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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번 : [84호/노동자세상] 그래 집단요양 투쟁이다. |
글쓴이: 이기만 |
등록: 2003-02-20 00:00:00 |
조회: 1544 |
“그래 집단요양 투쟁이다”
이 기 만
두원정공노조 수석부위원장
1. 기아사태와 경제위기를 빌미로 한 피비릿내 나는 구조조정
단행
구조조정의 방향: 인원정리
회사는 노조와의 다음과 같은 협약을 이용하여 희망퇴직이라는
명목으로 조합원들을 협박하며 퇴직을 강요하였다.
“회사는 2000년 2월 말까지 인원에 대한 고용안정을 보장한다.
단 회사의 사정으로 불이행시 1/4분기 희망퇴직조건(지급기일
14일 이내) 이상으로 희망퇴직을 모집한다. 기타 사항은
고용안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한다.”
- 단체협약 중 고용안정 부분 인용
회사는 98년 경제위기가 닥친 후 회사가 2000년이면 망할 것
같이 떠들었다. 물론 그때는 정말 회사가 망할 것 같았다. 기아
사태로 인하여 매출은 절반이하로 떨어진 상태에서 기계가동률은
기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물론 그것은 기아자동차의 영향으로 인하여 기아자동차 쪽으로
나가는 물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사가 망한다고
하는 것은 기아자동차의 영향으로 인한 단기적 위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위기는 다른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보쉬라는 다국적 기업이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낸 펌프에 우리의
시장을 완전히 빼앗길 것이라는 위기에서였다.
2000년이면 보쉬가 펌프시장을 완전히 장악할 것이고 기술에서
밀린 우리 회사는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위협이었다. 퇴직금을
지급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위협도 가해왔다. 당장의 심각한
생산량의 저하와 미래에 대한 불투명은 두원정공 노동자들을
뒤흔들어 놓았다. 어쩌면 그 동안 축적해온 유일한 재산인
퇴직금마저 한푼도 건져내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현장에
퍼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이먹고 오래되어 퇴직금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는 노동자들부터 회사를 그만두기 시작하였다. 이런
식으로 회사를 떠나간 노동자들이 97년 959명에서 2002년
623명으로 줄어들어 35%나 되었다.
물론 2000년에 회사는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출은 97년
수준으로 회복되어 떠나간 노동자들을 대신할 또 다른 무언가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생산라인 형태의 변경이었다. 끊임없이 줄이고, 좁히기를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그 동안 줄어든 인원을 대신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갑자기 회복된 매출과 줄어든 인원
속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던 생산 방식을 라인
형태의 변경으로 장시간 노동을 줄여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노동강도 강화를 통한 인건비 절약 차원에서의
개선이었다.
끊임없이 꾸준하고도 치밀하게 개선되기 시작한 라인은
노동자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엄청난 노동강도 강화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당시는 기계가 좁혀지고 콘베어로 연결되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원이 남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한사람에게 동료의 일까지 떠맡기는 형식으로 노동밀도를 높여서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짜먹기 위한 치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된
더러운 수법이었다. 노동강도 강화의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하였다. 생산량은 경제위기 전 생산량과 거의 비슷한
생산을 하면서 인원은 엄청나게 줄어있었고, 잔업과 특근까지도
끊임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자본의 노동통제는 정말 치밀하고
끝이 없다. 생산라인의 형태 변경을 통하여 잔업, 특근을
적절하게 조절하고도 생산량이 모두 나오기 시작하자 이제는
잔업과 특근을 가지고 새로운 노동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 중심으로 선택해서 잔업과 특근을 시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지금 잔업과 특근을 하지 않고는 안 되는
임금구조를 가지고 있다. 잔업과 특근을 모두 해야만 생활이
유지 되도록 임금구조가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자본은 이것을
철저하게 이용한다. “특근 올리고도 나오지 않은 사람은
다음부터는 특근을 시키지 않겠다”, “근태가 좋지 않은 사람은
잔업을 시키지 않는다”, “지원부서는 필요 인원만 특근과
잔업을 올려라” 등등.
노동자들은 이제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 잔업하고
특근하기 위해서 눈치를 보면서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말없이 죽은 듯이 기계처럼
움직여야 한다.
철저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강화된 노동강도 속에서
기계처럼 일하기 시작한지 3년 우리의 현장은 이제 새로운
고통으로 신음하게 되었다. 바로 집단적 작업환경의 악화속에서
피어난다는 근골격계 직업병이 그것이다.
2. 개별 요양투쟁
집행부가 바뀌고 새롭게 일을 시작하자마자 허리가 아프다고
조합을 찾아온 조합원이 있었다. 그 동안은 산재 인정을
받으려면 먼저 조합에서 산재인지 여부를 판단해서 산재라고
인정받아야 했고, 그 다음 회사에서 산재여부를 판단해서 산재로
인정받으면 요양신청을 해주는 식이었다. 요양신청을 해서
산재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확실한 공장내 사고에 의한
대형재해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는 회사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근로복지 공단에 산재요양 신청을 해주면 모든
것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회사와의 끊임없는 싸움을 통하여 조합을 찾아온 조합원을
회사의 의견을 무시하고 근로복지 공단에 요양신청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근로복지공단은 퇴행성 질환과
팽륜은 직업병이 아니라는 변명과 함께 불승인을 내리고 만
것이다. 우리는 배신감을 느꼈다. 우리의 적은 회사인줄
알았는데 더 큰 적이 복지공단이란 탈을 쓰고 존재했던 것이다.
우리는 치밀하게 재심자료를 준비하여 재심을 청구하였다. 역시
불승인이었다. 후에 재심에서 승인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재는 개편이라는
것이다.
법적으로 요양이 안 되는 질병이 명시되어 있어 어쩔 수 없다는
공단의 이야기에 위안을 삼고(우리가 잘못해서 안된 것이 아니고
사회적 한계라는 생각에), 산재승인을 받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치료받고 있는 조합원을 위로하였다. 몇 달 후에 허리를 다친
조합원이 있어 또다시 요양신청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퇴행성도 없고, 팽륜도 아닌 디스크라는 이야기에 당연히
요양승인이 될 줄 알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승인이었다. 불승인의 이유로 제시한 근거가 과거에
개인적으로 꾸준하게 허리를 치료해 왔기 때문에 개인적
질병이라는 것이다. 황당했다. 라인에서 근무하면 누구나 어느
한 곳은 아프게 마련이고 산재요양 신청이 까다롭고 어렵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병원을 다니면서 치료하는 조합원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돌파구가 필요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갖고 병원과 공단을 오고갈 때 집단요양
투쟁이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집단요양투쟁이란 무엇인가 들어보자.”
3. 집단요양 투쟁
처음에 개인의 요양승인을 위해 관심을 가지게 된 집단요양
투쟁이야 말로 요양을 승인받지 못한 조합원들의 고통과,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집단적 작업환경 악화로 노동력을
상실해 가는 조합원들을 해방시킬 유일한 무기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집단요양 투쟁이다.”
간부 집체교육을 시작으로 집단요양 투쟁을 준비해 갔다.
조합원교육, 설문조사, 현장조사, 인간공학 평가, 조합원 면담,
1차 검진 등등 집단요양투쟁을 위한 준비가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교육이 진행되면 될수록 조합원들은 집단요양 투쟁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그 동안 일하면 당연히 아픈 것으로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치료받거나 참고 지내오던
것이 어쩌면 노동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조합원들은
놀라고 있었다. 조합이 이런 일도 하는 구나. 정말 믿음이 간다.
조합원 교육은 이런 교육을 해야해. 등등 수많은 격려의 말들이
오갔다.
약 4개월의 연구조사 결과 현장의 84.5%가 직업병 유소견자로
분류되었으며, 직업병으로 강력히 의심되는 조합원만도 31.4%로
조사되었다. 또한 이중에서 52명은 당장 치료받지 않으면 안
되는 질환자로 조사되어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조합은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조합원들을 면담하여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지금 당장 큰 고통을 느끼고 있는 조합원
22명을 선정하여 집단요양을 신청하였다.
물론 이 22명 중에는 과거에 불승인 나서 고통받고 있던
조합원도 포함되었다. 이번에 승리하지 못하면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배수진을 치고 환자들을 만났다. 이제
그 누구도 해줄 수 없다. 동지들의 문제는 동지들이 노력하고
싸워서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환자들을 독려하고 힘있게
싸울 것을 주문하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환자들은 공단에
가서 농성하기 시작했다. 질병 진단이 늦어져 함께 집단요양을
하지 못한 조합원 1명을 제외한 21명이 반씩 돌아가면서 하루는
치료를 받고 하루는 공단에 가서 농성하는 방식으로 자체적으로
결정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요양에 들어간 환자들은 그 동안 시키면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일해온 자본이 말하는 그야말로 모범 근로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조금씩, 싸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투사가 되어갔다.
그러는 사이 현장은 환자가 병원에 가만히 있지 않고 밖으로
다니면서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닌다는 악의적 소문으로
집단요양투쟁을 무력화시키려는 기도가 일어나고 있었다. 전부다
꾀병환자들이며, 저들을 저런식으로 전부 요양승인을 해주면
현장에서 일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식으로 조합활동을 하면 회사도 말아먹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같이 떠돌았다. 나이먹은 조합원을 중심으로 현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조합은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근골격계 직업병의 특성과 환자들이 공단을 오가면서
싸울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 홍보물과 현장 순회활동을
통해서 홍보하였다.
집단요양투쟁은 질환자 개개인을 요양승인 내주기 위한 투쟁이
아니다. 그 동안 끊임없이 인원을 줄이고도 더 줄여야 한다고
떠벌리는 자본에 재갈을 물리는 투쟁이며, 지금과 같이
노동강도가 악화된 현장에서 조금 더 있다간 현장 모든 노동자가
재해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투쟁이며, 인원을 더
뽑고, 현장을 생산중심의 라인에서 인간중심의 라인으로
바꾸고자 하는 투쟁으로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투쟁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홍보하면서 집단요양투쟁은 환자를
위한 투쟁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투쟁임을 각인시켰다.
환자들의 힘있는 농성투쟁과 조합간부들이 끊임없이 현장순회
교육을 하는 사이 우리가 요양신청 한 21명 전원에게 요양
승인이 났다.
4. 앞으로의 과제
이제 우리는 현장을 일할 맛 나는 현장으로 바꾸어
산업재해로부터 해방시키고, 평생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현장으로 바꾸어 내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 집단요양 투쟁은
지금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를 재해로서 인정받게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재해를 일으키는
요인을 바꾸어 내기 위한 요구를 관철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 대해 요양을 해주기만 한다면 남아서
일하는 사람들이 또다시 그 질병을 앓을 수밖에 없으며,
치료하고 복귀한 조합원 역시 또다시 그 질병을 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작업환경을 바꾸기 위한 투쟁은 가장 중요한
투쟁일 수밖에 없다.
지금도 회사는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불투명성을 운운하면서
인원을 줄이려 하고 있다. 하지만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미
우리의 현장은 더 이상 노동강도를 강화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오히려 평균 약 25%의 초과
작업량 지수를 기록함으로써 지금보다 매출이 25%가 줄어든다고
해도 지금의 잔업과 특근을 모두 하면서도 현재의 인원을
유지해도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상태로 계속해서 작업할 경우 우리의 현장은 그야말로
산재공장으로 변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제 근골격계
직업병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대두된 집단적 작업환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을 벌여 나가야 한다. 끊임없이
줄이고, 좁히며, 콘베이어로 연결하여 통로조차 확보하지
못하도록 만든 우리의 현장이 직업병 발병의 핵심요인으로
등장한 이상 우리는 이것을 바꾸고자 하는 싸움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한/노/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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