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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번 : [27호/연재-기획] 유럽여행기(헝가리)
           - 평양냉면 맛이 질긴 이유
글쓴이: 이산하 등록: 1997-11-01 00:00:00 조회: 1773


평양냉면 맛이 질긴 이유
유럽여행기(9)
평양냉면 맛이 질긴 이유


이 산 하 / 서울대 법대 재학





‘천국행 티켓’은 64만불(弗)이라는데....

돈으로 천국행 티켓을 살 수 있다면, 그 값은 얼마나 될까? 미국의 경제잡지인 ꡔ워스ꡕ에서, 미국 부자들을 대상으로 흥미로운 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 돈으로 사기 힘든 것들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에 얼마나 투자하겠느냐는 설문이었다. 이 설문에서 미국 대통령 자리는 5만5천불(弗)로 제시된 예시 중에 최하위를 차지한 반면, 천국행 티켓은 64만불(弗)이라는 거금이 제시되었다. 미국 전체가구의 1%에 해당하는 연소득 25만달러, 보유재산 2백50만달러 이상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미국 부자들은 천당에 한 자리 확보하는 것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셈이다.
진지함이 결여된 흥미위주의 여론조사이며, 모든 것을 화폐가치화시키려는 물신숭배적 설문조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문득 이 질문을 내가 다녀온 배낭여행지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진다. 우선 배낭여행이 투자가치로 따져 이승세계에서 골찌를 차지한 미국 대통령 자리보다 높을 것이라는 호기로움에서 출발해 보자. 다만 미국 부자들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최상한가는 천국행 티켓 값보다는 낮게 책정하도록 한다. 자, 그러면 시작해보자.
배낭여행지중 최고로 칠 곳은 아무래도 ‘이스탄불’인 것 같다. 동양과 서양, 아시아와 유럽의 문명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스탄불은 여행자에게 묘한 매력을 풍긴다. 값으로 치자면, 40만불 정도. 다음으로 나는 ‘베네치아’를 들고 싶다. 인간이 얼마나 자연과 융화되어 살 수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이다. 30만불 정도 투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프라하’가 있다. 자본주의화 이후 ‘돈의 가치’가 우선시되면서 자신의 고답적인 분위기, 역사적인 분위기를 많이 잃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투자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25만불정도. 그렇다면, 이곳 부다페스트에는 얼마나 투자할 수 있을까? 프라하만큼 고답적이지는 않지만, 마자르족 특유의 분위기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역사적 숨결’을 호흡할 수 있는 국회의사당, 영웅광장이 있기에 나는 부다페스트에 투자한다. 15만불 정도는 기꺼이 투자해보겠다. 더구나 ‘평양랭면’을 맛볼 수 있으니, 어찌 부다페스트를 빠뜨릴 수 있겠는가?


부다페스트의 첫인상

프라하를 떠난 야간열차에서, 나는 다음날 아침 ‘도나우 강의 눈부신 태양’을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국경에서 여권 검사가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잡음없이 부다페스트로 향할 수 있었다. 새벽녘, ‘도나우 강의 눈부신 태양’이 우리를 깨울 것이라는 기대는 무참히 무너지고, 한바탕의 ‘왁자지껄한 소음’에 의해 잠을 깰 수밖에 없었다. ‘삐끼’(호객꾼)들의 출현 때문이었다. 각 유스호스텔의 ‘삐끼’들이 부다페스트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열차에 올라 와, 배낭객들을 상대로 유치작전을 벌이는 통에 새벽 단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다페스트와의 첫 대면은 이렇게 ‘왁자지껄하게’ 시작되었다.
부다페스트 역에 도착한 것은 토요일 오전 9시경이었다. 맑은 햇살을 마음껏 호흡한 후, 역 화장실에 들어가 간단하게 세수를 했다. 그리고 역 수하물 보관소에 짐을 맡겼다. 바로 그날로 루마니아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따로이 숙박을 잡지 않았다. 그리고 곧장 도나우 강변을 향해 출발했다. 웬만한 볼거리들이 그곳에 몰려있어서 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보다 더 절실한 목적이 있었다. 프라하에서 만난 어느 배낭객의 추천 작품인, 시원한 ‘평양 물랭면’을 감상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북한 사람들이 직접 만드는 물 냉면 맛이 그야말로 죽여준다”고 내 얼굴에 온통 침을 튀겨가며 열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여행자들을 옭아매는 덫

버스를 타기 위해, 어느 시민에게 “티켓을 어디서 사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필요없다”고 대답했다. ‘버스안에서 살 수 있겠지’ 싶어 그냥 올라탔다. 이게 화근이 될줄이야. 한 두 정류장쯤 지났을까. 입구가 몹시 복잡해서, 안쪽으로 들어가야 했다. 바로 앞에는 건장한 청년들이 가로막고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녹녹치 않았다. 청년들이 길을 터주지 않아 약간의 실랑이를 벌인 끝에 버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때, 어느 여성 한 명이 다가왔는데, 어느새 그녀의 팔에는 붉은 색의 완장이 둘려져 있었다. ‘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표 파는 곳을 찾지 못해서 그냥 탔으니 정상참작을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고, 벌금 600Fr(포린트)를 내라고 했다. 실랑이 끝에, 결국 나는 여성 검표원과 함께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음에도 기어이 벌금을 물리겠다는 여성 검표원에 대해 일전불사의 의지를 불태웠건만, 나는 그녀의 한마디에 기세를 꺽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서에 갈거냐, 아니면 벌금을 낼거냐?”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들 검표원의 주 타격대상은 ‘배낭여행객’이며, 그중에서도 ‘한국, 일본, 홍콩’ 등의 동양인 배낭객을 잘 건드린다고 한다. 당연히 이들의 주요한 활동 무대는 배낭객의 정기코스인 역에서부터 도나우 강변으로 가는 버스노선에 집중된다. 역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배낭객들을 기다려 함께 탄 후, 이들에게 벌금을 물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표적검사’라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배낭객들은 걸려들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부다페스트 역에서 ‘버스 표 파는 곳’을 찾는 것이 그리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표를 샀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펀치’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승차 후에 버스 안에 검표기가 있는데, 반드시 그곳에 펀치를 해야 한다. 나는 그 다음날 또 버스 벌금을 물었는데, 그때는 ‘펀치’를 안했다는 이유였다.
벌금 제도의 본질은....

유럽에서 대중교통 수단의 요금지불 체계는 상당히 ‘자율적’이다. 특히 버스나 시내 전차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 처럼 앞에서 타고 뒤로 내리는 것이 아니고, 앞 부분 혹은 중간, 끝부분 어느 곳으로도 승차가 가능하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무임승차가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각 나라마다 대중의 ‘자율’을 용인해 주는 정도는 차이가 많다. 물론 그 기준은 얼마나 자주 ‘표 검사’를 하느냐이다.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불시에 ‘표 검사’를 하지만, 그리 자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유럽은 그렇지 않다. 버스나 전차를 탈 때, 100% ‘표 검사’를 한다고 보면 그대로 맞다. 특히나 ‘배낭객’들을 그냥 보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배낭객들이 겪는 동유럽에서의 ‘좋지 않는 기억들’은 대부분 ‘벌금’과 연관되어 있다.
내가 지금 유럽 여행시 ‘무임승차’할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동유럽에서의 ‘벌금 제도’는 이미 그 고유의 기능을 상실한 채, 몇몇 기관원들의 사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여행을 하다보면, 각국의 교통제도가 틀려서 실수할 수도 있다. 예를들면, 버스에 올라서 표를 구입할 수 있는 나라도 있고, 그렇지 않는 나라도 있으며, 버스와 전철 혹은 전차를 모두 하나의 티켓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 갈아탈 때마다 티켓을 구입해야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 등 큰 체제에서는 비슷할 수 있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약간씩의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여행자들이 충분히 실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여행자들의 실수를 트집잡아 벌금을 갈취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자율성에 기초한 요금지불 체계가 원활히 운영되도록 그들을 ‘계도’하는 것이리라. 또한 이것이 벌금제도의 본질인 ‘대중 계도’에도 부합할 것이다.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평양랭면’

평양랭면집이 도나우 강변에 있다는 소리만 듣고, 그곳을 찾아 나섰으니 고생은 자명한 일이었다. 역에서 만난 한국인 배낭객과 함께 평양랭면 집을 찾아 떠났다. 일단 무작정 도나우 강변으로 갔다. 그곳에는 겔레르트 언덕과 루즈벨트 광장, 에르제베트 다리, 어부의 성채 등 관광명소가 모여있는 곳이기도 했다.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샅샅이 훑었음에도 도무지 평양랭면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하는 동안 시간은 세시간을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세시간 동안이나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자신을 달래야’ 했기 때문일까. 집착하면 끝이 없는 게 인간의 욕망인가 보다. 포기할 법도 하건만, 나의 발은 여전히 도나우 강가를 따라 옮겨지고 있었다. 결국 ‘서울의 집’이란 한국식당에서 단서를 구해, 평양랭면집을 찾을 수 있었다.
‘시원한 평양랭면’이라는 플랭카드가 나부키는 조그만 선박이었다. 도나우 강위에 두둥실 떠 있는 선상호텔이었는데, 그 호텔의 2층에 평양랭면집이 있었다. 우리가 한국인임을 눈치 챈 지배인은 재빠르게 북한 출신인듯한 ‘종업원’으로 하여금 주문을 받게 했다. 구수한 평양사투리를 들으며, 우리는 주문을 했다. 다른 것 볼 것 없이 ‘물냉면 세그릇’을 시켰다. 그리고 시원한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뜨거운 햇빛아래 3시간을 넘게 걸었으니, 갈증이 날만도 했다.
평양랭면은 잘 넘어갔다. 말 그대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평양랭면을 비우고 말았다. 너무 많이 걸어다녀 허기져 있었고, 유럽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전통음식이라곤 거의 입에도 대지 못했으니, 맛을 제대로 음미할 여유도 없이 위장으로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죽여준다’는 말 밖에는....
그런데 나는 서울로 돌아와 그 맛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날, 내가 잘 아는 대학 선배를 만나 유럽에 다녀온 얘기로 꽃피우고 있었는데, 그 선배가 내게 묻는 것이었다.
“냉면의 맛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오면서 질겨졌다고 하던데, 실제 북한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부다페스트의 평양랭면 맛은 어때? 잘 넘어갔어?”
그제서야 나는 그 맛을 알게 되었다. 그랬다. 적어도 질기지 않았다. 내 목구멍을 간지럽히며, 넘어간 듯 만 듯 평양랭면은 나의 위장에 도착해버렸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왜 냉면이 질겨졌을까? 음식 맛은 사람의 손 맛이라고 하던데, 혹시 그만큼 우리의 인정들이 삭막해졌다는 증거는 아닐까? 혹은 면조차도 대량생산되면서 ‘손 끝의 맛’을 ‘기계’가 대신하면서 생긴 현상은 아닐까?
음식문화에도 자본주의 체제의 만고의 진리, ‘이윤법칙’이 적용됨은 확실하다. 이윤이 남는 것이라면 물불 안가리는 자본주의의 생리는 ‘먹는 장사’에도 침투하여, 전세계 음식문화를 바꾸어 놓고 있다. ‘맥도날드’, ‘코카콜라’로 대표되는 초국적자본의 음식문화는 전세계 민족들의 고유한 음식문화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각국의 음식문화들이 이들 ‘햄버거 문화’ 혹은 ‘패스트 푸드 문화’에 밀려 사양화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먹는 장사’에 이윤의 논리가 많이 개입되면 될수록, 먹는 사람들의 건강이 고려될 여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햄버거내 소고기에서 O-157균이 발견된 문제, 광우병 파동 등은 그 좋은 예이다. 그만큼 먹는 사람들의 건강과는 상관없이 제조되고 판매되고 있다는 말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 이 말이 쓸데없는 민족감정을 불러일으키지만 않는다면, 최소한 음식문화에 있어서만큼은 각국, 각지역의 민족과 민중들의 건강권을 지켜낸다는 견지에서는 적극적으로 수용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초국적자본들의 이윤논리에 자국의 음식문화가 송두리째 박살나고, 그 효과로 자국 민중들의 건강권이 심각히 위협받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될 것 같다. 민중들의 건강권이라는 견지에서, 신토불이 정신을 살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아무튼 강 건너편에는 신고딕양식의 멋있는 국회의사당이 한눈에 보이고, 도나우 강물의 출렁임에 몸을 싣고 뜨거운 한여름에 시원한 평양 물랭면을 먹는 기분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함흥냉면은 쳐주지도 않아요”라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하던 지배인 아저씨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평양랭면집’은 클라크 아담광장에서 도나우강변을 따라 마르기트 섬 방향으로 죽 걸어가다 보면, 강변에 선박을 개조한 호텔이 있으며, 그 호텔 2층에 있다. 꼭 한번 가서, 질기지 않는 평양냉면을 맛보도록 권하고 싶다.


세 번째는 가지 말아야 하나?

나는 올해 두 번째로 부다페스트를 찾았다. 물론 제일 먼저 ‘평양랭면집’을 찾았다. 작년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자랑삼아 몇몇 배낭객들도 데리고 갔다. 그러나 두 번째 방문은 나의 아련한 추억을 앗아가고 말았다. 그때의 착잡함이란... 당시의 감정을 나는 친구에게 엽서로 부쳤다.

“나는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도나우 강변의 평양냉면집에 찾아 갔지. 작년에 만났던 구수한 북한 사투리의 웨이터 아저씨가 우리를 맞이하더구만. 나는 메뉴판을 펴들었는데, 육개장, 만두국 등이 새롭게 추가되어 있었어. ‘내년에는 약 30여 가지가 더 추가될 거예요’라며, 웨이터 아저씨는 자랑스럽게 말하더구나. 나는 일단 물냉면을 시켰어. 다행히 맛은 비교적 작년 그대로더구나. 다만 약간 매웠어. 그렇지만, 분명 인심은 변해있더구나. 양도 적고, 물도 안주고. 더구나, 육개장을 시켰는데, 세상에 밥은 안갖다 주더라. 밥은 따로 시켜야된다나. 차라리, 냉면만 시켜먹고 나올 것을 ... 평양냉면집에 대한 나의 추억만 완전히 구기고 말았지. 작년 것은 참 시원하고 부드러웠는데... 평양냉면 맛도 이제 점점 질겨지고, 매워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 세 번째는 가지 말아야 하나?”

나중에 나는 부다페스트의 평양랭면집이 대성총국이라는 북한 합작회사가 운영하는 식당임을 알게 되었다. 몇 년전 이 회사의 유럽지사 사장이 한국으로 망명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북한의 외화벌이 방식이 아직까지 음식업 등 소규모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1956년의 부다페스트

1956년 10월 23일 수만의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벰광장에서부터 국회의사당 앞으로 와서 나지(Nagy)에게 연설할 것을 요구했다. 나지는 헝가리 민중들 사이에 가장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지는 “동지들!”이란 단어로 연설을 시작했다. “동지들의 요구사항은 공산당내에서 논의할 것이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시오.”
1956년 10월 25일, 군중들은 코슈트 라요쉬 광장의 중앙에 있는 아스토리아(Astoria) 호텔 앞에 진주해 있는 소련 탱크앞에 멈춰 섰다. 소련인 책임자는 잔뜩 놀란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파시시트 집단들을 제거하기 위해 여기 보내졌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단지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스스로가 결정할 권리가 있는 민중, 노동자, 여성, 젊은이들을 보았을 뿐이다.” 군중들은 환호하며, 탱크에 올라가고, 헝가리 국기로 탱크를 장식했다. 그들은 탱크를 타고 의회를 향해 행진했다. “러시아인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 나지를 만나러 가자” 곧 1만5천여명의 군중이 의회앞에 모였다. 이 때, 국회의사당 맞은 편 건물(농업국)의 꼭대기에서 일단의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소련 탱크는 그 건물을 향해 두번 쏘았을 뿐, 광장에서 서둘러 떠나갔다. 잠시후, 저격수들의 사격은 멈추었지만, 100여명 이상이 이미 죽어 있었다.
1956년 11월 4일, 탱크를 앞세운 소련군은 도시를 완전 재장악하고, 국회의사당안으로 쳐들어왔다. 나지를 비롯한 정부관리들은 유고 대사관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꿈꾸며...
헝가리 혁명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에 비해 우리의 귀에 익숙치 않다. 1956년 헝가리 민중들은 관료적이고 억압적인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반대하고, 나아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 소련군의 철수 등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소련은 이를 ‘파시스트들의 반혁명’이라고 규정했으며, 서구 자본주의측은 ‘자본주의화를 위한 헝가리 민중들의 투쟁’이라며 추켜세웠다. 우리 역시 이중 어느 하나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도 헝가리 혁명을 옳게 설명하지 못한다. 헝가리 혁명 당시 민중들의 봉기에 지도적 역할했던 사람들이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우리들 귀에 익숙한 헝가리의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는 당시 혁명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었다.
“우리의 국가, 사회, 경제, 문화적 생활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정신 아래에서 쇄신되어야 한다. 민주적 정신의 함양과 모든 영역에서의 국민 자율성은 헝가리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고 모든 관점에서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또한 개혁적 공산주의자 팔 말레 역시 당시 혁명운동 과정에서,“우리는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주의 헝가리를 원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헝기리 민중들의 열망이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관료주의적, 억압적인 사회주의 체제’였으며, 그들이 원했던 것은 소련으로부터 독립되고,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주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사회주의 체제’였던 것이다.
헝가리 국회의사당 앞에서, 나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상황을 떠올려 본다. 서울의 봄, 서울역 회군, 5월 광주, 학살, 전두환 군사독재의 등장, 그리고 87년 6월... 결국 민중들을 억압하는 체제는 민중들에 의해서 고발되고 바뀌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또다른 억압의 체제로 전환되어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영웅 광장”이 “부츠(BOOTS)광장”으로

민중공화국 거리를 죽 따라가다 보면 막다른 곳에 보기에도 시원한 광장이 눈 앞에 다가온다. 그 한 가운데에 약 36m가량 되는 거대한 천사상이 우뚝하니 서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기마상들과 건국영웅들이 반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기마상은 마자르 부족의 연합 수장과 6인의 부족장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영웅광장은 한동안 ‘부츠광장’으로도 불렸는데, 그 사연은 1956년 헝가리 혁명에서 시작된다. 10월 22일, 영웅광장의 남쪽에서 대학생들은 억압의 상징 ‘스탈린 동상’을 철거할 것을 요구했고, 드디어 10월 23일 군중들은 망치로 동상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동상을 트랙터에 묶어서 시내 곳곳으로 끌고 돌아다녔다. 어떤 사람은 ‘혐오’의 표시로 스탈린의 머리에 ‘WC’라고 써넣었다. 영웅광장에 이르러서, 동상의 밑부분과 부츠 한쪽만이 남게 되었다. 승리의 신호로 그 부츠안에는 헝가리 국기가 꽂아졌다. 그 이후 오랫동안 이 광장은 “부츠광장(Boots Squar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편, 이곳 영웅광장에는 헝가리 혁명의 영웅 ‘나지(Nagy)’와 ‘팔 말레(Pal Maleter)’ 등이 묻혀 있다. 동구권이 격동하던 1989년, 나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념일에 그들은 여기에 묻혔다. 20십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한 이 기념식은 혁명영웅들을 추모했을 뿐만 아니라, 동구 공산주의 몰락의 상징으로 표현되었다.


나지(Nagy)가 유고 대사관으로 간 이유

영웅 광장의 반대편에는 유고 대사관이 있다. 이 대사관은 헝가리 혁명 당시 나지를 비롯한 혁명의 지도자들이 망명해온 곳이다. 유고대사는 그들의 안전을 보장했으나, 11월 22일 그들을 벨그라드로 데리고 가려던 차는 소련 사령부로 향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소련군대에 의해 붙잡혀 루마니아에 수감되었다. 이후 1958년, 나지와 그의 지지자들은 부다페스트에서 처형되었다.
현재 ‘사회주의 유고연방’은 없어졌으며, 신유고연방,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티토’에 의해 지도되던 당시의 ‘사회주의 유고연방’은 소련으로부터 독립적인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였으며, 스탈린 철학과 관료적 사회주의체제에 대당하는 독특한 이념과 운영원리를 정립하고 있었다. 공산당을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일당독재의 위험성을 경계했으며, 국가권력의 끝없는 확대를 도모했던 소련과는 달리 “국가 기구는 새로운 사회상태에 있어서 지속적이고도 중요한 발전요인이 될 수 없으며, 자치관리적으로 선발된 사회조직에 예속하는 전문적인 하나의 기구로 변해야 한다”는 견해를 그들의 강령에 정식화시켰다. 또한 공산당의 ‘주도적 역할’이라는 소련의 주장에 대해서도, “당은 대중들의 전체적인 주도권과 새로운 사회의 창조적 활동력을 표현하는 사회운동을 대신할 수 없으며, 근로자 대중과 동일한 권리를 가진 부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국제노동자운동에 있어서,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소련에 예속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소련식 길이 필연적인 길이 아니며 각 민족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이행의 길이 있음을 인정할 것과 그것을 기본으로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동등권 관계’를 내세우기도 했다. 당시 소련에 예속된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자본주의 국가도 아닌 유일한 국가는 ‘유고연방’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지는 소련이 탱크를 앞세우고 헝가리를 침입하여, 도시를 재장악했던 56년 11월 4일 지지자들과 함께 유고 대사관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고연방도 대세르비아주의, 대크로아티아주의라는 ‘침략적 민족주의’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20세기 가장 더러운 전쟁으로 기록될 유고연방내 전쟁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야 말았던 것이다. 민족주의가 진보성을 상실할 때, 어떻게 반인류적으로 전화될 수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전쟁에 의한 부정적 결과들을 치유하고 해결하는 주체는 그들 자신이 되어야 한다. 미국, 독일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간섭에 의한 치유는 또다른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어부의 성채에 올라

부다페스트에 가거들랑, 꼭 어부의 성채에 올라보라. 살랑대는 강바람이 귓볼을 간지럽히고, 시원한 풍경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부다페스트의 기억이 결코 좋지 않다. 여권도 잃어버리고, 검표원들과 실랑이도 벌이고, 삐끼들의 등쌀에 시달렸다. 그러나 내가 또 부다페스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곳 때문이었다.
어부의 성채. 도나우 강변의 오래된 요새위에 세워진 건조물이다. 하얀 건물 전체가 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긴 회랑의 끝에는 뾰족한 지붕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19세기 도나우 강의 어부들이 이 지점을 방어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 길지 않은 이 회랑을 거닐며 출렁이는 도나우 강물을 바라보는 눈맛이 여간하지 않다. 뾰족한 지붕 끝까지 올라가, 안도현의 ‘모항으로 가는길’을 읊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너, 문득 떠나고 싶을 때 있지?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따위 눈 딱 감고 떼어내고 말이야
비로소 여행이란,
인생의 쓴맛 본 자들이 떠나는 것이니까
세상이 우리를 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스스로 세상을 한번쯤 내동댕이쳐 보는 거야
오른쪽 옆구리에 변산 앞바다를 끼고 모항에 가는거야
………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지
저 잘난 세상쯤이야 수평선 위에 하늘 한 폭으로 걸어두고
가는 길에 변산 해수욕장이나 채석강 쪽에서 잠시
바람 속에 마음을 말려도 좋을 거야
그러나 지체하지는 말아야 해
모항에 도착하기 전에 풍경에 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촌스러우니까
조금만 더 가면 훌륭한 게 나올 거라는
믿기 싫지만, 그래도 던져버릴 수 없는 희망이
여기까지 우리를 데리고 온 것처럼
모항도 그렇게 가는 거야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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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표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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