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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2번 : [33호/연재-기획] 호주 항만 노동자들의 투쟁과 승리
글쓴이: 원영수 등록: 1998-06-01 00:00:00 조회: 1483


노동조합 파괴공세에 대항한
호주 항만노동자들의 투쟁과 승리
국제노동
호주 항만노동자의 투쟁과 승리



원 영 수
정세분석실 연구원





지난 4월 7일 밤 12시 호주 최대의 패트릭하역회사(Patrick Stevedores Company)는 호주항만노조(Maritime Union of Australia, MUA) 소속의 노동자 2,000명 전원을 해고하였다. 그 시간에 야간조로 일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경비견을 이끌고 침입한 경비대에 의해 항구 밖으로 쫓겨났으며, 그 시간 이후로 항구의 정문은 굳게 닫혔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호주 항만노동자들은 즉시 호주 전역의 항구들에서 강고한 24시간 피켓라인을 형성하여 전면적 투쟁에 돌입하였다. MUA 노동자들은 투쟁의 중심에서 서서, 한편에서 호주의 모든 노동자, 지역사회와의 연대, 국제연대를 통해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모든 법률적 수단을 동원하여 자본측의 공세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개월에 걸친 격렬한 투쟁 끝에 마침내 대법원으로부터 전원복직 판결을 얻어냄으로써 귀중한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는 단지 호주 항만노동자들만의 승리가 아니라, 전체 호주 노동자계급과 국제연대의 승리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배경 : 예고된 자본의 공세

이번 기습적 도발은 기본적으로 자본(패트릭사와 전국농민연맹 전국농민연맹(Nationl Farmers Federation, 이하 NFF: 의장 Donald McGauchie): 대표적인 우익 농민로비단체로서, 보수적 현정부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규모 하역회사(Producer and Consumer Stevedoring Co.)를 소유하고 있다. 농업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여, 부두에서 전투적 노동조합 MUA의 제거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서고 있다.
)과 정부(자유․국민 연립정부)의 조직적 공모에 의한 것이었다. 패트릭사는 1996년 집권한 현정부와 전국농민연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지난해 호주판 신경영전략인 항만작업 ‘개혁’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호주의 항만을 이른바 ‘고비용 저효율’ 구조라고 규정하고 이것을 ‘개혁’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노동조합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에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두바이 용병사건’이 발생하였다. 97년 12월 패트릭사는 NFF와 공모하여, 아랍에미레이트의 두바이항에서 퇴역군인들에게 하역훈련을 시켜 파업 파괴자(scabs)로 이용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의회에서 이 사실이 폭로되자 회사측은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처음에 회사측은 이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였지만, 98년 2월 패트릭사 회장(Chris Corriagan)이 “절망한 사람의 절망적인 행동”이라는 말로 자신의 개입사실을 인정하였다. 그와 더불어 1996년 노동법 개악으로 악명 높은 노동부장관 피터 리스(Peter Reith)도 깊이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패트릭사는 1997년 9월 케언즈 항과 1998년 1월 멜버른 웹 부두(Webb Dock)에서 일방적으로 MUA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시설을 노조가 없는 다른 회사(NFF의 간판회사)에게 임대하는 등 지속적인 노동조합 파괴공작을 기도하였다.

호주정부와 패트릭사, NFF측은 이번 분규가 호주 하역산업의 효율성 제고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MUA 노동자들이 게으르고 지나치게 높은 임금을 받고 있다는 이미지를 퍼뜨리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MUA를 공격하는 진짜 이유는 MUA가 호주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진보적인 노동조합이며, 호주와 세계 노동자들의 진보적 대의를 지지하는 오랜 역사와 국제주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MUA는 2차 대전 직전에 일본에 철강을 선적하기를 거부했고, 인도네시아의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했었다. 최근에는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을 지지했다. 그리고 지역내 열대우림의 파괴에 반대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호주 항만노동자들은 호주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자본의 기습 : 도발의 현장에서

4월 7일 자정무렵 2,000명에 대한 전원 해고통보와 함께, 멜버른의 이스트 스완슨 부두(East Swanson dock)에서 전격 진압작전이 개시되었다. 회사측이 고용한 사설 경비원들이 경비견과 함께 부두를 장악하면서 작업중이던 야간조 노동자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약간의 충돌이 발생, 여러명이 부상당하고 일부 조합원(25명)은 조합사무실에 갇혔다. 이들은 사무실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면서, 전화 인터뷰를 통해 현장 상황을 전했다: “우리는 나갈 수 없다. 그들이 전구역을 장악했다...... 여기는 3차 대전이 일어난 것 같다.”
그러나 회사측은 4월 8일 오전 성명을 통해 “작업관행에 대한 MUA와의 협상 실패”로 하역작업을 외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조합측의 개혁거부로 회사측이 5천6백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으며, 직장폐쇄는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에 화답하여 노동부 장관 피터 리스는 기자회견에서 “정부는 개혁을 도입할 회사측의 권리를 지지한다”고 말함으로써 정부측의 노골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회사측으로부터 해고방침을 통보받았음을 시사하면서, 조합원 해고수당으로 2.5억 호주달러를 회사측에 대출해줄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노동조합측에 대해서는 과잉대응을 자제하고 회사측이 제공할 ‘명예’ 퇴직수당을 고려하라고 촉구하였다.


두 개의 전선 : 피켓 라인과 법정

자본과 정부의 도발로 시작된 전투는 두개의 전선에서 벌어졌다: 하나는 법정에서의 투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과 지역사회의 피켓라인에서 현장노동자들의 행동과 투쟁이었다. MUA 노동자들은 호주의 전노동자와 연대하여, 정부와 자본에 맞선 계급투쟁의 장에서 투쟁의 선봉이 되었다.

패트릭사가 일방적인 전원 해고를 통보한 다음날인 4월 18일, 패트릭사가 부두를 사용하는 호주의 모든 항구에서 노동조합과 지역사회의 피켓이 설치되었다. 해고당한 MUA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피켓라인이 설치된 모든 항만시설 입구에서 해고자 가족, 다른 노동조합의 연대지원단, 지역사회의 지지자들과 함께 24시간 철야 저지대오를 유지하였다. 각 피켓마다 적어도 1천여명의 대오를 유지하면서, 지속적인 항의집회를 개최함으로써, 강력한 연대전선을 구축하였다.
피켓라인에서 컨테이너의 선적이나 하역을 저지하기 위하여 전투대오를 정비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의 공격에 의해 저지선이 붕괴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 경우에도 잘 정비된 연락체제를 통한 비상동원으로 저지선을 곧 복구하곤 하였다. 예를 들어, 4월 18일 아침 이스트 스완슨 부두에서, 경찰측은 트럭이 부두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지선을 해산하려고 기도하였지만, 철야 피켓부대는 경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리고 연락을 받고 합류한 약 1,000명의 건설 노동자들이 나타나자, 경찰측은 후퇴하였고 트럭은 단 한 대도 통과하지 못했다.

이러한 현장투쟁과 더불어, MUA 지도부는 법률적 수단을 동원한 법정투쟁에 즉각 돌입하였다. 그 결과 4월 8일 ‘향후 7일간 더이상의 해고금지, 회사시설의 이전금지, 대체노동력 사용금지’ 등을 내용으로 한 법원명령을 얻어냈다. 그러나 회사측은 즉시 연방법원에 항소하였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 마침내 4월 20일에는 빅토리아주 최고법원을 통해 ‘피켓을 금지하는’ 명령을 얻어냈다. 그러나 현장 노동자들은 피켓라인에서의 저지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4월 21일 연방법원의 토니 노스(Tony North) 판사는 “대량해고건이 법원에서 결정될 때까지 전원복직”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패트릭사는 즉시 연방법원의 합의결정을 요구하면서 항소하였지만, 4월 23일 연방법원은 전원합의결정에 의해 노스 판사의 판결을 최종 확정하였다. MUA의 법정투쟁 승리가 거의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패트릭사는 법원명령의 이행을 거부하고, 즉시 대법원에 항고하였다.


연대운동의 확산 : 제2의 리버풀 투쟁으로 !

이번 MUA투쟁은 단지 항만노동자들의 단결뿐만 아니라, 호주 전역에서 노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사람들은 이번 투쟁이 단지 MUA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조합에 가입한 모든 노동자들의 권리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만약 정부가 이번에 승리하면, 노동운동과의 나머지 싸움에서도 이기게 될 것이라는 인식이 폭넓게 공유되었다.
항만노동자들의 투쟁은 호주 전역에서의 노동조합과 지역사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대한 반격으로 90년대 호주 노동운동의 전환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호주 노동조합평의회(ACTU)는 MUA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ACTU 위원장 제니 조지(Jennie George)는 “감옥 가는 것을 불사하고 싸우겠다”고 말함으로써, 정부와 자본에 대한 호주 노동운동의 전면적 대응을 선포하였다. TV광고 캠페인, 수많은 연대집회와 투쟁을 통해 MUA투쟁은 호주 노동자계급 전체의 투쟁이 되었다. 그 결과 심지어 호주에서 가장 우익적인 노동조합 중의 하나인 수퍼마켓 노조의 조합원 50명 이상이 MUA의 지역사회 피켓을 지지하기 위해 파업을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 MUA투쟁은 지난 2월 리버풀 투쟁의 종결로 꺼져가던 국제적 연대투쟁의 불길을 되살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제운송노련(ITF)은 한편에서 파업 파괴자들이 선적한 화물의 하역을 거부하는 전세계적인 캠페인을 효과적으로 조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번 투쟁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MUA의 투쟁에 발맞추어, 미국의 해운노조(ILWU)도 4월 8일 즉각 MUA 지지시위를 조직하였고, 전일본선원노조(AJSU)는 춘투집회에서 MUA지지 및 48시간 연대파업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호주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조직되었으며, 미국과 스웨덴에서 패트릭사의 선적화물에 대한 하역이 거부되었다. 또 타일랜드,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등 주변국의 관련 노동조합들도 대표단 파견, 호주대사관에 항의서한 전달, MUA연대 메시지 등 연대행동을 조직하였다.

한편 패트릭사와 호주정부는 영국의 노동조합들이 패트릭 부두에서 선적된 화물의 하역을 거부하는 행동을 조직하자, MUA를 지지하는 행동을 막기 위해 영국법원에서 ITF의 캠페인을 중지시키는 명령을 받아내려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영국 대법원에서 패배당했고, 전세계 항만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은 MUA투쟁은 더욱더 힘을 얻었다. 이제 투쟁은 시작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 투쟁은 호주의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전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을 위해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투쟁이었다!


90년대 최대의 승리 ­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

5월 4일 호주 대법원이 해고된 MUA 노동자들의 전원복직 판결을 내림으로써, 이른바 ‘항만개혁’을 빌미로 한 정부와 자본의 노동조합 파괴공세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5월 6일, 현정부에 의해 도입된 새로운 노동법에 항의하고 MUA투쟁을 지지하는 대규모 집회가 10만명 이상의 노동자들과 지역사회 지지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집회에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참여했고, 참가자들은 하워드 정부의 작업장관계법(WRA)과 항만노동자에 대한 공격에 항의함으로써 호주 노동자들의 연대와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대한 투쟁의지를 재확인하였다. 이는 하워드 정부의 노동대중에 대한 공격에 관해 노동조합원과 지역사회 성원들이 느끼는 분노를 반영한 것이다.
97년에 미국의 UPS 팀스터파업이 미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했듯이, 이번 호주 항만노동자들의 투쟁은 호주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상징한다. 이 투쟁은 신자유주의적 보수정권과 그에 동화되어 가는 사회민주주의(호주노동당ALP)에게서는 진정한 노동정치의 대안이 존재하지 않으며, 노동자계급의 권리는 그들 자신의 힘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와 동시에 지난 2월 영웅적 투쟁을 종결한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의 투쟁이 호주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다시 되살아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투쟁이었다.
리버풀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지구화의 시대에 자본과 국가에 의한 신자유주의 공세가 노동자․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는 한, 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호주 항만노동자들의 투쟁은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전세계 노동자들의 투쟁이라는 대장정의 한 장을 장식하였다. 본질적으로 MUA투쟁은 한국의 5~6월 총파업투쟁과 함께 전세계적으로 더욱 전투화되는 노동운동의 한 흐름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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