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번/역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 이후의 80년(2)
제1부 약간의 방법론적․이론적 고찰
바만 아자드/ 사회주의 이론연구가
1. 방법 문제에 관하여
과거의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성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느 것이나 책임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이는 곧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전제와 가정을 명확히 정의하고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전에 명시된 전제와 가정에 기초해서만 이러한 평가는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의 사회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자칫 공허한 논쟁이나 주관적인 수사(修辭)에 빠져 버린다.
실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인류의 역사와 사회를 연구할 때에는 맑스의 변증법을 엄밀하게 견지할 필요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칙들이 그의 ꡔ경제학비판서설ꡕ(Einleitung zur Kritik de Politischen Okonomie; 1857) 속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들 원칙들 가운데 두 개가 인류의 역사와 사회에 관한 모든 과학적 연구의 기초가 된다.
첫 번째 원칙은, 맑스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과학적인 연구에서
“이론적 방법에서도 주체가, 사회가 언제나 전제로서 표상에 떠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1)
사회 현상을 연구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가 생활하고 있는 시대와 사회의 성격을, 그리고 그 시대와 사회가 자기의 사고와 논리에 각인시키고 있는 선입관의 특징을 충분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맑스는 말하고 있다. 나아가, 사회 속에서의 자신의 이데올로기적․계급적 입장을 인식하여, 현상을 연구할 때의 자신의 계급적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의 사상에 의하면, 우리 시대의 가장 진보적인 계급인 노동자 계급과 그 가장 전위적인 정치조직의 세계관에 기초할 때에 우리는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 세계관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시대 및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역사 단계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결과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과학적인 개념의 통일물이 된다. 변증법과 사적유물론이라는 세계관에 기초하여 지난 150년에 걸쳐 발전한 개념 및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이 유효한 이론적․과학적 도구의 실례(實例)이다. 물론 이러한 개념도 당연히 새로운 발전을 고려하여 재검토되고, 강화되고, 더욱 정교한 것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작업은, 노동자 계급 전체의 역사적인 이익을 진전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 시대의 가장 진보적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과학적인 세계관에 기초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도 명백하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주지주의(主知主義)에 기초해서는 사회주의의 과거의 발자취를 과학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이 원칙의 중요성이 있다. 그러한 평가는 소시민적인 감정론에도, 낭만주의에도, 완벽주의자의 이상론에도 기초할 수 없다. 그것은 국제적인 노동자 계급 및 그것을 지도하는 정당의 유물론적이고 계급적인 관점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견해나 입장을 단순히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획득될 수 없고, 세계적 규모에서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비노동자 계급적인 모든 관점을 객관적․실천적으로 거부하고 자기비판의 원칙을 계속 적용함으로써만 비로소 획득될 수 있다. 사회주의 내부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그것이 계급투쟁과 직접 실천적으로 결합되지 않으면, 지배적인 부르주아적 세계관의 틀 내에서의 단순한 지적 유희로 왜소화돼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직접 결합하고 투쟁 과정 속에서 계속적․비판적으로 그 방침을 수정하는 것이 과거를 과학적으로 평가하고 현재의 위기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유일하고 옳은 방책이다. 이 이외의 입장에서 사회주의의 과거 문제를 다룬다면, 어떠한 입장이든 그것은 필연적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주관적인 선입관에 침해되어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로부터 일탈해 버릴 것이다.
맑스에 의해서 제시된 두 번째의 방법론적인 원칙은 사실의 인식에 관한 것이다.
“가장 추상적인 범주들조차도, 그것이ꠏꠏ실로 그 추상성 때문에ꠏꠏ모든 시대에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추상 규정성 자체에 있어서는 역시 역사적 관계들의 산물이고 단지 이러한 역사적 관계들에 대해서만, 그리고 단지 이러한 역사적 관계들 속에서만 완전타당성을 갖는다.2)
이는, 사회 현상 및 자연 현상은 고유한 질을 가진 정적(靜的)이고 독립적인 것의 집합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총체적인 사회관계 및 자연관계 속에서 부단히 변화하는 운동으로서 간주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고, 따라서 그 실체와 질은 변화하고, 각 역사적 단계에서의 모순과 직결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어떠한 현상도 그것을 발생시킨 존재론적인 기초나 역사적 상황 혹은 모순과 분리된 형태로는 과학적으로 분석될 수 없다. 그와는 반대로, 맑스의 과학적 방법은 (현실적인 사회주의 모델, 민주주의, 당, ‘스탈린주의’ 등등을 포함한) 모든 사회 현상을 그러한 틀 속에서 그 논리적 기반을 구성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단계에 있어서의 모순들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분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국지적이고 부분적인 ‘자명한’ 현실을 긁어모으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을 에워싸고 있는 객관적인 현실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모순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연구는 현실의 가장 보편적인 (가장 객관적이고 복잡한) 측면으로부터 착수하고, 그런 후에 서서히 현실의 보다 특수한 요소들로 범위를 좁혀가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의 각 단계에서 고려해야 할 결정적인 사항은, 개개의 현상을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변증법적인 기반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분석하기 위해서, 개개의 현상에 대해서 보다 보편적인 사항이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해석하여 분석 속에서 통합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코 ‘스탈린주의’와 같은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써 과거의 사회주의 모델에 대한 비판을 시작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스탈린주의’와 같은 현상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내에서의 일련의 경위를 이해할 필요가 있고, 그를 위해서는 당과 노동자 계급과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를 위해서는 각 단계의 사회주의를 형성하는 내부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게 되고, 그를 위해서는 사회주의 체제의 현실적인 사회적․역사적 모순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를 위해서는 세계적 규모에서의 보다 보편적인 모순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맑스주의의 방법은 이러한 절차를 역순으로 수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원칙들이 변증법적이고 동적인 탐구 방법과 정적이고 추상적인 탐구 방법의 본질적인 차이를 구성하는 것이다. 오늘날 공산주의 운동의 과제로 되어 있는 이러한 과학적인 연구는 필연적으로 위에서 서술한 방법론적 원칙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현실의 사회주의에 대한 과학적 비판의 이론적 기초
‘과거의 이론의 무효성’을 기정사실로 한 위에서 과거의 사회주의에 대해 갖은 비판을 다 하는 것이 오늘날 다양한 방면에서 유행으로 되어 있다. 유감이지만, 이러한 현상은 반공산주의․비공산주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맑스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현저하다.
‘과거의 이론의 무효성’을 보편화하는 것은 맑스․레닌주의가 과학적인 근거를 갖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어떠한 의미에서도 ‘과거의 이론’이 그 유효성을 상실했음은 명백하지 않고, 그러한 유효성을 상실한 징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명백하지 않다. 그러한 주장이 사회주의 국가들에 위기가 발생한 것을 근거로 하고 있다면, 해야 할 일은 그 위기의 역사적인 기초를 조사하는 것이고, 위기를 출현하게 한 주체적인 요인과 객관적인 요인을 준별하여 그들 요소 가운데에서 이론에 기초한 주체적인 요인을 분리․검토하는 것일 것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작업은 어느 것 하나 결코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고, 그 결과 현 위기의 이론적 근원에 관한 주장은 미숙하고 어떤 과학적 근거도 없다.
둘째로, 그러한 작업이 이미 끝났다면, 그 결과로서 ‘과거의 이론’의 어느 부분과 어떤 점이 오류이고 무효인가를ꠏꠏ어떤 가정이, 어떤 논거가, 어떤 결론이,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현실의 어떤 측면이 그 이론과 관련되어 있는가를ꠏꠏ제시해야 할 것 아닌가? 맑스의 잉여가치론은 무효인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분석은 잘못되어 있는가?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현실에 합치하지 않는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당 이론에는 결함이 있는가? 사회주의 건설의 방침에 관한 이론은 잘못되어 있는가? ...
‘과거의 이론의 무효성’을 싸잡아 논의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수백 가지 이론을 전부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반화는 맑스․레닌주의라는 ‘과거의 이론’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도 과학적인 논의로서는 간주될 수 없다.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를 향한 인류사회의 발전단계에 관한 계급적인 분석, 인간의 ‘노동’이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을 형성하는 중심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라는 사실의 발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이해하기 위한 과학적 수단으로서의 ‘착취’와 ‘잉여가치’ 개념의 정식화, 프롤레타리아트를 자본주의 ‘매장인’ 및 사회주의 혁명의 원동력으로 인정하는 것, 기타 수백 가지의 복잡한 개념과 이론은 단순히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상상에 의해서 주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객관적인 현실에 대해서 갖는 유기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멋대로 버리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현대 사회주의 체제에 관한 이들 개념과 이론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초를 이루고 있고, 인류사회의 연구에 과학적인 방법론을 변증법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발전되어 온 것이며, 마찬가지의 과학적인 방법론을 적용함으로써만 부정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어떠한 현상도 그것만으로 홀로 발생한다든지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변증법적 사고의 원칙은 가르쳐주고 있다. 이는 특히 과학적인 연구과정에서 진실이다. 과학의 역사는 ‘과거의 이론’은 언제나 예외 없이 새로운 이론이 출현하고 발전한 후에야 비로소 부정된다는 것을 반복해서 증명해 왔다. 일찍이 어떠한 과학적 이론도 보다 과학적인 새로운 이론에 의해서 부정되지 않은 채 그 유효성을 잃는 일은 없었다. 어떤 이론이 기존의 현상이나 새로 나타난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유효성이 상실되었음이 증명된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이론의 집합체로서의 맑스․레닌주의가 유효성을 상실했다면, 그것은 맑스․레닌주의가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을 때에 증명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어느 한 사람도 이러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이론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맑스․레닌주의가 논박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 실천의 역사 전체에 대해서 반항을 시도하는, 과학사상 최초의 행위이다.
‘맑스․레닌주의의 무효성’이라는 주장이 오로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의 과거 10년 간의 부정적인 상황의 전개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쏘련 및 기타 동유럽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해체되고, 궁핍과 경제적 문제에 관한 인민의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가 일어나고, 그들 국가에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부활한 것, 이러한 것들이 ‘맑스․레닌주의의 무효성’의 ‘증거’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의 전부이다. 바꾸어 말하면, 단순한 특정 기간의 특정 국가들에서의 일련의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관찰 결과가 그러한 광범한 이론적 보편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문제는 이러한 보편화가 가설이나 이론의 범주에 머물지 않고, 이러한 현상이 생긴 논리적․역사적 맥락을 일체 도외시한 채 철학이나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연역 방법은 오늘날 어떤 과학 영역에서도 수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100여 년 전에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서 비과학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보다 과학적인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지 않고 ‘맑스․레닌주의의 무효성’을 선언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각하든 못하든, 단지 하나의 목적 즉 맑스주의 이전의 낡은 이론을 부활시켜 그러한 이론에 기초하는 구체제를 정당화하는 데에 봉사하는 자들이다. 현재의 조건 하에서는 과거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사회주의로의 새로운 길을 그리는 데에서, 공산주의자의 지침․나침판이 되는 것은 현대의 가장 혁명적인 과학으로서의 맑스․레닌주의 밖에 없다. 이러한 과학적인 이론 없이는 과거의 사건에 관한 어떠한 분석도 계급적인 기초를 잃고, 따라서 그 객관성을 결여해 기회주의의 혼돈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특정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발생한 최근의 상황이 과거의 몇몇 개념이나 경험의 재평가를 불가피하게 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세계관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서의, 그리고 과학적인 관점으로서의 맑스․레닌주의의 ‘무효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계급투쟁은 객관적인 현실임과 동시에 변증법적인 역사 발전의 불가결한 일부분이고, 우리의 주관적인 심리상태와는 무관하게 계속되는 것이며, 그것은 공산주의 사회가 성립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 투쟁에서 맑스․레닌주의는 계속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과학적인 세계관으로서,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그리고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인류를 해방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일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의 이론적 기초에는 약간의 변경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경은 새로운 경험과 조건에 비추어 그것을 확장하고 세련되게 만드는 방향에서만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레닌도 또한 지난 세기 말에 마찬가지 과제에 부딪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레닌은 맑스와 엥겔스의 이론적 개념의 ‘무효성’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론에 기초하여 제국주의 시대의 계급투쟁이라는 현실에 보다 정밀하게 적응하도록 그들의 개념을 세련되게 만들고 확장함으로써 운동의 앞길을 개척하는 데에 성공했다. 역사는 다시 이 임무를 공산주의자에게 과하고 있다.
3. 모델 문제에 관해서
사회주의적인 발전 모델의 문제에 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의 추상적인 보편화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많은 맑스주의 사상가가 맑스․레닌주의와 그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을 옹호하면서도 ‘80년에 달한 사회주의 모델의 실패’에서 현재의 후퇴의 원인을 찾고 있다. 이러한 방법도 우리가 보는 바로는 분석을 요구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무엇보다도 우선 세계의 다양한 나라에도 쏘련과 같은 하나의 국가 내에도 단일한 보편적인 사회주의 모델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가정은 이론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오류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최대의 모순은 그것이 쏘련과 같은 단일한 국가에 적용될 때에조차 ‘사회주의 이론’을 그 현실의 ‘모델’에 대치시키는 데에 있다.
이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사회적․경제적 모델의 성공 여부를 평가할 때 우리는 우선 어떠한 이론적인 전제가 그 모델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는가, 어떠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그 모델이 나타났는가, 어떠한 모순과 역사적 필연성을 발생시켰는가, 어떠한 역사적․사회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하고 있었는가를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모델이든, 그 성공 여부는 그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던 때의 객관적인 조건을 서로 대조해 봄으로써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어떤 사회적․경제적 모델의 성공 여부에는 외부적 요인들과 그 영향이 개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사회적․경제적 모델도 진공 속에서 태어나 발전했을 리가 없다. 세계적 규모의 모순과 사회 내부의 과거 및 현재의 사회적․역사적 모순 모두가 모든 모델의 성공 여부에 대해서 모든 발전 단계에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들 요소에 더해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는 사회에서 그 모델을 적용․발전시키는 역사적 책임을 지고 있는 전위당의 능력이다. 이는, 그 전위의 지식과 경험의 수준, 그리고 모델의 이론적․과학적 전제를 견지하는 정도에 의존하고, 동시에 그 모델의 일반적인 요구를 각각의 발전단계에 있는 사회의 특정한 객관적․주체적 조건에 따라서 적용하는 능력에 의존한다.
이들 요인을 염두에 둔다면, 어떤 모델의 성공 여부를 단정하기 위해서는, 책임을 가지고 그것을 수행한다면, 추상적인 일반화에 기초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모델이 실행되어 있는 사회의 역사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문화적 특징에 관한 가능한 한 상세한 조사와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모델의 실패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모델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은 외부적 요인들의 영향도, 이론적 전제가 무효였던 것도, 사회의 전위의 잘못도 아니고, 모델 자체의 내부에 있는 극복할 수 없는 구조적 모순의 결과임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바꾸어 말하면, 문제의 모델이 모든 외부적 요인의 영향과 상관없이 그것 자체의 내부적 모순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실패했음을 논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 모델의 실패와 ‘보다 좋은’ 모델의 탐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논쟁의 이러한 해결 방식은, 우리가 아는 한, ‘80년에 달한 사회주의 모델’에 관해서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은 이 방향을 향해 한 걸음도 내딛고 있지 않다. 현재 실패를 주장하는 유일한 근거는 몇몇 사회주의 국가에서 발생한 당장의 역사적 후퇴의 결과 생겨난 전체적인 환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과학적인 세계관․이론․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및 어떠한 계급투쟁도 그것을 이끄는 혁명적인 이론과 사회적․경제적 모델 없이는 발전하지 않는다는 기지(旣知)의 사실에 의하면, ‘80년에 달한 사회주의 모델의 실패’를 성급히 주장하는 것은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 ‘보다 좋은’ ‘보다 과학적인’ 세계관과 사회적․경제적 모델이 ‘발견’될 때까지 사회주의를 지향한 투쟁을 방기하도록 호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 하나, 그러한 논법으로부터 생기는 중대하고 경계해야 할 귀결이 있다. ‘사회주의의 이론’을 말할 때 우리는 실제로는 객관적 현실의 특정 측면에 합치하는 무언가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이론도 단순히 어떤 이상을 개념화함으로써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란 실로 맑스와 엥겔스가 사적유물론이라는 운동법칙의 발견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실제로 그 가능성과 존재의 필연성을 논증했을 때 공상적인 이상으로부터 과학적인 이론으로 변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사회주의는 ‘공상’으로부터 ‘과학’으로 바뀌었다.
나아가 제2단계로서 1917년에는 이 사회주의라는 ‘이상’은 다시 변화하여 이번엔 과학적인 이론─즉 가능성─으로부터 실제의 현실로 전화되었다. 10월 혁명과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창설에 의해서 사회주의는 세계의 수백만 명의 인민의 생활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현대의 인류사 전체 속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기는 현실로 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는 그 결함들에도 불구하고 과거 80년에 걸쳐서 계속 존재하면서 적어도 사회주의의 이론과 실천의 일정한 대응을 확립했다. 현재 이 80년 이상에 걸쳐서 존재한 현실이 이론으로만 축소될 뿐 아니라, 이 ‘이론’은 과거 100년에 걸쳐서 그 유효성을 보여주는 물질적인 증거를 만들어 내는 데에 실패했다고 주장되는 것은, 역사에서의 한 걸음이 아닌 두 걸음의 후퇴를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실제로는 사회주의 이론 그 자체의 무효성을 암암리에 주장하는 것이다.
80년에 걸친 사회주의의 현실적 역사를 거친 오늘날 그 이론을 실천으로부터 분리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가 기초해 온 그 이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는 지금까지 ‘이상’이라고 하는 형태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공상적’ 사회주의로의 역행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패배를 인정함과 동시에, 장래에 대한 어떤 막연한 소망에 집착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자유주의자나 부르주아 계급의 일부를 포함한 많은 선의의 사람들로부터 “사회주의는 이론적으로는 아주 좋지만 현실적으로는 유효하지 않다”는 말을 들어 왔다. 이러한 주장은 ‘80년에 달한 사회주의 모델의 실패’라고 하는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는 바로 한 걸음 나아갈 뿐이다. 그것은 이 명제를 제출하는 사람들은 결코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패배감에서 벗어나려고 자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러한 주장의 뒤에 숨어 있는 최대의 위험성이다.
‘80년에 달한 사회주의 모델의 실패’라는 명제를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계급적 적(敵)은 결코 공상가 따위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그들은 현실을 아주 명료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고 싶은가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다. 새롭게 출현한 환멸스러운 공상가들과는 달리 그들은 과거에 사회주의가 존재했음을 부정하는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에 그것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을 저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 계급에 대해서 사회주의는 과거에 분명히 존재했음을, 그리고 현실적으로 존재한 사회주의가 실로 ‘타고난 결함’─자본주의 것보다도 질이 나쁘고 어떠한 미래도 전망할 수 없게 하는 결함─을 면할 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라고 믿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ezinsky, 전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의 국가안보 보좌관: 역자)는 이 ‘사회주의의 타고난 결함’이라고 하는 명제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적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쏘련이 안고 있는 공산주의 체제의 딜레마[결함이라고 읽으라]란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 되고, 정치를 안정시키면 경제가 잘 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3)
이것을 이론적인 비판이라고 말하려고 한다면, 그 주장은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근본에 체제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 사회주의적인 생산관계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생산력의 성장․발전을 저해하는 것이라는 것,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기본원칙─즉 생산수단의 공적 소유, 계획경제, 국제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각자는 능력에 따라서 공헌하고, 공헌에 따라서 수취한다’고 하는 원칙─이 자기모순적이고 적용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증명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사는 증명을 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어리석은 주장을 결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이론적인 부정이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인 공격,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파괴를 기도할 뿐 아니라 ‘이론’이나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까지도 파괴하려고 하는 공격임은 아주 명료하다. 따라서 이 ‘실패’ 명제는 사회주의의 과거의 약점에 관한 순수하게 이론적인 논의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미래에 대해서 계속되고 있는 공격의 일부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객관적인 현실에 기초함으로써만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역사적인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하고, 엄격주의나 공상주의를 배제할 수 있다. 현실은 “어떠한 새로운 사회…도 피를 흘리지 않고 오류와 죄악 없이 태어나 발전할 수 없는”4) 것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80년의 사회주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해야 하는 일은 과거의 ‘결함이 많은’ 사회주의를 잘라버리고 나서 새로운 ‘결함이 없는’ 미래의 사회주의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1917년 이래 인류사에 계속 존재해 온 현실의 사회주의―그 성과도 결함도 모두 포함해서 유일무이한 사회주의―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그 미래를 보증해 가는 것이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로서 맑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있어서 조성되어야 할 상태나, 현실이 따라야 할 [따르게 되는] 이상이 아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지양할 현실적인 운동이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는 전제로부터 생긴다.5)
사회주의 모델에 관한 역사적 탐구
‘80년에 달한 사회주의 모델의 실패’라는 명제의 주요 결함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사회적․경제적 ‘모델’ 문제에 대한 비역사적인 탐구 방법에 있다. 이러한 탐구 방법은 맑스주의의 과학적인 방법론의 기본원칙에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쏘련의 75년 간의 역사에서는 단일한 사회주의 ‘모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각각의 역사적 단계에서, 내외의 정세의 전개에 따라서, 각각의 사회적․경제적 목표를 달성할 필요에 따라서 고안된 일련의 복수의 ‘모델’이 있었다. 우리는 또한 ‘사회주의’ 모델을 이론적으로 개념화된 것으로서 다뤄 왔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쏘비에트의 지도부나 이 나라의 헌법들이 표명하고 있는 것처럼, ‘발달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의 각각의 모델로서 취급해 왔다. 고유한 역사적 성격을 가진, ‘발달한 사회주의’ 단계를 지향하는 특정한 사회의 과도기를 위한 각각의 ‘모델’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제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어떤 ‘사회주의 모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최초의 ‘전시 공산주의’ 모델인가? 스탈린의 ‘급속한 공업화’ 모델인가? 흐루시쵸프의 농업․소비재 모델인가? 브레즈네프의 ‘성숙한 사회주의’ 모델인가? 고르바쵸프의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사회주의’ 모델인가? 이들 모델은 모두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인가? 이것들은 모두 각각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있어서 똑같이 실패하거나 성공했던 것인가? 이것들은 모두 똑같이 사회주의 이론의 기본적인 전제에 어긋난 것이었던 것인가?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쏘련의 사회주의 체제가 최종적으로 붕괴된 것에 대해서 똑같이 책임이 있는 것인가? 이러한 비역사적인 일반화가 우리 눈앞의 기본적인 의문을 명확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명확하게 하고, 그리고 그 문제를 과학적으로 조사하는 올바른 길을 방해해 버리는 것임은 아주 분명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과거 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한 비역사적인 탐구 방법은 단호히 배제되지 않으면 안 되고, 맑스에 의해서 제창된 것과 같은 진실로 역사적인 탐구 방법, 사회주의 사회의 각 발전단계를 올바른 역사적 맥락과 거기에서 제시된 목적들에 비추어 검증하는 방법이 채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어떤 특정한 모델의 성공과 실패의 정도, 사회주의의 기본원칙에 대한 충실도, 장기적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 사회의 양적․질적 발전에 대한 역사적인 공헌도를 확정할 수 있다. 이러한 탐구 방법에 의해서 우리는 사회주의 체제를 최종적으로 붕괴시킨 문제들의 논리적․역사적 원인을 구조적이고 시계열적(時系列的)으로 밝혀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단계에서 출현한 문제들의 원인이 된 각 정책이나 방책을 특정하는 데에, 그 성질이 객관적인 것인가 주체적인 것인가, 상부구조적인 것인가 하부구조적인 것인가, 내부적인 것인가 외부적인 것인가를 확정하는 데에, 그리고 동시에 발생한 문제들의 필연성의 정도를 확정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많은 요인의 진정한 원인과 상호의 논리적․역사적 관계를 정확히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이 방대한 작업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끈기와 부지런, 진지한 책임감과 과학적인 원칙들에 철저하고 충실할 것이 요구되는 사항이 아닐 수 없다. <다음 호의 “4. 이론적 관점에서 본 사회주의”로 계속>
번역 : 채만수(소장)
1) “경제학비판서설”, MEW, Bd. 13, S. 633. (김호균 역, ꡔ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ꡕ, 중원문화, 1989, p. 223.)
2) 같은 책, S. 636. (김호균 역, 같은 책, p. 227.)
3) Gus Hall, The Power of Ideology, New York: New Outlook Publishers, 1989, p. 27. (일본어판 역자 주: 각괄호 안은 인용자에 의한 삽입으로 생각된다. 또 원주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인용은 Zbigniew Brezinsky, THE GRAND FAILURE, The Birth and Death of Communism in the Twentieth Century, 일본어역=飛鳥新社刊 ꡔ大いなる失敗─20世紀における共産主義の誕生と終焉ꡕ으로부터의 인용으로 생각된다. 번역은 일본어 번역판 p. 307에서 인용했다.)
4) Gus Hall, Political Affairs, August 1992, p. 3.
5) Karl Marx․Friedrich Engels, “Deutsche Ideologie”, MEW, Bd. 3, S. 35.