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월호 보기 (제106호 이전)

현장에서 미래를 > 연재-기획 > 글읽기

402번 : [24호/연재-기획] 한국노동운동의 때늦은 개화
글쓴이: 손호철 등록: 1997-08-01 00:00:00 조회: 1444


한국노동운동의 때늦은 개화(開花)


손 호 철 / 부소장․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고는 미국의 저명한 좌파 잡지 ꡔMonthly Reviewꡕ의 특집 “Globalization & Labor”에 기고한 Hochul Sonn,  “The Late Blooming of South Korean Labor Movements.” Monthly Review. (June. 1997)을 번역한 글이다.

이 글을 바쁜 학기말에도 불구하고 한글로 번역해 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의 김 원 군에게 감사드린다.







남한은 한때 ‘희망없는 원조 중독증 환자(aid-junkie)’에서 가장 성공적인 신흥공업국가 중의 하나로 등장한 성공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1) 그러나 이러한 성공의 이면에는 최장 노동시간과 엄청난 산업재해율로 대표되는 한국 노동자계급에 대한 무자비한 초과착취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이러한 초과착취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남한의 ‘약한 노동’과 ‘계급정치의 부재’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래로 남한 노동자운동은 급속히 성장해 왔으며 그 결과로 1995년에 이르러 국가와 자본의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랜 숙원인, 불법노조지만 자본과 국가로부터 자율적이고 진보적인 전국적 단일노조연합체인 「한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의 건설을 이루어 냈다.

간략히 말하면 진보적 민중운동과 노동자운동이라는 특수성의 측면에서 우리는 이를 ‘한국적 예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남한은 노동자운동의 ‘초기의 부재’와 ‘때늦은 개화’라는 이중적 의미에서 세계사적 흐름에서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1. 역사적 배경


제3세계의 기준과 비교해 볼 때도 남한 노동자운동은 예외적으로 약한 사회세력이었다. 한국 노동운동은 역사적으로 공산주의로 불온시되었으며 계급이란 단어조차 최근까지 학계에서도 금지되어 왔다. 이런 조건이 지속된 요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1)한국전쟁과 지속적인 분단으로 인한 전례없이 협소한 이데올로기 지형2) 2)국가의 억압과 노조에 대한 ‘국가조합주의적 통제’3) 3)경공업이 지배적인 산업구조로 인한 노동자계급의 분산성 4)전국적인 교육열로 인한 높은 수준의 사회적 유동성과 그 결과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개인주의화가 그 요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1980년대 초반이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이후 다단계 쿠데타 과정에서 군부가 공식 발표만으로도 2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1980년의 광주민중항쟁은 1950년대 초반 한국전쟁 이래로 남한에서 최초로 급진적 민중운동의 부활을 촉발시켰다.4) 그 결과 갑작스러운 ‘맑스주의의 폭발’, 특히 학생운동 내의 급진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운동들은 점차로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에 따라 새로이 부상되는 노동자계급, 다시 말하자면 국가경제를 마비시킬 만큼의 전략적인 힘을 지녔으나 ‘전근대적인’ 노동관계와 노동조건으로 고통받고 있는 집중화된 노동자계급과 결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전세계적으로 맑스주의가 소비에트연합의 붕괴이후 전례없는 위기로 고통받고 있을 때, 맑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은 남한에서 노동자운동의 전례없는 ‘폭발’과 ‘개화’를 경험했던 것이다.

특히, 군사정권의 호헌조치를 무너뜨린 1987년 6월 항쟁에 의해 성취된 ‘민주화’는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켰다. 억압적 국가기구의 약화는 역사적인 1987년 7,8월 노동자대투쟁으로 귀결되었으며, 남한의 노동자계급은 오랜 침묵을 깨부수고 전국적으로, 거리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이 투쟁은 한편으로는 조직된 지도부의 부재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질서’와 ‘경제안정’이 주된 관심사인 중간계급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1987년 7, 8월 노동자대투쟁은 비타협적인 ‘전투적 조합주의’와 진보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새로운 지도부의 등장을 낳았다.

쿠데타의 실패와 잇따른 소련연방의 붕괴는 결과적으로 남한에서 아직도 ‘유아기’에 있는 급진적 민중운동의 불길에 찬물을 끼얹었다. 많은 민중운동 지도자들, 특히 지식인들은 과거 운동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과 함께 운동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달랐다. 노동자운동의 존재근거는 소련도, 교조적인 맑스-레닌주의도 아닌 새로운 노동운동을 낳게 한 한국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독점자본과 소위 ‘문민정부’에 의한 무자비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노동자운동은 다수의 영웅적인 투쟁을 성공적으로 조직화했으며 핵심적 산업에 있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시켰다. 마침내 1995년에 민주적 노동운동의 건설뿐만 아니라 ‘진정한 민주적 사회’의 건설을 강령으로 이들은 한국노총에 반(反)하는 민주노총을 건설했다. 한국노총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이후 미군정이 기층 좌익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설립한 조직으로 정부에 의해 지속적으로 통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고비마다 독재정권의 편을 들어왔다. 새로이 건설된 민주노총은 수천의 지부노조에서 50여만 명이 참가한 데 비해 한국노총은 120만 명의 조합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남한의 핵심적 산업인 자동차, 조선, 중공업과 더불어 공공수송 및 병원, 언론매체, 연구소와 같은 핵심적인 화이트칼러 노동자계급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통제력을 지녔다.



2. 역사적 총파업의 원인


최근 남한에서의 총파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한 노동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을 아는 것이 핵심적이다. 남한의 노동법은 여러 가지 면에서 노동자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전근대적이고 반민주적인 특징을 지녀왔다. 대표적인 예가 소위 ‘4대 금지조항’(Four Prohibitions)이었다. 1)노동쟁의에서 ‘제3자 개입’ 금지 2)정부통제하의 비민주적인 한국 노총에게 독점적인 권력을 제공하는 복수노조 금지 3)공무원과 교원의 노조조직 금지 4)노조의 정치활동 금지가 그것이다.

남한 노동자계급은 민주노총의 주도하에 이러한 비인간적인 관행의 민주화를 위해 지난한 투쟁을 시작해 왔다. 정부는 이러한 투쟁을 반민주적 노동악법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과 같은 다른 법들을 통해 탄압해 왔다. 이는 현정부 하에서 정치범의 가장 많은 부분을 노동자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쟁의의 경제․사회적 비용이 극적으로 증가한 결과 그 한계지점에 이르렀고, 실제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현 문민정부는 1993년 초에 전체 개혁프로젝트의 한 부분으로써 노동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자본측, 특히 가족중심의 소유집단인 재벌은 노동개혁을 거부하며 이에 대해 투자기피 등 ‘자본파업’(Capital Strike)으로 응수했다. 그 결과 경제는 악화되고 정부는 노동개혁을 포기하고 기존의 노동관행으로 회귀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80년대 중반까지 남한은 값싸고 잘 훈련된 노동력의 기반 하에서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통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사태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남한의 ‘국제경쟁력’은 노동자운동의 성장으로부터 야기된 급속한 임금상승과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제2세대 NICs의 등장으로 인한 경쟁으로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경제성장의 두 개의 지주였던 국가주도형 산업화와 재벌구조가 과거의 마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과도한 국가개입과 규제는 역기능으로 작용하기 시작했으며, 개별기업의 경쟁력이라기보다 과대성장한 재벌집단의 경쟁력에 기초한 경제는 점차 비효율화되었다. 게다가 우루과이라운드로 대표되는 자본 지구화의 가속화는 수출에 과도하게 의존하던 남한경제를 새로운 위기에 빠뜨렸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남한의 총자본은 ‘종속적 포스트 포디즘적 축적양식’의 일종인 유연적 축적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신경영전략’을 도입하고, 국가는 ‘세계화 정책’이라고 불리는 전략을 도입했다.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의 남한형 전략인 세계화는 그 기본적인 목표를 국제경쟁력의 향상으로 삼았다. 따라서 국가는 점차 ‘문민개발독재’,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선 국제경쟁력, 후 민주화․분배’의 기치로 무장한 ‘국제경쟁력 독재’의 일종에 가까워 졌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노동자계급으로부터 강한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자본은 유연적 축적전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노동법의 개악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결국 세계화 정책을 충족시키기 위한 OECD가입 결정은 정부로 하여금 최소한의 국제적 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낡은 법의 ‘근대화’를 강제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면의 압력 속에서 1996년 여름 김영삼 정권은 두 가지의 모순된 방향으로 노동법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한편으로 정부는 노동자와 국제적 요구에 조응하기 위해 공무원과 교직원의 노조 결성권을 제외한 ‘4대 노동악법’을 철폐하는 방향으로 ‘집단적 노사관계’의 개혁을 시도했다. 동시에 정부는 노동자의 해고조건의 완화, 임시직 노동자의 고용허가 등을 통해 자본측이 ‘개별적 노사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을 허용할 것을 결정했다. 정부는 서구와 남한의 차이, 다시 말하자면 남한에는 거의 사회복지 혜택이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정리해고 조건과 같은 남한의 개별적 노동관계가 선진국보다 ‘선진적’이라는 자본측의 불만에 설득된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전체 정부예산 중 복지부문의 지출비율은 부끄럽게도 전세계에서 132위에 불과하다. 그 외에도 국가는 노동과 자본의 참여와 합의를 통해 새로운 노동법을 제정함으로써 서구형의 ‘민주적 사회 코포라티즘 (De-

mocratic Social Corporatism)’을 노동관계에 도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개별적 노사관계의 개악에 반대를, 자본측은 새로운 집단적 노사관계를 표명했다. 따라서 새로운 노동법은 남한의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간의 전면적인 계급전쟁의 전장이 되고 말았다.



3. 총파업의 과정


노동과 자본측 양자로부터 모두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자 국가는 그들의 동의없이 노동법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그 동안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제위기는 악화되었고, 경제성장은 둔화되었으며 다수의 기업들, 특히 중소기업들은 대량으로 도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외에도 수출이 둔화되고 무역적자는 극적으로 증가했다. 즉 남한의 경제성장의 기적은 사라져간 것이다.

이러한 국면에서 김영삼 정권은 그릇된 두 가지 핵심적인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 먼저 경제조건의 악화와 재벌의 항의는 지배블럭내 개혁파와의 세력관계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우선론자’의 입지를 강화시켰고, 그 결과는 자본측의 요구를 수용하는 반면 핵심적 노동악법의 개혁을 연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노동법은 기존의 반민주적인 노동관계의 개악이자 국가의 협조아래 자본측의 반노동자계급적인 악랄한 총체적인 공격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고 말았다. 두 번째 결정 역시 중요했다. 정부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1996년말 이전까지 노동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이시기에 노동법을 개정하지 않는다면 가까운 장래에 노동법 개정이 불가능하다는 즉, 다가올 대통령 선거와 임금협상과 관련된 춘계 노동쟁의 때문에 개정이 불가능하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서 다가올 대통령 선거 기간에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안전기획부 - 이는 과거 중앙정보부의 새로운 이름이다 - 를 활용하기 위해 김영삼은 새로운 노동법과 함께 과거 인권유린으로 악명 높은 국가안전기획부에 집권 초반의 정치개혁 시기 동안 박탈했던 권한을 원상복귀시켜 통과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노동계로부터의 저항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부는 새로운 노동법의 최종안의 통과조차 비밀리에 여당 의원들만으로 행했다. 더 나아가서 보수적인 정치적 색채와 다가올 선거와 관련된 재벌의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부의 법안에 대해 반대를 보이기에 주저해 온 야당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정치적 주도권을 위한 투쟁과 노동자계급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1997년 이전에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대한 반대를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정부로 하여금 이 두 반민주적 악법을 1996년 12월 26일 이른 새벽, 야당과 신문기자들에게조차 통보하지 않은 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통제 아래 비밀리에 ‘날치기 회의’를 통해 통과시키도록 강제했다.

이러한 오만한 정부의 행위는 폭발 직전에 있었던 노동자운동의 잠재적인 위험을 자극한 격이 되고 말았으며, 그 결과가 바로 역사적 총파업이었다. 이전에 지속적으로 총파업으로 정부를 위협하던 민주노총은 총파업이 곧 시작될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총파업에 대해 우려했다. 이는 다름아닌 평노조원들에 대한 민주노총의 지도력은 한번도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파업의 시기가 연휴인 점은 민주노총에게 불리했다. 경기불황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노동측에 등을 돌릴지 모른다는 사실도 우려되는 점이었다. 따라서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유연한 전략’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다시 말하자면 전면전 대신에 다단계 총파업 전략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은 일종의 치고 빠지기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성공적이었다. 기층 노동자들은 즉각적으로 반응했으며 실제로 성난 노동자들은 이러한 민주노총의 전략이 지나치게 유화적이라는 이유로 탄력성 있는 전략에 대해 강한 비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에 따른 국가의 탄압으로 신생 민주노총이 총체적으로 파괴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실제 파업의 집행에 대해 주저한 반면 최종적인 순간에 민주노총 지도부로 하여금 파업에 돌입하도록 강제한 것은 기층 노동자들이었다. 더 나아가서 한국노총조차 일반노동자대중들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해 그들 자신의 총파업을 개시함으로써 파업에 동참했다. 또한 김영삼 정권하에서 쇠퇴를 보이던 민중운동도 급속한 속도로 재활성화되었다. 두개의 반민주적 악법을 철폐하기 위한 국민적 전선이 민중부문 뿐만 아니라 시민조직 - 중간계급 지향적인 신사회운동의 한국판으로써 - 에서도 조직되었다. ‘일반시민’ 특히 보수적이며 노동자들의 파업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신중간계급’도 새로운 노동법이 초래한 고용불안 때문에 총파업을 지지했다. 연일 경찰의 강제적 개입과 봉쇄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비난하기 위한 거대한 집회가 전국적으로 개최되었으며 주요 산업은 타격을 받았다. 국가의 권위는 거의 마비되었으며 여론의 정부에 대한 지지도 사라졌다. 더 나아가 다수의 해외 노동운동과 민주적인 단체로부터의 국제적인 지지가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법위반을 이유로 한 체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공공장소에서 단식 농성중이던 민주노총 파업 지도부를 체포할 수 없었다.

20일 동안 민주노총의 지도아래 치고 빠지는 형태로 지속되던 3단계 파업기간 동안 528개 단위노조로부터 40만 명의 노동자들이 한번 이상 파업에 참여하였으며, 하루 평균 168개 노조에서 19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파업과 대중집회에 참여한 총 참가인원수는 각각 110만 명과 360만 명에 달한다. 비록 한국노총은 민주노총과의 경쟁을 위해서 공식적인 참가자 숫자를 과장했겠지만 만일 이 숫자에 한국노총의 참가인원수를 더하면 참가인원수는 이의 두 배에 이른다. 같은 기간 중에 22개 나라에서 지지집회가 열렸고 해외의 다양한 노동자조직과 노동자들로부터 223통의 지지 편지가 도착했다.

결국 제4단계 파업이 선언되기 전에 대통령은 굴욕적인 사과와 더불어 실수를 인정하는 발표를 할 수밖에 없었고, 노동법의 재개정을 약속했다. 이는 실제적으로 노동자계급 앞에 지배권력이 굴복했던 것이다.



4. 총파업의 결과

아직도 파업의 불꽃은 남아 있으며 민주노총은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제 포연은 사라졌고 투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최종 대차대조표는 아니더라도 잠정적인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때이다. 약속 한대로 정부는 야당과의 타협을 통해서 노동법을 재개정했다. 그러나 최종적인 산물은 더욱 개악되어, 통과된 국회 안보다는 나았던 정부의 원안과 유사했다. 개정된 법안은 공무원과 교직원의 노동조합결성권을 제외한 세 가지 금지조항을 폐지했으며, 따라서 민주노총도 실제적일 뿐만 아니라 법률상으로도 남한 노동자계급의 대표기구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노총으로부터 민주노총으로의 조직이탈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측의 대부분의 요구사항 역시 약간의 제약만이 가해진 채 실현되었다. 민주단체 내의 다수는 이런 결과는 노동자들의 투쟁의 강도에 비해 너무나 적은 성과라고 믿고 있다.

민주노총은 만일 국회가 정당들에 의해서만 제정된 노동법안을 통과시킨다면 제4단계 총파업을 실행할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그러나 한보사태와 북한 최고위층 관리인 황장엽의 정치적 망명 등의 예기치 않은 사건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정치적 국면은 민주노총으로 하여금 4단계 총파업 약속을 포기하도록 강제했다. 대신에 민주노총은 하절기 임금협상 시기에 새로운 노동법의 재개정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투쟁의 기세와 황금 같은 기회를 상실한 듯이 보인다. 대통령의 노동법관련 담화이후 파업 연기 결정은 결정적인 전술적 실책이었다. 민주노총은 당시 어느 경우에도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좀 더 정부를 밀어붙였어야만 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결과는 정부와 자본측의 총체적인 항복이거나 잔인한 국가의 강제력에 의한 ‘화려한 영웅적 종말’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결과의 경우 가까운 미래에 훨씬 더 강력한 노동자운동의 재구축과 아마도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노동자계급 후보의 형태로 결과지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주노총의 지도부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데 실패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철은 뜨겁게 달구어졌을 때 담금질을 해야 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이들은 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족한 점도 총파업의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감소시키지는 못했다. 총파업은 특히 한국정치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최초의 정치적 총파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남한 노동자계급은 총체적인 자본과 국가의 공격을 패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승리는 노동의 힘이 그 외향적인 발전전략 때문에 세계화, 다시 말하자면 과잉축적과 같은 구조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자본측의 새로운 공세에 매우 취약한 경제구조를 가진, 남한과 같은 국가에서 이루어 낸 것임을 고려해 볼 때 더욱 의미가 있다. 총파업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각성을 이루어 냄으로써 남한에서 노동자운동의 ‘만개(滿開)’와 노동자계급 정당의 출현을 최소한 10년 정도 촉진시켰으며 노동자계급 자체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할 긴박한 필요성을 인식시켰다. 더 나아가서 최초로 민주주의 투쟁에 있어서 다른 민중적 세력을 넘어서는 국민적 지도력을 행사함으로써 남한 노동자계급은 ‘경제-조합주의적 세력’을 넘어서 ‘국민-민중적’ 혹은 ‘헤게모니’적 세력이 되었다.5) 그 결과로 최근의 유권자들에 대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0%이상이 다가올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노총의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하겠다고 응답하기까지 했다. 끝으로, 총파업은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와 자본에 대한 투쟁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연대, 예를 들자면 ‘밑으로부터의 세계화’의 중요한 디딤돌이다.

동시에 많은 위험들이 남한 노동운동을 기다리고 있으며, 지나친 낙관은 금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산업코포라티즘(ind-

ustrial corporatism)’ 혹은 ‘기업조합주의(business corporati-

sm)’의 함정에 빠져듦으로써 미국의 CIO의 재판이 될 위험이 상존한다.6) 또한 남한 노동자계급은 새로운 노동법의 도입을 통한 고용불안 때문에 개별화될 위험이 존재한다. 즉 남한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포섭전략에 의해 기업별조합주의의 포로가 될 위험 역시 존재한다. 세계화와 경제불황의 압력은 노동자계급이 ‘경제회생 우선’ 논리 혹은 ‘회사 살리기 우선’ 논리에 굴복하도록 강제할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서 남한 노동자계급은 ‘레드 콤플렉스’와 ‘북한 문제’를 - 특히 북한의 경제난이 악화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또한 남한 노동자계급은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조직화하기 위해서 1987년 민주화이후 지배적인 정치균열로 전화한 지역주의를 극복해야만 한다. 남한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조직화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와 같이 부르주아 정치에 포섭될 위험성이 잠복해 있다.

후발주자로서 남한 노동자계급은 특히 전례없는 국제적인 무한경쟁이라는 불리한 조건하에서 다섯 가지의 어려운 과제들을 안고 있다. 첫 번째, ‘생산의 정치’7)라는 과제이다. 이는 작업장의 민주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써, 다시 말하자면 전근대적인 공장전제주의를 타파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시민사회’의 수준에서 통일된 노동자계급을 창출하고 시민사회 안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민주노총의 지도력 하에서 단일한 국민조직으로 통합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조직노동자의 낮은 비율을 고려해 볼 때 민주노총은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과제 이외에도 미조직노동자를 조직화해야만 한다. 또한 민주노총은 지역, 산업, 기업, 대기업 對 중소기업 등과 같이 노동자계급간의 다양한 분할을 극복해야만 한다. 세 번째로, 남한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으로 조직화되어야만 한다. 네 번째로, 남한 노동자계급은 변혁성을 지니면서도 대중성을 강화해 나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끝으로 자본의 국제화에 경쟁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운동 간의 국제적인 연대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비록 후발주자지만 남한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향해 고통스럽지만 확고한 발걸음을 지속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한/노/정/연


1) Edward Mason et al., The Economic and Social Modernization in the Republic of Korea, Cambridge: Havard Univ. Press, 1980.


2) 이러한 분단의 효과에 대해서는 Paik Nak-Cuung, “South Korea : Unification and the Democratic Challenge,” New Left Review, no.197(Jan./Feb. 1993)을 참조.


3) 최장집,「한국의 노동운동과 한국」, 열음사, 1988.


4) Donald Clark ed., The Kwangju Uprisings, Boulder: Westview, 1988.


5) ‘경제-조합주의적’과 ‘국민-민중적’ 개념간의 차이에 관해서는 A. Gramsci, Selections from Prisonal Notebooks, NY: International Publishers, 1971을 참조.


6) 단적인 예는 Kim Moody, An Injury to All: The Decline of American Unionism, London: Verso, 1988을 참조.


7) Michael Buroway, The Politics of Production, London: Verso, 1985.



의견글쓰기
이 글에 대한 의견보기  다른글 의견보기
아직 올라온 의견글이 없습니다


정규표현식
[ 0.06 sec ]

| 목록보기 | 윗글 | 아랫글 | 글쓰기 | 관련글쓰기 | 수정 | 삭제 |

(구)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00-272) 서울시 중구 필동2가 128-11 상전빌딩 301호   Tel.(02)2277-7957(팩스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