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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번 : [87호/연재-기획] 광화문 촛불 시위를 보면서 |
글쓴이: 최세진 |
등록: 2003-05-20 00:00:00 |
조회: 2537 |
광화문 촛불 시위를 보면서** 이 글은 지난 2002년 12월에
작성된 ‘광화문 촛불 시위를 보면서’를 2003년 5월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서 주최한 콜로키움 이후 재구성한
것입니다.
최 세 진/ 민주노총 정보통신부장
우리는 작년 인터넷을 매개로 한 대중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경험했다. 이 글은 그 여러 가지 사례 중에서 특히 ‘광화문
촛불 시위’를 중심으로 그 배경과 진행 경과를 살펴보고,
결론적으로 우리 노동진영, 민중진영은 무엇을 고민해야 하고,
어떻게 바꿔가야 할지 제안하고자 한다.
1. 촛불시위의 전개
작년말 우리는 유래 없었던 놀라운 집회를 보았다. 한 넷티즌이
게시판에 ‘토요일 6시에 촛불을 가지고 모이자’라는 제안으로
첫 주에는 1만여 명이 광화문에 집결했고, 두 번째 주에는 전국
36개 도시에서 같은 집회가 진행되었으며, 광화문에는 5만여
명이 집결했다. 조직된 대중이 아닌 무차별 개인들이 한 개인의
제안으로 이렇게 한날 한시에 모여서 같은 요구사항을 걸고
집회를 연 것은 세계 초유의 사건이었다. 2000년의 시애틀
투쟁도 인터넷을 통한 조직이라 이와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으나, 시애틀 투쟁은 ‘조직 중심’의 연대였다는 점이
다르다.
6월, ‘여중생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언론은 이를 철저히
외면했고, 월드컵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월드컵이
끝나자마자 인터넷의 새로운 뉴스 초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쩌면 말 그대로 그냥 작은 교통사고로 지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이 사건은 수년간 국내 여론을 뒤흔드는 몇 차례의
사건들(매향리, F-15, 한강 독극물 방류, 오노 사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겪으면서 형성된 미국 패권주의에 대한
반감정을 자극했고, 그것이 인터넷 상에서 전반적인 동의로
확인되자 손과 눈으로 움직이던 넷티즌들을 하나로 묶어 거리로
나와 직접 발로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특히, 이 사건의
희생자가 10대들이란 점은 인터넷의 주된 이용자 층인 10대를
자극했는데, 여중생들을 내 또래의 친구로 생각한 10대들은
기존의 사건과 달리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 집회는 처음 11월27일 한겨레신문의 자유토론란에 한
넷티즌이 아래의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글을 올린 당사자는
앙마(김기보, 30, 학원강사, 앙마는 붉은악마와 무관하다)라는
아이디를 사용한 이용자로 단 세 군데의 게시판에 그 글을
올렸다고 한다. 이 글을 보고 찬성한 넷티즌들이 해당 글을
퍼다가 다른 동아리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제안이
나온 지 단 3일만에 광화문에 1만여 명이 집결했다. 거기는 책임
주체도, 조직도, 집회 내용에 대한 사전 합의도, 계획도 없었다.
다만, 제안과 동의만 있었을 뿐이다. 그 집회에 대해서는
범대위도 당일까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언론도 입을
닫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그 선전, 조직은 순전한 넷티즌들의
성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조직된 집회이기에 집회 신고는 당연히 할 생각도
없었으며, 집회현장에서도 주도하는 조직이나 단체가 없었다.
덕분에 집회가 금지된 광화문과 미대사관앞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그것 때문에 처벌받았다거나 구속된 사람과 단체는
없었다. 오히려 전 사회적으로 급격히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반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던 이회창 마저
집회에 참가하겠다고 선언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화가 난
조갑제는 ‘스탠스를 잃어버린 이회창 후보’를 격렬히
비난했다.
당일 집회 역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주최하는
단체나 정해진 연설자 없이’ 마이크를 주고받았다. 참가한
중학생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자유롭게 무대에 올라와서 목소리를
높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고, 해산도
자유롭게 이루어졌다. 한번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집회는
당일 한 연사가 이 추모제를 계속 하자고 제안하고 집회 현장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자 거수로 매주, 매달, 매일 중
매주 모일 것이 다수결로 결정되었다. 그 날 집회에서 대중은
동원의 대상도, 선전 선동의 대상도 아니었으며, 스스로
조직하고, 선전하고, 연설하고, 의결하고, 집행하는 주체였다.
2. 기존의 운동진영과 대중의 갈등
그러나 30일 당일까지도 6월부터 이 운동을 이끌었던 여중생
범대위에서는 광화문 집회에 대한 기획이나 지침, 논의가 전혀
없었으며, 그것은 30일 집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주초에
제출된 범대위의 일정과 계획에도 11월 30일 1만 명의 광화문
집회에 대한 분석이 없었으며, 곧 돌아올 12월 7일 광화문
집회에 대한 어떤 지침도 없었다. 당시 광화문 집회에서 ‘소파
개정, 부시 사과’부터 시작해서 ‘미군 철수’까지 그동안
범대위가 주장해온 구호들을 넷티즌들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들의 구호로 삼고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모인 그 대오를 보고 오히려 범대위는 어찌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이는 단지 범대위만의 문제는 아니다. 당시까지 모든
운동진영이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전 운동진영이 ‘대중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몰려가는 이 사태’를 어찌할 줄 모르고 그저
관망하고 있었다.
11월 30일과 12월 7일 오히려 운동단체들과 집회에 참여한
대중들 사이에선 갈등이 일어난다. 대중을 선도하고, 대중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할 운동단체들이 거꾸로 갈등을 일으킨 것이다.
그 갈등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의미부여를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갈등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실제로 집회가 끝난 후 통신에 올라온 넷티즌들의 글을
보면 당일날 그들이 운동단체들을 바라보던 시각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이를 가리켜 일명 ‘깃발논쟁’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집회를 둘러싼 여러 논쟁 중 하나가 되었다.
집회의 초기 제안자인 ‘앙마’라는 넷티즌의 제안 내용도
그랬지만, 그 날은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여 비폭력 추모제를
하자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모인 넷티즌들은
나중에 깃발을 들고 몰려온 운동단체들이 집회를 주도하려고
하면서 폭력적으로 진행하려 하자 거부감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넷티즌들은 깃발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데, 그것은
넷티즌들 스스로에 의한 자발적 추모제가 깃발을 든 단체들이
소집한 집회처럼 되거나, 깃발을 든 단체들이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넷티즌들은 운동단체의
참여자격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인 집회운영을
요구한 것인데, 운동단체 구성원들은 ‘우리도 참가 자격이
있다. 당신들이 월드컵에 열광하고 있을 때 우리가 바로
맞아가면서 싸워왔는데, 왜 참가 자격이 없는가’하는 반론을
했다. 그리고 평소 하던 방식으로 운동단체들은 집회를 이끌고
나가려 했고, 집회 대오 내에서 무대와 대중이 따로 분리되고,
운동단체와 개별 참여자간에 반목하는 현상까지 발생했다.
이에 대해 초기 제안자인 ‘앙마’는 <광화문에 더 많은
민주주의를>이라는 글에서 넷티즌들에게는 ‘이기기 위해서는
“넓어져야”합니다. ... 언론이 미선이 효순이의 진실을 가리려
할 때 깃발 든 분들이 결국 진실을 지켜내셨습니다. ... 깃발은
그분들의 자존심입니다. ... 너그러워집시다. 깃발이 보이면 아,
저분들도 왔구나. 서로 칭찬합시다.’라며 달랬고,
운동단체들에게는 ‘광화문을 진짜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곳으로 만듭시다. 여기 처음 오시는 시민들은 기존의 집회형식을
낯설어합니다. ... 거리감을 주는 표식을 떼어주십시오. 기존의
방식을 과감히 떨치십시요. ... 당신들은 10년 넘게 거리에서
대중들을 호출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그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 광화문에 모인 모두에게 집회의 주도권을 주십시오.’ 라고
호소했다.
그 이후 넷티즌들에 의한 운동단체 비난은 줄어들었지만,
대중들에 의한 자발적인 집회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단체들은 12월7일 집회와 범대위 이름으로 개최되었던 14일
집회에 여러 가지 실수들을 했다. 첫째는 현장에서 대중들의
요구를 읽지 못하는 실수이다. 지금까지 집회는 집회 주최자의
제안과 명령, 지침으로 대중들이 움직였는데, 이 집회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범대위는 계속 기존의 방식으로 집회를
이끌고자 했고, 그건 집회 당시 대중과 무대를 분리시켜 버렸다.
즉, 집회 전에 대충의 진행 계획을 짤 수 있겠지만, 참가자가
조직대중이 아닌 만큼 그 계획이 현장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현장에서 충분한 토론과 동의과정이 필요한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후 ‘앙마’를 비롯한 넷티즌들은 짧은
시간의 대규모 본대회와 소규모 집회 방식의 이중 구조를
제안했다. 즉, 전체 기조를 밝히는 본대회를 진행한 이후
200-500여명씩 나누어서 토론과 집회를 진행하자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본대회에서 투쟁방향을 밝힌 후에
소규모 집회를 통해 최대한 참가 대중을 주체로 끌어올리고
그들이 직접 집회를 끌어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을
앞으로 민중진영이 어떻게 소화해 나갈 것인지 하는 것은 단지
이 집회뿐만 아니라 앞으로 전 민중진영에게 있어서 운동을
펼쳐나가는 데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3. 촛불시위의 배경
1) 사회적 배경
가. 남북 화해 분위기
촛불시위의 가장 주요한 배경은 6.15 공동선언 이후에 자리잡은
남북 화해 협력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촛불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넷티즌들은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보호막으로 생각했던
미군의 존재가 오히려 현재는 짐이 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넷티즌들의 그런 대북관의 변화는 연말 선거때에도 고스란히
보여줬다. 87년 이래 대선때마다 반복되던 북풍이 지난
선거에서는 아예 맥도 못 추렸다. 북핵 재가동과 미국의
무기판매선 납치까지 결코 작지 않은 사건들이 거듭되고,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이 연일 1면 헤드라인으로 끌어올렸지만,
인터넷 상에서 이 문제를 둘러싸고 북한에 대한 비난이나
경계의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상황을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부풀리는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에 대중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나. 연이은 미군 범죄와 미국의 패권주의
그리고 수년전부터 반복되어 온 매향리 사건, 한강 독극물 사건,
미군부대 기름유출 사건 등 수년간 지속된 미군 범죄는
인터넷에서도 계속 화제가 되었으며, 9.11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전, F-15 구매 압력 사건, 오노 사건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패권주의는 넷티즌들을 자극했다. 특히 9.11 이후 미국에 대한
여론이 바뀌는 것이 눈에 띄는데, 그전까지는 미군 일부의
개별적인 범죄와 사건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 그 후 전개되는
미국의 대외정책과 세계적인 반발을 보면서 하나의 맥락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9.11 이후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국주의 행태는 그 자체로 비난여론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오노 사건은 넷티즌들의 감정적인 반미의식을 부추겼고,
맥도날드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집단적인 의사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즉, 여중생 사건 이전에 이미 인터넷 여론은 미국에
감정적이고 이성적인 거부감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넷티즌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은 기존에는 언론에 의해
정보를 습득하고, 운동진영의 선도투에 자극받는 과정이었다면,
최근 몇몇 사건에 있어서는 특히 오노 사건 이후에는 넷티즌
스스로 정보를 수집하고 불매운동을 조직하고, 프린터로
유인물을 만들어서 아파트 벽에 부착하는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다. 심지어 여중생 사건 이후에는 범대위에 갖가지 충고와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넷티즌들의 반미의식이 아직은 여러 사건의 연결을 통한
‘귀납적인 반미감정’이기 때문에 사회구성체론으로부터 추론된
반제국주의 투쟁이나 민족해방투쟁의 연속으로 넷티즌들의
반미감정을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
문제를 ‘통일문제’로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넷티즌들이 그 연관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은 오히려 제국주의로서의 미국을 폭로하고, 반전평화
운동과 연계시키는 것이 현재 상황에 훨씬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지 않을까 판단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이후 남북화해협력
분위기가 다시 냉각되거나, 미국이 한국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면 미국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더라도 거리로
넷티즌들을 모아내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힘들어질 것이라고
추측된다.
다. 월드컵 응원전
월드컵 응원전의 영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모여본 경험이다.
이미 한번 모여봤던 대중은 그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 때의 경험을 대단히 흥미로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또다시 모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게 했고, 스스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기만 하면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광화문과 야간집회의 문제이다. 현재 넷티즌 사이에는
광화문에서 모이는 것과 야간 집회가 불법이라는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80년 서울의 봄 이래 한번도 깨지 못했던
광화문의 높은 철벽을 그들이 실천적으로 깨버렸고, 집시법의
허구를 ‘어겨서’ 깨뜨려 버린 것이다.
라. 넷티즌의 형성
사실 ‘넷티즌’이라는 단어는 초기에는 ‘인터넷 이용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런 의미로 넷티즌을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인터넷 사용자’를 다른
집단과 구별되는 특성을 가진 특정한 소수집단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2002년 6월 현재 2천5백만명이 넘게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고(한국인터넷정보센터 통계자료), 나이별로 10대 중
90.6%, 20대 중 86%, 30대 중 66.7%, 40대의 38.9%가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소수의 특정 집단으로
분류하거나 지칭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는 신문 전체의
구독률과 비슷하다. 이미 40대 이상까지 폭넓게 인터넷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이들을 특정한 세대로 지칭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아직은 전체 국민연령대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고 각 게시판의 의견개진 역시 젊은
층이 활발하다는 점에서 현재 인터넷의 여론은 2-30대 젊은
세대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인터넷의
폭넓은 보급은 정보의 생산, 흐름, 토론, 여론 형성과정, 인간
관계에 다양한 변화를 일으켰고,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와
인터넷을 접한 젊은 세대일수록 새롭게 형성된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인터넷 사용자들이 형성하는 인터넷 여론은 매스미디어가
형성하는 사회 여론과 상대적인 독립성을 가지고 있는데,
초기에는 매스미디어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주로 논쟁되기도
하고, 순전히 넷티즌들 내에서만의 독특한 논쟁꺼리가
오르락내리락 하던 형태였다가, 최근에는 이용층의 세대가
올라가고, 확대되면서 스스로 정보생산자가 되어 오히려 거꾸로
인터넷 여론이 매스미디어 여론을 주도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 이제 대중들은 매스미디어가 의도하는 여론형성을
넘어 스스로 정보를 수집해서 비교, 분석, 배포, 토론해서
집단적인 행동까지 하는 단계가 된 것이고, 그 행동이 초기의
온라인 중심의 행동에서 오프라인의 집단행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종국에는 국내외의 모든 권력이 모든 인적, 물적,
정치적 역량을 투여하는 대통령 선거까지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들은 앞서의 386 세대와는 구별되는 몇가지 사회적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보통 수능세대라고 불리워지는 이들은
90년대의 소위 ‘신세대’ 이후 세대이다. 이들은 군부독재를
경험하지 못했고, 학교에서 특성화 교육이 강조되어서 각자의
개성적인 활동이 가능했고, 학생회 활동이 폭넓게 보장되었으며,
대안 학교가 확산되던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세대이다. 그리고
90년대 신세대들이 형성해놓은 자유로운 개성들이 폭넓게 보장된
문화의 혜택을 어렸을 때부터 받으면서 성장했다. 90년대
신세대는 자유의 영역을 문화운동에 투영했었는데, 이제 그
범위는 전방위로 넓어진 것이다.
이제 새로운 사회 여론 주도세력으로 떠오른 이들 세대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요구한다. 이미 미국 등 70년대 정보통신 초기부터
대중적으로 정보통신이 보급되었던 나라들에서는 이용자 비율이
세대간 전혀 차이를 보이지 않고 인구비례가 그대로 반영되는
상황이 되었다. 곧 우리나라도 이렇게 전 세대가 인터넷에
참여하는 시기가 올 것이고, 이미 70% 이상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직도 운동진영은 이 새로운 여론 주도세력을 파악조차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의 조직방식, 선전방식, 토론방식을
허겁지겁 따라가기도 버거워하고 있다.
2) 국내 인터넷 환경의 특성
가. 게시판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게시판 사용이 우리만큼 발달된 나라는
사실 거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홈페이지를 만들면 당연히
게시판 한 두개는 만들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다른
나라의 홈페이지를 둘러보면 일반 상업적 홈페이지 뿐 아니라
공공기관, 심지어 사회단체들의 홈페이지에도 게시판을 운영하는
곳이 거의 없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있다면 운영자의
메일주소가 있을 뿐이고, 가끔 메일링리스트를 신청하는 기능이
있는 정도이다.
외국의 경우 화제가 되는 것은 이용자들의 글이 아니라 홈페이지
자체이다. 즉, 홈페이지를 만들고, 다수가 찾아오게 할 정도의
능력이 되는 경우에만 인터넷이라는 여론광장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존에 만들어진 홈페이지의 여론광장을
통해 개인들이 다양한 주장을 펼칠 수 있으며, 개인들이 입수한
자료들을 다수에게 순간적으로 퍼뜨릴 수 있다. 이 때문에 가진
것이라고는 컴퓨터와 통신망밖에 없는 다수의 10대와 일반
이용자들이 인터넷에서 여론 형성층으로 부각할 수 있었던
것이고, 특정한 인터넷 매체나 홈페이지, 명망가가 아니라 속칭
넷티즌이라는 집단이 여론을 주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선거법, 각종 정보통신 검열관련법 등
시대에 맞지 않는 사법제도와 관리자의 자의적인 검열로 인한
토론의 왜곡 그리고 익명성을 이용한 게시판 도배, 난동 등은
보다 생산적인 토론과 여론형성을 막는 방해물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 매체를 이용한 대중조작에 쉽게 노출되는 특성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 초고속 통신망, PC방
정액제 초고속 통신망 보급 1위라는 것도 이 땅의 인터넷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첫째, 빠른 속도로 인해 많은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으며, 특히 동영상과 사진, 음성을 쉽게 보내고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텍스트로만 전달하는 정보보다 훨씬
풍부하고 사실적인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정액제 요금은 24시간 인터넷 접속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컴퓨터만 앞에 있으면 비용걱정 없이 언제든지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게 되면서 메신저 등 새로운 통신매체를
발달시켰다. 이는 또한 정보의 소통과 토론의 가능성을
극대화시켜서 온라인 행동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말 그대로
실시간의 집단적인 정보공유, 토론과 실천을 가능하게 했다.
세 번째, 전국에 구멍가게 만큼이나 많은 PC방은 우체국,
전화국에 비치된 컴퓨터와 더불어 언제든지 누구든지 적은
비용만으로도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혔는데, 이
또한 한국의 인터넷 문화를 다른 나라와 다르게 만든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3) 넷티즌 운동의 축적
광화문 집회는 그러한 사회적인 배경뿐만 아니라 넷티즌 스스로
집단적인 행동을 전개했던 실천적 경험이 주요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들의 움직임을 꼼꼼히 지켜보지 않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놓치고 있었지만, 이미 통신이용자가 10만도 채 되지
않던 91년도부터 넷티즌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내며 사회여론과
상대적인 독립성을 가지고 움직여 왔다. 이미 91년 말
넷티즌들이 하이텔의 유료화에 맞서 촛불시위를 벌인 일은,
처음으로 넷티즌들이 통신을 통해 여론을 모아 집단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95년에는 재난 사고를 감추려는
KBS와 공보처에 맞서 수만 명이 온라인 시위를 벌여 이들의
공식적인 사과까지 받아낸 일이 있었으며, ‘전두환, 노태우의
처벌 특별법’의 제정을 요구하며 2000여명의 온라인 서명을
받았던 경험도 있다. 그 뒤 2001년이 되고 나서는 몇 달에
한번씩 넷티즌들의 집단적인 온라인 시위가 정례화 될 정도로
자주 일어났다. 2001년 3월에는 일본교과서 왜곡 사건에 맞서서
일본정부와 우익언론사들의 사이트 6개를 집단적인 온라인
공격으로 다운시켰으며, 4월에는 대우자동차 노조 경찰 폭력
사건에 분노하여 청와대와 경찰청 사이트를 폐쇄시켰다. 7월에는
정보통신검열에 맞서 정보통신부의 사이트를 마비시키고, 430여
개의 홈페이지가 진보넷이 제안한 사이트 파업에 동참했다.
2002년이 되자 드디어 오노 사건을 겪으면서 그들은 네트워크
굴레를 벗어나 오프라인으로 뛰쳐나온다. 그들이 전개한 미국의
패스트푸드 불매운동은 맥도날드, KFC 등의 매출을 전년대비
10~15%까지 떨어뜨려 각 회사가 대응을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열게 만들 정도로 큰 타격을 준다. 당시 맥도날드는 그
불매여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시적으로 모든 TV 광고를
중단하는 결정까지 내렸었다. 바로 그런 다양한 실천의 경험의
축적이 월드컵 광장 응원전을 거치면서 촛불시위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3. 변화의 제안
첫째는 먼저 운동진영의 미디어 선전, 교육 역량을 강화하자.
올해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의 저변에는 전부 정보통신공간에
축적된 넷티즌들의 전면적 동의가 있었다. 월드컵 응원전을
이끌었던 붉은 악마는 97년부터 통신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온라인 동호회였으며, 국내 모든 이해집단이 그 물적, 인적,
정치적 역량을 전부 쏟아 붓는 대통령선거에서 조중동과
맞짱뜨던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주동력은 2000년에 구성된
통신 동아리 ‘노사모’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 인터넷 인구는 2,500만에 육박하고 있으며, 그것은
신문 구독률과 맞먹는다. 그리고 이제 그 인터넷 여론은 이 땅의
여론을 주도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그 여론은 대중의 직접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98년 조선일보의 단독 공격으로도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최장집 정책기획위원장 사건은 이제 먼
옛날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광화문 집회를 처음 제안했던
‘앙마’라는 이용자는 서른살의 학원강사였다. 즉, 이제 그
넷티즌 세대가 노동자 계급의 젊은 층을 이루기 시작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선전, 조직, 교육, 투쟁 방식의 획기적 변화를
이루지 못하면 우리도 도태될 것이다. 1면 헤드라인에 두 번만
때리면 국가 정책이 바뀐다고 큰소리 치던 조선일보의 몰락을
보라. 아직도 80년대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세대를 만나기 시작하고 있다.
둘째, 집회 방식을 점진적으로 변화해 나가자. 지금까지는
조직된 대중만 참여할 수 있는 집회였지만, 앞으로는 같은
사안에 관심있는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참여의 폭을
넓히고, 집회에 참여한 대중 스스로 집회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집회의 형식과 내용을 변화시켜 가야 할 것이다. 작게는 집회시
자유발언대부터 시작해서 토론형 집회 등 다양한 방식을
실험적으로 도입해 나가야 할 것이다. 집회를 준비한 단체는
일단 그 집회에 일반대중이 함께 하는 순간 집회의 진행자가
아니라 ‘집회의 제안자’로 바뀐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전에 조직내 논의된 틀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현장의
의견들을 충분히 받아서 전체 기조가 해치지 않는 선에서 동의
하에 함께 진행한다는 것을 집회 원칙으로 삼는다면 이번 같은
이런 단체-대중 형태의 갈등은 재현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셋째, 단체내 민주주의를 강화하자. 지난 7, 80년대 우리는
민주화 투쟁에 우리의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그
치열한 민주화투쟁이 87년 ‘대통령 직선제’라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취득하는 것으로 머무르고 말자, 우리 운동진영
역시도 내부적인 민주주의에서도 그 한계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즉, 그러한 문제는 노동조합들도 마찬가지이다. 87년
7,8,9 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이 거대한 흐름으로 일어나 95년
민주노총을 건설하게 되었다. 그 후 형식적으로는
어용노동조합에 비해 월등히 나은 조합원 민주주의가
구축되어있다고 하지만, 그 뒤 보다 내용적이고 실제적인
민주주의는 요원한 상태이다. 이는 다른 단체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이제 우리에게는 전 구성원이 함께 논의하고,
제안하고, 토론하고, 의결할 수 있는 도구를 확보했다.
정보통신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도구이다. 우리는 이를
극대화하여 최대한 운동에 참여하고자하는 대중들을 운동의
주체로 세울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간접민주제 형태의
의결구조를 개편하고, 상근자 중심의 집행체계를 바꿔내자. 이미
대중의 의지와 욕구는 확인했다. 우리가 바뀌는 것만 남았다.
넷째, 주장에서 설득으로. 지금까지 우리는 주장하고, 압력을
행사하고, 의사를 관철시키는 운동에 익숙해져 왔다. 그것은
대권력 투쟁, 매스미디어 중심의 운동일 때 하던 방법이다.
이제는 직접 대중을 만나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아무리
매스미디어를 휘어잡고, 상대편이 쩔쩔매는 상황이 될지라도
대중을 설득하지 못하는 운동은 더 이상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
그렇게 해서 설령 의견을 관철시켰다고 대중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한 그 결과는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대중들에게 그 문제점을 설명하고, 운동진영에서
제시하는 대안을 올바른 것으로 대중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각
단체 홈페이지에 신문에 몇 줄 실리지도 않는 성명이나
보도자료, 활동가들이나 보는 정책자료를 올려놓을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선전물을 배치해야
한다. 우리는 자본과 권력에 대응하는 방법은 잘 알지만,
대중들을 만나 설득하고, 토론하는 방법은 오히려 잘 모르는 것
같다. 이제라도 그것을 배워나가야 한다. 운동은 당연히
대중운동이 기본일텐데, 우리는 대중운동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대중들과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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