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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과 노래 -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 최 도 은 연구원/민중가수 이 글은 6월 3일 제50차 콜로키움에서 발표된 글입니다. 노래로 전국의 투쟁현장을 누비며 현장의 노동자들과 호흡을 같이 해온 민중가수 최도은 씨의 또다른 모습을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글을 쓰기에 앞서 노동가요란 무얼까 생각해 보았다. 노동가요를 노동요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일과 노래가 결합한 노동요 즉 농요, 어로요 등 신체의 협동심을 강조하는 노래 노동요 말이다. 자본주의가 도입되기 이전까지 역사 내내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 전해져 왔던 노래를 노동요라 한다. 물론 자본주의가 도입된 이후부터는 이러한 노래들은 기계의 굉음에 자기의 자리를 내 주었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 삶 주변에서 노동요를 찾기란 쉽지 않다. 아이들의 참요가 대중음악의 공격앞에 무너져 내렸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존재하는 노동가요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노동요를 살리자는 것인가? 이 것은 노동요를 되찾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되찾자는 투쟁의 노래 저항을 조직하는 노래를 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억압받고 빼앗기는 자의 역사와 저항하는 자들의 삶을 담은 노래 투쟁가요를 노동 가요라 말하는 것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45년 해방 이후 전평에서부터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전노협, 그리고 오늘의 민주노총에 이르기까지 노동가요의 시기별 활동에 대해 살펴보면서, 글을 통해 노동자의 노래 탄생 과정들을 살펴보고 각 노래들이 갖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인 뜻을 정리해 보려 한다. ♬ 해방 이후 작곡은 김순남․이건우, 작사는 임화가 주로 했으며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활동을 통해 반제반봉건 혁명의 이념을 음악에 부여하여 민주화와 대중화를 위해 실천했다. 이들의 곡은 현실을 반영하고자 한 리얼리즘의 실현과 일제 잔재 청소를 위해 왕성하게 투쟁가요․ 민중가요 창작 활동을 한다. ‘해방의 노래’ 김순남 곡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여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 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민전 행진곡’ 이건우 곡 1. 일제의 남은 뿌리 소탕의 싸움이다 나가자 민주주의민족의 전선으로 인민이 가는 곧 인민이 가는 곳마다 민전은 함께 진군한다 민전은 인민을 지키고 있다 2. 봉건의 남은 자취 쓸어없애 버리자 우리의 민주주의민족의 전선으로 3. 남녀와 노소없다 모도다 달녀와서 전열에 지체말자 민족의 전선으로 4. 애국의 가면을 쓴 팟쇼를 부시자 우리의 민주주의 민족의 전선으로 전평에서 주최한 46년 5․1일 노동절(해방후 처음으로 치러진 전국적 행사) 행사를 진행할 때에는 김순남의 ‘해방의 노래’와 ‘추도가’ ‘적기가’ ‘독립 동맹가‘ ‘인터내셔널가’ 등을 불렀다고 한다. ‘추도가’ 동무여 장하다 삼천만 대중의 묶였던 철쇄를 끊고 용감히 쓰러진 혁명의 투사여. ‘파리코뮨의 노래’ 동남풍이 불어서 포도꽃 피고 향기로운 바람이 철창을 쌓네 아~아 불란서의 봄은 왔건만 잘 있거라 이봄아 나는 가련다. ‘파리코뮨의 노래’는 1871년 파리꼬뮨 최후의 전사들이 5월 29일 동부 방센 요새에서 패배하여 항복할 당시 3만명이 총살을 당했고, 이후 베르사이유 군법회의에서 80명의 어린이와 132명의 부인들과 270명의 꼬뮨 주동자가 사형 당했었다. 이 노래는 꼬뮨 주동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결의를 다지며 부른 노래인데 우리나라에서 많이 불려졌다고 한다. ‘독립 동맹가’- 와르샤(러시아인지? 폴란드인지?) 노동가요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가자 생사자 운명의 판가리다 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어 원수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매고 결전의 길로 다 앞으로 동무들아 혁명의 기는 우리 앞에 날린다 다 앞으로 동무들아. ‘적기가’ 민중의 피 붉은 전사의 시체 살아 시체가 식어 굳기 전에 우리들은 원수를 갚으리라(5절까지) ‘인민 항쟁가(46년)’ 1.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무리의 죽음을 슬퍼 말어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2. 더운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속 울려온다 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친다. 3.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아서 떨리는 총칼 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항쟁가. 김순남의 ‘인민항쟁가’는 기근으로 고통받던 민중들이 총화되어, 46년 10월 초하루부터 11월 중순까지 전 산업 전 지역의 노동자 농민 300여만명이 참여했던(3․1운동에 버금가는 운동) 10월 인민항쟁을 기록한 노래이다. 9월 총파업(46년 9월 23일 전평의 우리나라 최초 전산업 전지역 총파업) 진압 과정에서 드러난 백색테러, 무력 탄압을 받았지만 ‘권력을 인민위원회로 넘겨라!’라는 정치적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며 3개월간 투쟁한 사건을 노래한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6․25전쟁 중 서대문 교도소에서 감옥문을 부수고 나온 동지들이 어깨를 걸고 종로까지 행진을 하면서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인민 유격대의 노래(47년)’ 오대산 봉우리에서 제주도까지 숲사이 바위사이 네와 내사이 조국의 자유 지켜 피로 무장한 우리는 유격대 조선의 자식 침략의 적들을 때려부수는 인민의 총검. 이 노래는 인민항쟁 후 백색테러와 무차별적 폭력 탄압에 맞서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던 동지들의 삶을 표현한 노래이다. ‘여순 봉기의 노래(47년)’ 밤 깊어 가는 여수에 총탄 울리고 용감한 애국병 굳게 뭉쳤다 피 흘리며 고함치며 돌진하는 매국노 소탕하는 판가름의 싸움터 나가자 동무들아 00의 병사 ‘노동자의 노래(48)’ 망치를 든 손에 손을 높이치켜 올리자 이 강토에 노동대중 대열 맞춰 나가자 인민이 정권 굳게 다지며 계획경제 세워가는 민주조선 새나라의 우리는 선봉대다. 전평은 46년 9월 총파업(철도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에서 시작)에서 시작하여, 47년 3월 총파업, 48년 2․7 총파업, 5․8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미군정 3년 동안 전국적 총파업을 진행하면서 미군정에 맞서 투쟁을 진행했다. 그리고 투쟁의 현장에 이 노래들이 실천의 한 동력으로 역할 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 외 ‘농민의 노래’ ‘청년총동맹가’ ‘우리의 노래’ ‘조선여자청년동맹가’와 ‘건국행진곡’ 48년 제주도 ‘4․3봉기의 노래’ 47년 ‘여순봉기의 노래’들처럼 시대와 상황을 정리한 노래들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노동의 노래․투쟁의 노래로 불려졌다고 한다(김순남의 곡은 92년 낭만 음악사에서 출판한 ‘김순남 그 삶과 예술’을 찾아보면 좀더 풍부하게 알 수 있다). ♬ 50~60년대 50년대 노동가요 투쟁의 노래에 대한 기록은 십여 권이 넘는 민중가요책 그 어디를 찾아보아도 확인할 길이 없다.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전쟁으로, 그리고 4․19 이후 5․16으로 이 땅에 진보적 인사들이 모두 마녀사냥 당했던 지난 역사의 흔적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 후에는 노동가요를 부를 수도 만들 수 없었다. 활동가들은 감옥에 가거나 촌에서 묻혀 살았다고 한다. 당시를 기억하는 노래로는 56년 ‘비 내리는 호남선’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이 노래는 당시 ‘못살겠다 갈아 보자’의 신익희 선생이 민주당 후보 운동 중 호남선을 타고가다 강경에서 급사하자 추모의 노래로 많이 불려졌던 노래라고 한다. 60년 4․19~21일까지 격렬한 시위가(도로가 포장되지 않아 사방이 자갈밭이라 데모대 만명이 일제히 돌을 던지면 경찰들이 백차를 버리고, 소방차를 버리고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계속되었던 3일간에는 데모대들은 주로 구호를 외쳤고 노래는 잘 부를 수 없었지만 ‘3․1절의 노래’ ‘애국가’를 불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유정 천리: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을 개사하여 ‘조병학 박사는 돌아가시고(민주당 후보였으나 암에 걸려 미국에 갔다가 돌아 가셨고) 장면 박사 홀로 남았네 자유당은 물러가고~ ’로 불렀다고 한다. 4․19를 기리는 노래는 70년대 중반 ‘크리스찬아카데미 노래모음집’을 통해 ‘진달래 한태근 곡’이 발표되고, 그 뒤 80년 중반에 「4월 그 가슴 위로」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른다. ♬ 70년대 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고 79년 8월 YH의 김경숙 열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70년대는 노동자의 죽음으로 열리고 노동자의 죽음으로 닫힌 시대로 기억할 수 있다. 10원어치의 풀빵으로 점심을 때우고 라면으로 고픈 배를 채우면서 불안정한 고용에 시달리며 사는 비참한 삶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50년대 독일 산업선교회의 지원으로 전국 각지에 설립된 산업선교회는 10여 년의 활동 속에서 한국 노동자가 처한 현실의 참담함이 확인되자, 목회의 활동 방향을 많이 수정하여 60년대 후반부터는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활동을 중심으로’ 산업선교회를 운영하였다. 70년대 유신의 시퍼런 칼날이 노동자의 목을 조일 때에도 크리스찬아카데미의 교육사업(74~79)은 중간간부교육을 통해 선진 노동자군을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소모임 체계의 공개적인 교육방법은 이 땅의 노동자에게 자주적 조합 결성을 위한 토대요 힘으로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투쟁의 결과 70년대 중반 무제한의 억압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러 공장에서 눈부신 단위노조 투쟁을 전개하는 힘이 되었다. 특히 경인지역의 노동쟁의는 정권과 자본에 맞서 일상적으로 투쟁하는 공간으로까지 자리했었다. 노동자로 살아가기 위한 처절한 저항의 그곳에 노동자의 노래가 있었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의 발단인 ‘노가바’ ‘아! 미운사람’ 노동자가 얼마나 노동을 더 해야 아~살 수 있나요 우리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렸는데 아~슬픈 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데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친 눈에 빛이 보여요 내일에 찬란한 빛이 (노래를 못하면 장가를 못 가요 아~미운 사람 장가를 가~도 아들을 못 나요 아~미운 사람 아들을 나아도 ×자를 나아요 아~미운 사람) 이 노래는 중간간부 교육중 집단 창작시간에 만들어졌는데 너무나 인기가 좋아(모두들 너무 좋아하는 노래였대요) 그후로도 계속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79년 4월 매해 4월경에 학생데모 시기에 맞춰 간첩사건을 만들던 박정희정권에게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4월7일)은 4․19 학생데모를 막을 조작사건으로 탄압 받게 되었다. 노동가요사에서 ‘크리스찬아카데미 활동’이 갖는 의미 첫째, 노가바 창작 ‘아! 얄미운 사람’ ‘쇠망치’ ‘작살조’ 다 그런거지 뭐 그런거야 그러길래 착취뿐이지 처음만나 사랑할 때 상냥하던 사장이 늑대같이 변할줄이야 다 그런거지 뭐 그런거야 그러길래 작살내야지 둘째, 노동자의 삶에 관심을 갖고 결합하는 지식인 문예일꾼들의 활동 김문환: ‘언덕에 서서’ 외국곡 번안 작업 ‘큰 힘 주는 조합’ ‘이 세계 절반은 나’ ‘흔들리지 않게’ ‘가라 모세’ ‘우리 승리하리라’ 등. 한태근: ‘진달래(이영도 글)’ ‘이쁜 마음’ ‘알 수 없네’ ‘ 김영동: ‘자유로운 노동자(신인령 글)’ ‘그 여름(신경림 시)’ ‘가다가 가다가(김기석 글)’ ‘자유로운 노동자’ 우리는 자유로운 노동자 권력이 없어서 용감하고 재물이 없어서 슬기롭다 우리는 역사의 참주인 황철익: ‘기다리는 사람(김광협 글)’ ‘이 밤 깊으면’ ‘기다리는 사람’ 닭이 운다 닭이 운다 먼동네에서 닭이 운다 어둠과 싸워서 어두운 곳에서 어둠과 싸워서 쓰러드리는 사람의 귀에 닭의 울음소리 들린다 먼동네에서 닭이 운다 새벽이 온다 한용희: ‘산넘어 산’ 김민기: ‘아름다운 사람’ ‘어찌 갈거나’ 군대 가기 전까지 자원 봉사처럼 활동을 했다고 한다. 등의 활동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창작과 번안곡 그리고 노가바 외에 ‘선구자’ ‘노총가’ 등도 불렀던 노래라고 한다. 70년 노동가요사에서 중요한 동일방직 투쟁에서 선배 노동자들이 부른 노래를 정리 해 보기로 한다. 지부장 선거를 방해하려고 사측이 구사대를 시켜 탄압한 ‘똥물 사건’ 때에는 ‘농민가’ ‘흔들리지 않게’를 조합원들과 함께 불렀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노래로는 노가바 ‘진짜노동자’인데 이 노래는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의 군가의 가락에 가사를 넣은 “우리들은 노동자다 좋다 좋다, 우리들은 노동자다 좋다 좋다, 무릎을 끓고 살기보단 서서죽길 원한다 우리들은 노동자다” 노가바이다. 78년 4월1일 124명의 열성 조합원이 해고된 뒤 벌인 ‘나체시위’ 때에는 독립군 애국가였던 노래(원곡은 어메이징그래스)를 노가바한 노래인데 아주 많이 불렀다고 기억한다. 억눌림서 헤어나려 발버둥쳤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투쟁을 하였다 오 하느님 주신권리 어디 있나요 세상아 너는 아느냐 억압자의 호소를. 그리고 70년대 후반 동일 방직 똥물 사건을 중심으로 극화한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기억해야 한다. 70년대 후반 유신 말기의 시대 상황을 채희완 연출․안무, 김민기의 작곡에 의해 공연예술 작품이 만들어졌고, 현장으로 이전한 대학의 문화운동권 출신 선배들이 현장에서 나와 합류했고, 대학의 탈춤반 풍물반에서 사회문화운동으로 이전하려고 고민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완성된 이 작품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품이었다. 따라서 이 작업은 당시 사회․문화운동 전반의 총화와 결집의 과정으로 해석해야 한다. ‘공장의 불빛’ 예쁘게 빛나는 불빛 공장에 불빛 온데 간데도 없이 희뿌연 작업등만 이대론 못 돌아가지 그리운 고향마을 춥고 지친밤 여기는 또다른 고향 ‘야근’ 서방님의 손가락은 여섯 개래요 시퍼런 절단기에 뚝뚝 잘려서 한 개에 오만원씩 이십만원을 술퍼먹고 돌아오니 빈털터리래 울고 불고 해봐야 소용있나요 막노동판에라도 나가봐야죠 불쌍한 언니는 어떡하나요 오늘도 철야명단 올리겠지요 ‘공장의불빛’에서 발표된 노래들은 70년대 후반 민주노조 활동을 했던 선배님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노래가 노조운동을 지켜주는 힘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80년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민주노조운동의 활동가들은 정화조치의 대상자가 되어 불량배 불순세력으로 몰려 해고와 구속 삼청교육대에 보내져 죽지 않을 만큼 고문을 당하고 탄압 받아 이들의 활동들은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게 되었다. 아니 적어도 80년대 중반까지는 지하로 지하로 들어가서만 존재했었다. ♬ 80년대 시위 때는 ‘흔들리지 않게’ ‘우리 승리하리라’ ‘훌라송:우리들은 민주파다 훌라훌라~’ ‘잘 탄다: 청와대 꼭대기에 불이 붙었다 잘 탄다 양키놈 대사관에 불이 붙었다 잘 탄다~’ 등을 불렀다고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 - 백기완 글 임을 위한 행진곡은 80년대 초 광주항쟁의 패배감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승리의 의지와 투쟁적 역동성을 획득해 낸 최초의 작품이다. 81년 광주지역 연행예술패 ‘광대’에서 노래굿 ‘넋풀이’ (빛의 결혼식)를 만들면서 발표된다.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리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 노동운동사와 노동자의 삶 (역사학 연구소 박준성) 인용 백기완 선생님이, 시민군 대변인으로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전사한 故윤상원님의 죽음을 진혼하는 시에 80년 광주를 겪으면서 광주지역에서 대중가요 창작활동을 하던 작곡가 김종률에 의해 81년에 의해 창작된다. 현재 김종률씨는 BMG한국 지사장으로 있다. 그는 당시 대중가요와 대학가요제를 오가며 활동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불나비’ 노래 불나비의 창작 배경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이 노래가 불려진 시기는 80년 겨울로 선배들은 회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노래가 창작된 것은 그보다 몇 년 앞선 것일 수 도 있다. 특히 청계피복의 선배들이 전태일 열사 정신을 이어 받아 민주노조 설립투쟁을 할 때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라 한다. 이 노래의 정신은 지금도 노동자의 가슴에 살아 숨쉬는 노래로 생명력을 갖고 있다. 80년대는 민중교회(서울 동월교회는 70년대부터 활동한 민중교회운동사에서는 매우 중요한 교회라 한다: 빈민야학 민중문화운동 등을 활발히 활동 한 교회인데 이곳에서 활동했던 사람들로는 임진택, 이장호, 김영동, 이철수(판화가) 등 이 있고, 성남의 주민교회 인천의 백마교회, 해인교회, 산마루교회, 사랑방교회, 안산의 노동교회, 성남의 산자교회, 안양의 돌샘교회 등) 노동상담소, 야학 활동(신대방동의 [돗자리]에서 김명곤은 탈춤 풍물 등을 지도했고, 김호철은 기타반을 지도했던 비공개 문화공간) 에서 노동자의 노래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84~86년경에는 성당이나 교회를 중심으로 집회들이 조금씩 열렸는데, 그 규모는 한 150여명이 모여서 현장에서 벌어지는 투쟁사례를 발표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이 집회를 통해 많은 수의 민중가요가 불려졌고 입소문으로 전해 진 노래의 다수가 80년 5월 광주를 대상으로 한 노래들이었다고 한다. 노동문제로 열리는 집회에서도 80년 초중반의 운동의 정서는 반독재운동인 전두환정권 타도 투쟁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5월을 담은 노래를 위주로 집회장에서 공유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민중교회 기타반 소모임이나 야학 소모임 진행자들에 의해서 노동자의 소박한 삶이 담겨진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불려졌다. 김보성의 ‘우리들 이야기’, ‘시다의 꿈(박노해 시)’ 등이 대표적인 노래라 할 수 있겠다. 김보성의 작품중 최근까지 불려지는 노래 ‘대결(박노해 시)’의 경우 85년 4․15 대우자동차파업의 상황을 보면서 공장에서 작업을 마치고 퇴근후 자취방에 돌아와서 만들은 노래라 한다. 고승하 ‘여공일기’ ‘고백’(박노해 시) ‘노동의 새벽’(박노해 시) 김용수의 ‘노동의 새벽 (84년 박노해 시) 김호철의 ‘X에게’(84년), ‘단순조립공’(김영환 시)」 그 외 ‘우리의 믿음 치솟아’ ‘노동해방가’, ‘노동자의 생활’ 등이 만들어지고 소모임을 통해서 불려졌다. ‘동지여 내가 있다’ 그날이 올 때까지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의 깃발을 내릴 수 없다 이름 없이 쓰러져간 동지들이여 외로워 마! 서러워 마! 우리가 있다 찢긴 깃발 휘날리며 나 여기서 있다. 이 노래는 87년 1월 14일 고문으로 죽은 박종철의 비보를 듣고 마산지역의 사회운동가 김영만 선생님께서 읊은 탄식의 노래를 고승하 선생님께서 듣고 악보로 기록해 주신 곡이다. 이 노래는 87년 마산 통일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의 입에서 불려지기 시작하다 전국으로 입소문을 타고 전달되어져 88년부터 많은 노동자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 87년 대투쟁 87년 7~9월 대투쟁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노동자의 폭발적인 파업(4,000여건)과 1,500여 개의 자주적 민주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역사적인 계기였다. 총파업투쟁 속에서 폭발한 노동자들의 투쟁의 여파는 1,0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과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조 건설에 대한 성과를 안겨 주었다. 이 투쟁은 많은 분야에서 노동자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고 민중가요 진영에게도 새로운 고민을 던져 주는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이 투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지금 우리가 부르는 집단성을 강조한 노동가요가 주를 이뤄 나타나게 되었다. 민주화운동으로 확대된 정치적 공간에서 폭발한 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군부의 개발독재가 더이상 한국자본주의의 발전수준에 적합한 정치체제가 아니며, 생산물에 대한 불공정한 분배가 더 이상 효율적인 자본축적 수단으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와 자본은 이의 폭발적 해체를 방지하고 새로운 체계로의 연착륙을 시도한다. 그 수단으로 동원된 것이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대통령 선거법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는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 도입과 노동법 개정, 그리고 경제적인 차원에서는 명목임금의 급상승 수용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운동은 정치적 민주화와 명목임금 상승 등의 대가로 기존 축적체계의 수정을 포괄적인 범위 내에서나마 수용한 것이다. - 황기돈 ꡔ진보평론 ꡕ2호 시가행진을 ‘아리랑 목동’으로 노동자 대투쟁의 첫걸음에 울산을 덮은 노동자들의 노래는 ‘아리랑 목동’! 현대엔진 87년 7월 5일 노조 설립 투쟁에서 부른 노래는 ‘아리랑목동’, ‘훌라송’이었다. 울산의 현대중공업 7월21~29일 민주노조 쟁취 싸움, 그리고 8월 17,18 현대그룹 노동자 4~5만의 총파업 시내 진출 시위 때 ‘아리랑목동’과 ‘훌라송’을 불렀다고 한다. 거제의 대우조선에서는 87년 8월 그 뜨겁던 대투쟁에서 다른 현장에서는 보기 드물게 ‘광주출정가’, ‘오월의 노래’, ‘늙은 노동자의 노래’, ‘훌라송’ 등 대학에서 부르던 다수의 민중가요를 노동자들에게 가르쳤고 투쟁의 대열을 유지했다. 이러한 특징은 노민추 진영의 오랜 준비 결과 당시 현장활동가 사이에서는 민중가요를 모르면 바보 취급을 당했을 정도로 노조건설에 대한 열정이 높았었다고 한다(이것은 마창지역의 영향이었다고 생각된다). 남한 최대 지하 조직에서는 ‘삼삼칠 박수’! 87년 8.12 지하철 노조설립과 동시에 진행된 기지순회 투쟁 때에는 ‘삼삼칠 박수’로 분위기를 엮어 갔다. 그리고 지금도 즐겨 부르는 ‘늙은 노동자의 노래’, ‘뱃노래’, ‘아빠의 청춘’, ‘훌라송’ 등이 불려졌다. 87년 이후 우리나라 민주노조의 노동운동을 책임진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노래!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던 경인․구로지역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는 당시 대학가에서 불려진 노래가 많이 전달되어 졌음을 발견할 수 있다. 80년대 중반의 활발했던 야학활동과 민중교회운동과 학출들의 현장 이전은 많은 수의 선진노동자를 만들었고, 그들은 사업장에서의 노조설립투쟁을 주도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다양한 민중가요를 전달하게 된다. 한 예로 조합원이 170명 정도인 인천의 한독금속노조에서는 ‘어머니’ ‘노동해방가’ ‘흔들리지 않게’ ‘훌라송’ ‘임을 위한 행진곡’ ‘불나비’ ‘차돌멩이’ 등 다수의 민중가요가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불려졌다. 투쟁이 깊어지고 철야농성이 시작되면 선전전을 마치고 현장에 돌아와 여유 시간을 통해 많은 수의 민중가요를 접하게 된다. 여성사업장의 경우 ‘노동자의 생활’ ‘사노라면’ ‘우리들이야기’ ‘시다의 꿈’ 등 여성 노동자의 삶을 담은 서정적인 노래를 자주 부르게 된다. 그렇지만 선진활동가들이 없이 폭발된 농성장의 경우를 보면 대중가요와 군가를 부른 것으로 확인된다. 아마도 민중가요를 접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87년 이후 민주노조 건설투쟁에서의 민중가요의 역할은 농성을 중심으로 입에서 입으로 노래와 노동자의식이 교육되어지고 전달되는 과정이었고, 이러한 활동은 아래로부터의 정보를 교환하고 삶을 교환하고 민주노조를 함께 만들고 지켜내는 삶의 과정이었다. 노동가요 전문 창작자 출현 투쟁의 현장 그 중심에서 본격적인 노동자의 노래 ‘노동가요’가 만들어지는데, 구로 지역의 투쟁을 이끌었던 지역의 활동가 김호철, 그리고 마창 지역에서 고승하, 김봉철에 의해 노동가요가 만들어진다. 듣는 순간 “아! 이거야!! 바로 이 노래구나”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노래, 한번 들었는데 정수리에 딱하니 박히는 그런 노래가 만들어 졌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더불어 투쟁을 통해서 획득한 노동자의 말과 숨결이 팍팍 담겨 있어서 참으로 듣기 좋고 부르기 좋아 싸움하기 좋은 노래, 투쟁하는 노동자의 노래가 나타난다.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로 시작하는 ‘파업가’와 “피묻은 작업복은 파업의 깃발이다 죽어간 동지들이 횃불로 살아온다 노동해방 살아 춤추는 조국 노동자해방 위해~”로 이어지는 ‘노동조합가’, “너희는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아아 우리의 길은 힘찬 단결투쟁 뿐이다”로 마무리하는 ‘단결투쟁가’(백무산 시)까지 88년 여름과 가을을 거처 마치 들판에 들불이 타 번지듯이 삽시간에 전국 노동자의 가슴과 가슴에 울려 퍼지게 된다. 노동문화단체의 형성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충격은 대학 내 진보적 문화일꾼들에게도 활동의 방향을 노동운동으로 전환시켰다. 대학내 노래패 출신의 활동가들은 노동문화단체로 이전하여 노동예술가군을 형성했다. 이들의 현장활동은 많은 현장문화소모임 구성의 실질적 구심이 되었고, 이들의 헌신적인 활동은 노동가요의 보급과 노조 문화운동의 발전, 노동운동 발전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서울-새벽(민문연→90년 노문연), 노동자노래단, 예울림, 안양-민요연구회, 새힘(안문연), 인천 산하(인문연), 부천 그루터기, 성남-다영글, 노래마을, 부산-노래야 나오너라, 일터, 마산 소리새벽, 대구 소리타래, 광주 친구, 대전 들꽃소리 등). 현재 불려지는 형식의 노동가요의 탄생 배경을 정리 해 보면 첫째, 87년 대투쟁이다. 당시의 전율을 담은 곡들이 88년 봄 창작되어 가을 경에는 전국 노동자의 투쟁과 집회가 있는 곳에서 입소문으로 불리면서 전국노동자의 마음을 울리게 된다. 둘째, 노동자의 세계관을 담은 노동시의 발전은 이전까지의 민중가요와는 다른 힘차고 진취적이며 노동계급의 살아 번뜩이는 투쟁의 노래로 창작되어 투쟁을 이끄는 무기로 서게 된다. 박노해, 백무산 등에 의한 노동시의 창작활동은 노동가요 창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88년부터 90년 초까지 이 노래들은 엄청난 파급력으로 노동자들에게 전달되었고 노동운동 입문의 시작은 노래로부터라는 표어가 나올 정도였다. 당시에 공단 근처 술집에서 볼 수 있던 풍경은 술잔이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이내 어깨에 어깨를 굳게 걸고서는 ‘동지여 내가있다!’ 로 시작해서 ‘파업가’ ‘노동조합가’ ‘단결투쟁가’로 이어져 공단 거리를 매우며 부르던 그 노래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니까 당시 노동가요를 부르는 것은 노동자의 처지와 입장을 노래를 통해서 하나로 묶어 내는 힘이었으며, 그 동안 억눌리고 빼앗겼던 삶의 분노가 노래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다짐하는 승화의 시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투쟁 속에서 결성된 문화패 그리고 노동가요는 새로운 방식의 조직을 만들었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 지하철노조등 대기업 노조에서는 노동가요의 중요성을 투쟁을 통해 절실히 느끼게 되어 곧이어 일상적인 문화 소모임인 노래패를 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경우 민주노조의 건설은 자본측의 직장폐쇄와, 위장폐업 심지어 자본철수로 이어져 생존권 사수와 농성대오 유지를 위해 문화선전대가 결성되고, 이들은 가두선전전과 지역 내 연대투쟁의 선봉문선대로 활동을 하게 되고 이후 지역마다 단일 문선대 구성의 발전경로를 걷는다. 봄에는 임투승리 문선대로 가을철에는 지역별 가을맞이 문화제를 준비해 가면서 기업과 업종의 벽을 넘는 노동자 연대를 실천했고 지역 노래패 연합의 모습으로 발전해 간다. 노래패연합으로 발전한 구로지역의 노래패연합, 인천지역 노래패연합, 부천지역 노래패연합 ‘청맥’, 마창지역 노래패연합 ‘땡감’ 등이 있었다. ♬ 90년대 기업과 지역을 넘어 전노협으로! 90년 1월 22일 559개 노조 18만 5천 조합원의 결집 전노협건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탄생하고 성장한 노동가요는 노동운동의 대중적 참여와 파급력으로 노동운동 발전의 양적 확대와 질적인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새날이 밝아온다 동지여 한발 두발 전진이다 기나긴 어둠을 찢어버리고 전노협 깃발아래 총진군~”의 ‘전노협 진군가’는 89년에 창작되어 전국노동자의 단결의 구심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에 대중적 확산을 통해 현장으로부터의 직접적으로 전국조직을 건설하는 조직과정을 함께 이뤄낸 상징적인 노래로 기억된다. ‘해방을 향한 진군’ “쏘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날리는 서울 철로위로 어깨를 맞대고 노동자의 힘과 뜻 모아 잡은 손 놓지 못하는 놓지 못하는 노동해방의 약속으로 전노협 전선으로~” ‘전노협 깃발가’ ‘전노협 선봉대가’ 등. 그리고 서노협과 서노문협이 공동기획 했던 전노협 건설의 염원을 담은 ‘노래판굿 꽃다지’도 문화행사를 통해 전국노동자를 하나로 묶어내 전노협 건설에 많은 영향을 끼친 문화제 기획 사업이었다. 90년 이후의 노동가요는 87년 이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던 민주노조운동이 현장 내부로부터의 탄압과 갖가지 법적, 제도적 침탈 그리고 여론을 이용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집중적으로 받게 되면서 조금씩 침체의 길을 걷게 된다. 더불어 작업장 안에서는 신경영전략에 의해 노동통제가 날로 강해지고 기업문화운동의 전개로 노동자의 일상적인 생활에까지 자본의 논리가 거칠게 파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노래의 특징은 전술가요, 풍자가요, 생활가요 등 다양한 노래를 통해서 노조운동의 난관을 뚫어가려고 애썼다. ‘무노동 무임금을 자본가에게’ ‘철의 노동자’ ‘다시 또 다시’ ‘연대 투쟁가’ ‘민주노조 사수가’ 등 목적의식적인 전술가요의 창작과 ‘1노 2김가’ ‘들어나 봤나’ ‘쓰레기 청소가’ 등 당시의 시대상황을 풍자 비판하는 풍자가요의 창작, 그리고 노동자의 하루 일과를 다룬 ‘여보 정말 사랑해요’ ‘달동네 부푼 꿈’ 등 일상생활을 주요 소재로 창작한 노래들을 만들어 대응해 나가려 했다. ‘진짜노동자 3’ 사나이 한평생 살아간다. 우리는 진짜 노동자 의리와 깡다구로 뭉쳐진 나는 너는 진짜 노동자 첫사랑에 눈물 흘릴 때 그땐 정말 철부지였지 파업투쟁에 세상 알았다. 노동자 새세상 ~ 적들이 아무리 짓눌러도 우리는 까딱없구나 전노협 깃발 아래 하나된 나는 너는 진짜노동자! ‘다시 노동자로 태어나’(91년) 폭력에 눌려 찢겨진 목숨 우리의 맹세 다시 새기며 사수하라 민주노조 동지여 함께 가자 아아 동지여 피끓는 외침 울려 퍼지고 복수다 이제는 끝장내리라 열사의 주검 안고 일어서리라 다시 노동자로 태어나 해방 투쟁 선봉이 되어 민주노조 깃발 움켜쥐고 가자! 동지여 박창수 열사 죽음 진상규명 투쟁 과정 중에서 안문연 ‘새힘’ 동지들이 집단 창작해 와서 박열사 사수대와 박열사의 어린 아들 용찬(7세)이가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우리들은 분노의 울음을 삼켜야 했고, 박열사를 죽음으로 내몬 노태우정권의 “타도!”와 “전노협 사수!”를 외쳤던 동지의 실천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매일 밤 안양 시내를 사수대의 물결 투쟁의 거리로 만들었던 당시에 가장 많이 부른 노래이다. 전국적인 기획사업 전노협 문화국이 주관하는 행사: 전국 문화국 수련회, 노래 테이프 제작, 노동가요모음 노래책 출판 전노협 문화국, 서노문협, 민예총 공동기획사업: 90, 91년 노래판굿 꽃다지 등의 사업들은 문화 담당자와 노동자, 청년학생 그리고 진보적인 대중에게도 사랑을 받으며 자리잡게 된다. 주간노동자신문사 주최 : 노동자 가요제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활동과 창작 가요들은 88~90년에 발표되었던 노래만큼의 파급력을 갖지는 못하면서 93~95년으로 해가 넘어 갈수록 현장에 대한 영향력은 서서히 상실해 간다. 다양한 요구의 변화에 맞춰 의욕을 갖고 창작활동을 하였으나 현장의 변화에 발맞춰 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현장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운동의 흐름이 변하고 있었다. 중소규모의 소모임 조직사업으로 노조를 유지하던 운동이 점차 대공장 중심의 간부를 축으로 하면서 전국적 사업을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성실히 전국적 사업을 수행하러 바삐 움직인 그 공간은 간부층과 묵묵히 믿고 따르는 조합원으로 서서히 균열되어 갔고(간부들은 끝없는 구속과 해고에 시달리고), 사측의 집요하고도 계획적인 현장 잡기 운동의 일환으로써 진행된 신경영전략에 의해 노조의 조직 기반들은 무너져만 갔다. 이제 노조간부들만의 결의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변화의 흐름은 노동자들(특히 규모있는 사업장 노동자를 중심으로)의 삶을 바꿔 놓았다. 현장의 일이 세고 힘들어도 명목임금의 상승은 노동자의 소비욕구를 상승시켰으며, 월세 전세, 벌집에서 임대아파트로 자기 집 소유로, 자동차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생활이 변하고 있었다. 그전에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희망이 없던 노동자가 아닌 것이다. 요구도 다양해지고, 깡소주에 새우깡이 아니라 단란주점에 가 비싼 시바스리갈도 찌끄려보고, 주일 내내 고된 노동에 시달리지만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에도 가보고 여행도 다니고…. 변화된 상황은 87년 이후 노동운동발전과 함께 성장했던 노동가요가 이제 91~92년을 거치면서 점차 쟁의 기간에 만 부르는 노래로 굳어지게 된다. 90년 이후 전반적인 침체의 경향 속에서도 민주노총 건설시기 까지 꾸준히 창작 된 ‘민주노총 진군의 노래’, ‘민주노총 내 사랑’ 등 민주노총 건설에 대한 노래들과 ‘민들레처럼’ ‘바위처럼’ ‘노래만큼 좋은 세상’ ‘세상을 바꾸자’ 등이 발표되었다.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문화기획프로그램들이 만들어져 노조를 체계로 현장에 전달되었지만 대중적 폭발력은 현저히 떨어졌다(오히려 이 노래들은 대학가와 사회단체에서 더 많이 불려진다). 지난 96~97 총파업 투쟁시 영하의 추위를 녹이며 날치기 노동법 반대를 외치며 ‘또다시 앞으로’창작은 92년말 빈민노래테이프 ‘시작의 노래’를 통해 발표, 노동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94년 현대중공업 64일 파업과 전지협 총파업때 많이 불려졌다.) ‘바위처럼’ ‘파업가’ ‘노동악법 철폐가’ ‘단결투쟁가’ 그리고 빠른 템포로 리바이벌 된 ‘불나비’ 폴란드 음악 번안 곡인 ‘가자 노동해방’ 정도의 노래가 노동대중에게 기억되는 노래로 볼 수 있다. 이제 최근 나타나는 현상을 짚어 보기로 하겠다. “가사가 뭐 이리 길어~, 노래가 어려워!, 이거 누가 부르라고 만든거야” 등등 가까이 지내는 몇몇 현장에서 활동하는 선배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몇 년전부터 매시기 만들어지는 창작곡들이 대중적으로 전혀 불려지고 있지 않는 현상도 지적해야겠다. 그 예로 96~97 겨울을 뜨겁게 달군 ‘노동법 개악저지, 안기부법 저지’ 총파업 투쟁에서도 90년대 초반에 불려진 ‘노동악법 철폐가’와 ‘파업가’가 여전히 지배적으로 불려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보면 몇몇 선배의 지적은 피해갈 수 없는 현실임이 확인된다. 어찌보면 현장대중들의 가슴속 깊이 박혀지는 노래가 없다는 것이며 최근의 창작곡들은 형식을 강조하는 경향과 가사에서 표현되는 추상성 등의 움직임이 현장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더 나가면 그간의 노동가요의 특성들이 조금씩 무너지는 노래들이 창작되고 잇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노동가요의 특성이 사라진 노래들이 노동대중에게 불려진다면 이것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한 예로 민중가요 노래패 ‘꽃다지’와 대중가수 안치환이 노래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같은 노래가 노동자이 선호하는 노래(현장마다 차별성은 있지만)로 존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노동자의 정서가 변화해서 인가? 정서가 어떻게 변한 것인가? 그런데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서는 이 노래가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왜 이렇게 반응이 다양한 것일까? 왜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도대체 현장 정서는 무얼까? 현장의 정서가 다양하다면 최근 창작곡의 한계는 무얼까? 일상의 노래를 선호하고 투쟁할 때에는 부르기 어려운 노래들이 창작되는 현실(꽃다지의 최근 작품들을 보면 좋을 듯하다). 그러나 투쟁의 공간에서는 그러한 유의 노래를 발표한 집단들도 공연 곡으로 부르지 못하는 현실. 업종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투쟁이 있는 곳에선 여전히 80년대 후반 90년 초반에 창작된 노래들이 불려지고 있으며, 99년 총파업투쟁을 준비하면서 만들어진 김호철작 박준 노래의 ‘총파업의 노래’ ‘약속은 지킨다’ ‘세상을 멈춰라’ 등이 최근 집회문화를 주도하는 노동가요로 자리하고 있는 현실속에서 다시 한번 고민 해 본다. 지금도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얼마전 신병현 선샌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부분들을 적어보면서 풀어보려 한다. “노동자들은 대체로 노동자이기보다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국민으로서, 민족성원으로 되고자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지배이데올로기 공세에 포섭되어 있는 것인데, 우리 운동은 시민적 도덕이라고 이야기하는 정체성을 스스로 운동속에서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작업장 공간만이 아니라 작업장을 떠난 일상도 다 자본의 지배적인 국가권력의 지배적인 기능적 공간이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속에서 다른 형식을 스스로 생산해 내려는 노동자의 실천 투쟁의 형태를 강조해 나가는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즉 노동자문화운동은 대중과의 관계 속에서 노동자 주체의 형성 가능성과 문화적 동일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탐색하고 강화하는 실천운동이며 동시에 노동자 문화의 풍부화에 기여하는 새로운 관계의 창출을 위한 개방적 실천 운동의 한 영역일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문화운동은 노동자 정치운동을 구성하는 한 영역인 동시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을 준비하고 강화하는 활동을 포함하는 대중 및 노동운동 조직과 그들의 정치 조직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실천 이데올로기들 및 지배이데올로기적 요소들과의 각성된 이데올로기 투쟁의 한 형태일 것이다!”라고 하시던 이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최근의 민중가요진영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시도들의 의미는 의미대로 인정하면서도 이들의 진보적 민중가요운동과는 다르게 앞으로도 여전히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 시대 노동자 계급의 노래, 노동가요 창작이 끊임없이 연구되고 실천되어져야 할 중요한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한다. ‘세상을 멈춰라’ - 김호철 곡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벼랑 끝에 내몰려 살수는 없다 기계에 매달려 살아온 가슴을 네놈들은 아는가 소주잔에 날려버린 상처도 피맺힌 사연들도 개좆같은 고통분담 헛소리에 되살아나버렸다. 기계를 멈춰라 세상을 멈춰라 노동자의 매로 세상을 처라 총파업투쟁 총단결투쟁 승리의 날까지 도전과 승리를 위한 실천의 시대, 정리해고 구조조정 중단, 비정규직 정규직화, 노동시간 단축, 실업자와 저소득층의 생계대책 사회안전망 구축, 임금안정 단협준수, 산별교섭 보장, 교육, 건강권 확보, 민중생존권 쟁취! 등의 문제가 노동자들의 삶에 가로놓여져 있다. 최근 들어 98년 대구 ‘좋은 친구들’의 창작과 실천활동 부산 ‘놀이패 일터’의 창작과 실천활동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한 김호철의 ‘민주노총 총파업의 노래’ 등이 노동자들에게 불려지고 창작되는 일이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나도 최도은 노래집1을 넘어 새로운 창작에 돌입해야겠다. 글을 쓰다 보니 20여권이 넘는 민중가요 책을 뒤져봐도 1940~1970년대까지의 노동가요가 기록되어 있는 책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다음 숙제로 역사를 담은 노동가요 책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과 노동가요 역사를 담는 노래테이프 만들기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동지 여러분들의 애정 어린 질타와 꾸짖음으로 놀기와 싸우기만을 쫓아다니는 나의 일하는 방식을 극복하고 약속한 사업을 만들어 나가는 최도은으로 만날 수 있도록 꾸짖어 주길 당부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한노정연 콜로키움을 통해 발표된 이 글은 시작일 뿐이며 앞으로도 감춰진 노동가요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더욱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하며 이런 시간을 갖게 해 준 우리 연구소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힘찬 노동자의 노래, 목청껏 함께 부르고 실천하자! 박준성 선생님(역사학 연구소): 발제문에서 빠진 부분을 좀 보충하겠다. 김순남이 만든 민중가요가 발굴된 게 50여곡이다. ‘인민항쟁가’가 결정적으로 그에게 체포령이 떨어지게 만든 계기로, 당시 거의 애국가처럼 불렸다. ‘부용산’은 만든 의도와 관계없이 빨치산 추모가로 역할했다. 그러나 너무 애절하고 패배적이라서 공식적으로는 불리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4․19에 대한 노래가 80년대에 만들어진 바와 같이, 이후에 만들어진 주요한 노래로 전태일 추모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 선생의 시를 황석영씨가 노랫말로 바꾼 것이다. *정정; 나체 시위는 76년, 똥물투척 사건은 78년 문 90년대, 특히 민주노총 이후에는 노동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이 국민-시민과 대립되는 섬이라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현재의 민주노총이라는 베이스캠프에서 국민-시민에 눈을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안치환, 윤도현 등이 그 동안 노래운동의 성과를 따먹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문화운동 활동가들의 기능분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선전․선동으로서의 기능과 국민-시민을 향한 운동으로. 문 굳이 ‘국민’이라는 말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노동자의 다양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연령, 각자가 처한 현실, 취향 등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노래를 싫어할 수도 있고,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다 좋은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박제화된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을 세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고, 그 속에서 실천을 검증해 가야한다. 답 민주노총이라는 전국적인 힘과 권력과 운영기능을 가진 조직이 형성되어 있고 그것이 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에서, 저의 경우에는 작은 사업장 투쟁문제에 고민이 가있다 보니까, 제기하신 고민을 깊이 하진 못했다. 그런 고민이 많았으면 노문센터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겠지만, 제가 해야할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운동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부분이고, 전국 운동에서 비어있는 부분, 곧 현장 투쟁이 제가 운동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저의 음악은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데 비해 투쟁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좋아한다. 문 최도은 동지가 투쟁 현장에서 기능적 노동가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문화운동 활동가들의 방식에 대해 얘기하셨는데,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곧 문화운동가들이 다 그런 활동을 해야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기능적 분화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노동가요는 다 기능적이었다. 문제는 더 나아가 그들이 국민, 대중적 감수성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정도의 성공을 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 문화운동이 노조활동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민중주의적 방식으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계급정치 속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기껏해야 노조 주변에서 서성거려서는 안 되고,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문 최도은 동지가 투쟁, 실천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계급투쟁이 매일매일 일상에서 계속된다는 측면도 존재한다고 본다. 투쟁의 경험을 기억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때, 노래가 어떻게 투쟁의 경험과 각성을 지속하는 데 기여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것 아닌가? 투쟁의 현장에서는 ‘파업가’만 부르지만, 노동의 일상, 가족과 아이들이 있는 생활로 돌아갔을 때의 고민이 필요하다. 현장활동가 그런 선택은 오히려 현장 활동가들이 한다. 현대 중공업 투쟁에서 불렀던 ‘아리랑 목동’은 수만명을 움직였던 정치적 무기였다. 아직은 그런 생활의 문제보다는 최도은 동지 같은 노동가수, 투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지가 현장에 왔을 때, 사람들은 투쟁하기 위해 신발끈을 맨다. 문 현재 다양한 문화 활동의 필요성이 같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함께 갈 수 있을 지에 대해 궁금하다. 답 지금까지 별다른 신경을 쓰지도, 노력도 하지 않는 상황이다. 고민이 부족했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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