과 대중문화에 초점을 제한하며, 고급문화에서 대중문화로 연구의 초점이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환은 모든 문화형식에 대한 통찰을 희생하며, 문화영역을 ‘엘리트와 대중’(과거의 고급/ 저급을 부정/ 긍정으로 역전)의 이분법을 재연하였으며, 헤게모니 문화형식에 대항하는 대안을 제공하고자 하는 예술을 통해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하고자 했던 표현주의나 초현실주의 및 다다(Dada)와 같은 아방가르드 운동과 문화연구 사이의 적절한 연결을 이루어 내지 못했음을 비판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도 70년대 초 ꡔ스크린ꡕ지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구분하고, 부르주아 리얼리즘 예술과 리얼리즘의 이데올로기적 코드를 재생산하는 미디어 문화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었다. 이들은 아방가르드적 모더니즘의 정치적 해방적 효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영국문하연구에서의 스크린지의 이론적 입장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이 이루어졌으나,(유물론적 문화론 및 이데올로기론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정신분석학에의 의존과 관념성과 기호학적 텍스트분석 비판)<A HREF="#FOOTNOTE20"><SUP>20)</SUP></A> 이 논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A HREF="#FOOTNOTE21"><SUP>21)</SUP></A>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영국의 문화연구는 문화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회적 관계와 체계 속에서 연구되어야 하며, 문화의분석은 사회, 정치, 경제에 대한 연구와 긴밀히 연관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들은 초기부터 크게 의존했던 전기 알튀세르와 표면적으로 단절하면서, 절충적 형태로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으로 퇴행하여 미디어 문화가 어떻게 지배적이 가치들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들 및 문화형식들이 개인들을 가치의 합의로 통합시키려고 하는 헤게모니적 프로젝트에 접합되는 지와 개인들을 소비주의와 대처주의 및 레이건주의와 같은 정치적 프로젝트로 통합시키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A HREF="#FOOTNOTE22"><SUP>22)</SUP></A> 그들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로서 사회 문화적 지배를 대항-헤게모니로서 저항과 투쟁을 명세화하고자 했다. 홀의 부호화/ 독해 모형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의 초기 모형은 자본의 순환에 따른 즉, 생산-유통-소비-생산을 포괄하는 연속적인 단락으로서 텍스트의 생산, 생산 및 유통과정, 수용자에 의한 텍스트 수용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분석과 텍스트의 생산과 수용 과정에서의 의미생산에 대한 분석을 추구했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그러나 최근의 문화연구의 포스트모던 문제인식으로의 방향 전환은 문화민중주의적 맥락에서 쾌락, 소비, 개인의 정체성 형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디어 문화는 다양한 정체성들, 쾌락, 임파워먼트를 위한 질료를 생산하고, 수용자들은 이러한 문화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대중적인 것(the popular)을 생산한다고 간주된다. 이 단계에서의 문화연구(영국과 북미)는 이전 단계의 사회주의적 혹은 혁명적 정치로부터 포스트모던 정체성 정치형태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며, 미디어와 소비문화에 관한 비판성은 현격히 감소하게 된다. 강조점은 미디어 산업에서의 텍스트 생산과 유통으로부터 수용자, 소비, 수용과정으로 이동한다.<A HREF="#FOOTNOTE23"><SUP>23)</SUP></A>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맥기건(Jim McGuigan)은 포스트모던 문화연구로의 방향전환은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라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서 ‘신수정주의’라고 비판한다.<A HREF="#FOOTNOTE24"><SUP>24)</SUP></A> 이것의 특징은 애초부터 불안정했던 정치경제학과의 단절과 비판적 사회이론과의 단절이다. 대중적인 것의 질료로서 국지적 쾌락, 소비, 잡종적 정체성 구성, 탈중심화를 강조하면서 정치, 역사, 경제를 폐기한다. 이러한 문화민중주의는 맑스주의의 환원주의, 해방의 거대서사, 역사적 목적론에 대한 비판과 거리두기 그리고 다시 반대물을 향유하는 방식으로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탈주하기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홀(Stewart Hall)은“글로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개념화 시도에서 “글로벌 포스트모더니즘은 차이와 주변으로의 모호한 개방을 의미하며, 대처주의나 레이건주의에서와 같이 차이에 대한 저항, 서구문명의 경전을 복원하려는 시도, 다문화주의에 대한 공격, 민족주의, 종족주의 및 문화적 인종주의 등에 대한 반발로서 문화정치의 중심지의 탈중심화와 결합되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글로벌 포스트모더니즘은 뉴미디어와 신기술로 마련된 지형위에서 이루어지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확장과 정보와 환락에 기반한 자본의 이윤실현과 사회통제를 표상한다는 비판이론의 해석과는 달리, 그는 서구적 서사에서 배제된 목소리나 차이, 주변으로의 개방으로서 문화의 다양화를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다.<A HREF="#FOOTNOTE25"><SUP>25)</SUP></A> 그러나 그는 그러한 다양성은 더욱 강력해지는 문화중개자로서 초국적 기업에 의해 제한되고, 통제된다는 점을 간과한다. 문화적 표현은 전세계에 걸쳐서 확장되기보다는 이윤 목적성에 따라 더욱 제약되고 획일화, 동질화될 뿐이다. 포스트모던적 장으로 진보적 재현의 정치가 확산될 가능성에 대한 홀의 순진한 낙관론적 기대는 새로운 사회조직 양식 내에서 일어나는 경험들과 현상들을 적절하게 접합시킬 수 없다. 단지 적극적 문화 수용자(active audience), 저항적 독해, 대항적 텍스트, 유토피아적 계기들만을 강조함으로써 문화산업에 의해 생산된 소비 선택의 다소 넓어진 기회를 찬양하면서 소비문화에 길들여진 개인들을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포스트모던 이론 속에서 증식된 차이, 복수성들, 이질성들은 새로운 사회질서 속에서의 욕망과 욕구의 증식을 예상할 수 있을 뿐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화연구의 발전은 공식적인 학술담론으로서의 권력을 향유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애초의 노동자 문화 연구의 감성 혹은 지향성과 충돌한다. 그 양상은 윌리스(P.Willis)에게서 볼 수 있듯이,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적 소비주의와 문화산업이 일상생활의 식민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시기에 문화산업의 대량적인 문화상품의 소비자로서 문화적 대중 혹은 청소년들의 ‘창조적이고 상상적인 문화소비’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분석으로 나가고 있다.<A HREF="#FOOTNOTE26"><SUP>26)</SUP></A>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8> 3. 문화정치적 기획들과 계급정치의 관계?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그러면 우리사회에서 문화연구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아니 문화연구가 있는가? 우리사회의 문화연구는 애초의 노동자 문화연구의 노동자주의적 감성이나 정치적 관심과는 달리, 미디어 중심의 문화연구의 제도화와 포스트모던한 수용자 분석, 그리고 다양한 대중문화 평론가들의 잡문을 양산시켰다. </P> <P CLASS=HS12> 이와는 달리, 이성백 교수가 ꡔ진보평론ꡕ에서 지적한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으로서 ‘서사연 연구자 집단’의 경우는 진보적 연구자들로서 애초에는 맑스주의 위기의 전화와 확장의 가능성을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에서 발견하고자 한 것 같다. 서사연의 경우는 푸코를 경유하여 주로 들뢰즈와 갸타리를 그리고 네그리를 철학적 준거로 삼아 맑스주의의 급진적 전화를 모색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주된 작업은 문화연구라기 보다는 프랑스 니체주의자나 자율주의 정치사상가들의 문헌을 소개하고 번역하는 일이었으며, 극소수만이 영화비평이나 잡문 형식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었고,<A HREF="#FOOTNOTE27"><SUP>27)</SUP></A> 이진경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이론적 작업이나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갸타리와 네그리의 보다 실천지향적인 저서들이 번역되고, 97년 이후로 ꡔ비판ꡕ과 같은 지면을 통해 노동운동의 파시즘적 경향에 대해 실천적인 비판을 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자본주의 계급구조 변동과 정보기술의 발전, 그리고 사이버 공간에서의 소통 가능성 증대에 주목한다.<A HREF="#FOOTNOTE28"><SUP>28)</SUP></A> </P> <P CLASS=HS12> “유물론적 문화연구” 집단으로서 ꡔ문화과학ꡕ은 애초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준거해서 유물론적 과학으로서 문화연구를 주창하였다. 이들은 문화를 이데올로기적 과정으로 개념화하고 “별로 논의되지 않아 왔던 언어, 육체, 욕망, 공간” 등의 “문제적 주제들”을 알튀세르 및 발리바르, 들뢰즈와 갸타리 등의 국내에 소개되는 논의들 추적하면서 “표상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이들의 철학에 이후로 점점 더 의존해 갔다. 1997년 말에서 98년에 이르면서, 계급중심주의 주장을 비판하고, “문화공학”을 주창하였다. 그것은 “문화와 공학의 모순적 절합을 꾀하려는 기획”이며, “문화적 생산과정 및 재생산과정 내부로부터 생산성과 창의성 높일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고, 문화과정과 사회적 관계들의 배치를 민주적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비판만이 아닌 대안의 효율적 생산을 설계하고 기획하려는” 시도로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문화정책에 대한 개입과 문화민주주의로 관심을 확장, 이동해갔다. 또한 이들은 ‘문화게릴라 총서’를 발간하면서 청(소)년 하위문화의 욕망과 탈주적(?) 위반적 혹은 저항적 성격에 주목하며, 독립적 문화 기획자들의 교육 프로그램 개발과 정책토론회 개최 등 보다 국가 문화정책에 대한 개입을 시도해 왔다. 최근 들어서는 외국영화 쿼터제 시위 조직 이후로 구성된 ‘문화연대’의 중심적인 단위로서 보다 실천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방향전환 속에서 “신자유주의가 시장독점화에 극복하는 것인데 비해 그것에 반대하는 기획으로서 문화공학은 “국가, 시장, 자치(시민사회)의 민주적 자치의 활성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A HREF="#FOOTNOTE29"><SUP>29)</SUP></A> 이들의 주요한 경향상의 특징은 들뢰즈와 갸타리의 철학의 독특한(창조적인?) 이해와 하위문화 및 문화수용자론적 관심, 계급정치의 문화정치로의 환원과 문화민중주의적 경향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두 가지 문화연구자 집단은 모두 들뢰즈와 갸타리의 철학 및 네그리의 정치사상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들의 실천, 탈주와 접속은 가상공간과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는 너무나 취약하다. 소수자들과 노동자들의 탈주는 ‘반(anti) 생산조직’으로서 파시즘적인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의 조직이란 벽에 부딪치지만, 언제나 그 주변에서 어른거리기 마련이다. 급진적인 주장들에서 보이는 스스로 변경으로의 추방 되기는 오직 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할지 모른다. 포스트모던 비판은 모던의 거울이다. 오히려 창조적인 조직화에 관한 통찰과 경험들은 초국적 기업들과 정당 및 노동운동 조직과 같은 거대조직들에 의해서 더 잘 실천될 수 있는 생태적 조건을 갖고 있다. ꡔ천개의 고원ꡕ식으로 표현하자면, 돌연변이를 통한 탈주 혹은 비약을 통한 변종으로 계속적으로 복제되어 살아남는 것(quantum speciation)기 위해서는 즉, 거대한 자본주의 기계적 흐름으로부터의 탈주는 고립되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조건과 자원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과연 어떤 것들일까? 그리고 정보기술의 스마트함과 사이버 공간의 유영 뒤에는 언제나 초국적 금융자본의 유혹과 군산복합체, 전자적 감시망과 통제장치, 전선망 매설 노동자들과 컴퓨터 기기 제조 노동자 및 데이터 입력 하청노동자들의 전통적 노동과정이 따라다닌다. 이들의 자율주의적 행동은 반생산적(?) 조직에 의존하는 고전적 노동자군에 대한 착취에 대해 눈감는 것을 조건으로 할 수도 있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이들의 논의의 일차적인 준거로 들뢰즈와 갸타리의 육체의 유물론 혹은 ‘되기’ 혹은 생성의 존재론 및 인식론이다.<A HREF="#FOOTNOTE30"><SUP>30)</SUP></A> 이들은 동성애자, 복장도착자, 약물중독자, 사드-마조히스트, 매춘부, 여성, 아이, 청소년, 정신병자, 아방가르드적 예술가 등 소수자(miniorities) 형태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분자적인(molecular) 수준에서의 탈유표화, 즉 사회적 상징체계에 의해 유표화된 몰적(molar) 사회범주로부터의 일탈(deviance) 혹은 주변화에 주목한다.<A HREF="#FOOTNOTE31"><SUP>31)</SUP></A> 이 소수자들에게서 공통적인 역설은 이들이 비교적 기표적 권력의 이원론적 체계에 종속되어 있지만, 동시에 되기의 탈주에 근접해 있다고 본다. 이들에게 있어서 ‘되기’는 다른 형태의 그 무엇 즉, ‘여성되기’, ‘동물되기’ 혹은 ‘불가지적인 것’(becoming- imperceptable) 되기와 같은 생성이다.<A HREF="#FOOTNOTE32"><SUP>32)</SUP></A> 이중 ‘여성되기’는 다른 성적 형태와 비교해서 남근적 권력에 기초한 리비도 경제 혹은 외디푸스 삼각형에 종속된 상징적 기호체제에 의한 유표화로부터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매개자 혹은 중개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외디푸스 삼각형에서 여성은 남성과 인간 아이와의 관계속에서 지배적인 위치로서 남성에 종속적이며, 중심점으로서 인간에 종속되어 있다. 또한 아이는 동일한 관계속에서 여성되기와 남성되기 인간되기에 종속되어 있다. 이러한 외디푸스 삼각형 도식은 다른 주변적 소수자에게도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남근 지배적 리비도 경제 하에서 종속적 위치로의 여성되기는 능동적/수동적, 강함/약함, 부유함/가난함, 깨끗함/더러움 등의 이항적 대립에서 종속적으로 위치되는 성적으로 유표화된 공인 받은 저장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성되기는 하나의 준거 혹은 매개자로서 남근 지배적 권력관계 하에서 다른 성적으로 소수적인 변이들이 갖는 욕망의 강도를 제어하는 안전밸브 기능 혹은 한계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배타적인 양극성을 넘어서는 경우는 사회체로부터의 추방 혹은 완전한 배제나 무의미로의 전락만이 있다 것이다. 이와 같이 이항적 대립쌍은 기본적으로 억압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호체제이고, 이것이 붕괴되는 곳은 또한 유성화(sexualization)도 붕괴되기 때문에, 이들이 분열분석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리비도의 남근 중심적 조직화와는 이단적인 조직화가 생존해 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유성화 되기’로서 ‘여성적 신체되기’인 것이다. 이는 억압적 사회체제로부터 욕망의 강도와 흐름을 따르는 탈주선(lines of flight)을 그려내기 위한 최소한도의 준거점이 된다는 것이다. ‘남근 지배적 권력 구성체’로부터 이탈하는 남성 역시 가능한 양식에 따라 이러한 여성되기에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에 의하면, 남근 지배적 권력 구성체 혹은 사회적 질서 및 기호체제와 마주하고 그로부터의 탈주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여성적 유표화에 의지하면서 그것을 벗어나고, 다른 되기의 생성적 탈주선을 타는 것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그런데, 이들의 논의는 포스트모던 기호학자인 크리스테바의 육동에 대한 기호체제에 의한 유표화(문화적 상징적 질서로의 통합)와 일탈 혹은 위반(transgression)의 미학(혹은 정치)의 위상학(?) 논의에 크게 의존하며, 구조주의 기호학자인 엘름슬레우(Louis Hjelmslev)와 그레마스(A.J.Greimas) 기호론의 독특한 해석과 확장에 의존하고 있다. 지배적 기호체제의 전략적 배치를 벗어나는 위반의 미학 혹은 기표적 실천은 다양한 실천적 계열들의 결합을 통한 새로운 의미작용의 가능성을 노린다. 푸코의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명제는 권력의 이접적 작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애초에 물질적 실천의 상이한 계열들이 마치 권력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으로 현상하는 것은 권력의 전략적 배치로의 포획 효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가 후기에 밝히고 있듯이(‘권력과 주체’), 들뢰즈와 갸타리도 라캉의 결여(the lack) 개념이 사회적 제약의 측면을 고려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듯이(ꡔ앙티외디푸스ꡕ), 그리고 알튀세르가 국가의 상징적, 실제적 폭력의 효과로서 주체의 형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듯이(ꡔ마키아벨리의 고독ꡕ), 상징적 기호체제의 전복과 상이한 배치는 거대 권력이라는 조건을 필요로 한다.(그리고 공간 정치에 관한 르페브르의 논의 참조할 것.) 위반과 저항인가 전복인가? 전복이라면, 무엇의 전복인가? 그 조건은 무엇인가? 조건이 구비되지 않으면 결국 어떻게 될까? 상상속에서 상징체계로의 위반은 현실세계 속에서의 지배적 사회관계의 재생산에 이바지하는 다른 표현형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식인의 간지 아닐까?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또한 이들의 비기호적 흐름들 혹은 질서화 되지 않은 욕망의 흐름 강조(탈영토화, 탈코드화)와 노마드(nomad)로의 생성 논의는 윤소영 교수가 비판하고 있듯이, 한편으로 탈국가화로 연결되는 반면, 이들이 강조하는 욕망의 흐름에 따른 몰적 장치로부터의 탈주 즉, 탈동일화와 탈개인화는 지구화 시대의 교통과 소비의 거대 통제 장치의 기능작용에 조응한다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포스트모던한 유토피아로서’ ‘유동적 동일화‘(shifting identities)는 이미 전지구적 범위에 걸쳐 사회터전 전체로 일반화된 시장이 요구하는 ’신축성‘에 조응하고, 몰주체적 환상과 파괴적/ 자기파괴적 지향성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A HREF="#FOOTNOTE33"><SUP>33)</SUP></A> 또한 발리바르가 비판하고 있듯이, 68년 이후 70년대 말의 선진경제의 제로성장사회론 기반한 재구조화와 제3세계로의 제조공장 이전의 맥락에서 이에 다한 반향으로 대두되었던 허무주의적(nihilistic)이며 비합리주의적(irrationalistic)인 대표적인 조류로서 위반의 미학 혹은 종말론적 미학에 바탕을 두고, 자연과학적 발견의 자의적 도용과 실증주의적 설득 방법에 호소하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A HREF="#FOOTNOTE34"><SUP>34)</SUP></A>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여성이나 소수자들이 위치지워지는 구체적인 역사 사회적 조건의 문제를 고려하기보다는, 남근 중심적 리비도 경제 혹은 기호 질서의 위반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을 갖는 들뢰즈와 갸타리의 생기론적 생성 철학이 비합리주의로 비판받을 수 있고,<A HREF="#FOOTNOTE35"><SUP>35)</SUP></A> 지구화 시대의 포스트모던 동일성의 혼란과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통치에 조응할 수 있는 “미학적 종말론”의 형태를 취한다고 비판받을 모면하기 어렵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자율주의적 실천운동: 68년 5월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미쳤던 마르쿠제와 라이히 등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반권위주의 및 반전체주의의 부정의 미학과 바네이겜과 기 드보르 등의 상황주의 운동은 이태리를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들에서 노동조합 및 좌파 정권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창조적으로’ 추구하는 자율주의적 운동(autonomia movement)을 발전시켰다. 이로부터 영감을 받은 실천들은 기존의 좌파적 조직원리를 비판하면서 자율성에 근거한 자기증식적 조직원리를 추구하게 했다. 특히, 이태리의 경우는 들뢰즈와 갸타리의 육체의 유물론과 욕망의 미시정치 철학을 적용하는 탈동일화 및 탈국가화 정치운동으로서 자율주의 운동의 발전을 가져 왔다. </P> <P CLASS=HS12> -이들의 실험적 실천은 기존의 조직 운동이 지닌 리더중심주의(leaderism)와 관료제적 경직화 경향을 넘어서는 조직원리를 추구하였고, 실제적이고 일상적 경험을 강조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 ‘일상생활의 질의 향상’시키는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를 모색하였다.<A HREF="#FOOTNOTE36"><SUP>36)</SUP></A> 그것은 새로이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적 관계를 예상하고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자율주의 정치의 핵심적인 모토였다. 자율주의 운동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생산적 노동’에 대한 기존의 특권화된 인식을 넘어서서, 재생산 노동 역시 생산적 노동임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구명하는데 있었다. 이것은 페미니즘에서 마리아 달라 코스타 등의 재생산 노동의 생산적 성격에 대한 이론화와 가사노동 임금제 운동실천으로 나타나기도 했다.<A HREF="#FOOTNOTE37"><SUP>37)</SUP></A>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이러한 운동은 복지국가의 가부장제적 성격을 비판하면서, 탈국가화 실천을 모색하는 운동이어서 조직형태와 원리에서 급진적이고 독창적인 실험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실천들이 신자유주의적 민영화 정책이 진행되는 가운데, 얼마만큼의 가능성의 조건을 창출할 수 있는 지의 문제일 것이다. 이들의 실천은 가사노동을 여전히 임금제에 국한시키고, 경제주의적 임금인상 운동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P> <P CLASS=HS12> -동시에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들의 자유롭고 창조적이며 실험적인 급진적 탈국가화 실천 경향은 자칫 신자유주의 시대 복지국가의 역사적 기능이 변화는 맥락에서 볼 때, 실천운동이 야기할 수 있는 효과가 양날을 가진 칼로 작용할 위험을 갖고 있다. 즉, 소비자로서 일상생활에서의 주권을 주장하거나 독자적인 생활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신세대(New Ages) 접근들은 그들이 부정하고자 하는 엘리트주의적 속성과 스펙터클한 거대 소비사회에서 소외된 전형적인 양상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뿐아니라, 반대로 사회적 조건의 불비와 제한으로 인하여 자칫, 발리바르와 해러웨이가 경계하듯이, 항상 비합리주의적 극생산주의(ultra-productivism)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빠질 위험이 있다.<A HREF="#FOOTNOTE38"><SUP>38)</SUP></A>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또한 우리는 노동자들의 파업시나 철거민들의 작업장 공간 혹은 주거 공간 및 도시공간의 점거 및 농성에 익숙해 있다. 그리고 노동자 정치에서 그것이 지닌 중요성은 잘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유럽의 페미니즘이나 자율주의 실천들에서도 주택무단점거(squatting)나 독자적인 생활공동체 건설 운동이 6~70년대부터 주목받아왔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 점유의 정치와 관련해서 등장했던 다양한 실천들은 당시의 그 사회구성체 혹은 특정 지역의 ‘공간 집중 및 공간 부족을 생산하는 사회경제적 모순, 도시-농촌 모순 혹은 정치적 관계’ 문제나 기존 좌파운동 실천의 경직성에 대항하는 비판적 성격을 띠는 역사적, 사회적 특수성이 강한 운동들이었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그런데, 일상에서의 생활의 변화를 추구하는 역사적 기획들과 실천운동들에서 등장했던 생활공동체 운동(히피부터 자율주의자 및 New Ages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80년대 노동자 문화운동에서 추구되었던 공동체 생활운동과 페미니즘의 소비조합 생활운동,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시의 생협운동, 윤구병 선생의 변산공동체 등등)은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사회구성체 속에서 그 점유된 공간은 ‘독자적이고 혹은 전원적인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고립된 섬”(?)<A HREF="#FOOTNOTE39"><SUP>39)</SUP></A>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공간적 고립과 독자적 생활양식의 창조(?)와 ‘미시 정치’(?)적 실천들이 진보적 좌파 운동과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할까가 정치 활동상의 하나의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는 상황인 것 같다. 노동자 문화 및 노동자 문화운동의 측면에서도 이미 80년대 이러한 조류가 등장했으나 실패한 경험이 있고, 다시 90년대 중반 이후로 뚜렷한 정치적 조류로 등장하여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공간의 생산과 그 모순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르페브르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지 않는 혁명 그것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뿐 아니라, 삶 자체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단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 제도나 정치적 장치만 변화시킬 뿐이기 때문에, 혁명을 통한 진정한 사회적 전화는 제 영역별로 동일한 속도와 힘을 미치면서 발생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일상생활, 언어, 공간에 그 효과를 미친다.”고 주장한다고 보아 공간 변형의 정치적 프로젝트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A HREF="#FOOTNOTE40"><SUP>40)</SUP></A>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지배적인 공간 형태는 그것이 지배하는 영역들을 조형하려한다. 차이는 추상적인 상징이나 예술로 밀려난다. 공간의 전유와 공간생산은 계급과 그 분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계급투쟁은 공간에 그 흔적을 각인시킨다. 모든 차이들에 환원하는 추상적 공간을 막는 투쟁의 중요성 즉, 미분화, 차별화하는 것, 차이를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투쟁은 자본의 ‘진보적 운동’과 관련해서 보면, 역사적으로 모순적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발전 초기의 급속한 산업화와 기계기술의 확산 과정 속에서 기계적 리듬을 통한 노동자 생활(시ㆍ공간)의 새로운 분할과 배치를 추구하는 부르주아의 진보적 물질 운동성은 자유주의 문인들의 기계-기술발전에 대한 자연화(naturalization)를 매개로 노동자의 생활리듬을 기계적이며 선형적으로 추상화된 자본주의적 시간과 리듬으로 환원시켜 갔다. 이 시기 노동자의 저항은 순환적(‘자연적’) 리듬에 종속된 전통적 생활방식을 고수하려는 ‘보수적인’ 운동으로 성격지워진다.(톰슨, 르페브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은 일상성의 통치가능한 기능적 측면의 단일 공간으로 환원과정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르페브르는 프랑스 68년시 공간 재전유를 주저하는 것에 대한 절망적인 태도로서 출현한 급진 좌파의 비합리주의적 경향을 비판한다. 그들은 “오직 불도저와 화염병만이 공간의 지배적 조직화를 파괴할 수있고, 파괴되어야 건설이 온다”고 주장하며, 공간의 재전유와 파괴 및 재구성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모호성을 드러내는데, 공간의 재구성이란 어떤 재구성을 의미하며, 기존의 생산수단 과연 파괴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들의 입장은 “그들이 속해있는 사회와 공간의 모순을 최소화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근거없이, 자본주의적 체계에 완결성 혹은 연금술적 속성을 부여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의 체계에 대한 독설적 비난 과정은 결국 모든 이성적인 제약들을 넘어서 있는 권력을 찬미하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것이다.(니체주의의 비합리주의적 경향) 이 분열주의적 좌파들은 자신들의 무의식과 모순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파괴와 구성의 절대적 자발성에 호소하는 것은 사고, 지식, 그리고 모든 창조적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며, 오직 피상적으로만 총체적 혁명관계 근거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또한 비지가 언제나 공간을 위한 투쟁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르페브르는 “문제는 표상적 공간이 아니라, 공간 표상의 생산”<A HREF="#FOOTNOTE41"><SUP>41)</SUP></A>이라는 것이다. 공간표상이 표상적 공간에 대한 조작을 촉진시킨다. 비노동공간에 대한 신식민화. 비생산적 공간의 설계. 집권화, 조직화, 위계화, 상징화된 것들이다. 일상성의 정치가 중요하지만, 그 형태가 더 중요하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새로운 사회관계는 새로운 공간을 요구한다”고 할 때, 그 때의 변화된 삶의 정치적 슬로우건 것 뒤에 남는 것은 ‘차별적 공간 실천’일 것이다. 그런데 일상생활이 추상공간에 사로잡혀 있고, 그 구체적인 제약 속에 있는한 오직, 기술적인 향상만 있는 한, 즉, 일 공간과 여가공간, 생활공간이 정치권력과 그들의 통제기제에 의해 제공되는한, ‘삶의 질 향상 등 생활의 변화’는 헛구호일 뿐이라는 것이다. 공간 실천론은 관념적인 비판이론의 공허함(말, 이데적 수준)의 부정적 유토피아와는 다른 실천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획기적인 공간 생산’이라는 유토피아: 그러나 기존하는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는 이러한 전망을 말살해 버려, 그 가능성을 진부한 것으로 환원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태도와 관련된 두 개의 경향에 봉착한다. 하나는 객관성 강조 경향(기존관계 공간내 사물 생산 유지)과 다른 하나는 주관성(자원주의: 생산양식의 일거에 분쇄, 극좌주의)이다. 생산력 발전으로 인해 거의 의식적인 공간생산의 가능성이 달성되었으나 ‘생산양식이 선점되거나 새로운 공간의 횡단’으로서는 그 역치를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본다. 공간의 정치? 차별적 공간 생산, 차별적 사회생활, 차별적 생산양식? 과학과 유토피아, 실재와 이상, 관념과 체험의 변증법이 올바르게 사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또 하나, 수용자론과 하위문화적 저항의 기표적 실천은 상상적으로 자위하기에 불과하다. 하위문화 집단의 기존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상상적 단절과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표현에 치중하는 스타일 정치이다. 표현하면, 상상적으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문화상품의 소비자들에게서 저항적(?) 잠재력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들의 꿈은 신자유주의적 소비자 주권 강조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기업가적 모험 추구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좌파의 보수성과 경직성을 비판하면서, ‘진보’의 파도타기를 하는 것이다. 내꿈꿔!에서 혁명을 본다. 바꿔!?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발리바르는 78년에 프랑스에서 구조조정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대두된 다양한 허무주의 및 비합리주의적 경향이 자본의 위기의 시기에 대두된 좌우파 모두의 경향임을 주목하고 비판한 바 있다. 그는 현시기가 자본주의의 위기의 시기라면, 그러한 자본주의 위기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위기가 야기하는 사회적 분업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속에서의 모순을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현시기는 생산력의 발전이 전세계적으로 더욱 불균등화 해가는 제국주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초국적 금융자본의 세계적 유동화는 과학기술혁명에 의존하고 있지만, 다시 그것이 과학적 연구의 성격과 사회적 생산과의 관계에 반향하여, 자본주의는 기술혁신을 가속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대자본의 직접적인 이윤에 더 강하게 종속시키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서 자본은 과학기술 훈련을 확대시키고, 노동력의 상대적인 탈숙련화를 일반화시킨다. 사회적 안전망과 노동자의 육체적 유지, 강도높은 착취와 유지 방식들이 개발되는 가운데 비합리주의적 상상력이 대두한다는 것이다. 체계의 모순이, 유토피아, 시대착오적 복고주의, 기타 개별적 상상력을 제외하고는 마치 해결 불가능한 것처럼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실증주의(positivism)의 사이비 ‘과학적’ 형식주의 혹은 의례(ritual)에 근거하는 외관을 띤다는 것이다(비합리주의의 합리주의적 외관). 이러한 비합리주의는 사회전체 수준에서 지배적인 실증주의가 제시하는 상상적인 해결책에 따라 첨예화하는 모순의 신호라는 것이다.<A HREF="#FOOTNOTE42"><SUP>42)</SUP></A>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발리바르는 역사유물론이 비합리주의와 전선보다는 정신주의나 종교적 신비주의를 형식적 과학성 추구 속에서 은폐하고 조장하는 실증주의와의 투쟁과 대중들에 대한 교육의 비과학성에 대한 투쟁을 중시한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앞서 필자는 노동자문화 및 문화정치가 대면하는 이중 전선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 하나는 노동자 운동 실천 및 노동자 일상적 실천에서의 지배 이데올로기와의 지속적인 투쟁의 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 정치 혹은 노동자 문화정치가 노동자들의 다양한 이질적인 삶의 양식들과 그 원리들, 특정한 노동자 범주들과의 대면 속에서 보편성을 의식적으로 추구하면서, 스스로를 풍부화해 가는 가운데, 노동자 정치 속에서 드러나는 상징적, 실제적 폭력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이를 넘어서려는 ‘새로운 조직적, 정치적 관계 양식’의 발견을 위한 실천적인 투쟁 전선을 말했다. 그것은 성적, 인종적, 지역적, 세대적 차이들과 정신-육체 노동의 차이들과 모순의 가능성과 현실화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예상하며 극복하려는 적극적이고 무한히 개방적인 투쟁과 실천의 변증법적 운동이어서, 노동자 운동 및 노동자 조직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적극적 대결함으로써만 극복 가능성이 드러날 수 있는 차이들이며, 적대들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노동자 문화정치는 곧, 노동자 주체의 형성 가능성과 문화적 동일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탐색하고 강화하는 실천 운동이며, 동시에 노동자 문화의 풍부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관계성 창출의 개방적 실천 운동의 한 영역일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 문화운동’은 노동자 정치 운동을 구성하는 한 영역인 동시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을 준비하고 강화하는 활동을 포함하는 대중 및 노동운동 조직과 그들의 정치 조직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실천 이데올로기들 및 지배 이데올로기적 요소들과의 각성된 이데올로기 투쟁의 효과이며, 한 형태일 것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제는 여러 문화정치적 기획들이 대두되는 정치적 지형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정치적 기획은 지식인들이 발화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특히, 좌파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정서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좌파 운동의 역사적 모순과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더불어 자본주의의 지구적 차원에서 드러나는 위기 양상에 대한 이해 역시 필요하다. 모더니즘이 그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대의 모순을 표현하고 사회변동에 반응하는 지식인들의 경향적 조류들이라고 본다면, 그것들은 언제나 이미 사실주의의 생생한 방향들이었다. 골리앗 크레인이나 굴뚝 위의 절박한 죽음의 농성과 무한한 좌파적 상상력이 함께 중첩되고 있다. 굴뚝위에서 점거농성장에서 포스트모던한 상상력은 그저 허공에 날릴 뿐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이러한 기획들에서 갖고 있는 좌파와 거대 조직적 운동 경험에 대한 이미지, 자화상이 문제다. 좌파운동은 끊임없이 자기모순과 대면하며 실천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해 왔다. 지식인들의 무의식적 “욕망”이 투영된 상상력들은 좌파들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와 경직된 실천상 위에서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운동 조류들과의 유효한 접합을 발견하는 것은 상호 변화의 문제일 것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그것은 한편으로 일상 현실과 문화운동 실천의 접합과의 괴리와 연관된 좌파적 역량의 한계나 기획의 편협성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좌파 담론에서도 신자유주의적 문화통치 지형과 문화 상품화를 통한 스펙타클화, 문화와 제도, 문화 생산 과정과 유통의 문제에서도 노동과정과 분업, 나아가 지식-육체노동의 모순이 적극적으로 사고되어야 할 것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 두 경향들에 지적으로 관련을 맺어 왔다. 이론주의와 실천적 급진성을 강조하는 조류들 속에서 동요해 온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양자를 실천 조직론의 차원에서 성급히 결합시키고자 실천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이러한 경향들이 가지고 있는 강점과 단점들이 충분히 실천적 차원에서 고민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실천 운동 조직들은 여러 측면에서 ‘포스트모던적’이고 문화민중주의적인 조직 실천들에 익숙해 있으며, 그것은 다시 원칙과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정정되는 동요의 모습을 띠고 있다고 생각한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필자는 문화연구자의 입장에서 무엇보다도 노동자를 포함한 대중에 대한 연구와 변화들에 대한 이해가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적’ 자료에 대한 접근이 너무 편협하게 제한된 가운데 철학적 사유의 섣부른 외삽에 불과할 뿐인 문화기획들이 난무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이 발표의 내용들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고, 단지 노동자 문화정치에 관한 토론을 위한 자료일 뿐이다. </P> <P CLASS=HS12> <A NAME="#2036052164"></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Hnc\BinData\EMB1ad0.jpg" width=216px height=130px > </P> <P CLASS=HS12> <A NAME="#2036052163"></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UNI1ad2.gif" width=58px height=175px >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A NAME="#2036052165"></A><IMG src="C:\DOCUME~1\leeus001\LOCALS~1\Temp\Hnc\BinData\EMB1ad1.jpg" width=192px height=115px >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제제기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노동자 문화영역의 부각은, 대중의 생활양식과 의식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들을 조직할 수 없다는 활동가들의 생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권위주의와 전투주의의 결합을 통해 단협에 있어서의 효율성은 단기간에 확보했으나 대중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공세로부터 그들을 끌어내기 위한 것으로 제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표자는 계급적 관점에서의 괴리, 정치․사회적 관계, 문화중심적 연구의 함정을 지적하고 결합을 새롭게 시도하자고 제기하고 있다고 본다. 노동자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는 사회구성체 전체수준으로 구성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거기에 구체적으로 작업장 수준에서의 노동양식과 관련한 개별 노동자들의 권위에의 도전, 수용, 옆사람들과의 담론, 행위양식 등 새로운 패턴들이 연대를 통해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관심이다. 기본적으로 어떻게 새롭게 조직할 것인가, 기업별․공장별로 구체화된 노동과 삶의 경험이 노조의 조직원칙과 어떻게 관련되는지가 알고 싶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답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노동자들의 일상에 대한 이해, 노동자의 전체 일상은 작업장으로 환원되는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작업장에서의 시공간, 지역-전국에서의 시공간의 상호연결성을 이해하려는 시도, 그리고 지역투쟁의 전국성, 지구성에 포착하면서 투쟁의 실천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의 조직화와 관련해서 노동자들이 기능적으로 환원되는 획일적인 일상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개인들이 일상을 생산하려는 부분들을 볼 필요가 있다. 작업장에서의 공간계획과 지역에서의 노동자의 삶은 연결되어 있다. 작업장 공간의 사건들의 외적 확대를 위해 지역공간 거점을 마련하고 전국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문화적 실천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럴 때 연대를 전국적으로 계획․실천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라 본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제제기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통합의 방식으로서의 문화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용, 즉 어떤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데…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답 </P> <P CLASS=HS12> 전통, 계급적 경험이나 실천적 수준에서의 유토피아들, 이를 찾아내고 전통으로서 찾아서 담론화시켜야 한다. 민주노조운동의 전통, 전노협 투쟁의 역사에 입각하게 되면 그것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며 나아가 뚜렷한 공동체 전통이 형성된다. 이렇게 투쟁과 역사에서 문화의 내용을 구성하고 발견해내는 시도들이 필요하며, 그것은 또한 미래로 투영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보편화시키려는 변증법적 운동으로서의 문화여야 한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제제기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97년인가 백기완 선생이 한겨레에 쓴 글을 보면, 문화일꾼들의 역할은 북돋아주는 것, 혹은 문화는 심금을 울려야 하는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러한 것들이 역시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계급적으로 동질성을 가진 삶의 경험들을 통한 것이어야 할텐데, 발표자의 글에서는 그러한 것들은 빠져있고 무표정하고 마음이 없는 대상들만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노래활동이건 문화연구건간에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답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미적 형상화의 문제이다. 개별적 경험과 계급의식, 모순을 계급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집합적인 노동자들의 공통적인 경험을 자본주의 모순과 연관시키는 것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할 수 있다. 미술, 언어학, 자서전, 문학 등으로 그러한 미적 형상화를 가능하게 하려면 문화연구가 필요하다. 그러한 성과가 나오고 대중들의 정서적 감수성을 조사하는 것, 대중적 실천적 삶들에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들을 보여주는 것이 미학적 형상화의 재료들이 될 수 있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제제기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발표자가 말한 문화의 4가지 정의-자유주의적, 인류학적, 예술활동 개념, 특정사회질서 재생산체계-를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 이것은 통합 위주의 시각이며, 지배문화에 치우친 정의라고 본다. 문화는 지배 문화와 저항 문화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답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다른 식의 문화 구분 시도는 많다. 지배-피지배 문화, 모-하위 문화, 부르주아-노동자 문화, 고급-저급 문화 등이 그것이다. 지배-저항 문화의 정의는 힘들지만, 이데올로기적․사회적 관련에서 정의할 수 있다고 본다. 지배 이데올로기와의 관계 속에서 저항, 종속적, 발현적, 대량적, 전통문화 등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민족주의적 정서에 바탕해서 국제연대가 희생되는 것 등 이데올로기적 지배관계 속에서 문화를 위치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제제기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발표자는 문화와 이데올로기를 일치시키는 것인가?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답 </P> <P CLASS=HS12>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 다양한 삶을 문화로만 얘기할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문화를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제제기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노동자 계급의식을 이데올로기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답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여기서의 이데올로기는 알뛰세의 이데올로기 개념이다. 알뛰세는 이데올로기를 사회구성원들의 사회적 관계 인식으로 본다.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문제제기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주류문화가 아닌 다른 문화, 즉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인간으로서의 문화도 있지 않은가?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답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공통적인 뭔가를 말하는 것인가? 그러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 의식, 형식 등 육체에 각인시키는 것들이 모두 특정 문화적 생산물들이다. 그것은 모두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는다. <A NAME="#2036052166"></A> <TABLE border="1" width="50px" height="14px"cellspacing="0" cellpadding="0" style='border-collapse:collapse;border:none;'> <TR> <TD height="14px" width="50px" valign="middle" bgcolor="#000000" style='border-left-width:0.12mm; border-left-color:#000000; border-left-style:solid;border-right-width:0.12mm; border-right-color:#000000; border-right-style:solid;border-top-width:0.12mm; border-top-color:#000000; border-top-style:solid;border-bottom-width:0.12mm; border-bottom-color:#000000; border-bottom-style:solid;'><P STYLE='font-family:"휴먼굵은팸체";font-size:11px;color:"#ffffff";text-align:center;line-height:12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3px;'> 한/노/정/연</TD> </TR> </TABLE> </P> <P CLASS=HS12> <BR> </P> <P CLASS=HS12> <BR> </P> <P STYLE='font-family:"#신세고딕";font-size:11px;color:"#000000";text-align:right;line-height:17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토론이 약 2시간 30분 이상 진행되었습니다만, 지면 관계상 대폭 줄였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P> <P STYLE='font-family:"#신세고딕";font-size:11px;color:"#000000";text-align:right;line-height:17px;text-indent:0px;margin-left: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P> <!-- Document End --> <HR WIDTH="300px" ALIGN="left"><A NAME="#FOOTNOTE1"><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2px;margin-left:12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1) 예컨대,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에 이르는 문화 활동가들의 논쟁. 이에 대한 개괄적인 파악을 위해선, 대표적으로 정이담, “문화운동 시론Ⅲ”, 김정환, “예술성, 운동성, 대중성, 민중성, 일상성, 전문성”, “민중형식과 그 테두리”, 정이담 외, ꡔ문화운동론2ꡕ, 공동체, 1986; 노동자문화운동론에 관한 논의로는 ꡔ전망과 건설ꡕ, 1, 2, 동녘, 1988, 1989; ꡔ현실주의ꡕ, 민맥, 1992; ꡔ문화과학ꡕ, 1, 2호 등을 참조할 것.</P> </A><BR><A NAME="#FOOTNOTE2"><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3px;margin-left:13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 이러한 생각에 대해선 P.Bourdieu, In Other Words, Cambridge: Polity Press, 1990.</P> </A><BR><A NAME="#FOOTNOTE3"><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2px;margin-left:12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 민중주의 역시 정의하기 어렵고 논란이 되는 개념이다. 과거 페론주의, 농민운동이나 계급을 벗어나는 급진적 수사에 의존하는 운동이나 마오주의적 경향을 지칭하였다. 요즈음은 민족주의자 및 종족주의자를 지칭하기도 한다. 라클라우는 계급모순을 비계급 모순과 접합하는 담론들에 고유한 경향으로 본다. 그는 민중주의를 통해 정치담론을 통한 주체, 주체성, 주체임의 호명, 정체성 생산으로서 정치를 사고하며, 문화주의적이고, 인민과 권력 블록의 모순은 결코 계급 사이의 무매개적인 모순으로 현상하지 않는다는 점에 근거하여 다양한 유형의 민중주의를 구분한다. 홀은 민중문화가 지배적 문화에 투쟁하고 대항하거나 지지하는 투쟁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본다. 민주적 좌파의 민중주의 경향이나, 문화의 정치로의 환원, 정치의 문화정치로의 붕괴경향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P> </A><BR><A NAME="#FOOTNOTE4"><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2px;margin-left:12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4) 강명구, 「한국 노동계급 문화의 담론: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문제틀」, ꡔ이론ꡕ, 1993, 7, 겨울, 288~316쪽.</P> </A><BR><A NAME="#FOOTNOTE5"><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2px;margin-left:12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5)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서관모, 「이데올로기의 문제설정: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ꡔ진보평론ꡕ, 2, 1999, 259~282쪽.</P> </A><BR><A NAME="#FOOTNOTE6"><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2px;margin-left:12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6) Glenn Jordan & Chris Weedon, Cultural Politics: Class, Gender, Race and the Post-modern World, London: Balckwell, 1996.</P> </A><BR><A NAME="#FOOTNOTE7"><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3px;margin-left:13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7) 계급을 초월한 사회적 조화의 창출이 문화정치의 목표.</P> </A><BR><A NAME="#FOOTNOTE8"><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2px;margin-left:12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8)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의 문화산업 비판의 적절성과 관념성 문제 그리고 그 후예들로서 급진적 신좌파들의 실천적 오류 문제는 따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P> </A><BR><A NAME="#FOOTNOTE9"><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2px;margin-left:12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9) 다른 한편으로 동독의 맑스주의 문화정치 실험에서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개인의 전면적인 발달을 위한 고급문화 중심의 문화정책 대중적으로 광범하게 시행하였다. 하지만, 공식 이데올로기 강조 경향으로 인하여 대중들의 문화생산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그다지 활성화되지 못했다. 위로부터의 대중들의 고급문화 향수 촉진, 고무가 있었으나, 자발적 문화활동에 대한 지원은 소극적이었으나, 강제적 억압은 없었다. 또한 30년대 독일말스주의 미학논쟁이 있었다. 루카치, 아도르노, 브레히트, 브로흐 등의 논쟁에 대해서는 Terry Egleton, “Aesthethics and Politics,” NLR, 1978 참조. 시기는 다르지만 이러한 논쟁은 맑스주의 문화정치에서 중요한 논쟁으로서 변형된 형태로 여전히 지속된다.</P> </A><BR><A NAME="#FOOTNOTE10"><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9px;margin-left:19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10) 이러한 논지는 E.Balibar, “Culture and Identity(Working Notes)” in J. Rajchman (ed.), The Identity in Question, London: Routledge, 1995, pp.173~198. 그리고 H.Lefbvre, The Production of Space, Oxford: Blackwell, 1993.</P> </A><BR><A NAME="#FOOTNOTE11"><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7px;margin-left:17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11) 이에 대한 미국의 사례에 관해서는 Bill Readings, The University in Ruins, Cambridge: Harvard Univ. press, 1996.</P> </A><BR><A NAME="#FOOTNOTE12"><P CLASS=HS11> 12) 이러한 관점은 E.Balibar, 윗글 참조.</P> </A><BR><A NAME="#FOOTNOTE13"><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13)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검토는 알튀세르, ꡔ마키아벨리의 고독ꡕ, 새길.</P> </A><BR><A NAME="#FOOTNOTE14"><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14) E.Balibar, 윗글.</P> </A><BR><A NAME="#FOOTNOTE15"><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7px;margin-left:17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15) 여성적 차이와 여성 내적 차이의 억압이라는 모순을 보편화의 과정을 통해 넘어서려는 여성주의 정치학자 필립스의 논의는 M.Barrett & A.Phillips(ed.), Destabilizing Theory, Polity, 1996.</P> </A><BR><A NAME="#FOOTNOTE16"><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7px;margin-left:17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16) 그들이 반드시 문예활동가로 국한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들의 강점이자 약점은 형식성의 강조와 내용성 부재이다.</P> </A><BR><A NAME="#FOOTNOTE17"><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9px;margin-left:19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17) Tony Bennett, “Towards a Pragmatics for Cultural Studies,” in Jim McGuigan(ed.), Cultural Methodologies, London: Sage, 1997, pp.42~61.</P> </A><BR><A NAME="#FOOTNOTE18"><P CLASS=HS11> 18) D.Kenller, “Critical Theory and Cultural Studies,” in J.McGuigan(ed.), 윗책, pp.12~41.</P> </A><BR><A NAME="#FOOTNOTE19"><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7px;margin-left:17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19) 대표적으로 Dick Hebdige, Subculture, 이동연(역), ꡔ하위문화: 스타일의 의미ꡕ, 현실문화연구, 1998; T.Jefferson, Resistance through Rituals, Birminfham:CCCS, Hutchinson, 1975.</P> </A><BR><A NAME="#FOOTNOTE20"><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0) 이에 대한 약간의 소개로는 신병현, ꡔ문화, 조직 그리고 관리ꡕ, 한울, 1996 참조.</P> </A><BR><A NAME="#FOOTNOTE21"><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1) Terry Egleton, “Aesthethics and Politics,” NLR, 1978 참조. 그러나 이글턴은 문화주의자인 톰슨의 제자이다.</P> </A><BR><A NAME="#FOOTNOTE22"><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7px;margin-left:17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2) 이러한 그람시적 절충으로의 전환1980년 홀의 두 개의 페러다임 논의 글에서 그는 경제주의의 위험으로서 정치경제학의 폐기를 통한 문화주의와 구조주의의 통합과 절충을 꾀한다. 그리고 1983년에는 알튀세르의 경제 결정론 비판과 정치적 결정을 부각시키며 대처주의 분석에 포스트 포드주의적 경제분석에 의존한다. 즉, 경제분석의 취약성 문제 노정, 급기야 후에는 뉴타임즈 그룹의 ‘대처에게 배우’고 ‘파도타기를 하자’는 신자유주의적 기조 혹은 민중주의로의 방향 전환이 이루어진다.</P> </A><BR><A NAME="#FOOTNOTE23"><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3) 수용자론의 문제, 이것은 애초에 하급문화의 저항성 인식틀에서 기원하는 문제이다.</P> </A><BR><A NAME="#FOOTNOTE24"><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4) Jim McGuigan, Cultural Populism, London: Routledge, 1992.</P> </A><BR><A NAME="#FOOTNOTE25"><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5) D.Kenller, 윗글.</P> </A><BR><A NAME="#FOOTNOTE26"><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6) 대표적으로 Paul Willis, Common Culture, Milton Keynes: Open Univ. Press, 1990.</P> </A><BR><A NAME="#FOOTNOTE27"><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7) 이들의 이러한 잡문들은 광고디자인이나 상업적 미술비평가들과 다양한 관심을 가진 학부생들에 의해 선호되었으며, 그들의 글들과 이제는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P> </A><BR><A NAME="#FOOTNOTE28"><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7px;margin-left:17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8) 이들에 대한 철학적, 이론적 비판은 ꡔ진보평론ꡕ 2호와 3호의 서관모 교수의 글과 김만수교수의 글을 볼 것. 그리고 윤소영, ꡔ베토벤ꡕ, 공감, 1997에서 “피디의 진실2”을 참조할 것.</P> </A><BR><A NAME="#FOOTNOTE29"><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29) 강내희, “‘문화공학’을 제안하며,” ꡔ문화과학ꡕ, 14호, 1998년, 13~45쪽.</P> </A><BR><A NAME="#FOOTNOTE30"><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0) 대표적으로 G.Deleuze & F.Guattarri, A Thousand Plateaus, 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1987; 질 들뢰즈, 펠릭스 갸타리(지음), 최명관(역), ꡔ앙띠 외디푸스ꡕ, 서울: 민음사, 1994; 펠릭스 갸타리, “욕망의 미시정치를 위하여”, “제도에서 기표의 위상”, ꡔ분자 혁명ꡕ, 윤수종(편역), 서울:푸른숲, 1998, 217~310쪽, 311~324쪽; Rosi Braidotti(1994), “Toward a New Nomadism: Feminist Deleuzian Tracks: or, Methaphysics and Metabolism,” in Constantin V. Boundas & Dorothea Olkowski(eds.), Gill Deleuze and the Theater of Philosophy, Routledge, 159~186쪽.</P> </A><BR><A NAME="#FOOTNOTE31"><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1) 펠릭스 갸타리, “여성되기”, 윗책, 224~228쪽.</P> </A><BR><A NAME="#FOOTNOTE32"><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2) 윗글 그리고 G.Deleuze & F.Guattarri, 윗책, 1987, 232~309쪽.</P> </A><BR><A NAME="#FOOTNOTE33"><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7px;margin-left:17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3) 윤소영,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비판” ꡔ베토벤ꡕ, 서울: 공감, 233~267쪽.</P> </A><BR><A NAME="#FOOTNOTE34"><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7px;margin-left:17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4) 이에 대해서는 E.Balibar, “Irrationalism and Marxism” NLR., 107, 1978, 3~20쪽. 그리고 이러한 비판의 이단점을 형성하는 알튀세리언의 과학주의적 스피노자 해석과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Christoper Norris, Spinoza & the Origins of Modern Critical Theory, Oxford: Basil Blackwell, 1991을 참조할 것.</P> </A><BR><A NAME="#FOOTNOTE35"><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5) 윤소영, 윗책.</P> </A><BR><A NAME="#FOOTNOTE36"><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20px;margin-left:20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6) 이에 대해서는 Selia Robotham, Lynne Segal and Hilary Wainwright(1979), Beyond the Fragments: Feminism and the Making of Socialism, Boston: Alyson Pub.</P> </A><BR><A NAME="#FOOTNOTE37"><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7px;margin-left:17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7) 레오뽈디나 포르뚜나띠(지음1981, 1995), 윤수종(역,1997), ꡔ재생산의 비밀ꡕ, 박종철출판사.</P> </A><BR><A NAME="#FOOTNOTE38"><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8) E.Balibar(1978), 윗글; D.Haraway(1992), 윗글.</P> </A><BR><A NAME="#FOOTNOTE39"><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39) “분열을 넘어서서”, Andrew Ross, Strange Weather, 그리고 H.Lefebvre 참조.</P> </A><BR><A NAME="#FOOTNOTE40"><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40) H.Lefbvre, The Production of Space, 54쪽.</P> </A><BR><A NAME="#FOOTNOTE41"><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7px;margin-left:17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41) 도시나 공장, 주거지역, 농촌의 건물, 도로, 정보 네트워크 등등이지 그에 대한 글, 담론, 이미지가 아니다.</P> </A><BR><A NAME="#FOOTNOTE42"><P STYLE='font-family:"바탕";font-size:12px;color:"#000000";text-align:justify;line-height:16px;text-indent:-18px;margin-left:18px;margin-right: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 42) 발리바르, 윗글.</P> </A><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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