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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7번 : [77호/알림-소식] 빼앗긴 6월 항쟁의 계승자는 바로 노동자 민중이다!
글쓴이: 노동자의 힘 등록: 2002-06-10 00:00:00 조회: 1209

빼앗긴 6월 항쟁의 계승자는 바로 노동자 민중이다!
6월 항쟁 제15주기를 맞이하여


2002년 6월 10일
노동자의 힘



“6월 10일, 모이자. 1시 광화문”, 6월 항쟁 15주년을 기리기 위한 마라톤 플래카드가 아니다. 16강 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될 미국과의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전 국민이 모이자는, 얼마 전 KT 사유화지분 전량을 매수한 SK독점재벌의 선전문구다. 그렇게 온 나라가 월드컵에 파묻혀 떠들썩한 가운데 주한미군의 2만볼트 고압선에 사지가 잘려나간 전동록 건설노동자가 한 많은 육신을 뒤로하고 운명을 달리했다.

오늘은 5․18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이 장기집권을 획책하던 87년 6월, 전 민중이 ‘호헌 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분연히 일어난 지 15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 민중의 분노에 대한 고육지책으로 노태우는 직선제 수용을 중심으로 한 ‘시국수습을 위한 8개항’을 선언하였지만, 임기가 끝날 때까지 6․29선언의 민주화조치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6월 10일 밤부터 시작되어 15일까지 5박 6일 동안 진행된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민중들의 희망이었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그 희망의 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치열한 토론과 3차투표 끝에 농성단은 해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기만적인 ‘6․29선언’을 넘지 못한 채, 국면은 ‘민중 자신의 직접적인 투쟁을 통한 민주주의 쟁취’에서 자신의 지배자를 뽑는 형식적 민주화인 ‘대선’으로 급격히 옮겨갔다.

진격하던 민중들은 투쟁의 상대를 잃고 서성거리고 있는 사이, 신군부의 후계자가 권력을 합법적으로 강탈했다. 87년 대통령 선거는 메가톤급 대중조작이 판을 친, 사상유례 없는 불법, 부당 선거로 끝났다. 회유와 협박을 동원한 야권분열 공작과 정치적 반대자를 향한 용공음해, 온갖 수단을 사용한 지역감정 조장과 관권, 금권을 동원한 부정 선거 등 그 수법과 강도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87년 6월 당시 이른바 ‘항쟁’의 주역이었던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6월 항쟁은 4월 혁명과 부마민중항쟁, 그리고 5월 민중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은 ‘독재타도 민주쟁취’의 분수령을 이룬 역사적 항쟁이라 자찬한다. 적어도 6월 민중항쟁이 6․29선언에 의해 왜곡되지 않을 때까지는 그렇다. 그러나 그 투쟁의 정치적 성과는 어디로 귀결되었는가? 상층의 주역 가운데 일부 정치모리배들은 당연히 ‘6월 항쟁’을 미화하고 싶고 그로 인해 민주주의를 성공적으로 쟁취했다고 자랑하겠지만, 지난 15년 동안 우리의 정치 사회 경제가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가?

민중 주도로 이루어진 6월 항쟁이었으나, 그 정치적 성과는 권력내부에 있었거나 권력의 비호 속에 있었던 사람들 수중으로 떨어졌다. 이들이 민주를 외치는 민중의 열망을 외면한 채,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정치꾼들끼리의 야합과 타협으로 3당합당, 이른바 문민정부로 그 색깔을 달리하며 민중을 들러리서게 한 것이다. 이른바 ‘6월 항쟁’의 성과로 일컬어지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의 직선․문민․국민의 정부는 개발독재를 비호하고 노동자 민중을 수탈하며 경제위기를 빌미로 노동자 민중을 탄압하며 광포한 신자유주의를 관철시키고 있지 않은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떨쳐 일어선 ‘6월 항쟁’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결국 가진 자들의 개인적 자유만을, 그들의 제도정치 참여의 폭만을 넓히는데 기여하였고, 오랜 독재기간 동안 동원체제 속에 희생되어 온 노동자 민중에게는 허구적인 자유만이 주어져 또다시 거리로 뛰쳐나가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소시민적 개량주의자’들이 정치적으로 주도했던 6월 항쟁에서 민중은 주역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지배세력에게 이용만 당하였다.

민주화 과정에서 일부 성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분명 첫 단추는 잘못 끼워졌다. 6월 항쟁의 결과가 군사정권의 연장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후 여소야대와 5공 청산의 결과가 3당합당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 결과 민주화에 대한 기대는 급격하게 대중적 분노로 나아갔다. 민주화는 반동의 물결 속에서 퇴색되고 개혁은 온갖 추문으로 실종되었다.

이렇게 하여, 6월 민중항쟁도 자기를 완성하지 못했다. 미완의 4월 혁명과 쓰라린 6월 항쟁은 너무나 닮았다. 맨손으로 일어난 민중이 포악한 정치권력을 허물어 낸 것은 똑같지만, ‘죽 쒀서 개 준’ 꼴로 되어버린 점도 비슷했다.

그럼에도 6월 항쟁으로 인해 열려진 정치적 공간은 개발독재 과정의 최대 희생양인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등장을 가능케 했다. 6월 항쟁 이후 87년 7~9월 노동자대투쟁은 임금인상과 노조결성, 어용노조의 민주화를 주 내용으로 하였다. 바야흐로 소시민적 개량운동으로 점철되어진 6월 항쟁의 한계를 딛고, 노동자 민중이 혁명광주의 정신을 계승한 유일한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게 된 폭발적인 투쟁을 가능케 한 것이다.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은 극히 형식적인 논의에 그쳤으며 민주화의 질적 향상을 위한 내용을 담아내지 못했다. 6월 항쟁에서 민중들이 내세웠던 민주, 민중, 통일이라는 세 가지 화두는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에 있으며, 이러한 과제를 좀더 확장시켜 ‘민주주의’, ‘민중복지’, ‘노동해방’을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위한 노동자 민중투쟁의 과제로 설정하는 것이 6월 항쟁을 진정으로 계승해 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 그것은 보수정치 제도정치 지배권력에 맞서 노동자 민중의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과 노동자 민중의 노동권, 생활권, 건강권을 쟁취하는 민중복지를 쟁취하는 것, 그리고 모든 억압과 착취를 벗어나기 위한 노동자 민중의 혁명정신을 통해 노동해방 세상을 건설하는 과정에 우리 모두가 함께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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