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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3번 : [89호/연재-기획]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인식
글쓴이: 안태정 등록: 2003-07-20 00:00:00 조회: 2362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인식



안 태 정

연구위원






1. 시작하는 말

2. 공산주의사회

3. 제국주의의 정치․경제적 특질

4. 제국주의전쟁의 성격과 대응

5. 민족개량주의와 제국주의

6. 혁명론과 제국주의

7. 끝내는 말




1. 시작하는 말

20세기 전반기 조선의 사회성격과 그 전망의 내용을 규정하는 내외적 요인들 가운데서 외적 요인의 하나로서 일본제국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사회 구성원들의 계급적 위치와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인식과 태도도 사회 구성원들의 계급적 위치와 지향하는 바에 따라서 다양했다. 당시 사회 구성원들 가운데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인 동시에 그 전위로서 공산주의사회를 지향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어떠했을까.

이 글에서는 식민지시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조선 사회에서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당시 국내외 정세와 사회성격, 그리고 이에 입각한  혁명론 등의 성격을 규정했던 외적 요인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일본제국주의의 정체’의 일단을 알아보는 작업이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운동 목적은 조선 사회에서 추상적이든 구체적이든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 상태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가 당시 조선의 사회에 어떠한 억압과 착취 상태 등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는가. 그러한 ‘압제사회’를 ‘해방사회’로 만들기 위한 혁명론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차지하는 위상 등이 어떠하다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생각했는가.

이 글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1) 문제가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오늘의 한국 사회의 성격을 형성한 역사적 요인의 하나로서 일본제국주의를 제외할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과,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 상태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 공산주의사회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추구한 바람직한 세상은 어떠한 사회였을까. 1921년 「고려공산당 선언서․당 강령․당규」에 의하면 ‘계급 없는 사회’, ‘대동사회’, ‘절대평등․대동세계’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를 명시적으로 ‘공산주의사회’라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김하일은 공산주의자들의 “최후의 목적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통해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 것임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1936년 이재유는 자기가 생각하는 ‘진정한 공산주의사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펼쳐 보였다. (1) 사회적 생산력이 고도화되어 극히 적은 양의 사회적 노동으로 생산된 풍부한 생산물을 각자의 희망에 따라 사회적으로 소비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착취도, 공장주도, 착취를 위한 사유재산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회구성원은 높은 수준의 물질생활을 평등하고 자유롭게 영위한다. (2) 높은 수준의 사회적 교육이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실시되고, 지배와 피지배 및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가 없어진다. 따라서 억압적 국가권력은 필연적으로 사멸되며, 단지 그곳에는 사회구성원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필요한 정치적 위원회가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억압도 법률도 징역도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의 자유, 평등, 평화를 누리는 생활만이 계속된다. (3) 과학의 고도화로 미신과 종교가 소멸되어 버리고, 모든 사회구성원은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여러 가지 연구와 발명에 총동원된다. 지금까지의 인간과 인간의 투쟁은 소멸하고 인간과 자연의 투쟁이 전개됨으로써 진실로 새로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다. 그들은 가장 고급스런 예술적 생활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행복하게 즐긴다. (4)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남녀 사이에는 생산․정치․교육 그리고 모든 연구․발명과 그 밖의 문제에서도 차별이 없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단지 성적 대립자로서만 존재하게 된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에 의해 물질적․정신적․예술적 및 그 밖의 모든 생활의 통일과정으로서의 남녀의 연애가 넘친다. 현재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진실한 일부일처제의 엄격함이 있다. 진실한 자유․평화․평등․행복의 부부생활이 비로소 인류역사에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재유는 “역사는 순차적으로 발전”하고, 당시의 “여러 선진자본주의 나라에서의 공산주의운동도 과도적인 사회주의시대로 들어서는 운동이고, 공산주의사회로의 준비과정에 불과”하다고 했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수준은 말할 것도 없다고 보았다. 그 이유들 중의 하나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이었다. 따라서 일본제국주의라는 장애물을 걷어치우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되어야 했다.



3. 제국주의의 정치․경제적 특질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정치․경제적 특질을 조선 사회 구성원들의 절대다수인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라는 관점에서 파악했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일본의 제국주의화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게 된 역사적 경로에 대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인식을 보자.   

1870년대 세계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들어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식민지를 경쟁적으로 획득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국주의 무력에 위협 당하고 있던 봉건국가로서의 일본은 문호를 개방하여 제국주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한편 국내의 봉건 지주 및 귀족계급의 기성세력과 근대 부르주아적 신진세력이 결탁하여 새로운 국가권력, 즉 ‘명치유신’ 정권을 수립했다. 이 기형적인 일본국가는 자본주의적 발전과 함께 제국주의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한 유일한 조건으로 원료공급과 상품판매를 담당할 수 있는 식민지, 즉 아시아대륙을 향한 진군로(進軍路)로서 조선의 획득이 중대한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을 침략하고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러시아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일본국가는 대만 정벌 이후 청나라와 러시아에 대한 전쟁의 승리를 통해 조선을 완전히 획득하여 세계 열강과 대등하게 되었고, 나아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처 일본자본주의는 빠르게 제국주의로 전화되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 사회에서 일본제국주의 국가기구의 특질과 경제구조의 특질은 상호 교호적 관계로 작용한다고 했다. 먼저 조선 사회에 나타난 일본제국주의 국가기구들 가운데서 억압적 국가기구의 특질을 보자.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완전히 무장 해제된 조선에는 2개 사단의 일본 군대, 다수의 헌병이 상주하고 있고” “이 무장한 군대와 함께 관료, 사법관, 경찰, 정탐, 재향군인단, 국수단, 소방단”, ‘치안유지법, 제령 제7호, 출판법, 보안법, 사상보호관찰법’ 등이 “전 조선을 하나의 커다란 감옥으로 만들지 않고는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지 못한다”고 했다. 한편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에 대한 기만적 회유정책, 매수정책 등을 사용한다고 했다. 즉 국민협회 일파의 참정권운동을 공공연하게 조장해 왔고, 송병준 일파로 하여금 소작인상조회를 만들게 하여 일부 농민을 매수하려 했고, 박춘금 일파로 하여금 상애회를 만들게 하여 일부 노동자를 매수한다고 했다. 중추원, 도평의원회, 부협의원회 등의 이른바 자문기관을 만들어 조선인들을 참가시킨다고 했다.

다음에, 조선 사회에 나타난 일본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특질을 보자.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당시의 근대적 교육제도를 “그 본질에 있어서 일본제국주의자가 조선을 지배하는 교활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교육의 목적은 그들에게 소용있는 인텔리겐챠를 양성하며, 조선인으로부터 국민성을 거세시키고 소위 ‘일선동화’를 실현하려”는 것이었고, “교과서는 그런 목적에 맞도록 총독부에 의해서 편찬되며 그 외의 것은 사용되지 못”하도록 했다. 역시 “숭신조합(崇神組合)을 조직하여 미신을 장려하는 것, 명륜회를 조직하여 종래의 유교사상을 부흥시키는 것, 각 종교의 퇴폐를 부흥시키기 위해 물질적, 정신적, 권력적으로 원조․장려하는 것, 일반 민중을 보수화하기 위해 관혼상례를 장려하고” “일․선 통혼과 융화를 장려하고” “남존여비, 애국․배외 사상을 고취하는 것 등, 이 모든 것은 전조선 민중을 보다 근대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옛날로 후퇴시키는 활동이며, 피억압 대중을 제국주의전쟁 찬미로 몰아세우는 활동이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한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는 말처럼 “자본가와 지주층의 막다른 경제적 행동의 반영에 의해 비관적인 염세사상이나 순간적인 향락생활이 전 조선의 도시를 지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본제국주의가 조선 사회의 상공업부문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 “자본의 공격에 의하여 과거 생산방법은 점차 급속히 몰락되어 간다. 그리고 그럴수록 조선인민은 그 고유의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고”, “조선인의 경제적 생활은 여지없이 파멸되고, 모든 부는 일본자본에 집적된다”고 했다. 봉건적 생산관계가 파괴되어 근대적인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자본․임금노동 관계에서 일본인은 자본가계급, 조선인민은 노동자계급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제국주의와 조선민중 양자간은 자본과 노동간의 계급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조건에서는 “조선산업이 숫자적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조선산업의 일본산업에의 종속정도는 강대하여지며, 조선의 부는 일본제국주의의 수중으로 집중된다”고 했다. 조선인민의 노동의 산물인 부(富)가 일본제국주의 자본에 의하여 착취당했다. 결국 “조선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제일보도 걷기 전에”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희생물이 되어서 산업의 정상적인 독자적 발전의 기회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음에 일본제국주의가 조선 사회의 농업부문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대체로 “조선의 농업관계에 있어서는 상품적, 화폐적 관계의 급속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그 착취에 있어서는 전자본주의적 방법이 우월”하고,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에 있어서의 농촌 생산력 발전의 최대의 적인 봉건적 착취관계를 조금도 타파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그것과 결합하여 그것에 의하여 기아지대(饑餓地代)를 착취한다. 봉건유제는 아직 거대하게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는 「12월 테제」의 관점을 수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1930년대에 들어가서 사회성격 논쟁의 일환으로서 농업구조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일정하게 대립적으로 진행되었다. 인정식 등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농업에서 (반)봉건성’이 유지 강화된다고 보았다. 즉 (반)봉건적인 지주와 소작인간의 계급 관계가 여전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문병 등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농업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일정하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즉 농업구조에서의 자본과 노동간의 계급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자의 주장을 혁명론과 관련시켜 보자. 박문병 등이 소유관계 등에서 자본주의적 제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할 경우,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제는 이미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인정식 등이 ‘자본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자본’ 곧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타격방향을 설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토지혁명은 상정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적인 농민을 위한 봉건제 철폐의 개량적인 토지개혁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2)


4. 제국주의전쟁의 성격과 대응

조선공산주의자들은 1928년 「12월 테제」에서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군대의 소비에트연방 및 중국공격 시 아시아에 있어서의 중요지점이다. 태평양 상에 있어서의 전쟁이 가까워짐에 따라 조선의 경제적 군사적 중요성은 증대하고 있다”라고 보았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중국과 소련 침공 및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전쟁이 곧 발발할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1929년 이후 ‘세계경제공황 시기의 중심문제’로서 전쟁이 세 가지 형태로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 제국주의 상호간의 전쟁, 둘째 제국주의의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전쟁, 셋째 중국시장을 분할하기 위한 간섭전쟁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형태의 전쟁이 제국주의국가들 간의 약탈전쟁으로 시작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 간의 혁명전쟁으로 전화될 객관적 필연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세계 무산계급대중은 “제국주의의 약탈전쟁을 국내 혁명전쟁으로 전화시키기 위한 공고한 포대를 미리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은 1931년 9월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침략하자 이에 대응하여 ‘제국주의전쟁을 내란으로’, ‘군수공업은 총파업하라’, ‘모든 방법으로 전쟁을 방해하라’ 등의 ‘제국주의 약탈전쟁’을 반대하는 구호를 내걸고 활동했다.

한편 1932년 국제공산청년동맹은 일본제국주의자의 만주침략을 일본제국주의의 공동의 적인 중국혁명과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전쟁이라고 보았다. 청년동맹은 조선노동대중이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소비에트연방을 진정으로 옹호하고 중국혁명을 전력을 다해 지지하는 일’이야말로 중요하다고 말했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근거지로 삼아 만주를 침략하고, 중국혁명 및 소비에트연방에 대한 전쟁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일본제국주의의 만주침략 반대투쟁, 반(反)소비에트 전쟁준비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해야한다고 강조했다.3)

김하일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에서 “약탈적 전쟁”과 “소련에 반대하는 반혁명적 전쟁” 준비에 “조선을 이용하는데 있어서 모든 가능성과 또 그 가능한 일을 모두 행사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앞잡이들이 조선에서 보다 배타적이고 반동적인 일본 파시즘의 이데올로기, 즉 범아시아주의를 선전하고 중국 노동자들에 대해 조선 노동자들이, 또한 조선 노동자들에 대해 중국 노동자들이 서로 적개심을 갖게 충동질할 가능성을 부여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본의 약탈적 전쟁에 대해 조선의 여론을 유리하게 환기시키기 위해서이다. 조선에서 범아시아주의를 선전해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것이다. … 현재 조선의 환경에서 조선 민중에게 보다 큰 불행과 약탈, 억압, 속박을 가하는 이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의 임무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앞에 우뚝 솟아 있다. 우리는 전쟁을 방해하고, 또한 이것을 조선 노동자들의 민족해방전쟁으로 전화시키는 방법으로써 그 전쟁을 급속히 종식시키는 모든 필요한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적색노동조합원산좌익위원회는 1937년 일본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전쟁에 대하여 “우리는 강도적 약탈전쟁을 절대 반대한다. 우리에게 평화와 자유를 달라! 살아야 할 전 민족이 해방과 자유를 향하여 전진하는 과정에서 혈전의 선봉이 되는 것은 절대 반대한다. 일본제국주의의 강도적 약탈전쟁을 내란, 식민지민족해방전쟁으로 전화시키자”라고 했다.

이렇게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만주침략과 중국 등에 대한 전쟁의 성격을 ‘약탈전쟁’, ‘반혁명전쟁’으로 규정하여 반대하고, 이러한 전쟁을 내란, 즉 민족해방전쟁으로 전화시키자고 주장했다.



5. 민족개량주의와 제국주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민족개량주의의 대두배경으로 “대중의 혁명적 투쟁을 마비시키기 위한 (일본)제국주의의 개량정책”을 제시했다. 그들은 조선총독부의 지방자치제 실시, 매일신보(조선총독부 기관지)의 민간양도 등을 그 예로 들었다. 그것은 혁명적 대중에게 개량주의적 환상을 퍼뜨리고, 대중의 혁명적 투쟁을 거세하여, 대중의 생활을 일본제국주의에 영구히 예속시키기 위한 제국주의의 교활한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개량정책의 목적은 민족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의 상층을 일본제국주의 쪽으로 획득하여 제국주의의 지배기반을 보다 공고히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이러한 개량정책은 조선민족 내부에서 일정한 원조자를 획득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협조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민족개량주의’라고 보았다. 이렇게 일본제국주의의 개량정책과 조선민족 내부의 개량주의는 상호침투와 상호협력 관계에 있다는 것이었다.

1931년,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민족개량주의의 범주에 ‘우익 민족개량주의’, ‘좌익 민족개량주의’, ‘청산파’ 등을 포함시켰다. 첫째 우익 민족개량주의의 정치적 견해와 요지는 ꡔ현단계의 조선ꡕ(외수춘 씀)에 드러난 ① 민족당의 수립 ② 공민권 획득운동의 전개 ③ 일체의 투쟁에서의 합법주의 등이었다. 우익 민족개량주의는 ꡔ동아일보ꡕ를 중심으로 나타난 정치적 경향이었다. 둘째 좌익 민족개량주의는 민족해방투쟁에서의 혁명적 노선인 공산당의 정치노선과 우익 민족개량주의(자치주의)의 중간을 동요, 배회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공산당에 반대하고, 공산당을 증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치주의에 대해서도 증오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민족개량주의에로 귀결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좌익 민족개량주의는 신간회의 지도부를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소부르주아 상층부대인 좌익 민족주의자에 의해서 대표되고 있다고 보았다. 셋째 청산파는 1927년 말에 민족개량주의의 대본영인 ꡔ동아일보ꡕ 지상에 실은 「당면의 제문제」라는 글에서 공산당의 대중적 활동(계급운동)을 철거하라고 주장하고, 자치운동을 투쟁의 과도단계로 승인하라고 모든 조선공산주의자들에게 요구한 장일성 등이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에서의 계급투쟁, 즉 일본제국주의와 지주․공장주․자본가에 반대하는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계급투쟁을 반대”하는 민족개량주의의 목적은 “무산계급이 자본가와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여 투쟁할 때 어떤 제도 또는 자본가의 국가권력과 사유재산제도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자본제도를 유지․옹호하여 그 범주 안에서 합법적으로 투쟁하고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을 조금씩 개량시키거나, 지금 일본제국주의의 정책의 나쁜 부분만을 없애고 어느 정도 사회를 조금씩 개량하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현 단계의 민족해방운동의 도상에서 민족개량주의는 모든 혁명적 대중의 적이다”라고 말했다. 때문에 “(일본) 제국주의의 기만정책에 호응하여 대중 속에 제국주의 지배 하에서의 개량의 희망과 기대를 전파시키려고 하는 개량주의에 대한 투쟁은,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혁명적 민중의 승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완전한 민족해방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혁명적 대중에게 무조건적으로 요구되는 최대의 임무”라고 했다. 

그러나 1935년 7월 김하일은 민족개량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해야 하지만, 개량주의적 단체를 배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에 “우리는 대중을 포용한 개량주의적 단체 속에도 뛰어들지 못하고 구석에 잠입했고, 특히 노동조합운동에서는 개량주의적 단체들에 대립하는 종파적 단체만을 조직하려고 지도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개량주의적 단체에서 그들과 협력하여 사업을 하지 않으면, 그 단체 내의 민족개량주의적 수령과 그 주구들의 전술과 정책을 폭로하지 않으면”, “개량주의적 노동조합 내에 조직된 노동자와 농민을 우리 손으로 전취”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 혁명론과 제국주의

식민지시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제시한 당면한 혁명론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일반적으로 ‘반일제․반봉건’ 등을 핵심적인 혁명과제로 갖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혁명론의 구체적 내용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반일제․반봉건’ 등의 과제, 즉 민족적 과제와 그리고 반봉건과 반자본의 계급적 과제를 어떻게 관련시키는가에 따라 변했다.

1921년의 고려공산당 강령은 “세계무산자 혁명의 대본영인 제3국제공산당의 대범(大範)에 준거”했다. 그리고 “민족해방문제”에서 “우리는 절대평등, 대동사회의 실현을 기함으로써 부자유, 불평등의 원인인 모든 제도 ― 안으로는 민족 내의 모든 착취계급, 밖으로는 민족 간의 압박자 ― 는 이를 시비(是非) 공히 타파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리는 민족적 해방이 사회혁명의 전제임을 절실히 느끼는 자”라고 하여 사회혁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해방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하 모든 혁명단체에 대해서는 대성(大成)에 달한 단계로서 우리의 주장과 부합하는 범위에 한하여 이를 찬동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민족해방, 즉 일본제국주의의 민족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설정에 의하여 혁명주체의 범위가 규정되었다. 그러나 고려공산당은 구체적으로 혁명주체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반봉건과 반자본 문제가 실증적으로 제기되지도 않았다. 아마도 당시 계급적 모순이 첨예화되지 않는 사회적 조건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1926년 「조선공산당선언」은 일본제국주의의 ‘민족적 억압’과 아울러 ‘봉건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에 의하여 규정되는 반일제와 반봉건이라는 혁명적 과제를 가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을 제시했다. 반일제와 반봉건 중에서 반일제의 측면이 더 강조되었다. 그러나 반일제와 반봉건 문제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한 고려는 제기되지 않았다.

1928년 코민테른 제6회 대회와 「12월 테제」 발표 이후에는 ‘계급 대 계급’ 노선에 의하여 반일제와 반봉건 문제 등이 유기적으로 관련되었다. 예컨대 「조선의 정세와 조선 공산주의자의 당면 임무」(사공표)4), 「노동계급 전위의 당면 임무」(이철악), 「현하 조선정세와 혁명의 특질에 관한 테제」(이운혁), 「조선의 토지문제와 (공산)당의 토지강령」(광우) 등이 그것이었다. 1930년대 전반기까지의 반일제와 반봉건 등의 관계를 보면, 대체로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헤게모니 하의 노농동맹론에 입각한 토지혁명론을 전면에 내세운 반일제투쟁이었다. 이 경우 이른바 ‘민족부르주아지’ 등은 일제에 의하여 민족개량주의자로 성격이 변화된 것으로 규정되어 혁명의 주체로5) 파악되지 않았다. 즉 토지혁명으로 말해지는 반봉건 계급투쟁과 민족개량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말해지는 반자본 계급투쟁을 통한 반일제투쟁이었다. 그것은 세계경제공황기의 혁명적 대중투쟁의 앙양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기부터는 코민테른 제7회 대회의 반파쇼인민전선=반제민족통일전선 노선에 의하여 반일제와 반봉건 문제 등이 유기적으로 관련되었다. 즉 반일제투쟁이 전면에 다시 나섰다. ‘민족부르주아지’ 등이 일본제국주의파쇼와 모순적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파악되면서 혁명의 아군으로 포함되었다.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헤게모니 또는 독자성 여부가 논쟁거리였다. 단순화시키면 혁명적 대중운동(계급투쟁)을 폐기하고 반제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해 낼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혁명적 대중운동과 반제민족통일전선운동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낼 것인가 등이었다.



7. 끝내는 말

식민지시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운동 목적은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착취 상태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이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조선 사회에서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의 특징은, 첫째 당시의 조선 사회의 성격이 그들이 건설하려고 생각하는 공산주의사회와 관련하여 어떠한가, 둘째 공산주의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당시의 조선 사회의 구성원들 가운데서 어떠한 사람들이 운동주체로 나서고 아니면 운동대상이 되는가, 셋째 어떠한 운동형태가 요구되는가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당시의 조선 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절대다수인 노동자와 민중이 일본제국주의와 그 사회의 지배계급인 유산자계급(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에 의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다양하게 억압과 착취를 받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와 유산자계급의 일부가 자행하는 만주침략과 중국 등에 대한 전쟁을 ‘약탈전쟁’, ‘반혁명전쟁’으로 규정하여 반대하고, 이러한 전쟁을 내란, 즉 민족해방전쟁으로 전화시키자고 주장했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대부분은 1935년 전반기 무렵까지 민족해방운동의 도상에서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조장되는 민족개량주의는 모든 혁명적 대중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1935년 후반 무렵부터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일부는 민족개량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해야 하지만, 개량주의적 단체를 배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들은 개량주의적 노동대중조직 내의 개량주의적 ‘수령과 그 주구들’의 전술과 정책을 폭로하고, 나머지 구성원들인 노동자와 민중과 결합하고 전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 침략 하의 조선 사회의 상태에서 공산주의사회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일반적으로 ‘반일제․반봉건’ 등을 핵심적인 혁명과제로 갖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혁명론의 구체적 내용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반일제․반봉건’ 등의 과제를 어떻게 관련시키는가에 따라 변했다. 1928년 「12월 테제」 까지는 대체로 반일제와 반봉건 중에서 반일제투쟁을 통한 반봉건과제의 해결을 내세웠다. 「12월 테제」 이후부터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대체로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헤게모니 하의 노농동맹론에 입각한 토지혁명론을 전면에 내세운 반일제투쟁이었다. 1930년대 후반기부터는 반일제투쟁이 전면에 다시 대두되었다. 그러나 혁명적 대중운동(계급투쟁)을 폐기하고 반일제전선을 형성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혁명적 대중운동과 반일제전선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낼 것인가 등이 문제가 되었다. 

한/노/정/연


1) 레닌은 ‘5개의 기본적 특질을 포함하는 제국주의’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했다. (1) 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고도의 단계에 달해,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독점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2) 은행자본이 산업자본과 융합하여 ‘금융자본’을 이루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금융과두제가 형성된다. (3) 상품수출과는 구별되는 자본수출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4) 국제적 독점자본가단체가 형성되어 세계를 분할한다. (5)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전세계의 영토적 분할이 완료된다. 요컨대 제국주의란, 독점체와 금융자본의 지배가 확립되어 있고, 자본수출이 현저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국제 트러스트들 간의 세계분할이 시작되고, 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지구상의 모든 영토분할이 완료된 발전단계에 있는 자본주의다. V.I.레닌, 남상일 옮김, ꡔ제국주의론ꡕ, 백산서당, 1986, p. 122.


2) 오미일, 「1930년대 사회주의자들의 사회성격 논쟁」, ꡔ역사비평ꡕ 8, 역사비평사, 1990.


3) 이와 관련하여 1934년에 일단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일본제국주의의 만주침략의 참된 원인은 ‘무력으로 새 영토를 탈취하고, 수백만의 민중을 노예화하고 겁탈’하여 세계공황 이래 ‘첨예화되고 있는 심각한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조선공산당 행동강령」, 이반송․김정명 지음, 한대희 편역, ꡔ식민지시대 사회운동ꡕ, 한울림, 1986, p. 338.


4) 사공표는 3․1운동 이후의 조선혁명운동을 제기된 목적의 차이와 투쟁의 계급적 내용의 변동에 따라서 3기로 구분해 보았다. 제1기는 3․1운동이후 조선노농총동맹 성립시기(1924)까지로 특징은 “투쟁이 오직 일본제국주의에 향한 것”이라고 했다. 제2기는 조선노농총동맹 성립이후 신간회 성립(1927)까지로 특징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 문제 이외에 다시 지주에 대한 투쟁, 자본가계급에 대한 투쟁의 문제가 제기된 것, 그러나 이 두 가지 투쟁이 통일되지 못하였던 사실”이라고 했다. 제3기는 신간회 성립이후로 특징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과 조선독립을 위한 투쟁 및 토지혁명을 위한 투쟁이 통일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사공표, 「조선의 정세와 조선공산주의자의 당면임무」, 배성찬 편역, ꡔ식민지시대 사회운동론연구ꡕ, 돌베개, 1987, p.98.


5) 이와 관련하여 최규진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대체로 1928년 「12월 테제」 이전에는 ‘4계급블록’(노동자, 농민, 도시소시민, 민족부르주아지) 통일전선론을, 그 이후부터 1930년대 전반기까지에는 ‘3계급블록’(노동자, 농민, 도시소시민) 통일전선론을 내세웠다고 한다. 최규진, ꡔ코민테른 6차대회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정치사상 연구ꡕ, 성균관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논문, 1996, p. 66~11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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