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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4번 : [89호/연재-기획]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 이후의 80년(4)
글쓴이: 바만 아자드 등록: 2003-07-20 00:00:00 조회: 1940

기/획/번/역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 이후의 80년(4)


제2부 사회주의에 위기를 초래한 관적・외부적 요인



바만 아자드/ 사회주의 이론연구가





타고난 성질 때문에 발전 과정이 위기를 초래하는 자본주의 체제와는 달리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성장의 둔화가 위기로 연결된다. 역사상의 사회주의 모델들은 주어진 객관적인 사회적․역사적 제약 속에서 사회주의의 지속적인 발전을 보증하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각 모델의 성공이나 실패 정도에 대한 평가는 각각 그 발전단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객관적인 제약 속에서의 각 모델의 고유한 목표에 비추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은, 이론적으로는, 생산력이 최고의 발전단계에 도달하고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적 의식이 높은 수준에 있는 서유럽이나 미국 등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일어날 것으로 일반적으로 예측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이론을 현실에 맞추어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자본주의 세계의 가장 발달한 나라들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은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필연적으로 새로운 요구를 제시했다. 사회주의에는 이론적으로 예상되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짐과 곤란한 책임이 지워졌던 것이다.

그러한 책임 가운데에서도 제일 먼저 들 수 있는 가장 중대한 것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교해서 러시아 사회가 처해 있던 객관적 및 주체적 후진성을 극복하는 것이고, 사회 속에 사회주의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질적 생산 기반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러시아 사회의 취약성이나 그 역사적 후진성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적․군사적인 힘의 우위와 서로 맞물려, 자본주의 국가가 직․간접적인 경제적․군사적 간섭에 의해서 사회주의 사회의 성장을 그 출발점에서부터 방해하도록 했다. 이는 또 사회주의 사회의 내부에 방어적인 자세를 확대시켜 지도부가 사회주의가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시 하도록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회주의 건설 과정 전체를 통해서 이 방어적 태도가 역사적인 사회주의 모델의 발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 하나의 요인은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한 사회주의에 대한 경제봉쇄였다. 레닌을 포함해서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는 서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 특히 독일에서 10월 혁명과 동시에 혹은 그에 곧 이어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일어날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러시아는 그들 국가에서 승리한 노동자계급의 물질적․기술적인 능력에 의거해서 스스로의 경제적 후진성을 급속히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점과 관련해서도 현실은 달리 전개되었고, 신생 쏘비에트 국가는 자신의 내부자원만으로 경제적 발전을 추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한 나라 내에서 진전시켜야 할 필요성은 공산당 지도부 내에서의 진지한 이론적 토론의 결과로서 도달된 것이고, 동시에 이 나라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 특수한 성격을 부여하였다.

이들 요인에 더해서,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에 사회주의가 강요받은 ‘냉전’이나 군비확장 경쟁 등의 영향도 추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이 사회주의 사회의 ― 본래라면 생산력의 발전이나 공산주의를 향한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활용되었을 ― 물질적․인적 자원의 커다란 부분을 빨아들이고 빼앗았다.

그 때문에 이러한 객관적․외부적인 요인은 실로 처음부터 쏘련 사회주의가 전체적인 진로를 설정하고 능력 발휘의 조건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직접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요인은 사회주의의 통상적인 기능이나 역사적 목표에 있어서는 외부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고찰해온 것처럼 쏘련 사회주의 체제의 내부과정의 형성이나 구조적인 특징을 결정짓는 데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1. 생산력 발전의 초기 단계

1917년 볼쉐비키가 권력을 획득했을 때 러시아의 경제상황은 다른 많은 후진국가들과 마찬가지였다. 인구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861년부터 1913년 사이에 겨우 9.1%(연율 0.9%)밖에 증가하지 않았다. 이 숫자는 공업화 개시기에 있던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이 60% 정도였던 것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낮은 것이었다.1) 같은 시기 러시아 농업생산의 성장률은 연율 2% 미만이고, 농업 부문의 생산성은 1880년부터 1913년까지 10년마다 겨우 3%씩 상승했을 뿐이었다. 1913년의 공업생산고는 경제 전체의 생산 가운데 겨우 18%밖에 점하고 있지 않았다. 같은 해 러시아의 노동력의 72%가 농업 부문, 18%가 공업, 10%가 써비스 부문에서 일하고 있었다. 1913년의 금속제품의 생산은 이 나라 전체 공업생산고의 10%이고, 공업 노동력의 겨우 12%가 종사하는 데에 불과했다. 영국, 독일, 미국 등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의 숫자는 적어도 러시아의 그것의 2배였다. 1913년 러시아의 문맹률은 60%를 넘고, 이는 서방측 국가들의 공업화 이전의 숫자와 마찬가지였다. 1913년 러시아의 사망률은 인구 1천명 당 27명으로, 이는 서유럽의 숫자(1천 명 당 13명)의 2배였다.

1913년의 러시아는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자본의 대부분을 프랑스, 영국, 벨기에 등으로부터 조달하는 대채무국이었다. 러시아 경제는 외국자본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낮은 수준에 있던 내수는 공업성장을 촉진하기에는 부족했다. 1914년에는 국내 투자 총액의 20%가 외자에 의한 것이었다. 이 비율은 미국이 그 공업화 개시기에 있던 1880년대의 2배이고, 또 일본이 마찬가지의 시기에 있던 1887-96년의 숫자의 20배이다.

1917년 러시아의 GNP 구성비율은 서유럽 및 미국에서의 공업화 이전의 상태와 마찬가지였다. 인구의 많은 부분, 그리고 전체 노동력의 많은 부분이 문맹이었다. 광범하게 존재한 빈농들의 문맹률은 거의 100%였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는 저개발국가들의 ‘이중’경제의 많은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본이 집중된 고립적인 공업 부문이 광대하고 구태의연한 후진적인 농업 부문과 병존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의 러시아에서 볼쉐비키는 권력을 획득했던 것이다. 지구 표면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결집된 단일조직으로서의 실체는 이루고 있지 못했던 나라에서 볼쉐비키는 사회주의 건설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었던 것이다. 통신 능력은 한정되어 있고, 유통 경로는 일관성을 잃고, 산업기반은 극도로 취약하고 미발달했으며, 빈농의 경제상태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고, 사회는 사회주의적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사회적 발전 단계에 도달해 있지 못했다. 10월 혁명 후의 러시아 및 그 후의 쏘련에서의 사태의 추이는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향한 공산당의 치밀한 계획에 기초하고 있었지만, 이 나라 사회의 문화적․사회적 인구구성 및 과거 전제정치의 역사로부터의 직접적인 영향은 피할 수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 건설에 착수하기 전에 우선 이 거대한 후진성을 극복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은 없었다. 레닌은 1918년 러시아 공산당(볼쉐비키) 제7차 임시대회에서의 선견지명이 있는 연설 속에서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아주 선명하게 제시하였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완전히 내던지고 사회주의로 옮겨가는 첫걸음을 내딛었을 뿐이다. 사회주의에 다다르기까지 아직 얼마만큼의 과도적 단계가 있는지를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고, 또한 알 수도 없다. 이는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이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가, 또한 이 혁명이 얼마나 쉽고 빠르게, 혹은 늦게, 그 적을 쳐부수고 사회주의적 발전의 탄탄한 길로 나아가는가 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다. 이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2)


그리하여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과정은 사회주의 이론이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도 훨씬 뒤떨어진 지점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동시에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직면했을 요구보다도 보다 복잡한 요구들과 씨름하게 만들었다. 초기 단계에 혁명에 부과된 특별히 복잡한 이러한 요구들이 사회주의 건설의 전체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 과정 상에서 심각한 역사적인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이 나라에서 수행된 사회주의의 역사적 발전의 하나하나는 이 체제에 부과된 내적 요구는 물론 이러한 복잡한 외적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 고안되고 적용된 것이다. 이들 외적 요구가 역사상의 사회주의 모델의 구조나 내부 기능에 미친 영향력을 고려하는 것은, 사회주의 체제에 생긴 위기의 객관적 요인과 주체적 요인의 상대적인 비율을 평가하는 데에서뿐만 아니라, 위기 발생에서의 전위당의 역할을 평가하기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2. 제국주의의 포위 하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권력 탈취 이후 볼쉐비키의 애초의 정책은, 사회의 모든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즉시 국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주요 부문의 관리, 사기업과의 혼합경영, 농업․소매업․소규모 공업에서의 사적소유의 법적 승인을 기초로 한 국가자본주의 형태의 수립이었다. 이러한 방책은 러시아 사회라는 현실로부터 도출된 것이었다. 사유재산 문제에 대한 볼쉐비키의 태도는 신중했고, 특히 공업 부문에서는 극히 신중했다. 자본의 도피와 그에 따른 생산의 급격한 저하를 피하기 위해서 그들은 ―취약한 것이었지만―사유 부문과 공유 부문의 공존을 용인했다. 혁명정부는 경제의 기간 부문, 예컨대 은행, 곡물의 매입, 운송, 석유, 군수산업 등등만을 국유화했다. 사기업의 노동자위원회는 경영의 감독기능에만 한정되고, 기업의 의지결정이나 경영은 여전히 각 기업의 소유자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노동자위원회가 소유자의 권리를 침해한다든지 정부의 허가 없이 공장을 접수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권력 장악 후 볼쉐비키가 농업 부문에서 맨 처음 한 일은 1917년 11월 8일의 토지개혁법의 제정이었다. 이 법은 대토지소유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에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이는 볼쉐비키가 농업에서도 사적소유를 암암리에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0월혁명 승리 후 곧바로 볼쉐비키는 러시아 영토에 대한 14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과 점령 및 제국주의자에 의해서 선동된 백군과의 내전에 직면했다. 독일은 우크라이나를 점령했다. 백군은 우랄, 시베리아, 카자흐스탄 북부 외에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점령했다. 폴란드도 러시아가 점령당한 지역이었다. 볼쉐비키는 국가의 석탄 산출고에서 10%, 철강 생산의 25%, 사탕무우 재배의 10% 이하, 전체 곡물 생산의 절반 이하의 지역밖에 지배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빠졌다.3) 이러한 조건 하에서 그들은 14개 제국주의 국가들의 점령군 및 백군과의 불리한 전쟁 속에서 혁명국가의 생존을 걸고 싸우지 않으며 안 되었다. 볼쉐비키가 그 역사 속에서 최초로 채용한 모델인 ‘전시공산주의’는 이러한 조건에 대응하는 속에서 발전되고 실행된 것, 사회주의 혁명을 방어하고 강요된 내전에 승리하기 위해서 이 나라의 한정된 경제적 자원 모두를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시공산주의’ 모델 (1918~1921년)

‘전시공산주의’ 모델은 국가의 모든 경제적․인적 자원을 국가가 관리하고, 시장기구를 행정상의 분배제도로 대체한다고 하는 원칙에 기초한 것이었다. 러시아 국가경제에서의 농업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전시공산주의’의 최초의 시책은 농업 부문의 잉여생산물을 몰수하는 것이었다. 부농이나 중농의 모든 잉여생산물을 징수하기 위해서 국가경찰(체카4))이 모든 마을에 파견되었다.

‘전시공산주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비농업 부문 산업의 국유화였다. 이 정책은 1918년 봄에 사탕산업에서 시작되어 1920년 가을까지 3만7천 개 이상의 기업이 몰수되었는데, 그 반수 이상은 기계화되어 있지 않은 영세한 기업이었다.5) 1920년의 쏘비에트 공업통계에 의하면, 이렇게 해서 국유화된 기업 가운데 종업원이 한 사람뿐인 것이 5천 개를 넘었다.6)

‘전시공산주의’의 세번째 측면은 일체의 사적 매매의 금지였다. 1918년에 사적 매매는 완전히 금지되고 국가가 소비물자의 유일한 배급자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국가는 공업노동자에 대한 관리체제를 확립하여 공업노동자의 이동을 제한하고, 노동력의 배치가 행정관리 하에 놓여졌다.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엄한 벌칙이 가해지고, 1919년 11월 28일에는 국가공무원에 대해서 군사교련이 부과되었다. 화폐는 교환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기업 간의 거래는 장부 기입에 의해서 처리되었다. 임금 격차는 거의 전면적으로 폐지되고, 노동자의 임금은 물자로 지급되었다. 한편, 국가는 모든 도시 써비스와 교통기관의 무료화를 선언했다.

이렇게 실로 그 최초의 단계부터 내전이라고 하는 현실이 ‘전시공산주의’라는 형태에서의 사회주의 건설 방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무료 써비스의 제공, 임금의 균일화, 공업에서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및 농업에서의 사적 대토지 소유의 완전한 근절, 경제에 있어서의 화폐의 역할의 말소, 사회 자원이나 인적 자원의 배치에 관한 국가의 완전한 관리, 소비물자의 유통에서의 완전한 국가 관리 등등―이것들은 한결같이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에서 공산주의 사회의 ‘초기 단계’의 처방전으로서 기술되어 있는 정책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사회주의 사회의 이러한 조직 형태는 많은 점에서 발달한 공산주의 사회의 특징을 본딴 것이었는데, 그것은 오직 당시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 오직 강요된 내전에서 승리한다고 하는 목적을 위해서 채택된 것이었다. 이는 사회주의적인 발전 모델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 및 노동자계급 내부의 적에 의해서 사회주의가 군사적으로 패배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시공산주의’는 사회주의 국가를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점에서 훌륭한 정치적․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의 객관적인 조건과의 정합성(整合性)이 없었기 때문에 중대한 부정적인 결과도 초래했다. 1918년부터 1921년 사이에 농업 생산은 급감했다. 밀의 생산은 시베리아에서는 반감했고, 볼가 및 코카사스 지방에서는 4분의 1로 격감했다. 이는 많은 농가에 그들의 생산물의 일부를 국가 관리의 눈에 안 띄게 불법적으로 숨기려고 하는 동기를 주게 되었다. 몇몇 지역에서는 은닉되는 양이 총생산량의 2할을 넘었다.7)

농업 부문과 공업 부문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농민의 구매력이 가계를 유지하는 최저한의 수준으로 현저하게 저하했기 때문에 공업 부문에서 생산된 소비물자에 대한 수요가 감퇴했다. 농민의 공업제품 소비 수준은 전쟁 전의 수준의 12-15%로 떨어져 버렸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토지개혁 후에는 이전보다 풍요로워 질 것을 기대했던 농민들의 분노를 샀다. 농민들은 농산물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국가의 독점을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저수입과 기계적인 균일임금에 의해서 노동자에 대한 적절한 물질적 자극이 없었기 때문에 공업 부문에서도 문제가 발생했다. 공업 생산은 전쟁 전의 15%까지 떨어져 버렸다.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의 수가 늘어났다.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왔던 사람들 중 다수가 도시를 떠나고 있었다. 도시의 인구는 1917년의 260만 명에서 1920년에는 120만 명으로 감소했다.8) 공업 부문의 노동력 부족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1920년 말에는 파업이 확대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21년 3월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의 해군병사들이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를 지원하여 파업을 벌이기에 이르러, ‘전시공산주의’는 정치적․군사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서는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동시에 그것이 계속 심각해져 가는 이 나라의 경제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전시공산주의’의 이러한 경제적 부작용은 사회주의 혁명에서의 ‘과속’의 위험성에 대한 맑스의 경고가 과학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었다. 10월혁명 4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레닌은 이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열광의 물결에 편승해서 맨 처음에는 일반 정치적인, 나중에는 군사적인 인민의 열광을 불러  일으킨 우리는 이렇게도 거대한 (일반 정치적인 임무나 군사적인 임무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경제적 임무를 직접 이 열광에 편승하여 실현하려고 기대하고 있었다. 기대하고 있었다―라기보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즉, 우리는 충분히 고려하지도 않은 채 소농민적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해서 물자의 국가적 생산과 국가적 분배를 조직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의 생활은 우리가 오류임을 보여 주었다. 일련의 과도적 단계가 필요했다. 즉,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준비하기 ―여러 해의 노력에 의해서 준비하기― 위해서는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필요했다. 직접적으로 열광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대혁명에 의해서 창출된 열광의 도움을 빌어 개인적인 이익에, 개인적인 관심에, 경제적 계산에 입각하여, 소농민적인 나라에서 국가자본주의를 거치면서 사회주의로 통하는 견고한 다리를 우선 먼저 건설하도록 노력하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공산주의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수백만 수천만 명의 사람들을 공산주의로 이끌 수 없을 것이다. 실제의 생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혁명 발전의 객관적인 경과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9)


그러나 이 ‘과속’은 볼쉐비키의 주관주의와 경험 부족의 결과라기보다는 이 사회주의 혁명이 외부로부터 강요받은 객관적인 요인들에 의한 귀결로 보인다. 레닌 자신은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전시공산주의는 전쟁과 황폐 때문에 불가피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임무에 어울리는 정책이 아니었고, 또 그러한 정책일 수 없었다. 그것은 일시적인 방책이었다.”10) 이 ‘일시적 방책’은 외적의 침략과 전쟁으로부터 사회주의를 방어한다고 하는 특수하고 한정적인 목적을 위해서 입안된 것이고, 그 정치적․군사적 목표는 달성되었다. 그런데 그 정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제적 임무”에 대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한 직후부터 그 모델을 파기할 것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한/노/정/연


(다음 호에는 “제2부 사회주의에 위기를 초래한 객관적․외부적 요인”의 후반부를 실을 예정입니다.)

번역 : 채만수 소장


1)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 한, 혁명 이전의 러시아의 경제통계는, 폴 R. 그레고리․로버트 R. 스튜어트, Soviet Economic Structure and Performance, Harper and Row, New York, 1974의 pp. 19-41에서 인용한 것이다. (일본어 역주: 일본어 역, 敎育社 刊 ꡔソ連經濟―構造と展望ꡕ pp. 30-47. 이하 이 책으로부터의 인용에 관해서는, 특히 별다른 얘기가 없는 한, 일본어 번역판의 페이지를 게재한다. 단, 일본어 번역판은 1986년에 발행된 제3판을 저본으로 하고 있음에 비해서, 원서는 1974년 판으로부터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서술에는 차이가 있다.)


2) 러시아 공산당(볼)제7차 대회 “강령의 개정과 당명의 변경에 관한 보고”, 大月書店 刊 ꡔレ-ニン全集ꡕ 제27권, pp. 129-130.


3) 모리스 돕, 日本評論社 刊 ꡔソヴェト經濟史―一九一七年以後のソヴェト經濟の發展ꡕ, 상권, pp. 119-120.


4) [일본어 역주] 국가비상위원회.


5) 돕, 같은 책, p. 130.


6) A. 노브, 岩波書店 刊, ꡔソ連經濟史ꡕ, p. 75.


7) 돕, 같은 책, p. 143.


8) 노브, 같은 책, p. 99.


9) “10월혁명 4주년에 부쳐서”, 大月書店 刊 ꡔレ-ニン全集ꡕ 제33권, pp. 44-45.


10) 돕, 같은 책, p. 150. (일본어 역자 주: 돕의 책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이 문장은 레닌의 1921년의 논문 “식량세에 관해서”로부터의 인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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